◈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한 마오리 족 벧전 2:21~23 출처
『유대인의 옷을 입은 예수』 중에서
팀 스태포드
진리를 얻고자 끔찍한 고통에 직면해야 할 때가 있다.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수께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던 겟세마네와 갈보리의 십자가는
고통과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 준다.
악에 맞서는 일은 정치적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끔찍할 정도로, 그리고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이다.
예수님의 삶에서,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과정에서 보여 주신 행동보다
제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없었다.
베드로는 고난에 반응하는 본보기로 예수님이 고난받으셨을 때의 일을 묘사한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
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1~23).
사회학자 르네 지라르는 예수의 복음에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는
독립적인 힘이 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각 사회는 적으로 규정한 이들을 정죄하는
종교화된 폭력의 기반 위에 세워진다.
그러한 ‘신성한 폭력’이 그 사회의 힘과 합법성에 대한 개념을 형성한다.
미국인들이 테러에 대항하는 전쟁에 느끼는 종교 수준의 적대감을 생각해 보라.
장엄하고도 거룩한 태도로, 스스로 보호한다는 차원을 넘어 신성한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전쟁이 미국을 다시 거룩한 존재로 구별해 준다고 생각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예수 이전에는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국가의 투사들은 영예와 존경을 얻었다.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들은 정벌한 대상의 해골로 피라미드를 쌓았고,
로마의 대로 주변에서는 수백 명의 포로들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사회 건설을 이유로 정당화되었던 폭력이
점점 설 자리를 잃었다. 십자가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복음은 처참하게 희생된 한 사람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이 희생자를 주님으로 예배한다!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억압자를 존경하는 대신 고통받는 자의 입장을 공감하게 되었다.
간디를 생각해 보라. 사람들이 정복자에게 동정을 느꼈기에 제국들이 무너졌다.
십자가 이야기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수록
사회를 향한 숭고하고 예측 불가능한 의의를 지닌, 어떤 능력이 풀려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아들의 이야기는 사람의 통제를 초월하는 동력을 촉발한다.
하나님은 예정하신 때에, 예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그분의 나라를 도래하게 하신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이야기는 복음의 독립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유럽인이 처음 접한 마오리인은 전쟁을 일종의 종교의식으로 즐기는 식인종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에 행복해했고, 피 흘리는 폭력 행위에 전혀 죄책감이 없었다.
19세기 초, 선교사들은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복음을 전한 지 18년쯤 지났을 때 단 두 명만 개종했을 뿐이다.
마오리인은 기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업적은, 바로 선교사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잡아먹히는 일 없이
마오리족과 함께 살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생존을 확인하고서 그곳에 들어와 총을 팔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마오리인은 처음으로 서구 문명의 혜택, 즉 전쟁을 위한 과학 기술을 체험했다.
씨족 중 누군가가 죽임을 당하면 반드시 보복하는 것이 영예로운 행동이었고
그 영예를 저버린 자는 엄청난 수치를 당하는 그들 사회였지만,
총기류는 너무나 강력한 무기였다.
전에는 그저 몇 명의 용사만 죽였던 전쟁이 이제는 대량 살상으로 변했다.
마오리족은 폭력의 참혹한 결과에 우울해했고,
이러다가는 마오리족의 씨가 다 말라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명예를 잃지 않으면서도 싸움을 중단할 방법이 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폭력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음을 깨달았다.
마오리인은 처음으로 평화를 갈망했지만 이들에게는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자원이 없었다.
자기 파괴적인 전쟁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그 전쟁을 있게 한 제도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마오리인은 집단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씨족마다 ‘평화의 복음’이 전해졌다.
많은 수의 마오리인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성경을 읽고 참된 열정으로 회중을 이루었다.
마오리인은 이전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알아 왔던 영들을 거부하고 원수에게
반대쪽 뺨을 돌리는 큰 모험을 감행했다.
마오리인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스스로 원수의 손에 죽으셨음을 믿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고 한
복음을 깨달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