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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해결책, 속사람의 새로움

LNCK 2019. 9. 17. 20:32

 

◈갈등의 해결책, 속사람의 새로움                고후4:16            19.09.11.  출처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사람은 늘 무엇과 투쟁하면서 삽니다

청년 자녀들은 엄마와 투쟁하고

아버지와 투쟁하고 선생님과 투쟁하고

 

그리고 사회의 기득권과 투쟁하고

요즘 말하는 소위 꼰대들과 투쟁하고

 

여자는 남자와 투쟁하고

남자는 남자들끼리 투쟁을 하고

 

중국은 미국과 투쟁하고

미국은 중국과 그 이외 모든 나라와 투쟁하고

영국은 유럽으로부터 독립 하기 위해 투쟁하고

 

사람은 옛날부터 투쟁을 하면서 살았고

투쟁을 하지 않는 다면 인생의 목적이 더 이상 있을지조차

궁금한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정권을 얻기 위해 자기와 생각이 같지 않는

모든 사랑과 투쟁을 하고

 

정치라는 것이 원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 때에 그 갈등을 줄이고

여러 사람들, 뜻을 달리하는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살게 하기 위하여

 

정치가 발전한 것인데

그러나 정치가 발전한 후에는

오히려 정치인들 때문에

 

정치적인 일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나뉘어 주고 서로 갈등을 하고

그 갈등의 현실을 유지해야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참으로 여러 가지 면으로

시달립니다

 

겉으로는 세상에 일어나는 일(갈등)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 한 번도

화목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일본과 당연히 화목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중국과도 화목하지 않고 거리상 제일 가까운 북한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무엇과 비슷하냐면

애를 키우는데

그 애가 친척 누구와도

가깝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너무 가까우면 서로 적이 되기 쉽습니다)

 

고모 이모 와도 가깝지 않고 사촌 과도 가깝지 않고

가까워질 만한 이유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사실 피를 나누거나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과 친해야 되는데

 

오히려 그 사람과 반목하고 서로 불신하는

그런 분위기에서 살고 자라는 아이는

커서 누구를 신뢰하겠습니까!

 

(사람은) 친한 사람이 필요한데

친한 사람을 구태여 멀리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까운데 있는 일본이든 중국이든 러시아든

별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국과 가깝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가까우면 앙숙)

 

아니면 우리끼리 사는 법(고립)

배운다든가 합니다

 

겉으로만 그런 것(갈등, 투쟁)이 아닙니다

사람은 진정한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모릅니다

 

내 몸이 내 자아와 같은 것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몸은 내가 원치 않는 것을 욕망 합니다

그래서 내 몸은 끊임없이 음식을 먹기를 원하죠

 

내 자아는 그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절제 하려고 애를 쓰는데

몸은 상관이 없어요

몸은 몸대로 놀아요

 

여러분도 그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또한 몸이 좀 젊게 남아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몸은 몸의 스케줄이 있고

몸의 뜻이 따로 있어요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이 내 감정인 것 같죠?

내 말을 들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냐 감정은 감정대로 놀아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감정의 기복에 좌우되고

괴로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감정이 호수와 같이 고요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 없이 감정은 감정대로 뛰놀 때가 있습니다

불안하다던가 흥분한다던가

뭐 우울하다던가...

 

감정조차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진정 내 자아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우리가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갈등합니다)

 

도대체 내 몸은 내게 무익한 쪽으로

자꾸 가려고 하고

내 감정도 내가 원치 않은 쪽으로

나를 끌고 가려고 하고

 

도대체 그러면 이 모든 것과 싸우는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요?

 

이것(자아)

나의 의지인가요, 나의 양심 인가요?

 

사도 바울도 사람 속에 일어나는

갈등에 대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육신과 성령(사이의 갈등)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말했지요

그리스도인의 갈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예를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사도 이지만 사도 바울도 (신앙적 갈등을)

말하길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내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

그러니까 선을 원하는 나란 존재는 누구고

악을 행하는 나란 존재는 누구라는 말입니까?

 

그걸 마치 내 책임이 아니고 내가 악을 행할 때

마귀의 시험에 의해서 범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마귀의 탓이다 라고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마귀가 시험을 하든 안 하든 간에

악을 행하는 자는 나입니다

 

내가 원치 않았더라도 악을 행한다면

사도 바울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내 육신이 행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지만

 

그럼 육신을 나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내게서 제거 할 수 없는 육신이

나와 함께 있는 한

그건 내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내 속에 갈등이 있습니다)

형이 동생의 과자를 뺏어 먹은 후에

그거 내가 먹은 거 아니야

내 육신이 먹은 거야

이렇게 말할 수 없지요!

 

그런데 이제 성경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신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런 신비한 말을 했습니다

Christ in me

내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내가 너희를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오시지 아니하리라

 

보혜사가 오시면 그가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안에 있으시리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신비한 개념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성령께 늘 순종을 하든

순종하지 못하던 간에

그럼에도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안에 성령이 항상 거하십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재 혹은 내주라고 부릅니다

Indwelling of the Holy Spirit (내주)

 

우리는 신학적인 개념을 말할 때

사람들이 그 현실에서 실감하기

너무 어려운 것을 말하게 되면

사람이 그것을 믿기가 좀 어렵고

너무 동떨어진 것을 말하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지요

 

그러나 성령의 내주하심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맛볼 수가 있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고

 

이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불기둥과 구름기둥 대신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그 역할을 하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역할을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느끼고 분별하고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것은

일평생 걸리는 훈련입니다

일 평생 걸리는 훈련!

일 평생 걸리는 훈련!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고후4:16) "우리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 속은 날로 새롭도다!"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별로 환영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니에요

나는 후패하지 (낡아지지) 않아요

나는 아직 젊어요

 

뭐 그러나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사람의 DNA는 이미 낡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6

 

갈등의 해법 : 속사람의 새로움

우리의 속이 과연 날로 새로워지는지요?

사도 바울은 그렇게 (날로 새로워진다) 말했지만 새로워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우리는 아직 잘 모릅니다

 

내가 어떤 면으로 새로워지고 있다는 얘기일까?

과연 나는 새로워지고 있는가? 새로워 진다면

나 스스로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지?

 

주님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고 계시는지?

그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적용

우리가 서로 성도의 교제를 나눌 때

불필요한 얘기 하지 말고

무슨 뭐 법무부가 어쨌느니 정치 때문에 여러분이 직접적으로 해택이나

손해 입는 사람 별로 없을 겁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개인적으로 아무 것도

직접적인 혜택 못 받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다고

무슨 혜택 입은 분이 있어요?

(너무 과도한 관심을 갖지 말라는 뜻)

오바마가 됐을 때

혜택 입은 분 있습니까?

(정치 말고 신앙적 대화를 하시라는 뜻)

무슨 상관이 있어요?

 

상관이 없는건 아니지만

우리와 별로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 간에 대화를 나누려면

무슨 신문 지면에서 이미 기자들이

침을 튀기면서 떠드는 얘기 하지 말고

이런 얘기를 하세요

 

우리의 속사람이 어떻게

날로 새로워지고 있는지

그걸 서로 대화하세요

(변화와 성장을) 찾으세요 서로!

 

나는 권사님, 권사님을 수년 동안 보면서

이런 이런 신앙적인 변화를 관찰합니다

 

얼마나 유익한 얘기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저는 성도님 중에 한 분이 십몇 년 전에 했던 제 설교와

지금 하는 설교를 비교해서

그동안에 저의 생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뭐 이런 것을 연구하는 분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고 참 반가웠어요

 

그 얼마나 관심을 갖고 설교를 들으면

지난 십 수년 동안 저의 그 설교 내용이든

신학이 어떤 식으로 변천했는지

까지도 들여다 보니

그거 듣는 것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아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그동안 나를 인도하셨나 보구나!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집사님을

이런 식으로 그동안 인도 하셨다고 봅니다

 

난 이런 변화를 관찰했습니다

그건 이제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삶 속에

내가 지켜보는 동안에

 

이런 변화가 느껴질 수 있었다면

그건 위대한 것이고

귀중한 것이고 그런 (속사람의 날로 새로움)

것을 우리가 서로 말해 하고...

 

그게 아니고

나는 20년 동안 집사님 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늘 똑같다

그건 참 비극적 일이 아닐 수 없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서

하고 계시는 일을 내가 보지 못한다면

가족이라도 그것을 봐 줄 수 있어야 되는데 나는 왜 못 보느냐?

내 욕심 때문에 못 봅니다

 

내가 욕심 하는 것과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것이 다르면 내 눈에 안 차기 때문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성숙 역사가) 안 보여요

 

내 눈에 안 차기 때문에 안 보여요!

그러나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나의 욕심에 관점에서 보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걸 잘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은 당신을 이런 식으로

인도하시는 것 같다..'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귀중한 것을

우리는 이런 성도들을 만나서

이런 성도들과 교제를 좀 해 봐야 되는데요..

 

영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실이 담겨져 있는 사람

말이 헤프지 않은 사람 말이 헤프다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까

 

포도주가 포도즙이

그 집에 양은 정해져 있는데

헤프게 마신다면 물을 타서 마신다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있는 진실과 믿음은

정한 분량이 있는데

헤프게 나눈다면 물을 탄다는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헤픈 말보다는

한마디 한마디를 하더라도

거기에 진실이 담겨져 있고

거기에 깊은 믿음의 믿음의 고백! 믿음의 고백!

 

고후4:13절에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4:13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I believe so I speak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성도의 교제는)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고 만약에 믿는 것이 없다면 말할 것이 없죠

또 믿기 때문에

믿음을 우리의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고

 

우리가 믿는 고로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듣는 사람에게

다 득이 되고 힘이 되고

믿음에 도움이 되고

그것이 진정한 성도의 교재요,

 

사람이 후패 할지라도

날로 새로워지는 속 사람을 보고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