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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회심 - 조지 휫필드 눅19:9-10 출처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
성경 어느 곳에서나 구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구원의 선물을 어떤 자에게는 베푸시며 어떤 자에게는 베풀지 않으십니다.
구원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선물인 것은 그런 이유만이 아닙니다. 사람 속에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만한 어떤 이유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받는 오직 유일한 이유가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달을 수 있는 의가 구원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이 참되면 그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것이 복음적인 요소들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 다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체험이 이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이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대한 많은 사례들을 기록에 남기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유추하게 만드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있는 성도의 기업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말입니다.
이 본문 속에 언급된 사람의 회심을 바르게 활용하면 우리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거의 모두가 이 사람이 누구이며 주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본문에 언급된 사람은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복되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주목해 보아야 할 삭개오의 회심
(하나님께서 도우시면)저는 본문 앞부분에 상세하게 기록된 그의 회심에 대해 몇 가지 논평을 하고 이 본문의 뒷부분을 자세히 설명하여 불쌍하기 그지없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격려하는 근거로 삼고 싶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복음서 기자인 누가는 이 사람의 회심에 대한 기사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눅 19:1). 거룩하신 예수님께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며 선을 행하신 것을 당신의 일로 삼으셨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끊임없이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자연을 깨우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처럼 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서 치료하시고, 매일 매 순간마다 도덕 세계를 향하여 은혜로운 감화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은 거룩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주목할 만한 이적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곧 불쌍한 소경 바디매오에게 행하시는 일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누가복음 19장에서 우리는 더 큰 이적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그것을 특별히 주목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사를 소개하면서 ‘볼지어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눅 19:2).
복음서 기자는 이 사람의 ‘회심’과 ‘볼지어다’라는 말 사이의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의 판단대로라면 이 사람이 회심하게 되는 길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분명히 어느 누구도 삭개오라는 사람 안에 구원받기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이 세리장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개연성을 종합해 볼 때 그는 악명 높은 죄인이었을 것입니다.
세리는 로마 제국에서 명하는 대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독히 토색하는 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름만 들어도 증오심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우리 주님을 죄인이라고 표현할 때, 저가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앉아 음식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자, 삭개오는 세리였으니 분명히 죄인이었습니다. 세리들 가운데 괴수였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죄인들 중 괴수였습니다. 또 그는 부자였습니다. 성령에 감동된 한 사도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또 다른 사도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약 2:5).
사도들을 지으신 이시요, 구속주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확증하여 말씀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그러므로 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엄청난 부를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3절에서, 이 사람이 아주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였다’는 말을 듣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군중들은 우리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거만한 대제사장들이 칭하는 대로 율법을 알지도 못하는 허다한 민중들이 걸어서 주님을 따라 들에까지 나아가곤 하였습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설교하시는 것을 들으려고 삼일 동안 함께 그 들판에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주님을 믿었거나 그 말씀을 청종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교리를 전파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들을 꾸짖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자기들의 원수로 여겼습니다. 주님을 모함하여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핍박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역자들이 이 악하고 패역한 부자들로부터 그와 같은 대접을 받는다 할지라도 결코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 외에는 누구도 제 목회 사역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실 때 가난한 자들의 영혼은 가장 귀한 사람들의 영혼과 똑같이 보배롭습니다.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지상에 계실 때 그 말씀을 청종했던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케 하셨고, 천국에서 가장 큰 자로 삼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세상의 재물에 있어서 부요한 사람들이 저에 대해 좋게 말한다면 저에게 정말 화가 있을 것입니다. 양의 옷을 입고 있는 늑대처럼 평강이 없을 때 “평화”라고 외치고, 복음이 허락하신 한계를 벗어나서 좋은 것들만 말한다면 이것은 무서운 조짐입니다.
오! 너희 부자들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 멸시치 않으셨는데 너희들이 어떻게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부자들이여, 만일 너희가 그런 식으로 행한다면 너희를 지으신 분을 비난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이 제게는 더 사랑스럽습니다. 저는 가나한 자들이 동지로 날아오는 비둘기처럼 그리스도의 교훈에 재빨리 나아오는 것을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다만 저는 여기에 참석한 가난한 자들이 복음화 되어서 복음의 정신을 갖게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너희가 복되도다. 천국이 너희 것이기 때문이다.”
2. 뽕나무에 올라가는 삭개오에게 배워야 할 것
이제 우리는 삭개오에게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눅 19:3).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저는 이러한 자세가 좋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 중에 제일인 사랑에 거스르지 않고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같은 마음이 그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냈으며, 지금 수많은 무리들로 하여금 특별한 설교자의 말을 듣기 위해 이끌어 낸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호기심이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그 무리가 여러분일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의 교훈을 들으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려고 나왔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기자의 말을 그대로 빌려 쓰자면 삭개오는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했던 것입니다.
자, 우리 주님의 명성은 당시 온 예루살렘에 두루 퍼져 있었습니다. 온 나라가 주님의 명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이 선한 사람이라고 말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그는 백성들을 속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자 세리 삭개오는 주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주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주님을 뵙기가 여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키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을 뵈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제 말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선해지는 것을 부끄러워한 나머지 악을 행하는 많은 무리들을 좇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는 사람들로부터 압력을 받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자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영광의 주님을 부인하며 사람들 앞에서 신앙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 비열하고 억눌린 두려움이 참된 기독교의 독입니다. 이것은 영혼에 무서운 덫을 씌어 사람들을 멸망케 합니다. 저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지만 사람들로부터 경멸당할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깨달음을 옮기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오처럼 그리스도를 뵙기 위해 자기 앞을 막고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려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자기의 키가 작아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냥 가슴을 치거나 절망적으로 주저앉아서 “더 이상 그분을 보려고 따르는 것은 헛되구나. 나는 결코 그분을 볼 수 없을거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틈에 계속 있으면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고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 19:4)라고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달려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한 멸시받은 소수의 무리 속에 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전혀 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넓은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고 협착한 길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양떼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합니다. 거룩한 열정으로 무리 앞을 달려가기를 힘쓰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미련한 자로 여겨지는 것을 기뻐할 수 있을 때까지는 결단코 위로의 예수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시는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뽕나무가 등장하여 삭개오가 그 뽕나무에 오르기 위해서 겪었던 어려움을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뵐 사람들은 조소받는 것 외에도 다른 여러 어려움과 역경들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더 배울 수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삭개오는 그 두 장애물을 다 통과했습니다. 그가 앞으로 달려나갈 때 많은 사람들이 비웃으며 사울의 딸 미갈처럼 소리쳤을 것입니다.
“저 부가 삭개오가 오늘 체통을 잃어버렸나? 자기의 위치가 크다는 것도
망각하고 불쌍한 군중들 앞서 달려 나가 뽕나무에 올라가서 그 광신적인 설교자를 보려고 하네!”
그러나 삭개오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호기심은 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기만 한다면 어떤 조소도 괘념치 않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뵈려는 호기심을 가진 모든 자들에게도 이러한 장애물은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어 그들의 길에 놓인 모든 난관을 뚫고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나 사탄이 무엇을 말하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두가 이것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결국 많은 고통을 겪으며 (우리가 능히 추측해 볼 수 있듯이) 많은 조소를 겪은 후에 삭개오는 그 나무에 올랐습니다. 삭개오는 나무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는 나뭇잎에 자신을 숨기고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실 때를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 19:4).
그러나 노래를 부를지어다. 하늘이여, 기뻐하라! 땅이여, 주권적으로 택한 백성들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시며 그들을 항상 악에서 보호하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께 찬미와 경배를 올릴지어다! 영원하신 하나님,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나다나엘을 영원 전부터 아셨고,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매 그를 부르십니다.
3. 생명책에 기록되었기에 이미 아셨던 삭개오의 이름
다음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 19:5). 오, 놀라운 사랑이여! 누가복음의 기자가 ‘볼지어다’라는 말로 그 사건을 보고하기 시작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이것은 최고의 감탄을 자아낼 만한 말씀입니다.
삭개오는 그러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자기를 아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자, 그러나 보십시오! 전에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삭개오를 향해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는 나를 네 집으로 청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집에 유하여야겠다.’
주님께서는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마치 삭개오를 아주 잘 알고 계신 것처럼 말입니다. 실로 주님은 삭개오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 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원 전부터 성부께서 성자 그리스도 예수께 맡기신 자들 중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날 그의 집에 유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롬 8:30).
우리는 여기서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가 우리 앞에 분명하게 실증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삭개오에게는 합당한 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세리였고,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자였고, 단지 호기심에서만 그리스도를 뵈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고 실제적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삭개오처럼 그런 것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보호하지 않으셨다면 여전히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을 것이며, 다른 이들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 생명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상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삭개오가 이러한 초청의 말씀을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며 자기 집에 오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정말 놀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삭개오는 분명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꿈꾸고 있지. 그럴 수 없어. 어떻게 그분이 나를 아신단 말인가? 전에 그분을 뵌 적이 없었어. 게다가 그분을 내 집에 모셔 들이면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을 거야.’ 우리는 삭개오가 그런 생각을 해쓸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시 110:3). 이 외적인 부르심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임했습니다. 이 은혜가 삭개오의 의지를 부드럽게 덮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눅 19:6)하였습니다. 그의 집으로 주님을 모셔 들였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모셔 들였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집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이나 뜻을 따라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또한 성령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열고, 영광의 임금을 즐겁게 영접하게 됩니다. 삭개오처럼 호기심 외에는 선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들어온 사람들을 전적으로 경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주님께서 지나가시는 곳에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 계신 모든 분들이 자신의 영혼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을 듣고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나오도록 격려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삭개오처럼 호기심으로 그리스도를 뵈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제 영혼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 쉽게 분을 내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십시오. 그러나 형제들이여!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말씀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몇 마디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영혼을 구원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저는 성경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주목하였습니다. 회심한 내시는 즐거워하면서 그의 길을 갔습니다(행 8:39).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의 온 집과 더불어 즐거워했습니다(행 16:34). 그처럼 삭개오도 그리스도를 즐거이 모셔 들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즐거이 모셔 들이는 자들은 정말 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의와 거룩함과 영원한 구속함을 받기 때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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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좋은 땅에 대해서 나쁘게 보고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사람을 우울하고 미치광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특성이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죽기 전에 자신의 죄가 완전히 용서받아 더 이상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처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경건한 사람들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악인이 웃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웃음에 불과합니다. 그 웃음 속에는 우수가 깃들어 있습니다. 고작해야 그것은 산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타닥거리고 빛을 내지만 곧 사그라집니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의 기쁨은 그들의 것과 같지 않습니다. 경건한 자들의 기쁨은 견고하고 영원합니다. 그 기쁨은 외인이 감히 간섭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들로부터 그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벧전 1:8) 기뻐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잠깐 동안 고통을 당했을 것입니다. 아마 거쓰리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일에 따르는 시련>에서 말했듯이 그 고통은 15분 이상을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연하여 말씀드리건데 그렇게 오래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나 볼 수 있듯이 때때로 주 예수께서는 신속하게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시되 당신의 영원하신 뜻을 따라 부르십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여자가 똑같은 정도의 해산의 고통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것을 똑같은 정도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많은 시련을 겪지 않던 사람들도 그 후에 더 큰 갈들을 겪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은 후에도 시련을 당할 수는 있지만 다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든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롬 8:15).
삭개오가 죽기 전에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오직 한 가지는 그가 지금 그리스도를 믿었고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여김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세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그와 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삭개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음에 모셔 들인 사람들인 사람들은 즉시 주님 안에서 평안을 얻으며,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는 결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는 모든 일에서 자유하여 의롭다함을 은혜로 받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니의 선물이라”(엡 2:8).
4. 실천의 열매로 나타난 삭개오의 믿음
여러분! 마음속으로 이것은 방탕한 도덕률 폐기론적 교리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 믿음이 참되다면 사랑으로 역사할 것이고,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심한 삭개오를 주목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마음에 모셔 들이자마자 그 행실을 통해서 믿음을 증거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그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고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료 세리들 앞에 섰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사람의 비굴하고 죄악적인 두려움을 벗어던지기 때문입니다.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참으로 이 말은 주목할 만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회심과 함께 그리스도를 신성을 인정하였습니다. 야곱의 우물가에 있던 여인이 그러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도 그랬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요 9:38).
이것이야 말로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느낀 적이 없었음을 더할 나위 없이 잘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들이 주님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느꼈다면 주님에 대해서 그렇게 가볍게 말하지 않을 것이고 주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을 비웃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삭개오의 이 말은 주 예수님을 믿고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얼마나 고상한 열매입니까! 그 말 한마디가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조그만 나누어 주겠다고 하지 않고, 십분의 일을 나누어 주겠다고 하지도 않았고, '절반'을 나누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무엇의 절반입니까? 내 소유의 절반입니다. 정말 가치 있는 것들의 절반입니다. "내 재물, 내 소유,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내 소유의 절반을 주겠나이다"
‘내가 주겠나이다.' 내가 죽을 때, 내가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주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주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친히 그 유언을 앞당겨 집행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있을 때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삭개오는 그의 소유의 절반을 누구에게 준다고 하였습니까? 부자에게가 아닙니다. 이미 비단으로 옷을 해 입은 사람에게가 아닙니다. 다시 보답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가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 소외받은 자들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기까지는 그 사람들로부터 어떤 보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삭개오는 자기가 자선을 베풀기 전에 먼저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공직을 감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일을 스스로 의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덧붙여 말합니다.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 말을 들으십시오. 왕에게 바쳐야 할 세금을 내지 않은 양심 없는 사람들, 물건을 사고 팔 때 부정직하게 속인 사람들은 이 말을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참된 믿음을 주시면, 삭개오처럼 있는 힘을 다해서 보상하기까지는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회심하기 전에는 그렇게 속이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부유해지면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몹시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토색하는 세리들이여, 가서 삭개오에게 배우십시오. 가서 그와 같이 행하십시오. 만일 여기서 회심하지 않으면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여러분의 죄를 실토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아버지의 영광으로 심판하러 오실 때 그 일로 인해서 여러분을 정죄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정당한 근거로 삭개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육신적인 혈통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출생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보배로운 믿음의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주님을 믿어 의로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그의 믿음도 사랑으로 역사했습니다. 저는 그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져 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5.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만, 그 믿음은 선행으로 입증돼야
자, 은혜의 교리를 거스려 말하며 특히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가 사람을 방종에 이르게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여, 여러분 스스로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더 불의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삭개오의 예가 그 정반대라는 것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아닙니까? 제가 억지 해석으로 제 입장을 변호하고 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저는 제가 아는 지식을 최대한 동원하여 진지하게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말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확증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제가 또한 확증하는 바는, 믿음은 선을 행할 기회가 주어진 곳에서 선행을 함으로 인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삭개오에 대해서 본문이 말하는 바를 여러분이 진정 믿음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여러분 스스로 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증거합니까?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들었습니까? 그 부르심에 순종하셨습니까? 삭개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영접하였습니까?
여러분이 가졌다고 말하는 그 믿음으로 인해 사람들 앞에 서서 주 예수님을 고백합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며 겸손히 자신을 낮추려고 하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었습니까?
여러분이 소유한 것들을 구제하는 데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손해를 끼친 자들에게 마땅한 보상을 해 주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복된 자들입니다. 구원이 여러분의 영혼에 찾아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아들과 딸들입니다. 머지않아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이런 마음이 없다면 자신의 영혼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 일에 대해서 천사들처럼 말한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저주를 더할 뿐입니다. 진리를 주장하지만 불의할 뿐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여러분의 조상이 아니라 마귀가 여러분의 아비가 됩니다. 마음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갖지 않으면, 여러분은 영원토록 마귀들과 저주받은 영들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본문의 뒷부분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이 말씀은 자기 의에 빠져 있는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은 천사들처럼 죄인이 회심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기는 켜녕 불평하며 말했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눅 19:7).
주님께서는 당신의 행동의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내가 온 목적과 부합한 것이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그분은 ‘인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 우리의 구속주의 놀라운 겸손함이여! 주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로 칭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는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여리고로 가신 것은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지 아니 하셨다면 삭개오는 결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하늘로부터 이 낮은 땅으로, 이 눈물 골짜기고 내려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스스로 잃어버림을 당했다고 느끼는 모든자들, 삭개오처럼 자기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기꺼이 모셔 들이는 사람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구원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죄의 세력으로부터 죄인을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후사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게 하며, 더 나아가 창세 전에 주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누리셨던 그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는 구원입니다.
인자께서 여러분을 구원하러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인자가 되신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보좌를 버리고 율법에 순종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고난 당하시고 그 모든 일을 이루신 것은 가련한 잃어버린 죄인들을 위하여 아버지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의를 전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잃어버린 자” 모든 나라와 언어와 족속들 중에서, 잃어버린 상태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인자께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온 모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능히 다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주님은 능히 그렇게 하실 뿐만 아니라 기꺼이 그 일을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오는 자들을 한 사람도 내쫓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예전처럼 죄인들을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 저를 오늘 보내어 여러분 중 어떤 이들, 곧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주님께 인도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합니까?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해야 되지 않을까요? 많은 양 떼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선한 목자요 감독되신 주님께 돌아왔다고 말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저의 작은 사역을 복되게 하시길 기뻐하신다면, 가장 악한 죄인들에게 구원을 제시한다는 이유로 율법주의적이고 자기 의에 빠진 바리새인들이 저를 쳐서 아무리 불평하더라도 개의치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인자되신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은 지금도 가장 악한 세리, 여러분 중 가장 비열한 죄인에게 찾아가실 것입니다.
오! 죄인들이여, 서두르십시오. 서둘러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십시오. 바로 오늘, 이 시간, 아니 이 순간에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을 영원한 거처로 삼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 어느 누가 영광의 왕을 기꺼이 맞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이 삭개오처럼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겠습니까?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은 그냥 가만히 서 있을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여러분을 부르실지 부르지 않으실지 어떻게 압니까?
불쌍한 죄인이여, 어서 오십시오. 불쌍하고 잃어버린 자된 가련한 세리들이여, 어서 서두르십시오. 그리고 어서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의 누추한 곳에 스스로 찾아가실 정도로 자신을 낮추십니다. 오늘 주님을 모셔 들이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을 믿으면 그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모든 평강과 기쁨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많은 무리들 앞을 달려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하여 모든 악한 말을 하더라도 괘념치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뵙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은 다 보상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비웃음을 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다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삭개오는 면류관을 쓰고 영광중에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계속 주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받는다면 머지않아 여러분도 면류관을 쓰고 영광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사소한 핑계를 대면서 제 말을 막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오지 않아도 될 만한 핑계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밖에서 잃어버린 자요, 파멸에 처한 자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구원을 통해서 영광을 받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을 멸망시킴으로써 영광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 지금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거처를 삼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은 마귀와 또한 그의 사자들과 영원히 함께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시간 여러분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자신의 생명으로 여러분을 지금 부르시기를 원합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기꺼이 자기 백성으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은혜로 여러분을 부르지 않으신다면 제가 아무리 여러분에게 요청해도 소용이 없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단 느끼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삭개오처럼 금방 그에게 모든 것을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을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병들지 않았거나 적어도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저 전능하신 의사께 말입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자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칼로 여러분의 심령을 쪼개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는 화살로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박히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오, 신령한 빛을 여러분의 영혼에 비추시기를 원하나이다!
만일 자신이 그리스도 밖에서 상실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비참한 사람이며, 여러분의 영혼은 죽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옥의 형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옥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깨닫고 이렇게 부르짖도록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여, 이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소서. 주여, 나를 이 사망의 늪에서 건지소서. 주여, 나를 이끄시고 나로 하여금 당신을 따라 즐거이 나아가게 하소서. 저는 잃어버린 죄인입니다. 주여, 저를 구원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멸망하나이다!”
여러분이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그 거룩하신 손을 얼마나 빨리 내미시며 말씀하실는지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 14:27). 여러분의 고통스럽던 심령이 얼마나 놀라운 평안을 소유하게 될까요? 이제 여러분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일 것입니다.
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체험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잃어버린 자였으나 이제 발견되었다. 나는 죽었으나 이제 다시 살게 되었다. 인자께서 그 권능의 날에 내게 오셔서 나를 찾으시고 내 죄악된 영혼을 구원하셨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나왔습니까?
주님은 선한 선생님이 아니셨습니까?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여러분의 영혼에 달콤하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그 약속하신 것에 신실하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그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고 고난받을 때 그분께서 과연 이 땅에서도 넘치는 상급을 주시는 분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여러분이 분명, “오!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십시오. 그들에게 주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행하신 그 큰 일을 말해 주십시오. 이것이 그들에게 용기를 주어 그분께로 나오도록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삭개오의 이야기는 이러한 이유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아 참으로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영혼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에 대해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삭개오가 세리가 아니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세리 중의 괴수였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삭개오가 그와 같지 않았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부자라면 어떻습니까? 삭개오도 부자가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로 하여금 그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이기게 만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주님은 어려워서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죄가 산같이 크다 할지라도 이 위대한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가 될 것입니다(슥 4:7).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의 모든 불의를 주님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온에서 애통해하는 자들이여, 믿음으로 그대의 구주를 볼지어다! 십자가에 달려 두 팔을 뻗으신 주님을 볼지어다! 또한 여러분의 영혼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지어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였는지를 볼지어다.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내 상처 난 옆구리를 들여다보아라. 그리고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마음을 볼지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내 팔에 안겨라! 죄인이여, 와서 내 심장에서 흐르는 피로 네 더러운 영혼을 씻어라. 여기에 모든 죄와 모든 부정한 것을 씻기어 합당한 샘이 열렸도다! 범죄한 영혼들이여, 볼지어다.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너희 머리 위에 머물러 있도다. 서둘러 오라. 내 상처의 틈 속에 너희를 감추어라. 내가 너희의 허물을 위해서 상처받았다. 너희를 영원토록 살게 하기 위해서 내가 죽었노라.
볼지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나도 나무 위에 들려야 한다. 내가 어떻게 너희를 위해서 저주받은 자가 되었는지를 볼지어다. 내가 징계를 받음으로 너희에게 평강이 임하는구나. 그래서 내가 채찍을 맞았고, 상처를 입었고, 십자가에 못박혀 주었다. 내가 채찍을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오! 두려워 떠는 온 세상의 죄인들이여, 나를 바라볼찌어다. 믿음으로 나를 바라볼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고 죽기까지 내가 순종하였노라.“
오! 죄인들이여, 주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영광의 주님께서 죽으러 가시며 여러분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듣는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을 믿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이 구절을 통해서 계속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실상 본문의 모든 말씀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더 이상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마십시오. 주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시고 싶어 하지 않는 패역함과 죄들을 그대로 가지고 그분에게 나아오십시오. 여러분 스스로는 그러한 것들을 버릴 수 없지만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그것들을 없애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권능은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도 위대합니다. 그러니 서두르십시오.
오! 세리들과 죄인들이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온 마음을 드리십시오. 만일 주님의 부르심에 청종하기를 거절한다면 여러분의 저주는 정당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여러분도 모두의 피에 대해서 저는 자유합니다. 그 무서운 심판 날에 구주 앞에서 나의 말에 대해 여러분은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기 전에 영원한 평강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마다 “아멘”이라고 말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