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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태초

LNCK 2019. 7. 4. 18:29

www.youtube.com/watch?v=3NTtvjwFy0w&feature=youtu.be

 

요한복음의 태초               요1:1~5            2019.06.16.출처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즘 아파트 주차장에 전기차 충전소가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기차 역시 계속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전기차를 충전하려면, 반드시 충전소를 찾아가야 합니다.

요즘 고속도로 휴게소에도 전기차 충전소가 계속 설치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마음이, 우리 심령이 충전이 필요할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거기가 바로 요한복음 1:1~2절에 나오는 태초입니다.

무슨 뜻인지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맥락으로 요1:16에 보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예수님은 언제나 충만하십니다.

그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공급 받을 때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유대문화식 강조법은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합니다. ‘아주 큰 은혜를 뜻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은혜가 계속 채워져서

나를 채우고 나서도 넘치는 은혜를 뜻합니다.

 

충만이란.. 넘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당신이 항상 충만하신데

그 충만하신 내용들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학력, 재력, 건강이 잘 풀려서 우리를 기쁘게 하시겠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이 가지신 은혜, 믿음, 성령, 영생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고

충만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충만함을 그렇게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 충만함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기쁨이나 충만을 원합니다.

 

진공청소기는 먼지를 마구 빨아들입니다.

그런데 먼지만 빨아들이면 좋은데, 주위의 다른 것까지

빨려들어올 수 있는 것은 다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반지나 귀걸이, 또는 다른 귀중품이

부주의해서 닥치는 대로 같이 빨려 들어가는, 그런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류나 양말 등은 빨려 들어가다가 그 흡기구를 막아버리기도 하죠.

 

마루 바닥에 음식이 차려진 상태를 가정해 봅시다.

진공청소기가 알아서 내가 빨아들일 것(먼지)’ ‘아닌 것(음식)’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마구 다 빨아들입니다.

 

지금 내 마음속에 기쁨이 없고,

괴롭고 무겁고 하는 모든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내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진공청소기 같은 마음으로, 그 일을 빨아들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여간 닥치는 대로,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지 말아야 될 것까지, 우리가 세상 것까지 다 빨아들입니다.

 

은혜, 진리, 말씀, 영생, 성령.. 이런 것만 빨아들여야 되는데

우리가 세상 것까지 다함께 빨아들이니까 ....

 

그럼 어떻게 해야 세상 것을 빨아들이지 않게 됩니까?

그럴려면 내 마음이 충만해야 됩니다. 충만하면 넘쳐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절대로 세상을 빨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평강, 기쁨 가운데

이 세상 삶을 살고, 주어지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충만은 목적이거나 결과가 아니라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충만하게 될까요?

 

배가 고픈데 위를 충만하게 하려면, 식탁에 앉아서 먹어야 합니다.

기름이 없는 자동차는 주유소나 충전소에 가야 합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기쁨과 평강을 바라면서도

왜 그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나요?

 

진정한 충만을 가능케 하는 충전소로 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진짜 충전이 일어나는 충전소로는 가지 않고

진공청소기 상태가 되어서, 세상의 아무 것이나 다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진공청소기가 양말, 커텐자락, 바닥에 놓인 음식 빨아들이듯이 빨아들여서

그 진공청소기가 고장나 버리듯이,

지금 우리 마음이 다 그렇게 고장 난 상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허락하신 하나님 나라, 가나안 복지, 에덴동산의 회복을 위해서

충전소(태초)로 가야 됩니다.            *주제 

 

그 충전소가 어디입니까?

바로 태초입니다.

 

마음을 이 세상에 두고 있는 한

절대 우리 마음은 충만해지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세상에 속해 있고, 세상의 바다에 흠뻑 빠져서 젖어있는 우리 마음을

태초로 보내야 합니다.  

세상에서 빼 내서 태초로 보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그 태초를 우리에게 선물하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는, 태초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십니다!

 

우리 마음의 충만함을 위해서

우리가 주유소, 충전소로 활용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참 경이로운 것은, '태초'라고 하면

우리가 태고적에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신비한 침묵이 흐르는 장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는, 그런 '태초'가 아닙니다.

아마존 깊은 정글 속에 들어가서야 만날 수 있는

그런 태고적 신비가 가득한 태초가 아니라

완전히 세상 밖에 존재하는 태초입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이 피조 세계 역사에 첫 출발점을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이 '태초'는

진짜 우리 마음에 충만을 위한 충전소로서의 이 태초는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모든 세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이 태초는

세상 밖에 존재하는 태초입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세상의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고,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는 그런 시간의 흐름을 떠나 있습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할 때

여기서 '태초'는, 비유를 들면

우리가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다보면

수원, 천안, 대전을 차례로 지납니다.

 

저녁 7시 기차인데, 서울에서 본 달이

수원에 가도 보이고

대전에 가서도 달이 보이고

대구, 부산에서도 보입니다.

 

달이 하나로 떠 있으니까 그렇지요.

어디에 있든지 항상 달이 떠 있으니까 장소 불문하고 시간 불문하고 달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태초 라는 것은

아담 때도 태초가 있었고,

노아 홍수 때도 태초가 있었고

아브라함 때도, 모세,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사도바울, 사도베드로 때도

중세시대도, 지금도

태초는 계속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까?

태초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만하길 원하면, 세상에 마음에 남아있으면 안 되고,

몸이 있는 장소로부터 나를 구별해서

(지성소가 구분 되듯이) 그렇게 구분해서 우리 마음을 태초로 보내라는 것입니다,

 

태초로 보내서, 세상 밖으로 나가서

예수님과 연합한 상태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충만한 것처럼

예수님을 꼭 붙잡고 있음으로써

 

예수님께 하나님이 들어오실 때

그 들어오신 하나님을 나도 받지 않으면,

충만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충만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세상으로 떨어지자마자 우리 마음은

진창으로 뒹굴게 되어버립니다.

 

스위치 켜져 있는 진공청소기로서 아무 것이나 빨아들이면서

마음에 구멍을 뻥뻥 내는 것입니다.  *청소기 먼지 봉지에 구멍이 나듯이

 

무엇을 빨아들였다고 생각하는 만큼, 마음이 팍 못에 찔리면서

그 청소기 먼지 봉지가 찢어지듯이 (못에)

그런 식으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결코 충만함을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빨아들이게 된다면... 안 되는 거죠.

 

태초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을 떠나야 됩니다.

 

세상을 떠나서 태초로 참여해야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생활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 내 마음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간다는 것은

오늘 본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태초를 생활화 하는 것이 십자가 생화화입니다.

태초는 마음 충만을 위한 유일한 충전소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예수님을 충만케 하신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태초에 마음이 가서, 마음이 충만해서

절대로 이 세상에 남아있는 한 이 세상의 어떤 문제를 가지고

풀어서 해결하고, 얻고 획득해서 충만해지려 하는 한

절대로 충만이 안 됩니다.

 

세상을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과 연합해서 떠남으로써

태초에 참여함으로써

내 마음은 충만하게 충전될 수 있고

 

십자가를 계속 붙잡고 있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관심이

예수님을 통과해서 나에게 전달됨으로써 넘쳐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내를 만난다고 할 때

진공청소기가 켜져 있는 상태로 접근하면

아내를 빨아들여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부부관계가 원활해지지 않습니다.

아내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어떻게 대하느냐?

마음이 아내를 만나기 이전에

아내까지 포함한 세상을 떠나서

태초에 참여해야 됩니다.

 

지금 태초는, 옛날이 아닙니다.

단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세계 밖에 있다는 의미의 태초입니다. 요1:1, 요일2;13

그 태초로 가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충만해져서, 예수님께 사랑과 관심이 계속 주어지는 가운데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바람에, 내가 예수님처럼 충만해졌습니다.

흘러 넘쳐나기 시작합니다.

 

넘쳐나는 부분이 있을 때, 아내를 만나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나의 충만입니다.

예수님과 붙어있어서 예수님이 충만하신 것처럼

나도 충만한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아내를 대하고, 남편을 대하고, 자녀를 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업을 하는 겁니다.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뭐 내가 희생한다, 그런 말들을 하는데

여러분, 예수님 붙잡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태초의 충전소에서 나를 충전시키지 않고는

사명 감당이 불가능합니다.

무슨 거기에 희생이라고 하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사명을 수행하는데 희생이 어디있습니까!    

이 세상 것을 갖지 않는다고 희생입니까?

이 세상 것을 갖지 않는 것은,

가질 필요가 없어서 안 갖는 것입니다. 희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으로 태초로 올라가서

충전된 사람은

이 세상에서 희생할 수도 없고, 손해볼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은

목숨도 버릴 정도로 이 세상에 대해서 얻고 싶은 게 없을만큼

나를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로 충만해 있는 것을 말하고자 하심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

돌에 맞아 죽는 데도 저들을 용서해 주시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지금 우리는 희생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테초에 마음이 올라가서..

그 상태에선 손해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 넘쳐나는 부분으로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을 대하니까

그들을 위한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 건강도, 제정도 안 좋고, 다 힘들고 자녀도 말썽입니다.

왜 그런 것을 마음으로 빨아들이십니까?

내가 무슨 스위치 켜져 있는 진공청소기라고

아무 거나 눈에 보이는대로 갖다 대서 빨아들입니까?

 

그러니까 마음이 찢어지고 괴롭고 축축하게 젖어서

우울하고 그렇게 되죠.

 

십자가 붙잡고 태초로 돌아가는 겁니다.

태초를 생활화하는 겁니다.

태초만이 충전소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야만 충전소(태초)에 도달하고

그래서 충만해져서 넘쳐나는 부분을 가지고서야

이 세상을 내 마음에 깊은 충만, 기쁨 충만한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아도

지속을 못합니다.

이게 기계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 인격적인 사건입니다.

 

기계적이라 그러면, 붙잡자마자 기계적으로 딱딱 충만이 이루어져야 되지만

하나님이 내게 오시는 것은 내가 십자가를 붙잡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무적으로 오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약속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으면 하나님께서 들어오신다는 것도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가운데 약속해주셔서 들어오시는 것이지

십자가를 붙잡자마자 기계적으로 딱딱 들어와서

나를 채우시는 게 아닙니다.

      

그럴려면 지속되어야 됩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요!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담을 때

질그릇이 보배를 뱉었다 담았다 반복적으로 그럽니까?

 

이 보배가 예수님의 죽음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을 질그릇이 담았다는 것은

담은 후에 쭈욱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충만함을 그렇게 원해도 충만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지속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태초로 돌아가는 걸 말합니다.

마음이 완전히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스위치 켜져 있는 진공청소기 같은 이 마음으로

세상을 향한 출입구를

십자가를 따라하늘로 돌려버리는 것을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 따라가자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 하나님 아버지로 충만함을 허락하는 태초로 가서

내 본전을 챙긴다음에 (내가 충만해진 다음에)

그 다음에 계속 예수님을 붙잡고 있음으로써

넘쳐나는 부분을 가지고,

기쁨의 넘침, 평강의 넘침, 하나님의 뜻의 넘침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전까지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웃을 향한 뜻으로 발전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충만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집중하는 것으로 모든 뜻과 섭리가 다 작용하지요

 

내가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야

그 다음부터 넘쳐나는 하나님의 뜻이

이웃에게로, 아내와 남편에게로, 자녀에게로

직장동료들에게로, 이 세상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넘쳐나는 부분으로 사세요.

어떻게?

태초로 돌아가서,

거기서 마음을 충만하게 충전시키신 다음에

이 세상에 내려와서

충만한 뒤에 그 풍부함으로 살고,

 

그러다가 또 충만의 문제가 생기면

다시 태초로, 십자가 붙잡고, 돌아가는 겁니다.

 

가장 좋은 것은

계속해서 태초(*‘천국이라고 해도 됨)와의 연결을 이어가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질그릇이 보배를 담은 것처럼, 담고 다니면 최고로 좋지요!

 

태초를 선물하시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태초 만이

충만과 넘침의 충전소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1:1태초 : , 아르케

같은 단어가 쓰인 곳 (컨코던스 찾아봄)

 

19:4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처음부터 beginnig)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19:8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beginning) 그렇지 아니하니라

 

24: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시초 beginning)이니라

 

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0:6 ‘창조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13:19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1: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2:11 ‘예수께서 이 표적(표적의 시작)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일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14.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통털어 볼 때 태초에 (, 아르헤)’라는 단어는

태초’, 말고도 시초’, ‘원래라는 뜻으로 쓰임.

 

설교와 연결하면, 우리 마음이나 신앙이

태초의 마음, 원래 신앙, 마음이나 신앙이 생기기 시작할 당시의 마음

즉 변형되지 않은, 원래 오리지널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