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 제1장 죄 / 존 라일 - YouTube
◈존 라일 , 『거룩 』 제1장 죄 요일 3:4, 히13:3 출처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독교의 뿌리는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
오늘날의 대부분의 오류와 이단 , 거짓 교리는 죄에 대한 모호하고 불분명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
19 세기 교회를 통틀어 가장 부족한 것이 죄에 대한 분명하고 온전한 가르침이다 .
▲1. 죄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
죄는 계층과 지위 , 이름과 나라 , 백성과 방언을 막론하고 온 인류에게 드리워진 엄청난 도덕적 질병이다 .
하나님의 생각과 법에 완벽히 합치하지 않는 모든 상상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 “죄 ”이다 .
죄에는 행함으로 짓는 죄와 행하지 않음으로 짓는 죄가 있다 .
우리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함 ’으로 죄를 지을 뿐 아니라 ,
실제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간과함 ’으로 죄를 짓는다 .
“저주를 받은 자들아 ,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배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1-42).
어셔 대주교는 숨을 거두며 기도했다 .
“주여 ,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되 , 특별히 내가 하지 않음으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 하소서 ”.
▲2. “죄 ”는 엄청난 도덕적 질병의 근원과 원천이다 .
인간의 죄악됨은 밖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 그 속에서 비롯되었다 .
어렸을 때 교육을 잘못 받아서가 아니다 . 나쁜 친구들이나 그릇된 본보기에서 기인한 것도 아니다 .
죄는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병과도 같다 .
우리 모두는 이 병을 가지고 태어난다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롬 5:12),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요 3:6),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롬 8:7),
갓 태어난 천진난만한 아기도 “천사 ” 같다고 하지만 , 어린 “죄인 ”에 지나지 않는다 .
그 키와 생각이 자라감에 따라 , 그 속에 속임과 악한 성향 , 이기심 , 방자함 , 완고함 , 탐욕 ,
시기 , 질투 , 정욕의 싹과 조짐을 보게 될 것이다 .
▲3. “죄 ”의 정도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 본성적으로 “항상 악할 뿐 ”이다 (창 6:5).
우리의 모든 사고와 정서 , 추론의 능력과 의지가 어떤 식으로든 죄로 오염되었다 .
양심조차도 확실한 안내자로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어두워져 있다 .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는다면 양심 역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이다 .
요컨대 ,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 ”(사 1:6).
공손함과 예의 바름 , 점잖은 매너 , 단정한 몸가짐 , 교양 등과 같은 얄팍한 덮게로
죄라는 질병을 가릴 수는 있지만 , 죄는 이미 성향과 체질에까지 깊이 전이되어 있다 .
물론 인간에게는 많은 고상한 기능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
예술과 과학과 문학 등에서 엄청난 능력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
하지만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어서 ”,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본성적 지식과 사랑과 경외함이 없다 .
인간은 훼파된 성전과도 같아서 , 한때 하나님께서 거하셨던 장엄함을 흔적으로만 갖고 있을 뿐이다 .
회심하여 성령의 주권 아래 있는 사람도 여전히 그 속에 완고함이 있는 것을 보면 ,
죄의 정도와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
이 육신 장막이 무너질 때까지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 .
그러나 죄는 더 이상 신자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한다 .
새로운 은혜의 원리에서 비롯된 넘치는 능력이 죄를 억제하고 다스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
신자의 삶은 실패의 삶이 아니라 승리의 삶이다 .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다 .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지만 육체를 신뢰하지는 않는다 .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기를 결코 잊지 않는다 .
▲4. 죄책과 죄의 악독함과 무례함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실감할 수 없다 .
본질상 유한한 인간은 자신이 맞닥뜨려야 할
거룩하고 온전하신 분의 목전에서 죄의 악독함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실감할 길이 없다 .
하나님은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고 하시며 (욥 4:18) 행실뿐 아니라
중심의 생각과 동기를 감찰하시고 ,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는 ” 분이다 (시 51:6).
죄 가운데 태어나 끊임없는 불완전과 우둔함으로 죄인들과 더불어 살다가
이내 사라질 피조물인 우리가 죄악의 무시무시함에 대해 이해해 본들
그것은 너무나 불완전할 뿐이다 . 우리는 죄를 헤아릴 수도 , 측량할 수도 없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
그리고 그분의 대속과 속죄에 대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야말로 ,
인간의 죄악됨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분명한 증거이다 .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로만 온전히 값을 치룰 수 있는 것을 보면 ,
인간의 죄책은 끔찍하리만큼 사악한 것임에 틀림없다 .
▲5. 우리는 죄의 기만성을 간과하기 쉽다 .
죄를 대할 때 , 우리는 실제 하나님의 목전에 드러난 죄의 모습보다
한사코 덜 심각하고 덜 위험한 것으로 보려고 한다 .
죄를 과소평가하여 변명하고 , 죄책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
죄는 가롯 유다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찾아온다 .
요압과 같이 두 팔을 벌리며 아첨하는 말로 다가온다 .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는 하와의 눈에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했지만 ,
이 실과 때문에 그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야 했다 .
궁전 지붕에서 한가롭게 거니는 것이 다윗에게는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았지만 ,
그 뒤로 간음과 살인이 따라 들어왔다 .
처음부터 죄가 죄로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깨어 기도하자 .
사악함에 세련된 이름을 붙일 수는 있어도 , 하나님의 목전에 드러나는
그 본질과 성향까지 바꿀 수는 없다 .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자 .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의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히 3:13).
빛에 이를수록 더 많은 죄악을 보게 되고 , 천국에 가까울수록 더욱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
교회사의 위인들을 보면 , 브래드퍼드나 러더퍼드 , 맥체인 같은 탁월한 성도들은
항상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복음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
아무리 죄가 넘쳐 난다 해도 , 은혜는 더욱더 넘쳐 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참여하신 영원한 구속의 언약을 통해서 은혜가 넘쳐 난다 .
의롭고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 그 언약의 중보자를 통해서 넘쳐 난다 .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그분의 공로를 통해서 넘쳐 난다 .
자기 백성의 마음에 보내셔서 그들을 새롭게 하시고 , 성결하게 하시고 ,
옛것은 다 지나가게 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넘쳐 난다 .
죄를 죄대로 보면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것이 사실이지만 ,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볼 수만 있다면 누구도 낙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
▲죄 교리에서 오늘날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천적 지침들을 제시한다 .
1) 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우리 시대에 만연하는 모호하고 흐릿하고 막연하고
몽롱한 신학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고 , 은혜에 대해 가르치고 , 믿음과 회개와 거룩에 대해 가르치기는 하지만 ,
성경에 있는 “그대로 ” 가르치지 않는다 .
이런 그릇된 신앙을 고치고 회복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길은 ,
죄의 죄악됨에 대한 성경의 옛 가르침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
인간은 자신이 지옥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까지는
결코 천국을 향해 결연히 돌아서지 않을 것이며 , 순례자로 이 땅을 살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
“사람이 율법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 ”이며 (딤전 1:8),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 ”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롬 3:20, 7:7).
율법의 요구들을 앞세워 사람이 귀 기울이게 해야 할 계명들을 분명히 밝혀서
그 계명들이 요구하는 바 , 그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나타내야 한다 .
산상수훈에서 우리 주님이 취하셨던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
죄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잠시 예수께로 나아와 그분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
이내 그 자리를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고 만다 .
2) 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요즘 유행하는 터무니 없이 관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학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
교리와 신조를 거부하고 신앙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현대 사조의 경향이다 .
한마디로 모든 것이 진리이고 ,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모두가 옳고 , 잘못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멸망 받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 모두가 구원에 이를 것 같다 !
그리스도의 대속과 속죄 , 마귀의 인격성 , 성경의 기적 ,
미래에 있을 심판의 영원성과 실재성 같이
중요한 신앙의 주춧돌이 , 현대 과학과 보조를 같이 하기에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운 것처럼 여겨져 ,
기독교라는 배 밖으로 내던져지고 있다 .
이 위대한 진리를 편들기라도 하면 , 여러분은 이내 편협하고 , 교양 없고 ,
시대에 뒤떨어진 신학적 골동품 정도로 취급받을 것이다 !
성경을 한 구절이라도 인용해 보라 . 그들은 유대인의 책 한 군에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는 것은 아니며 ,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도 많은 새로운 발견들이 계속되어 왔다고 반박할 것이다 !
죄의 본질 , 죄의 실재성 , 죄의 악독함 , 죄의 권세 ,
그리고 죄책에 대해 쉬지 않고 언급하는 것만이 , 현대의 이런 역병에 대한 처방이다 .
3) 영국 전역을 홍수처럼 휩쓸며 많은 것들을 쓸어가 버린 감각적이고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기독교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 또한 죄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
양심이 온전히 일깨워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신앙 체계가 다소 매력적일 수 있다 .
하지만 일단 우리의 양심에 각성이 일어나면 ,
우리는 오감에 호소하는 의식적인 기독교만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된다 .
허망한 종교적 행위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
사람들이 죄의 본질과 악독함과 죄악됨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완전하고 분명히 알았다면 ,
지난 사반세기 동안에 생겨난 반 (半 )가톨릭적 교회들의 5 분의 4 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
4) 요즘 회자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이론들에 대한 해결책도
죄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다 .
우리가 몸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완전에 이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구절은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없다 .
우리의 가장 탁월한 행위조차도 불완전하다 .
우리는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우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
마땅히 경외해야 할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다 . 기도할 때조차도 불완전한 것 투성이다 .
마귀와 세상과 육체에 대해도 싸워야 할 만큼 싸우지 않는다 .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한 상태를 솔직히 고백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
5)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개인의 거룩에 대한 저급한 견해에 대한
좋은 해결책은 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이다 .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수준이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다 .
좁고 깊었던 길이 넓고 얕은 길이 되어 버렸다 .
겉으로는 많은 사람을 얻었지만 , 질적으로는 많은 것을 잃은 것이다 .
지난 사반세기 동안 엄청난 부의 증가로 세속성과 방종 , 안락함에 대한 추구가 만연하게 되었다 .
한때 사치로 여겨지던 것이 지금은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고 ,
결과적으로 자기부인과 “고난 받는 ”것은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 (딤후 2:3).
우리의 관심이 분산되고 영적인 삶은 점점 힘을 잃어 가고 있다 .
정통 교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주하여 매일의 경건생활을 소홀히 하고 있다 .
이런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 더 많은 겸손과 성찰이다 .
이 상황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죄의 본질과 죄악됨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다 .
우리의 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적인 의식을 빌려 오지 않아도 되고 ,
참회 제도를 다시 회복시킬 필요도 없고 , 수도원주의나 금욕주의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 .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 우리는 순수하게 회개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은 ,
첫 번째 원리인 “옛길 ”로 돌이켜야 한다 (렘 6:16).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리하고 , 하나님 목전에서 죄가 무엇인지 봐야 한다 .
부주의하고 안이하게 세상적인 삶을 영위하면서도 , 동시에 복음주의 교인이라 자처하며
복음주의 원리들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일단 죄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악하고 , 훨씬 더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
우리에게 착 달라붙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나가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