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오직 하나뿐인 희망 행1:1-3 출처
마틴 로이드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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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란 무엇인가? 지금 이보다 더 긴급한 질문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복음이야말로 오늘날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이 모두 시도되었지만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여러분은 철학자나 정치가에게서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소위 세상종교들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 오직 복음에만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복음 역시 희망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복음 또한 지금까지 2천 년이나 시도되었지만,
당신이 언급한 여러가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여기에 대한 유일한 답은, 작고한 체스터튼(G. K. Chesterton)이 아주 완벽하게 제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시도된 적도 부족함이 드러난 적도 없다.
다만 어렵다고 여겨져 시도되지 않았을 뿐이다. "
이것은 단순한 진리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세상은 한번도 기독교를 시도한 적이 없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말들은 많이 했지만, 기독교를 진정으로 시도한 적은 없었습니다.
제가 기독교가 지금도 여전히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긴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을 다르게 표현하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하는 일은 무엇이며,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도 물을 수 있습니다. "왜 나 자신이나 다른 이들이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보잘것없는 저에게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우셨습니다.
저의 개인적 경험과 다른 사람들의 경험,
그리고 역사를 읽으면서 얻은 축적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도 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게 하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늘 아래 오직 복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긴급한 일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가장 큰 비극은 복음이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극심한 혼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 점을 상기시키는 것은 논쟁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부담감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아십니다.
제게 이런 부담감이 없었다면 저는 설교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담감 때문에 저는 목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지금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기독교가 뭐지? 교회가 뭐지?"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들이 이처럼 혼란스러워하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습니다.
이런 혼란은 단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를 점점 더 두렵게 하는 것은, 교회 바깥의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이주로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한 교단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기독교 강연자로도 유명한 사람이 최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당장 해야 할 일들 가운데 첫번째가,
주일에 예배를 두 번 드리는 어리석은 습관을 버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일예배는 한번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니 나머지 시간에는 각자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오전 9시에 한번만 예배를 드립시다."
그는 또한 자신에게 권한이 있다면 1년 동안성경 읽기를 금하는 포고령을 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교회와 기독교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주일아침 9시에 딱 한번만 드리는 예배에서
적어도 1년간은 정치에 관한 설교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이런 말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이 요즈음 나돌고 있는 너무나 전형적인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놀랄 일입니까?
일반적으로 말해 이 시대의 생각은, 기독교의 메시지는
결국 우리의 일들이 어떻게 정돈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가르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가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불의를 해결하고 개혁하는 것이 교회의 주된 일이며,
산상설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일종의 사회적 강령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전혀 관심이 없고, 대개는 구약을 완전히 무시해 버립니다.
사도 바울도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대신에 이들은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에 집중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정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정치강령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이것을 최대한 적용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어서도 안되고, 다만 이러한 일반원칙들을 취해 실행에 옮겨야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두고 고상하고 낙관적인 인생관이며 일종의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좀 더 고상하게 사는 법을 찾았고 도덕적 향상을 경험했으니,
이제 다른 사람들도 이 원칙들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를 주로 도덕과 행위의 문제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에 좀 더 다가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이들은 사람들이 이러한 윤리적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곧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가르침에서 이들의 공통된 시각이 있습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순수한 도덕적 가르침인데, 성경이라고 부르는 책에서 이것을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에게 있어 성경은 중요하지도 않은 많은 역사로 어지럽습니다.
성경은 대부분 거짓인 데다가 분명히 사실이 아니며, 과학적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조금도 믿을 수 없는 많은 기적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모든 것을 제거하고 껍데기와 지푸라기 속에 숨겨져 있는
핵심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핵심을 찾아내고 나면,
성경을 무시하고 정치적 상황이나 도덕적 상황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실행에 옮기도록 그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메시지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며, 교회의 역할에 관한 일반적인 개념입니다.
이제 저는 이 모든 것들을 다루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주의를 사도행전의 첫 세 절에 집중시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보십시오. 교회의 기원은 무엇인가?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질문입니다.
20세기를 교회의 기원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인용한 말씀에는 교회의 기원을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무엇이며 기독교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무엇을 했는지 발견하는 것입니다.
권위의 문제가 일차적이며 근본적이라는 데에는 여러분도 저와 생각이 같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이며
교회가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선언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는 "그것이 사도행전이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가?"라고 물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교회란 무엇인가를 결정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는 2천 년이나 되는 역사와 결별한 채 과거에 일어난 일에는 관심이 없고
우리의 관심은 현재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여러분이 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라고 부를 권리가 여러분에게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교회의 기원과 관련해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권위 밖에 없습니다.
바로 성경의 권위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복음서 기자인 누가입니다.
그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먼저 쓴 글"은 도입부가 사도행전과 비슷한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 1:1-4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기록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데오빌로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추정컨대, 그는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지성과 학식을 갖추었으며 기독교에 관해 다양한 보고를 듣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이자 아주 유능한 역사가인 누가를 알게 되었는데,
사도 바울과 동행했던 누가는 이야기의 내막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매우 좋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접촉이 있었고,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사실 이런 말로 편지를 썼습니다.
"일어난 일을 각하에 정확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을 왜 믿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각하께 자세한 내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는 이일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했습니다. 첫째 부분은 복음서이고 둘째 부분은사도행전입니다.
우리는 그때로 돌아가 이 이야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특권일 뿐 아니라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입니까?
예루살렘 권세가들이 평범하고 단순하며 무식하고 무지하다고 여긴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래는 남자 열두 명뿐이었는데 약간의 사람들이 가세했습니다.
이들은 내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었고 유명하지도 않았으며,
지위도 돈도 통신수단도 선전수단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무지하고 무식한 소수의 사람들이,
사도행전 17장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행17:6,KJV)는 것입니다.
불과 200년 사이에 기독교는 대로마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3세기가 시작될 무렵 기독교는 이미 너무나 강한 세력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관심은 이 사실을 살펴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짧은 기간에 기독교를 공인할 정도로,
소수의 사람들이 로마제국 전체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습니까?
이들이 고대세계를 뒤집어 놓은 것은 정치사상을 전파하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까?
기독교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기독교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세계사 전체에서 가장 생생한 사실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사를 빼놓고는 세계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란 무엇이며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현대의 사상이 이미 일어난 일을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저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직과 상식은 우리에게 사도행전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기독교가 의미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기원한다면, 우리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라는 사건과, 세상과 육적인 것과 마귀와 인간과 지옥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기독교의 놀라운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이 제시하는 설명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여러분에게 사도행전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도행전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 우리 앞에 제시된 특정한 주제들을 하나씩 다루어 나갈 것입니다.
제가 느끼건대 현대세계는 데오빌로와 아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이런 것들을 숙고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데오빌로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도덕생활이나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영혼의 깊은 상처가 있으며, 여러분을 낙담시키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봤지만
교회가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데오빌로들이여,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기독교를 알기 원하고,
다행히도 우리는 여러분에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기독교에 대한 저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말씀드리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저는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라고
고백한 찰스 웨슬리 (Charles Wesley)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 의견은, 주일에 예배를 두 번 드리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단 한번의 설교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주변 세상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든지 찾아가서 말하고 전파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라는 이 엄청난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여기에는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첫째, 이들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1-3).
이 말씀은 누가복음 전체의 요약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복음서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대원칙이 있습니다.
출발점이자 근본적인 것은, 기독교는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는 사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미 각하께 그분에 관해 써보냈습니다.
이제 그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는 가르침이 아니라 인물(Person)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정치에 적용돼야 할 도덕사상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역사적 인물에서 시작됩니다. 누가는 순수한 역사가였습니다.
그는 사건과 사실들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초대교회에서 설교의 주제였습니다. 그분은 누가복음의 주제입니다.
그분은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사실이 잊혀졌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적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가르침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바로그분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것."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8).
주님은 이들을 내보내시면서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를 전파할 것이다."
여러분은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주님의 제자들이 항상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파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행 17:18). 이들은 사람들에게 가서 그분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가르친 전부였습니다. 이들은 결코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어 보세요. 예수라는 분에 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에 대해 뭐라고 말했습니까? 중요한 것은 사실들(facts)입니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사실들을 제시했으며, 여기 사도행전에서 사실들을 다시 제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실들의 의미와 중요성에도 동일한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와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뿐 아니라
그분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록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과 그분의 가르침,
이 둘은 항상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에 가장 특별한 것을 추가하셨습니다.
"너희가‥‥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은 정말 엄청난 말씀입니다. 여기 가난하게 태어나 목수 일을 하던 한 유대인이 있습니다.
그는 서른 살에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약 3년 후에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여기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 온 세상을 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히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여러분에게
종교적 심성이나 종교를 보는 눈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종교를 선택하면 그만이며,
그중 기독교가 괜찮은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주님의 말씀에 비춰 보면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기 땅 끝까지 선포되어야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라는 분에게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철학이나 정치적 이념에 불과하다면 어느 누구도 기독교를 믿을 의무가 없을 것입니다.
서로 대립하는 철학파와 가르침과 이론들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이것을 믿고 저 사람은 저것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대면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믿는 바가 아니라 바로 사실들(facts)입니다.
그 사실들은 예수라는 인물, 그분이 행하신 것과 말씀하신 것,
그리고 예수라는 인물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성경을 덮어라. 사실들은 전혀 중요치 않다. 예수가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었는가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르침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잘못 짚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라는 인물입니다.
누가가 뭐라고 하는지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시작하다"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자신이 복음서에서 기록한 모든 것은 시작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가 복음서를 쓴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기 기독교에 관심이 있으며 기독교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는 그에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누가의 이야기는 그의 복음서 스물네 장에 걸쳐 전개됩니다.
여기서 누가는 모든 것을 두 단어로 요약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일입니다.
저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 아십니까? 그분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그 인물의 중요성을 깨닫습니까?
예수께서 행하기 시작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누가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말합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알고 싶은 것은 그분이 어떻게 태어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인간이셨습니까? 누가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난 일을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된 자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가 크게 되리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차지하실 것이며,
그분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이 모든 것을 읽어 보십시오.
마리아는 당황했습니다. 어떻게 처녀인 자신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 가브리엘이 말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5).
이것이 누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게 태어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영원에서 나와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천국에서 땅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여러분의 도덕적 ·정치적 견해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앞에 놓인 문제는 이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아기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여러분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세상에 오셨을 뿐 아니라 다른 여러 일들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복음서 메시지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과학적 시각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먼저 쓴 그의 글인 복음서를 다시 언급하는데,
복음서에서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말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주목을 끄셨습니다. 기적은 상징이었고 사람들이 와서 보았습니다.
누가는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그분을 보러 왔을 때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했으며"(눅5:17)
그분으로 인해 큰 소요가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일들을 떠나서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일도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원수들이 자신을 증오하여 죽이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아셨고,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는 헤롯 왕도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눅9:51).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체포되셨습니다. 그분은 재판에서 입을 열려고 하지 않으셨고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가로질러 십자가를 지고 가셨으며,
몹시 지쳐서 도중에 다른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그분은 십자가에 달린 채 죽으셨습니다.
두 친구가 그분의 시신을 내려 무덤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음의 결박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누가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처럼,
그분은 몇몇 제자들과 그밖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시사
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그후에 그분은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기 있습니다. 기독교는 역사입니다. 의사 누가, 역사가인 누가는
지성인 데오빌로를 돕고 싶었습니다. 전에 데오빌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정말 알고 싶소. 당신들을 보고 깜짝 놀랐소. 당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보았고
당신들이 가르치는 것을 들었소. 그 결과도 보고 있소.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소."
누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데오빌로 각하, 알고 싶으시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분이 시작하신 일입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셨고, 가르치셨고,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자신을 내어주셨고, 죽으셨습니다. 장사지낸 바 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누가는 부활을 강조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교회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 사도행전에 교회의 역사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상을 뒤엎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뒤엎고 있는 놀라운 한 기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죽으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이에 대한 아주 확실한 증거들을 많이 제시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사실입니다.
누가는 실제로 이렇게 말합니다. "데오빌로 각하, 각하께서는 이 사실들을 믿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빼고는 어떤 설명도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시작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르치는 일도 시작하셨습니다.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가르침을 여러분께 요약해 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복음서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요8:58).
그분은 자신을 "인자"(人者)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옛 사람에게 말한 바‥‥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1-22). 그분은 자신에게만 있는 특별한 권세를 주장하셨습니다.
그분은 실제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이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분은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분은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은, 이
것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데오빌로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걸어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얼마 전까지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죽고 난 지금, 그들은 극한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에서 길을 가던 이들 사이에 나타나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날 아침 일찍,
이들 무리와 함께 하던 몇몇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이 있는 동산에 갔다 와서는
제자들에게 무덤이 비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였다"(눅24:11)고 성경은 말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께서 곁에 오셨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이 낯선 사람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들려주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자라고 바랐노라"(눅24:21)고 말합니다.
이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너무나 놀라워했고,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들도 보았습니다.
이들은 그분이 틀림없는 메시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이제는 그분이 메시아이실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셨고, 죽으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24:25-26).
그날 저녁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무서워 떨었습니다.
제자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죽은 후 다시 살아나리라고
제자들에게 거듭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결코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그리고 그분은 구운 생선을 조금 드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께서는 다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24:44).
기독교를 알고 싶다면 성경을 덮지 마십시오. 성경을 펴서 읽으십시오)
모세의 책들과 선지서와 시편을 읽으십시오. 이것들은 모두 그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바로 무지(無知)라는 놈이 이 시대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그들을 그리스도 밖에 잡아 두고 있습니다.
서둘러 9시 예배를 드리고는 골프치고 해수욕을 즐기려고 달려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을 위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기에 여러분을 위한 유일한 희망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런 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세상에 오신 일이 갖는 의미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5-47).
여기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왜 세상에 오셨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행했는지 직접 설명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지 못하며 본성적으로 악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며,
우리 죄를 용서받으며,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알며, 그분에게 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개선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구속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분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장기적인 정치 프로그램에서 시작합니다.
"올해는 이것을 법전에 넣고 다음에는 저것도 넣을 수 있었으면..."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 죽어, 영원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을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메시지를 어떻게 알릴 수 있습니까?
그 답은 바로 예수입니다. 사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파송하여 전파하게 할 것이다.
나는 너희가 회개와 오직 내 이름으로만 가능한 죄사함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원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온 민족에게 이것을 전파하라.
나는 피부색이나 신분이나 신조에 개의치 않는다. 인류는 하나다.
모두가 죄인이며,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모두가 지옥에 떨어져 마땅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다.
구원자도 하나다. 너희는 그들에게 가서 나를 전하며 내 증인이 되라."
이것이 바로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말한 기독교에 대한 전부입니다.
앞서도 여러분께 말씀드렸지만 지금 조금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핵심은 "예수께서 시작하신 모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아직 끝내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십니다.
누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데오빌로 각하, 이제 두번째 보고서를 보냅니다.
그분이 시작하신 일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각하께서 받아 읽어 보셨습니다.
누가복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그분이 계속하고 계시는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분이 지금도 계속해서 일하고 계시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현대의 가르침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다른 사상가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가르침은 나사렛 예수가 아주 뛰어난 도덕사상가요 정치사상가였다 하더라도
결국은 한사람의 인간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세상에 존재했었고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가르침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플라톤과 예수님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여러분에게 증명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가르침이 있으니까요.
우리에게 남은 일은 그 가르침을 적용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답은 지금도 그분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일이며,
교회의 메시지는 단순히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고 계시는 일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장차 하실 일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 불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주장입니다. 주관하시는 분은 예수님 이십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까? 성경은 예수께서 영원한 영광중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말씀합니다(눅22:69).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으며, 그 말씀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20).
제자들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제자 삼아야 했습니다.
놀랍고 복된 이 말씀만큼 내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정치가들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영원하신 아버지요 창조주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일과 그 구속을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이 놀라운 책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 권세를 나타내시는 것을 봅니다.
그분은 초대교회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강림은 그분의 권세가 구체화된 사건이었습니다.
그 다음 그분은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어느 날 오후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자리를 펴고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쳐 줌으로,
그가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성전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정치적 ·도덕적 프로그램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며 그 권세를 주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밖에 어떤 일을 계속하셨습니까? 다소 출신의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지독한 박해자였습니다.
그는 우리 주님을 증오했고 그분의 운동을 싫어했습니다.
나아가 믿는 자들을 감옥에, 심지어 죽음에 던져 넣음으로써
이 운동을 말살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으로 내려가 그곳에 있는 작은 교회를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권한을 받고 교회를 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면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내려갔습니다(행 9:1).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께서 다소의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정오쯤에 사울은 하늘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을 보았습니다(행26:13).
바울은 "주여 뉘시오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행 9:5).
예수께서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울을 쓰러뜨리고 낮추셨습니다.
그를 내동댕이쳤습니다. 바울을 회개로 이끄셨습니다. 예수께서 바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승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권세를 가지고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분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분은 지금 여기 계시며, 사람들을 불러내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분의 나라를 건설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부활 후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행1:3).
그분은 사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적은 무리로 파송하지만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할 것이다.
나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그들에게 나를 증거하라."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께서는 여기서 끝내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그분이 천국에서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히7:25).
그분은 인성(人性)을 그대로 지닌 채 천국으로 돌아가셨으며 , 그곳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대언자이시며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약하고 무가치한 기도를 취하여,
하나님의 보좌 바로 앞에서 당신의 영광스런 중보를 통해 그 기도를 바꾸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연약함을 기억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셨습니다"(히4:15).
그런데 무엇 때문에 시험을 받으셨습니까?
"시험받는 자들을 - 바로 여러분과 저를 - 능히 도우시기" 위해서였습니다(히2:18).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시련을 겪을 때 모든 친구들이 나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셨습니다"(딤후4:17)."
재판정에서 주님은 당신의 종 곁에 서 계셨으며, 바울은 그분이 거기 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데마를 비롯해 바울의 모든 조력자들이 그를 버렸다는 사실이 뭐가 그렇게 중요했겠습니까?
주님이 그의 곁에 서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역사하실 것입니다(히10:13).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다 보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역사하시는 것과 그분이 앞으로 하실 일을 봅니다.
그분의 백성들은 박해를 받고 죽임당하여 온 교회가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개입하시고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마침내 그분이 백마를 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 개개인을 악한 이 세상에서 구원하시며, 우리를 그분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이시고,
그분이 다시 오실 그날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사도행전 1:10-11은 이렇게 말합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께서 죽어 장사되었을 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누가의 메시지,
그가 데오빌로에게 쓴 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것은 바로 여러분에게 쓴 글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가실 때처럼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육체를 가지고, 볼 수 있도록, 하늘 구름을 타고,
거룩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영원토록 영광스러운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교회를 낳았습니다.
사람들이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프로그램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큰 재물이 생긴다고 해서 그 재물이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재물이 우리의 도덕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영원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세상의 개선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세상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장차 올 영광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고계시며,
구속받은 자들이 모두 곳간에 들여질 때까지 계속 일하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분은 다시 오실 것이며 최후의 심판인 이루어지고 그분의 나라는 땅끝까지 확대될 것입니다.
이것이 고대세계를 뒤집어 놓은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메시지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간단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메시지가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를 지닙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기독교는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은 교회의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설교도 당신의 논쟁도 아닙니다.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께 기도했고 경의를 표했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싶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기독교가 단지 여러분을 바로 잡아줄 것이라는 희망에서
그것을 택하고, 최소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지금까지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가장 놀라운 사건입니까?
기독교는 과연 여러분 삶의 기준이며 여러분이 점점 더 알고 경험하기를 갈망하는 그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지옥에서,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죄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여러분은 깨닫습니까? 기독교의 본질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러 이 땅에 오셨는지 말해주는
그 무엇이라는 사실을, 이제 여러분은 깨닫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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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양무리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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