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라일 『거룩』 머리말과 서론 고후7:1, 고전9:27 출처
장호준 역, 생명의 말씀사
◑머리말
이 설교들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거룩의 원천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깨닫기를 바라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가 얼마나 풍성한지알기를 바란다.
이 땅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처참할 정도로 낮은 수준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실천적 거룩에 마땅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간이 갈수록 더 분명히 깨닫는다.
미국의 천막 집회에 대한 글을 읽어보고
‘종교적 감정’이라는 현상을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이다.
“여자들이나 생소한 설교자들이 들려주는 감정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연설,
큰소리로 부르는 노래, 열기에 찬 방, 사람들로 꼭 찬 천막,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에서 받는 강렬한 반(semi)종교적 느낌들,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모임, 공개적인 신앙 간증 등이
모든 것이 당시에는 매우 흥미롭고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정말 분명한 근거와 실체가 있어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집회에 참여했던 사람이,
가정에서도 이전보다 더 거룩하고, 온유하고, 욕심이 없고,
애정이 넘치고, 친절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었는가?
주신 은혜에 만족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들에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가?
요란스럽고 흥분을 일으킬 만한 것이 없이도 고요한 은혜의 방편을 누리고
차분한 주일을 보내고 있는가?
가정이나 혼자만의 은밀한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일관되게 남아있는 것보다
공적인 모임과 장소에서 서로 마음이 맞는 그리스도인끼리 노래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후자는 은혜가 없어도 본성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전자는 은혜가 없이는 될 수 없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히5:12)조차 알지 못하면서
‘성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1879년 10월. 스트래드브로크에서 J. C. 라일
◑마틴 로이드존스의 추천사
“거룩”을 주제로 한 이 위대한 책을 새롭게 출간한 것에 대해 누구나 고마워할 것이다.
20여년전 헌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읽으면서 누렸던
영적 정신적 만족감을 저는 도무지 잊을 수 없다.
그의 설교는 항상 성경 말씀과 더불어 시작하고 말씀을 풀어간다.
라일 주교는 17세기의 위대한 청교도들이 파 놓은 샘물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의 저서들은 오늘날의 독자가 아주 쉽게 읽은 수 있는 현대적 형태로 주어진,
참된 청교도 신학의 정수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서론
성화는 칭의만큼이나 중요하다.
개신교가 아무리 바르게 가르치고 있다 해도 삶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세상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을 거짓되고 공허하다고 멸시하고,
급기야 기독교 신앙 자체를 싫어한다.
우리 모두가 성경이 말하는 거룩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거룩이라는 주제는 바른 기초 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미숙하고 부당하고 편향된 주장으로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이 지침을 “이 시대를 향해 던지는 거룩에 관한 경고”라고 생각하시기 바란다.
▲1. 성화 교리를 다루는 많은 사람들이 회심한 사람의 거룩은
개인적인 노력과 전혀 상관없이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대담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데,
과연 이런 주장이 지혜로운 것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모든 거룩의 뿌리이다. 거룩한 삶의 첫걸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믿음을 갖기 까지는 한 톨의 거룩도 거둘 수 없다.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거룩한 삶의 시작일 뿐 아니라 거룩한 삶을 이어가는 비밀이다.
하지만 성경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거룩을 위해서는 믿음뿐 아니라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말했던 사도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자신이 “싸운다”, “달음박질한다”,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 말한다(고전9:26,27)
그것만이 아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도 하고(고후7:1), “힘쓸지니”라고도 하고(히4:11), “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자”고도 한다(히12:1).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도 할 것이라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은혜이다(롬4:5).
하지만 성결하게 하는 믿음은 삶으로 역사하는 은혜이다.
이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갈5:6), 시계태엽과 같이 속사람 전체를 움직인다.
“믿음만이 의롭게 한다”는 말은 지극히 바르고 성경적이지만,
“믿음만이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그렇게 바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의롭게 되었음을 사람 앞에 가시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믿음은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약2:17).
▲2. 산상수훈이나 사도 바울이 쓴 대부분의 서신들 후반부에서 볼 수 있듯이,
일상에서의 거룩함에 대한 많은 실천적인 권고를 약화시키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
스스로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날마다 자기를 구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에 힘써야 한다.
신약성경은, 양심을 아프게 하지도 않고, 감정을 상하게 하지도 못하는,
거룩한 삶에 대한 일반적인 권고 이상의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일상에서 거룩함을 빚어내는 특정한 요소와 세부적인 권고를
신자에게 분명하고 온전하게 제시하고 강조해야 한다.
참된 거룩은 단지 믿음과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능동적인 행함과 수동적인 은혜가 우리의 행함과 태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참된 거룩은 우리의 말과 성품, 본성적 필요와 성향을 통해
그리고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 남편과 아내, 통치자와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오래전 경건한 저자들은 이 모든 문제를 원론적인 언급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고,
더 깊이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거룩한 사람이 가정이나 직장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3. 모호하고 막연한 말로 완전을 이야기하고,
전혀 근거 없는 거룩의 표준을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양 그리스도인을 다그치는 것이 지혜로운가?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고(고후7:1),
“완전한 데로 나아가고”(히6:2), “온전하게 되라”(고후13:11)고 권면하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생각이나 말, 행실, 태도로 짓는 죄로부터
완전하고 흠없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문자적인 완전을 가르치는 구절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아담의 후손 가운데 이 세상에서 그것을 얻은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신령한 빛을 더 누리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와 불완전을 항상 절감했다.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더 큰 “겸손으로 허리를 동였다”(벧전5:5).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많이 사용하고 있는 완전과 관계된 말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죄의 본질이나 하나님의 성품, 자신의 마음, 성경, 용어의 정의 등에
무지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있지도 않는 이런 가르침은 한 마디로 위험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4. 로마서 7장의 내용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아직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나 연약한 초신자의 경험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이 문제는 사도 바울이 서신을 기록한 이래로 1,800(2,000)년 동안 논란거리였다.
존 웨슬리나 찰스 웨슬리, 존 플레처까지도 사도 바울 자신의 현재 경험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로마서 7장 기록은, 모든 시대의 성숙한 성도들이 자기 경험을 기록해 놓은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오히려 이 기록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연약한 신자의 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사의 탁월한 주석가들 대부분이 한결같이
로마서 7장을 성숙한 신자의 고백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5. 오늘날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교리를 말하는 사람이 흔히 사용하는 말은 과연 지혜로운가?
이 교리가 성경에서 의도한 것 이상으로 높아져 있지는 않은가?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와 하나요, 그리스도가 그 안에 거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신비로운 연합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다시 살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혔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는 성경 구절이 다섯 군데 있다
(롬8:9-10,갈2:20,4:19,엡3:17,골3:11).
우리는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아야 한다.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일을 해 가신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확하고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의미를 넘어서 신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내주하심을 말할 때는
그 의미를 더욱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성령의 사역을 무시하게 된다
(요즘 내재 신론이나 우주적 그리스도를 말하는 뉴에이지적 신비사상은 같은 류이다-요약자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에도 계시고, 천국에도 계시고,
두세 사람이 그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도 계시고, 어디에나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머리와 대제사장 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재림 때까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고,
그분이 떠나시면서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지금도 그분의 백성 마음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요15:2).
로마서 8:9-10을 보면 확연하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사도 요한의 말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새뮤얼 러더퍼드의 <영적인 적그리스도>를 보라.
신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두 세기 전에 극단적 이단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반율법주의와 광신주의의 가장 악독한 형태로 변해갔다.
이 끔찍한 오류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같은 말씀을 무리하게 푸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이런 가르침을 따랐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 일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자는 죽어서 이미 장사되었고 그리스도만이 그들 안에 살면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육신의 안락함만을 구가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죄를 짓기 시작했다!
왜곡되고 과장된 진리는 가장 위험한 이단들의 어미가 될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6.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회심과 성별 또는 회심과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을 본다.
이 둘을 완전히 구분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로마 카톨릭은 교회를 죄인, 회심자, 성도의 세 부류로 나눈다.
오늘날 현대 교사들도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을 회심하지 않은 자,
회심한 자, 완전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더 높은 수준의 삶”에 도달한 자의 세 부류로 나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성경은 항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산 자와 죄 가운데 죽은 자,
신자와 불신자. 회심한 자와 회심하지 않은 자, 좁은 길로 가는 자와 넓은 길로 가는 자,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만 나눈다.
그러나 각 범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와 은혜의 정도는 다르고 다양하다.
그러나 그 차이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한 승강기인데 서 있는 높이가 다른 것에 불과하다.
은혜는 정도마다 큰 차이가 있고 영적인 삶은 항상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은혜 안에서 자라기 위해 항상 힘써야 한다. 성별이 없는 회심이 있는가!
두 번째 회심으로서의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신자에게 촉구하는 사람은,
성경이 새 생명, 새 창조, 영적인 부활이라고 일컫는
위대한 처음 변화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경시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주장을 듣다 보면, 이들이 말하는 성별되는 때가
바로 이들이 처음 실제로 회심하는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는 “옛길 곧 선한 길”을 따르겠다(렘6:16).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그리스도께 성별하고 더욱 헌신함으로 은혜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가능성과 앞으로 전진해야 할 절대적 필요를,
회심한 모든 사람에게 해마다 역설하는 편이 더 지혜롭고 안전하게 보인다.
대부분의 신자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거룩과 하늘의 기쁨을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두 번째 회심을 가르치는 것은, 겸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짓누를 뿐 아니라,
경박하고 무지하고 자기를 속이는 사람을 부추겨 아주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한다.
▲7. 신자에게 죄와 씨름하고 싸우기보다는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리스도의 손에 자신을 맡기기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
신자의 의무로서 “너희 자신을 드리라”고 하는 표현은 신약성경 단 한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롬 6:13-19, 6절에 걸쳐 총 다섯 번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 자신을 타자에게 수동적으로 맡기라”는 의미는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드려 섬김과 유익과 소용이 되게 하라는 것을 알 수 있다(롬12:1).
더구나 신약성경의 서신서 전체를 통틀어 서른 군데 정도에서,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할 책임이 있고,
이 일을 위해 개인적인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오히려 거룩한 침노, 갈등, 전쟁, 싸움, 군사의 삶, 씨름 등을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로 언급한다.
사람들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사실인 칭의와 성화를 계속해서 혼동한다.
칭의를 통해 사람에게 요구할 말은 “믿으라, 그저 믿기만 하라”는 것이고,
성화를 통해 요구할 말은 “깨어 기도하고 싸우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성경에 무지하고, 따라서 신앙도 견고하지 못하다.
이런 사람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 다닐 수밖에 없다(엡4:14).
아테네 사람들과 같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우리 조상들을 통해 다져진 것에는 병적인 염증을 느낀다.
현대적인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는 구름처럼 몰려들지만,
자신이 듣는 것이 과연 진리인지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선정적이고,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가르침을 끊임없이 열망한다.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벧전3:4)과는 전혀 상관없고 영적으로 술 취해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과장된 찬양으로 쉴 새 없이 감정을 자극해 주고,
감정에 격해 큰소리로 울 수 있는 군중집회 같은 것에만 관심을 둔다.
교리의 차이를 전혀 분별할 수 없게 만드는 무지가 팽배해 있다.
설교자가 “똑똑하고” “열정적”이기만 하면 다른 것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이런 것에 문제라도 삼으면 이내 여러분은 “편협하고 관대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질 뿐이다!
거룩에 자라기 위해 힘쓰는 모든 사람은 성경을 더욱 균형 있게 읽고, 교리를 신중하게 분별하고,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 더욱 힘쓰고 분발해야 할 것이다(렘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