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덕을 벧후1:5 편집장 글
벧후 1:5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성경에 나오는 용어 중에 아주 애매한 것이 ‘덕’입니다.
그런데 ‘덕’하면, 우리는 유교적 의미의 덕을 떠올리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덕’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덕’도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아래서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유교적 의미의 ‘덕’은 아닙니다.
한국어로 덕은 한자로 ‘큰 덕德’자를 써서
인품이 온화하고 어질다는 의미를 뜻하고,
그건 영어로 gentle, respectable 쯤 될 것입니다.
위 구절에 나온 덕은 KJV에 virtue로 번역했는데,
그런 ‘성품이 어질다’는 덕 德이 아닙니다.
본본의 ‘덕 virtue’을
NIV는 goodness, NASB는 moral excellence로 번역했네요.
◑1. '집을 짓는다, 건축한다'는 의미의 ‘덕을 세운다’는 뜻도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덕을 세운다 edify’는 말이 나옵니다.
'덕'이라고 쓰지 않고, 반드시 '덕을 세운다'로 쓰고 있습니다. '덕 virtue'과 구분이 되네요.
①고전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영어성경이 edify로 번역합니다.
헬라어 ’오이코도메오‘ 집을 세운다, 건축한다는 뜻. 명사는 ’오이코도메‘
진짜 집을 건축할 때도 쓰지만
위 본문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신앙을 세우는데,
마치 집을 건축하듯이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뜻.
②고전8:1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오이코도메오, 건축한다
③롬14: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오이코도메, 명사로 씀, ‘집을 세우듯이 차곡차곡 힘쓰나니..’ 라는 뜻
④고전14:26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오이코도메, 명사로 씀, ‘집을 세우듯이 차곡차곡 힘쓰나니..’ 라는 뜻.
⑤ 그외 살전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2. Virtue 라는 의미의 덕
본문 벧후1:5의 ‘믿음에 덕을’ 할 때는 virtue 라는 의미의 덕입니다.
과거에 영어공부 할 때 ‘virtue = 덕’으로 무조건 외웠는데,
그 의미는 몰라서 애매했습니다.
사전에 찾아보니까 ‘높은 도덕적 기준이 나타나는 행위’ 이렇게 되어 있네요.
‘behavior showing high moral standards’
쉽게 설명하면 ‘의, 선, 믿음’과 비슷하지만 반대 개념입니다.
‘의, 선, 믿음’은 다 추상적인 것이고, 철학적 개념이죠.
그 ‘의, 선, 믿음’이 속에서 바탕이 되어, 겉으로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
그것이 바로 ‘덕, virtue라는 의미의 덕’입니다.
의로운 행위, 선한 행위를 뜻하는 거죠.
‘믿음에 덕’에서, 믿음은 철학적, 논리적, 추상적 개념입니다.
(원래 히브리 개념은 포괄적이지만, 헬라 개념은 추상적, 관념적이죠)
그 믿음에 ‘덕’을 보태라는 베드로의 권면은,
마음으로만 믿지 말고, 믿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지요.
▲여기서 ‘덕’의 헬라어는 ‘아레테’인데 *ἀρετή
‘어떤 도덕적 고상함이나 그 행위’를 뜻합니다.
이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같은 단어가 쓰여진 다른 구절을 찾아봅니다.
①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 virtue 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온화한 성품을 선포하라’ 이런 뜻이 아닙니다.
덕은 virtue .. 그러니까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으로서
어떤 고상한 도덕성이 바탕이 되어, 그것을 행위로,
마치 소금과 빛처럼 드러내라..
그렇게 하라고, 우리를 불렀고 구원시켰다는 뜻이죠.
②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 virtue 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아레테
위와 똑같은 내용이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며,
virtue(고상한 도덕적 행실)을 드러내며 살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그렇게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③빌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 virtue (아레테)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덕스럽게 살아야 된다..는 뜻인데
마음으로만, 생각으로만 믿지 말고,
삶으로 드러내라, 드러내며 살게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적용1. ‘믿음에 덕이 있어야’ 합니다. 벧후1:5
다른 말로 관념적 믿음만 있으면 안 됩니다.
생각으로만, 지식적으로만 믿으면
그건 불완전한 믿음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죠. 약2:26
야고보사도만 아니라 베드로 사도도 같은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게 바로 ‘믿음에 덕을’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성경을 모를 때
‘믿음에 덕을’ 이란 구절을 읽을 때는
믿음을 가진 신앙인은 유교적 덕이 있는,
그래서 성품이 온화하고, 아량이 넓은 사람으로 살아야 된다고 이해했는데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믿음에 덕을’ 이란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으로
자기 마음 속으로만 믿지 말고
어떤 믿음의 선한 것이, 그 도덕적 고상함이, 밖으로 행동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믿음’은 엄밀히 말하면 행위를 다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이지만
헬라적으로, 철학적으로 믿음을 규정하자면.. 그건 생각이요, 신념입니다.
그렇게 마음으로만 믿는 것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덕’으로 발전해야 되는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믿음의 행위를 하는 것, 믿음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에 덕을’ 더하는 것입니다.
관념적, 추상적 믿음만 가지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믿음이 출발하겠지만..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적용2. 덕 virtue 에는 능력이 있다 Virtue is Power!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고침 받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눅8:46에서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이 구절을 KJV는 ‘내 virtue가 빠져나간 줄 아셨다’로 번역했습니다.
‘for I perceive that virtue is gone out of me’ KJV
그런데 거기서 virtue는 헬라어 성경에 ‘두나미스 power’로 되어 있죠.
virtue에는 power적 속성도 있는 것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예수님의 어떤 고상한 도덕적 성품의 능력’
그러니 KJV 성경번역가들이
헬라어 두나미스를 그저 power 로 번역했으면 쉬었을 터인데,
번역자들이 약간의 해석을 가미한 것 같아요.
‘예수님의 어떤 고상한 도덕적 성품의 능력’ 즉 virtue가
열 두 해 혈루증 환자를 낫게 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이렇게 설교를 많이들 안 하지만,
과거 중세 시대 때부터 이런 설교를 꽤 한 것 같습니다.
성자라는 분들, 대표적으로 성 프란시스,
이런 분들에게 병 고치는 능력이라든지.. 이런 능력이 있다고 봤는데,
오늘날 20세기부터는 그 능력을 성령의 두나미스, 성령의 파워로 봤지만
옛날에는 virtue의 능력, 즉 ‘인격적 고상함에서 나오는 능력’
그런 것을 높이 평가한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번역할 때도
눅8:46절을
‘능력 power 이 그에게서 나간 줄을 앎이라’하면 될 것을, *헬, 두나미스
‘인격적 능력 virtue 이 그에게서 나간 줄을 앎이라’고 KJV가 번역한 것입니다.
▲눅6:1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도 virtue is power! 라고 말씀하는데요,
눅6: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이 구절을 KJV 는 virtue로 번역했어요.
‘for there went virtue out of him, and healed them all’
즉 많은 사람들을 고친 힘이,
그저 power 라고 번역하면,
무슨 주술사적 능력, 무슨 심령술사적 능력이라고
안 믿는 사람들은 또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KJV는 예수님의 능력은 ‘인격적 고상함의 능력이다’라고 딱 못 박으려고
power 대신에 virtue를 쓴 것입니다. *헬, 두나미스
어쨌거나 KJV 성경을 번역하던 17세기에는
예수님의 능력을, 도덕적/인격적 능력 즉 virtue로 이해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런 점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 거죠.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될 능력이기도 합니다.
인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능력이 정말 있을까요?
다시 말해 virtue에서 정말 능력이 나올까요?
오늘날 ‘능력’ 하면, 산에서 기도해서 소나무 뿌리 뽑아서 받는 ‘능력’으로 이해하는데,
그런 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죠. 쉽게 타락하는 단점이 있지만요.
그렇지만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능력,
virtue(덕)에서 나오는 능력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성자들이 가졌던 능력이고, 오늘날에도 이런 능력을 가진 분들이
우리 주위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 벧후1:5절을 통해서
‘믿음에 덕을’
그 덕은 능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이
약간 잘못된 것이
우리 개신교가 신앙의 인격에서 나오는 능력, 벌추의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것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 없고
오직 물질의 힘, 많은 사람들을 모은데서 오는 힘
다른 세력화, 조직화에서 오는 거대한 힘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오는 파워를 가지려 하고
또한 그렇게 모아진 힘을 자랑하는데
그건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것은, 눅6:19와 8:46에,
물질의 힘, 세속적 힘으로 고치신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고치셨는데
그것은 바로 ‘인격적 능력 virtue’이었던 것을
과거부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이해해 왔던 것을
오늘날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 더 읽으실 분 ............................
▲마더 테레사가 길거리에 쓰러진 이를 안고 음식을 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며 그를 칭송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는 자신은 칭송받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며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항상 빈자들을 돌보았던 것은
‘빈자 속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개념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도 ‘덕 virtue’에 포함되지요.
덕이란, 한마디로 도덕적 최고 고상함인데 moral excellence
그래서 아래 것들을 다 합친 개념입니다.
•HONOR. 존경스러움
•COURAGE. 용기
•COMPASSION. 긍휼
•RESPECT. 존경
•LOYALTY. 충성
•HONESTY. 정직
•PRUDENCE. 신용
•GRACE. 은혜
그렇지만 그걸 머리로,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삶에서 스며나오고, 우러나오는 것을 ‘덕’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