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제6장 성장 / 존 라일 벧전3:18 스크랩
◑제6 장 성장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전3:18)
우리는 은혜 안에 자라가고 있는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
신앙의 진보를 나타내고 있는가? 세월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썰물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처럼 인생은 속히 지나간다.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의 실체가 시험받을 때가 점점 다가온다.
이날이 오면 신앙의 기초를 “반석”위에 두었는지, “모래” 위에 두었는지 드러날 것이다(마7:24-27).
성장은 아주 실제적인 주제이며, “성화” 전체의 문제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참된 성도는 자라간다. 진실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건강과 풍성함,
영적 행복과 위안은 영적 성장이라는 주제와 뗄 수가 없다.
▲1. 은혜 안의 성장이 실재한다.
그리스도인이 이 명제를 부인하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하고 슬픈 일이다.
칭의 문제에 있어서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다(골2:10).
믿는 순간부터 신자는 자신의 칭의에 대해 더하거나 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선택과 부르심, 칭의에는 정도의 차이나 증감이 없다.
“은혜 안의 성장”이라고 할 때는, 성령이 신자의 마음에 부으시는 은혜의 크기,
열정, 힘, 능력, 정도가 자라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은혜는 항상 성장하고 진보하고 증가하는 것이다.
“은혜 안의 성장”이라는 교리를 주장하는 주된 근거는 성경이다.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살후1:3).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너희 믿음이 자라--기를 바라노라”(고후10:15).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4:15).
“너희 사랑을 --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4:1).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은혜 안의 성장”이라는 교리를 세우는 또 다른 근거는 “사실과 경험”이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성도들의 생애를 보면, 은혜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
동일한 사람이라도 그의 믿음과 지식이 때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그
리스도인에 대해 “약한” 믿음과 “강한” 믿음을, 성경에서 “갓난 아이”, “아이”,
“청년”, “아비”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모든 생명이 겪는 과정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1) “은혜 안의 성장”은 영적 건강과 부요함을 보여주는 최상의 증거이다.
아이들이 크지 않고, 꽃이나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건강한 영혼은 반드시 자라간다.
2) “은혜 안의 성장”은 행복한 신앙생활의 한 방편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에서 자라가는 것과 우리가 누리는 위로가 서로 연관이 있도록 하셨다.
신앙을 통해서 가장 큰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성령의 가장 분명한 증거가 마음에 있는 사람이 자라간다는 것은 확실하다.
3) “은혜 안의 성장”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비밀이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일깨우고, 세상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야말로
계속적으로 향상되고 전진하는 신자이다. 이런 신자의 성장을 볼 때,
사람들은 그에게 생명과 실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4) “은혜 안의 성장”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살전4:1, 히13:16, 요15:1,8).
하나님은 모든 백성을 기뻐하시지만, 특히 자라가는 백성을 기뻐하신다.
5) “은혜 안의 성장”은 가능한 것일 뿐 아니라 신자는 자라가야 할 책임이 있다.
신자에게는 그 속에 새로운 원리가 있다. 이 원리를 억누르지 않는 것은 그의 엄숙한 의무이다.
자라가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자기의 특권을 상실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라지 않는다면 다른 누가 아닌, 우리 자신이 비난받아야 한다.
▲2. 은혜 안의 성장을 알 수 있는 표지가 있다.
1) 겸손이 더해 가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자신의 죄악됨과 무가치함을 절감한다.
이런 사람은 욥처럼 “나는 비천하오니”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욥40:4).
아브라함처럼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라고 말한다(창18:27).
야곱처럼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라고 말한다(창32:10).
다윗처럼 “나는 벌레요”라고 말한다(시22:6).
이사야처럼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말한다(사6:5).
베드로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한다(눅5:8).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릴수록 하나님의 거룩과 완전을 더 알게 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지금 자기에게서 발견하는 것에 비하면, 처음 회심했을 때 자신에게서 보았던 것은 너무나 미미하다.
자신 속에서 겸손이 더해 가는지 보라.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더해 가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더 큰 안식을 얻는다.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알아간다.
그분의 마음과 의도를 알아 간다. 대속자, 중보자, 제사장, 대언자. 의사, 친구,
목자로서의 그분의 직분과 영광이 형언할 수 없는 모습으로 펼쳐진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고 있는지 보라.
3) 일상의 삶에서 거룩이 더해 가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죄와 세상과 마귀를 더 잘 이긴다.
기질과 언어와 행동에 더 주의를 기울이며, 삶의 모든 관계에서 자신의 행위를 더 살핀다.
모든 일에 있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자 더욱더 애쓴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더 높이”, “더 위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항상 좌우명으로 삼는다(빌3:13).
4) 사고와 관심사가 더 신령하게 되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영적인 것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고 세상에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적인 것을 가장 사랑한다.
벗들과의 영적 관계, 영적 활동, 영적 대화가 영원한 가치로 다가온다.
5)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 더해 가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사랑이 가득해진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특히 형제를 향한 사랑에서 더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관용하고, 동정하며, 사려 깊고, 다정하고, 신중한 것을 통해서 그 속에 있는 사랑이 능동적으로 드러난다.
모든 사람에 대해 온유하고 인내한다. 다른 사람의 행위를 가장 좋은 의도로 해석한다.
6) 영혼을 선대하려는 열심과 부지런함이 더해 가는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나눔, 기도, 전도, 심방 설교 등-에 계속 힘쓴다.
그 일 자체를 자신이 받는 상급으로 여긴다. 영적 침체를 나타내는 분명한 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른 사람의 영혼과 그리스도의 나라 확장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이다.
▲3. 은혜 안에서 자라가고자 하는 사람이 사용해야 할 방편이 있다.
1) 개인적으로 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이다.
개인기도, 성경읽기, 묵상, 자기 성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세 가지 일에 힘쓰지 않는 사람은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은 참된 기독교의 근본이다. 여기서 잘못되면, 평생에 가는 길이 잘못된다!
지금은 특별한 위험이 도사린 시대이다.
많은 종교적인 활동과 분주함, 요란함과 흥분으로 넘쳐나는 시대이다.
과연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는 시대이다(단12:4).
수많은 사람들이 감각적인 설교를 좋아한다. 감동을 준다는 많은 대중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시4:4).
200년전의 영국 그리스도인들은 요즘의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더 성경을 많이 읽었다.
더 자주 하나님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다.
2) 공적인 은혜의 방편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개 교회의 일원인 신자가 할 수 있는 모든 방편을 말한다.
주일 공예배, 공적인 기도모임, 찬양을 하며, 설교를 듣고, 성찬에 참여한다.
공적인 은혜의 방편을 어떻게 누리느냐 하는 것은 신자의 영혼의 번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건강에 이상이 오면 입맛부터 없어진다.
은혜의 방편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영적으로 병들었다는 신호이다.
공적인 은혜의 방편에 참여할 때마다 “힘을 다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전9:10).
이것이 은혜 가운데 자라가는 비결이다!
3) 일상의 사소한 문제를 다루는 자신의 행위를 잘 살피는 것이다.
영혼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질, 말, 일상에서의 관계, 시간 사용과 같은 모든 일에
경각심을 갖고 임해야 한다. 한 시간 한 시간이 하루를 만든다. 하루와 하루가 인생을 만든다.
하찮은 시간은 없다. 나무뿌리가 썩기 시작하면 가지 맨 끈 이파리에서부터 그 증상이 나타난다.
어느 작가는 “작은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서서히 타락해 갈 것이다”고 말했다.
나무의 수액처럼, 기독교 신앙이 우리 성품의 모든 가지와 이파리까지 흘러
모든 사람을 흡족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은혜 안에 자라가는 방법이다!
4) 누구와 사귀고 어떤 사람과 어울릴지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하는 것은 사람의 성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함께 지내고 대화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어조를 닮는다. 보
통 이로운 것보다는 해로운 것에 더 쉽게 영향을 받는다.
질병은 전염되지만, 건강은 그렇지 않다. 기도와 성경 읽기를 독려하고,
우리의 구원과 영혼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도록 하는 벗을,
장차 올 세상에 대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벗을 찾아야 한다.
5) 은혜 안에 자라가는 핵심은, 주 예수와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믿음과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신자와 구주 사이의 일상적인 친교를 말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면서도, 그분과의 “교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외인일 수 있다.
성경에 인용된 신랑과 신부, 머리와 지체, 의사와 환자, 재판장과 의뢰인, 목자와 양,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는 날마다 계속되는 상시적이고 긴밀한 교제와 공급이 전제되어 있다.
사랑스럽고 인격적인 친구로서 그리스도와 친밀해지고, 확신을 가지고 그분을 붙잡는 것이다.
“교제”하는 습관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 안에서 자라갈 수 없다.
모든 필요보다 앞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 모든 어려움을 그분께 말씀 드려야 한다.
모든 인생의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분께 물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슬픔을 그분 앞에 펼쳐 놓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기쁨을 그분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그분의 목전에서 모든 것을 행할 줄 알아야 한다. 날마다 그분께 나아가서 기대해야 한다.
▲적용
1)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 영혼에 무관심하는 것은 정신없고 바보같은 짓이다. 이보다 더한 자살이 또 어디 있을까?
더 늦기 전에 깨어나라. 즉시 그분을 찾으라.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되지 않으려거든 그리스도를 찾으라.
2) 지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은혜 안에 자라가는 것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
처음 회심한 이래로 거의 진보를 나타내지 못한 사람이다. “찌꺼기같이 가라앉아” 있는 사람이다(습1:12).
과거에 받은 은혜, 옛날의 체험, 지식, 믿음, 옛날의 방식과 표현에 안주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 당장 성장이 멈춘 이유를 밝혀 내기로 결심하라. 그
이유가 무엇이든 위대한 영혼의 의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먼저 나아가서
여러분에게 있는 은밀한 질병을 고쳐 주시도록 간구하라.
3) 실제로는 은혜 가운데 자라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가 산을 내려온 모세처럼, 얼굴이 빛나지만
정작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단언하건데 이런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자라가는 그리스도인을 이웃으로 둔 사람은 복이 있다! “땅 위를 덮는 하늘”을 맛보는 것과 같다.
성장하는 영혼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깊은 인식이다.
자기는 무익한 종이고, 죄인의 괴수라는 인식만 할 뿐이다.
자라가는 그리스도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두 마디뿐이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계속 전진하십시오!”이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혜에 빚진 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은혜 안의 성장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자 한다면,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이 세상에서 더 많은 시험과 환난을 지나가야 할지라도 놀라지 말자.
탁월한 모든 성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된 자였다(히2:10).
주님께서는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질병, 상실, 십자가, 걱정, 실망 같은 것들은 우리가 겸손하게 되고,
깨어 있고, 영적인 마음을 갖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포도나무를 다듬는 전정가위 같고, 금을 정련하는 용광로와 같다.
혈과 육에게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