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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선교운동의 선구자 진젠도르프의 생애

LNCK 2019. 9. 8. 14:36

개신교 선교운동의 선구자 진젠도르프의 생애                             출처

 


모라비안 경건주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니콜라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는

1700526일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개신교적 신앙 때문에 망명한 남부 오스트리아의

귀족 집안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태어난지 6주만에 세상을 떠나고

4살 때 어머니가 재혼을 하여 경건한 할머니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할머니 헨리테는 귀족의 품위를 지키면서도

우아하고 경건한 개신교 신자였고

특히 경건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던 스패너의 열렬한

후원자였습니다.

 

스패너는 자주 진젠도르프 집을 심방하여 영적인

교훈과 감화를 어린 진젠드로프에게 끼쳤기 때문에

진젠도르프는 어릴때부터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 헨리테의 좌우명은 기도하고 믿고 조용히 기다리라

하나님께서 손짓하실 때 십자가도 고된 일도 기피하지 말라

는 것이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이런 외할머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원리들을 할머니에게서 얻는다. 그분이 있지 않았다면

우리의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은 구세주가 관심을 가졌던 세상에 있는

그 모든 일에 관심을 보여 준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카톨릭과 루터교, 그리고 개혁파 종교간에 어떠한

차이점도 알지 못했으며 그녀의 마음을 독차지 하였던 것은 그분의 이웃(에 대한 관심)이었다."

 

진제도르프가 이후에 초교파적인 신앙운동을 하게 된 것은

바로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였습니다.

또한 그는 할머니의 여동생 헨리테 폰 겔스도르프에게서 날마다

기도하는 법과 기도하면서 주님과의 대화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의 영향으로 그는 일찍이

그리스도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일기장에 나에게는 단 한 가지 열망 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님 오직 그분뿐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서 뿐 아니라

가장 참되고 가까운 친구로 여겼으며

이러한 태도는 인생을 마칠 때까지 그의 신앙생활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습니다.

 

가정환경과 스패너의 영향외에도 진젠도르프는

학교 교육을 통해서 좋은 기독교인이 되는

계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710년부터 1716년 즉,

6년 동안의 학교교육을 할레에 있는

프랑케의 페다고기움에서 받았습니다.

 

이 페다고기움은 지금의 중고등학교 정도의

교육을 실시하는 곳으로서

스패너의 제자인 프랑케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스패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식 기독교 교육이 엄격히 준행되었고

또 외국 선교사들의 경험담 내지는 선교보고도

자주 들을 수 있도록 배려되었습니다.

 

유아시절의 좋은 가정교육을 받은 진젠도르프는

이미 9살 때 세계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고

이러한 선교사들의 활동들을 듣고 난 후부터

자신의 인생을 선교사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 계획을 좀더 구체화하기 위해

다른 열심있는 소년들과 '겨자씨 선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단체는 기독교적인 형제애를 가지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고

세계의 모든 인류를 사랑할 것을 서약하였습니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비슷한 기도 모임을 7개나 더 만들었습니다.


▲그는 할레에서 학교교육을 마친 다음에는

신학을 공부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원하는 바와 그의 가족의 소원과는 달라

그는 신학대신에 비텐베르그 대학으로 가서

법률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법률공부를 마치고 1721년에는

정부 관하에 있는 드레스덴의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출세와 장래가 보장된 그 길에서도

그는 아무런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법학을 3년간 공부한 후 1719년부터 1720

서유럽의 문화전통을 둘러보는 수학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 때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화가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그림 속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나는 너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은 영감을 느꼈습니다.

 

이 체험은 그를 일생동안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잊지 못하게 했고

나중에 그의 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예수님께 일생을 헌신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여행 이후 1721년 작센법원에서 1년 정도 근무하고

그의 나이 22(1722) 에르트무테 도로테아와 결혼합니다.

 

도로테아는 진젠도르프와 같은 신앙노선을 걷고 있었으며

묵묵히 남편을 내조했습니다.

남편과 같이 찬송가도 작곡하고 남편이 해외선교에

헌신하는 동안에는 가사를 열심히 꾸려갔습니다.

 

그녀의 생애 마지막 15년 동안에는

이름만의 부부생활을 영위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남편이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있도록 겸손히 도왔습니다.

 

진젠도르프는 조상에게서 계승받은 재산의 일부로

베르델스도르프의 영지를 샀습니다.

 

그의 계획은 슈페네와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의 본산인

할레대학과 같은 시설을 하여 선교본부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727년에는 자기의 가옥을 내놓아

종교적 피난민들의 안식처로 삼게 하였는데

그 안식처로 모여든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모라비아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이 15세기 초의 존 후스 시대부터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내려오는 보헤미안 형제단의 후계자들이었습니다.

처음 몇 해 동안에 이곳에 와서 정주하게 된 사람이 300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진젠도르프의 영지에 헤른후트,

곧 '주님의 망대'라는 마을을 세우고

또 작은 종교공동체를 설립하고

진젠도르프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진젠도르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과 재능과 재산을 쓰셔서

이 유서 깊은 교회를 재조직하고

또 이를 통해서 더욱 큰 역사를 이루고자 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찬송가를 많이 작곡해 모라비안들은

, 일요일마다 아침 6시에 10개 그룹별로

여러곳에서 기도와 찬송의 예배를 드리고

10시까지 2km를 걸어가 교회에서 정규예배를 드렸습니다.

 

오후에는 헤른후트로 돌아가 장로나 진젠도르프 백작이 설교하는 가운데

아침 일찍 예배에 참석 못 한 성도들을

대상으로 다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후 늦게는 베르텔스도르프로 다시 걸어가 정규 예배를,

이어서 다시 헤른후트에 돌아가 예배를 드리다가

 

저녁 9시면 젊은이들 중심으로 흩어져

거리마다 찬송함으로 행진하며

집에 돌아가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1728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공직을 사퇴하고

종교적 지도자로서 전적인 헌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던 모라비안들이

그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뭉쳤습니다.

 

부흥을 위한 기도를 위해

작은 그룹들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24명의 형제와 24명의 자매가 자정부터

그 다음날까지 계속 기도하기 위해

각자 1시간씩 맡을 것을 서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라비안 교회의 24시간 기도 운동은

그 후 1백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중보기도는

그 다음 2백년 이상 수많은 사람들이 모든 대륙으로

선교를 위해 파송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진젠도르프는 어디든지 복음을 전하는 준비된 일꾼을

보내기 위해 청년 남녀들을 가정으로부터 분리시켜

엄격한 감독하에 신앙훈련을 시켰습니다.

 

진젠도르프는 사역을 조직하고 시작하는 아이디어가 풍부해

로중이라는 매일의 말씀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24시간 중보기도 모임이 시작된 이후

진젠도르프가 말씀을 선택하여

한 장로가 각 가정을 돌며

그날의 말씀을 전달하고 묵상하게 하였습니다.

 

그 장로는 매 가정의 부부에게

개인과 집안이 성화된 삶을 살고 있는지 자주 진지하게 물으며

화목한 분위기 여부를 점검하였습니다.

 

진젠도르프의 로중을 이어 지금까지

거의 280년간 묵상의 책이 보급되고 있는데

이 현대판 책은 수십개의 언어로

매년 총 150만 부(독일어판 100만 부 포함) 이상 판매되어

개인 묵상과 가정예배 등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시 개신교 교회는 세계선교에 대해 잠자고 있었습니다.

1731년 진젠도르프는 덴마크 크리스천 4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서인도에서 온 한 흑인과

그린랜드 출신인 두 에스키모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선교사를 보내주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들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고,

선교열이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헤른후트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선교적 도전을 던졌습니다.

응답은 즉각적이고 열광적이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세계선교를 품고 나갔으며,

그곳에서 낮에는 그들과 같이 일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 때부터 모라비안 교회는 소극적인 경건생활에서

적극적인 세계선교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1732년 레오나르드 도버와 다비드 니츠만을

서인도제도에 파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 뒤를 이어 1735년에는 그린랜드로,

1735년은 수리남으로, 1737년에는 아프리카에

1740년에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과 실론(Ceylon)

1742년에는 중국에, 1747년에는 페르시아에

1754년에는 자메이카에, 1756년에는 안티구아(Antigua)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그들은 1930년까지 세계 14개 나라에 3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1760년 진젠도르프가 죽기까지 모라비안 교회는

28년간의 활동을 통해 226명의 선교사를 배출해 내었고

1760년 당시엔 그린랜드의 13개 지역과

.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49명의 형제와 17명의 자매들이

6,125명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이들 모라비안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개척적인 역할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어려움을 참고 이기며

고난을 달게 받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활동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는

개신교 역사상으로 처음으로

전체 공동체의 전적인 지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선교로서의 전체 교회라는 개념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들의 뜨거운 선교열정의 여행으로 19세기 유럽에는

15개의 선교기관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모라비안들은 그전에 모든 개신교와 성공회가 보냈던 선교사들보다

더 많은 수의 선교사들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특별히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이들은 삶을 통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였으며

원주민들보다 부유한 생활을 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살았습니다.

 

이들의 주된 사역은 복음전파였으며

지역의 정치나

경제적인 문제에 휘말리는 것은 되도록 삼갔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서 아주 단순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의 사역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를 위해서는 아내와 가족들과 떨어져 살기도 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은 되도록 독신으로 있기를 원했으며, 결혼하는 경우

그 배우자를 제비뽑기로 결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진젠도르프 자신이 아내와 이들을 남겨두고

유럽이나 해외로 자주 선교여행을 하였으며

그 기간이 때로는 10년이 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진젠도르프 백작과 모라비안 교도들의 영성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736년 북미 원주민들에게 전도하러 미국 조지아로 가던

배 위의 요한 웨슬리는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승객이 공포에 떨었는데

같은 배에 탄 모라비안들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시편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건한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 모라비안들은 웨슬리에게

예수님을 개인적인 그리스도로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웨슬리가 구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고

조지아에서의 목회 중에도 런던으로 돌아가서의 사역중에도

모라비안들과 교제하며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런던에서 피터 뵐러(모라비안 지도자)를 통해 이신득의의 깨달음을 얻었으며

이는 후일 세계적인 교단으로 발전한

감리교회의 근본 교리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라비안의 본거지인 독일 헤른후트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시기와 비난으로 1736년에 고향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계 각 곳에

흩어져있는 선교사들을 위로하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으로 확신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형제회 모라비안들이

세계 도처로 흩어졌습니다.

 

이 흩어집은 곧 세계선교를 의미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라비안의 선교사역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영국,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서인도제도,

북아메리카 등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1941년부터 1943년 초반까지 펜실베이니아에서

인디언들을 위한 선교사업의 발전과 교회연합 운동에 힘쓰고자

모라비안 감독직을 내놓고 루터교회 목사로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교는 그의 초교파적 노력을 따라주지 않으므로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모라비안 교회 육성에 힘썼습니다.

 

그는 모라비안 교회의 감독으로서 파송할 교직자를 임명하고

선교부의 책임을 맡았으며 교회를 관리해 갔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 나사렛, 필라델피아, 헤브론,

하이델부르그, 랭커스터, 뉴역시와 스테튼 아일랜드에서

모라비안 공동체들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주위로부터 많은 오해와 핍박을 받고

환난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도 전 세계에 예수님을

전파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막지 못했습니다.


1747년 추방령이 철회되고 거의 죽을 때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다니면서 쉴새 없이 일했습니다.

 

교단 분열과 경건성의 악화를 막기 위해 애쓰다가

176060세를 일기로 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진젠도르프는 18세기 독일 경건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로서

개신교 선교사역에 큰 공헌을 한 모든 역사를 통해

제일 위대한 선교 지도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위기의 때에 모라비아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를 살리고

세계선교에 힘쓰도록 도와준 위대한 복음운동가입니다.

 

특히 많은 남녀 청년들로 하여금 세계 만민 구원역사에

일생을 헌신하도록 도전을 주었습니다.

 

진젠도르프가 재산과 명예를 다 바쳐 끊임없이

헌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의 가슴에 불타는 한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소년시절에 가졌던 이상대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뒤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진젠도르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에게는 단 한 가지 열망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오직 그분뿐입니다

    


타자 Or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