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의 공동생활』 시133:1 굿니스의 도서요약
디트리히 본회퍼
이 책은 본회퍼가 핑켄발데에 있는 신학교의 학생들과의 공동생활의 결실이자
그들을 통해서 전 세계 교회를 향하여 주는 극히 구체적이고 간곡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1. 공동생활
‘보라, 형제끼리 한마음으로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고, 즐거운고!’(시133:1)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홀로 은둔생활 할 것이 아니라 원수들 가운데서 살아야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사명과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땅 위의 모든 나라에’(신28:25) 흩어진 한 백성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들이야말로 전 세계로 흩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씨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흩어진 대로 있되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믿는 무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눈으로 보이게 모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이 몸으로 옆에 함께 있다는 것이
신자에게는 비할 수 없는 기쁨과 힘의 원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사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귐의 목적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자로서 서로 만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사귐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중보자가 되셔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는 형제를 알 수 없고 그와 가까워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으셨을 때 우리 자신을 입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안에 있으며 그는 어디에서나 우리의 육체 곧 우리를 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까닭에 우리는 그의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현실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는 우리가 실현해야 하는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하신 현실로서 우리는 그 현실을 받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귐의 터와 힘과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우리의 사귐을
그만큼 더 고요히 생각할 수 있고 위해서 기도하고 희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현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터로 삼기 때문에 심리적인 현실이 아니고
영적인 현실입니다.
모든 영적인 현실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씀 아래서 함께 사는 삶은 어떤 운동이나 조직, 단체,
경건한 이들이 모임이 되어버리지 않고 한
거룩한 그리스도의 공교회로 이해될 때 비로소 건전하게 지속됩니다.
우리를 한데 묶는 것은 형제끼리의 친교의 경험이 아니라
형제로서의 친교에 대한 튼튼하고 확실한 믿음입니다.
◑2. 남과 함께 사는 하루
말씀 아래서 함께 사는 생활은 이른 아침에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성도들이 드리는 아침 경건회에 성서를 읽고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일이 빠질 수 없습니다.
시편의 비밀
시편은 성경 전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여
고대로부터 교회는 시를 읊어 드리는 기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시편은 성도의 무리를 대신하여 드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거의 예외없이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시편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기도를 의지하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이야말로 모든 기도의 위대한 배움터입니다.
성서읽기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성서를 읽는 일은 우리에게 의미 있고 유익한 일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밖에’ 있으며,
나의 구원은 나의 삶의 역사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만 찾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성서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 노래를 부르라
시편을 읽고 성서를 읽은 다음에는 ‘함께’ 찬양을 드립니다.
이것은 찬양하고 감사하는 교회의 소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이면 왜 노래를 부릅니까?
같이 노래함으로써 그들은 같은 말을 동시에 말하고 하나가 되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털어놓을 공동의 간구, 공동의 감사, 공동의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함께 드리는 경건회의 자유로운 기도는 모인 성도들의 공동 기도이지
기도하는 개인의 기도여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사귐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서 성도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3. 홀로 있는 날
고독과 침묵
하나님이 그대를 부르셨을 때 그대는 홀로 그분 앞에 섰었고
홀로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했습니다. 또한 그대는 사귐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사귐 안에서 그대는 십자가를 지고 싸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귐 안에 서 있을 때에만 우리는 홀로 있을 수 있고,
또한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사귐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이 둘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앞서는 것 같은 관계가 아니라, 동시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사귐을 위해서도, 개인을 위해서도 홀로 지내는 날이 없이
함께 사귀는 날은 아무 성과가 없습니다. 홀로 있는 표는 침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침묵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침묵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대면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명상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명상하고 기도하고 대도하기 위해 날마다
홀로 있을 시간을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당신의 말씀을 알려 주시고
우리를 깨우쳐 주십사고 기도하면서 명상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다만 말씀에 마음을 모을 따름입니다.
기도
명상을 하다가 기도로 이끌려 들어갑니다.
성서의 말씀을 토대로 기도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약속을 받은 기도에의 길입니다.
대도(代禱)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그 지체들이 서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삶을 말합니다.
대도는 우리가 매일 하나님과 형제에게 갚아야 할 봉사입니다.
대도를 위해서 우리가 바치는 시간이야말로 날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생각하면서 솟아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시간입니다.
성서를 읽으며 명상하고 기도와 대도를 드리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봉사이고,
이 봉사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발견되기 때문에, 우
리는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봉사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이 일을 위해서도 따로 시간을 정해 놓고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묵상의 시련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비그리스도교적인 환경 속에서 오랜 시간을 홀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시련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참된 명상의 시간과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하는 것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이 개인을 자유롭게 하고 강하고 성숙하게 하는데 이바지했는가?
명상의 시간이 그리스도인을 현실을 떠난 세계로 이끌어 들이지는 않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사귐의 힘으로 홀로 있는 사람도 복되고, 또 홀로 있는 데서 얻은 힘으로
사귐을 지탱하는 사람도 복됩니다.
그러나 홀로 있는 데서 오는 힘과 사귐에서 오는 힘은
사귐 속에 있는 사람 하나 하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의 힘일 따름입니다.
◑4. 섬김
혀에 굴레를 씌우라
‘자기의 혀에 굴레를 씌우는 사람은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약3:3이하)
사귐 가운데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의 성패를 가늠하는 규칙은
서로 형제에 대해서 할 말을 가슴에 지닌 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바로 이끌어 주기 위해
남몰래 권면해 주는 일까지 막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비밀에 속하는 것은 호의를 가지고 돕는다는 구실을 가지고서도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부터 혀를 훈련시키면 사람들은
저마다 비할 수 없이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아닌 사람을 창조하시되 우리가 희망한 대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고 슬기로울 수도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고
재간이 있을 수도 둔할 수도 있고 경건할 수도 덜 경건할 수도 있으나
이런 것은 사귐에는 없을 수 없는 개인들의 천태만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수군거리고 심판하고 정죄하고 자기만 옳다고 주장할 까닭은 못 됩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서로 즐거워하고 서로 섬겨야 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사귐에 속한 지체들은 모두 자기의 설 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귐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하나하나
한 줄에서 빠질 수 없는 고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고리라도 튼튼히 묶여 있으면 그때야말로 그 줄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지배하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주장이나
이에 따르는 억지가 아니라 은총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 따라서 봉사이어야 합니다.
자기의 삶에서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그 후로는 다만 섬기려고 할 것입니다.
‘높은 것을 바라지 말고, 낮은 데 내려가서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머무르라’(롬12:16)
온유한 섬김
섬기기를 배우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은 것을 믿고 사는 사람만이 자신을 바르게 낮출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 속에서 형제를 섬기려는 사람은
나의 죄가 가장 무거운 것이라는 깊은 겸비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없이 귀를 기울이는 섬김
사람과 사귈 때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지 않을 수 없는 섬김 중의 첫째는
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처럼 우리가 형제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습성을 얻은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시초입니다.
세상에는 제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 줄 사람을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듣는 직책을 위촉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하나님의 귀로 들어야 합니다.
돕는 섬김
그리스도인의 사귐에서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섬김 중의 둘째는 적극적으로 돕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소한 일을 그저 돕는다는 것입니다.
일상 함께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 같은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의 손이 봉사를 할 수 있을 때에 팔짱을 끼고 있지 않는 것,
그리고 우리의 시간을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시간을 채우시도록 한다는 것, 이것으로 우리는 겸손의 훈련을 받습니다.
서로 짐을 지는 섬김
‘서로 남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갈6:2)
그리스도의 법은 남의 짐을 지는 법입니다.
남의 짐을 진다는 것은 참고 용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형제의 짐을 집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생이야말로 송두리째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실현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사귐입니다.
그것은 서로 서로 남의 짐을 몸에 지는 십자가의 사귐입니다.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사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 이 짐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봉사
하나님의 말씀을 지나치게 말하는 것만큼 위태로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면에, 말을 했어야 할 때에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일에 대해서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서로 서로 해야 할 결정적인 봉사(말씀의 봉사)를 알면서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인다운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형제의 생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이 우리의 손에는 없습니다.
부서져가는 것을 우리가 한 데 묶을 수 없고, 죽어가는 것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서져가는 것을 묶으시고,
분열되어가는 데서 사귐을 만들어 내시고, 심판을 통해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우리의 입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말씀을 막으면, 죄 있는 형제의 피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우리가 그의 말씀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형제를 건지십니다.
권위의 섬김
‘그대들 가운데 크게 되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느니라’(막10:43)
예수님은 사귐에 있는 모든 권위는 형제를 섬기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권위는 듣는 섬김, 돕는 섬김, 남의 짐을 지는 섬김,
그리고 선교하는 섬김이 이루어지는 데 있을 뿐입니다.
섬기는 참다운 권위는 너무나 초라하게 보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설명하는 감독(딤전3:1이하)은 인간의 재질에서 나타나는 마력에 대해서나
영적인 인물의 빛나는 성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감독은 소박한 사람, 신앙과 생활이 건전하고 참된 사람으로서
성도의 사귐을 바르게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의 권위는 섬기는 책임을 완수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하나도 찬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모임에는 뛰어난 인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와 형제들을 참으로 섬기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 아래에 굴복해서 형제들 중의 하나가 된 사람만이 그런 권위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5. 죄의 고백과 성만찬
장벽을 뚫고 사귐에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사귐에 이르는 길이 뚫립니다. 죄는 빛 앞에 폭로되어야 합니다.
죄를 드러내어 고백하기까지 우리는 무서운 싸움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놋 문을 부수고 쇠 빗장을 꺾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들의 사귐에서 그의 모든 죄가 사함 받은 것을 발견합니다.
털어놓아 고백한 죄는 이미 그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이 형제의 죄를 지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죄악과 함께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죄의 고백과 함께 자기의 죄악을 벗어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장벽을 뚫고 십자가에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십자가에 이르는 길이 뚫립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사람은 죄악을 지닐 때에야말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교만을 부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를 만날 수 있는 곳, 죄인이 여러 자리 중에서 죽는 곳에 가기 꺼려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형제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마음과 몸에 깊은 아픔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깊은 아픔에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우리의 구원이요
우리의 영원한 축복으로 체험합니다. 옛 사람은 죽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고 영생을 받게 됩니다.
장벽을 뚫고 새 생명에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새 생명에 이르는 길이 뚫립니다.
죄가 미워서 고백하고 사함을 받을 때에 과거와의 완전한 절연이 이루어집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곧 제자로서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무리와 함께 사는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둠에서 건짐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즐거운 소식입니다.
장벽을 뚫고 확신에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확신에 이르는 길이 뚫리는 것입니다.
형제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재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혼자서 내 죄를 고백하는 한,
모든 것은 어두움에 뒤덮여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형제에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누구에게 고백할 것인가?
우리는 누구에게 우리의 죄를 털어놓을 수 있습니까?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사는 사람, 예수의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아주 깊은 죄악과
자기의 마음의 아주 깊은 죄악을 깨달은 사람은 형제의 고백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경험이 아니라 십자가의 경험이
우리로 형제의 고백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두 위험
서로 죄를 고백하는 일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에서
경계해야 할 두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첫째 위험은 고백을 듣는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의 고백을 도맡아 듣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에게 너무 지나친 부담이 되거나 건성으로 듣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둘째 위험은 고백하는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언제나 고백한다는 것을 하나의 경건한 일로 삼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곧 마음의 마지막 음란입니다.
경건한 행위로써 죄를 고백하는 것은 악마의 꾐입니다.
경건한 행위로서의 고백은 영의 죽음이요, 약속만을 믿고 하는 고백은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것―그것만이 죄를 고백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요,
그것만이 죄를 고백하는 목적인 것입니다.
즐거운 성찬
죄의 고백은 특히 거룩한 만찬에 함께 임하기 위한 준비로서
그리스도인의 사귐에 이바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찬을 받는 날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에서 즐거움의 날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형제와 화해함으로써 성도의 모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와 동시에 사죄와 새 생명과 구원을 받습니다.
거룩한 성찬의 사귐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성도의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주의 식탁에서 몸과 피로 하나가 되듯,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사귐은 목적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서 누리는 기쁨은 절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말씀 아래서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례전으로 완성됩니다.
(2019.08.02. 요약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