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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이 이뤄지려면

LNCK 2019. 10. 5. 03:02

예언이 이뤄지려면 - YouTube

예언이 이뤄지려면                     창15;1~6                   출처

     

한때 <대한민국(평양, 혹은 대구)이 장차 동양의 예루살렘이 되리라>

예언하고 믿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비전은 사람들이 괜히 하는 말이 아니고

성령으로부터 비롯되었으리라고 봅니다.

 

동양의 예루살렘이 된다는 말은

대한민국이 기독교 신앙에 중심지, 힘의 중심,

제사장 국가가 되리라.. 는 포부와 비전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예언은 아직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이루어질만한 조짐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성취되기 이전에 그만 쑥 들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해야 됩니다.

그때 그 예언은 잘못된 예언이었다는 말인가?’

 

그 사람들이 흥분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예언)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가?’

 

여러분, 성경말씀에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했지요?

예언이 함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마음대로 예언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성령에게는 그러한 뜻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런 예언을 하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삽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인내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삽시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고,

 

40년이 지나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전해주지 않았다면

그 다음 세대가 가나안 땅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 믿음을 잃어버렸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멈추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뜻하신 것이라도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그 믿음을 붙들어야 되고

그 믿음을 붙들기 위해 필요한 순종과 희생을 감수해야 되고

 

그리고 시간이 걸려서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다윗이 그 아들 솔로몬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비전을 전수했던 것처럼

 

그리고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을 얻을 비전을 전해주었던 것처럼

또 엘리야 선지자가 엘리사에게

성령의 능력과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인도하는 사명을 전해 주었던 것처럼

 

이 모든 것은, 먼저 믿은 사람, 먼저 약속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직접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전수해야 될 필요가 있고,

 

그 믿음을 여러 세대에 걸쳐서 붙들고

그 믿음을 간수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데

 

대한민국(평양, 혹은 대구)이 동양의 예루살렘이 되리라는 비전을 가졌던 분들이

그 다음 세대에 그것을 전해주기 이전에

다음 세대는 벌써 생각이 다른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그 관심사가 다른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교회에 기대하는 바가

다른 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이제는 동양의 예루살렘이든, 서양의 예루살렘이든, 세계의 예루살렘이든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후손들이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달라졌습니다.

바뀌었어요.

 

이제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다른 쪽에 맞춰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나안 땅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대신에

엉뚱한 땅을 바라보는,

 

아니면 우리는 더 이상 땅 같은 것은 필요없다!

우리의 미래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광야에서 우리 옵션(선택의 길)을 찾자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이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것이냐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람에게 옮겨가서, 이제 사람이 무엇을 해야되느냐..

무엇을 이루어야 되느냐..

어떤 의무가 있느냐..

이쪽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봅니다.

 

한 세대가 지나가는 동안에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가졌던 비전과 믿음은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그것이 스스로를 비판하는 목소리로 바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제 우리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고

-신앙의 부흥

-교회의 성장

-세계 선교

-민족 복음화

여기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지 않고,

 

그 대신에

-기독교의 사회적인 역할 이라든지

-기독교의 사회적인 의무 같은

이런 엉뚱한 데 관심의 우선순위를 갖게 데다 보니까...

 

여러분, 왜 서구교회가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쇠퇴했습니까?

 

그때를 우리가 바라봐야 되는데

지금은 아직까지는

쇠퇴 decline decrease

재미 없는 말을 쓸 수밖에 없죠.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서구의 기독교가 쇠퇴한 것은 지난 1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지난 100, 좀 더 짧게 보면 지난 80

20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일이에요!

 

왜 그렇게 되었느냐?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서구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관심이 세계선교, 민족복음화, 교회성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디에 그들의 관심사가 있었느냐?

무슨 사회개혁, 사회운동, 또 세상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

 

그런 게 틀리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성령께서는

복음을 전할 때에만 역사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오셨어요.

 

그런데 교회가 복음 전하는 일,

민족복음화, 세계선교, 교회성장,

여기에 대한 관심을 잃고서

 

그 이외의 일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부터

성령이 역사하실 일이 없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필요 없게 되었어요.

성령의 능력이, 성령의 증거가, 성령의 충만이 필요 없게 되었어요.

 

교회가 성령충만할 필요를 갖지 않게 되었고

예배가 성령충만 하지 않게 되었고

목회자들이 성령충만 하지 않고

설교가 성령충만 하지 않고

성도들의 신앙훈련이 성령주도적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서 당연히 신앙은 힘을 잃어갔고

비전이 보이지 않고, 신이 나지 않고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당연히 교회가 시들어갈 수밖에 없었고요

사람들의 신앙이 시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계속해서 움직여야 됩니다.

사람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도 움직여야 신앙의 역할을 합니다.

믿음이 필요해야 합니다.

믿음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필요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내게 성령충만이 필요가 없는 일,

내가 기도해야 될 필요가 없는 일,

믿음이 필요하지 않은 일

이렇게 되면 당연히 믿음이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말씀에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20절에 있는 말씀인데,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말씀의 뜻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하는 것은 다 귀중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예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예언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전을 갖게 하십니다.

 

우리가 비전을 갖게 되는 계기는 예언을 통해서입니다.

성령을 너희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2:17

비전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영적인 현상인데

영적인 감동을 받을 때, 사람은 미래의 가능성을 엿보고

그것이 그 사람을 흥분하게 하고

그것이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성령에 감동을 받지 못하면

사람이 백번 애를 써도 아무 비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안디옥에 교사와 선지자들이 회의를 하다가 비전을 얻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무슨 세계선교전략을 짜다가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에 대한 비전을 얻는 것이 아니고

주를 섬기며 금식을 하는 중에 성령이 말씀하시는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13:2

 

오늘날 총회든 노회든 교단의 지도자들이든

선교단체든 얼마나 그들의 진로와 비전을

주를 섬겨 금식하며 예배할 때 성령이 예언하심을 통해얻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회의를 통해 결정하려고 합니다.

의견을 나누면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모든 단체와 구별되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 중의 하나는

무슨 세상의 기업체, 무슨 애플이든, GM이든,

무슨 세계적인 기업이든 아니면 단체든

회의를 하고 아이디어를 나누고 또 소비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마케팅 조사를 하고.. 그러면서 그들이 나아갈 길을 결정하겠지만

 

교회는 회의를 통해서 비전을 얻는 게 아닙니다.

먼저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거기에서 비전이 오고, 거기에서 믿음을 얻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의 모든 단체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

머리를 맞대고 염려해서 되는 게 아니고, 걱정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백 번 염려해 보세요, 길이 열리나?

 

의인은 염려함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해야 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안디옥에 선지자와 교사들은 기도했다고 하지 않고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13:2

 

여기서 섬긴다 ministered’는 말은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이게 아직 한국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기도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명수입니다.

기도는 잘 합니다.

그러나 주를 섬기는 법에 대해서는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통성기도 하는 중에 성령이 말씀하신게 아닙니다.

주를 섬겨 예배드리는 중에 성령이 가라사대

성령이 어떤 식으로 말씀하셨느냐.. 아마 예언의 영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선지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13:1

선지자들이니까 예언 했을 게 아닙니까.

예언을 했습니다.

 

이 예언이란 것은 그냥 임의로 하는 예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움직임이 없지만

미국에는 소위 자신을 선지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현대 선지자들의 특징은

영적으로 흥분을 하면 그야말로 모든 보장과 모든 좋은 얘기는

다 끄집어내기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현대 선지자들의 특징은 흥분하면

, 주님이 곧 오신다!’ 라고 예언하기도 하고

흥분하면 오 부흥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약간 좀 헤픈 예언이 많습니다.

 

흥분을 하기 시작하면

헤픈 예언을 많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흥분하기를 좋아하는 현대 선지자를

우리가 좀 꺼려하게 됩니다.

 

괜히 흥분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갔다가

뭐 한 번 흥분하면

권사님 집을 팔아 헌금하시면 하나님이 열 배를 주십니다

이런 예언을 듣기 시작하면, 그거 무시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순종하기도 어렵고..

 

흥분하는 선지자를 우리가 조심해야 됩니다.

흥분하는 선지자들은 보통 보면

주로 큰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는 둥

이런 식으로 약간 헤픈 말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선지자와

쉽게 흥분하는 선지자를 우리가 구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진짜 선지자는 엘리야처럼 쉽게 입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그렇게 좇아가고 좇아가고

주님이 살아계시는 한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하면서

여러 번 좇아가고 좇아가서 겨우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나에게 구하는 것을 말하라

그제야 엘리사가 겨우 말했어요.

 

뭘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제야 물어봅니다.

그때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의 갑절을 얻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소원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엘리야 선지자는 예언이 헤픈 선지자가 아니었어요.

아무데서나 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무에게나 축복을 말하는 선지자가 아니었어요.

 

사르밧 과부에게 3년 반 신세를 지는 동안에

기적이, 떡반죽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 외에

그 기간 동안 엘리야가 행한 일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을 때 살려준

딱 그 한 번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은사를 과용, 과신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현대 선지자 운동이라는

선지자들이 모여서 서로 예언할 때 보면

 

물론 성령의 성격이

사람을 격려하고, 사람의 영을 살리는 말씀을 하시는 분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마치 선지자들끼리 서로 예언을 해 주는 말을 보면

모두가 선지자고, 모두가 사도이고, 모두가 장차 부흥의 주역이 될 것처럼

그렇게 말을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헤픈 것이고

예언을 헤프게 하는 것이고

예언 인프레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에 선지자와 교사들이 헤프게 예언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로 필요할 때 성령께서 단 한 번의 예언을 주십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내가 저들을 위해

준비한 일을 위해 세워라!’

 

대단한 일이죠. 이건 헤픈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그들도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대하는 중에 예언을 했다면

그게 자기의 마음 소원을 얘기한 것인지

하나님의 마음을 얘기한 것인지 어떻게 분별하겠습니까!

 

 

////////////////////////// P2 //////////////////////////

 

 

예언이 이뤄지려면 P2

 

그러나 정말로 필요할 때

성령께서 단 한 번에 예언을 주십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내가 저들을 위해 준비한 일을 위해 세워라!

 

대단한 일이었죠 이게 헤픈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그들도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소원을 말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인지

우리가 늘 조심해야 돼요

 

헤픈 예언, 잘못된 예언을 하지 않으려면 내 사심이 얼마나 개입했는지를 조심해야합니다

내 개인적인 욕심, 내 개인적인 소원이 거기에 개입을 하면

예언인 줄 아는데 사실은 예언이 아닐 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배우자에 대한 기도를 조심해야 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진 <후에>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내가 누가 좋은데..'

그 사람을 내가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같으니 그 사람을 나에게 달라..

근데 이미 감정적으로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어려운 거에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이미 사랑에 빠졌는데 그래서 자기가 이미 결정을 하고

아무리 봐도 내가 주님께 기도 했던 모든 조건을 가진 사람 같다는데

그러나 원래부터 그런 조건을 가졌던 게 아니고 그 사람을 만난 후에 조건이 변한 겁니다

그 사람 위주로 조건이 맞춰진 거에요

 

그래서 내가 기대하던 모든 걸 가졌다고.. 근데 그게 아니지요

그 사람을 만난 후에 그 사람 위주로 생각이 바뀐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언 은사가 있는 선지자들도

'배우자에 대한 인도 만큼은 예언을 의지하지 말아라'

일단 서로 둘이 서로를 사랑을 하는지 그리고 가는 방향이 일치하는지 그게 우선적이다

아주 현실적인 현실적인 어드바이스입니다

 

미국의 어느 한 교회에 총각 찬양 인도자가 있었는데 총각 일때

하나님이 그 찬양인도자가 남편감이라고 계시를 했다고 주장하는 처녀가 4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인도자는 다른 여자랑 결혼했어요

그러니까 그럼 그 네 여자가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다는 건 어떻게 된 겁니까?

 

미리 감정이 있는 중에 기도를 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이미 감정이 있는 중에 기도를 하니까 모든 게 그렇게 보이는 거에요

그러니까 제대로 된 예언을 한다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고

 

그리고 신약의 예언과 구약의 예언의 차이점 중 하나는

구약 선지자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만약에 그 사람의 예언이 틀리면

그 사람은 거짓예언자이기 때문에 돌로 쳐 죽여야 돼요

 

그러나 신약의 예언은 믿음으로 분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정확하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예언이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은 믿음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신약의 예언은 자기의 믿음의 분량대로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은 사도와 비슷한 그런 권위를 갖고 있었지만

신약성경은 선지자가 쓴 게 아니고 사도들이 쓴 거죠

 

그러니까 예언과 선지자가 갖는 비중과 그 중요성이 차이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살전5:20

 

그러나 선을 취하고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예언은 분별을 해야 됩니다 분별!

영분별 이라는 것은 영적인 것을 분별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평양 또는 대구)이 장차

아시아에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라는 예언!

 

일단 이 예언을 우리가 멸시 하면 안 됩니다

이런 예언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음 세대에 약속(예언)을 전해 주었던 것처럼

우리도 과거에 성령께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서

이런 약속을 하셨다 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아마 어떤 분은 그게 진짜 예언이라면

우리가 믿든 안 믿든 우리가 뭐 애를 쓰든 안쓰든 이루어질 것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언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예언에는, 예언하는 사람이 뭐 어떻게 하든 그대로 이루어지는 예언이 있고

 

둘째 부류의 예언은

사람이 자기 몫을 해야 됩니다!

자기가 그 예언을 믿어야 됩니다

믿음을 지켜야 됩니다

순종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루어지는 예언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봐야 되는데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런 약속을 받았죠

 

121절에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놀라운 약속을 하셨어요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그냥 가만히 있어도 이루어 질 것이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무산될 수 있는 위험,

위협이 여러 번 있었어요

 

그 때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건져 주셨으니 망정이지

만일 아브라함이 거기에 함몰되었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무산 됐을 것입니다

 

그 몇 가지 예를 보면 12:12절에 이제 애굽에 갔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말하기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전 하겠노라

 

사라를 자기 누이로 속였어요 그래서 바로가 사라를 데려갔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느냐 17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이 재앙을 경험한 후에 바로가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원망했어요 왜 당신이 사라를 누이라고 해서 내가 이런 재앙을 당하게 했느냐

 

그러니까 만약에 아브라함이 그 순간에 아내 사라를 잃어버렸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물 건너 가버리는 거지요

너로 인하여 큰 족속을 이루리라 라고 약속을 하셨는데

사라를 잃어버리면 아브라함은 이제 큰 족속을 이룰 수가 없게 됩니다

그 약속이 물 건너 갈 뻔한 위기,

 

이 위기를 당했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건져 주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보존한 것입니다

 

근데 이런 사건이 한 번만 있었던 게 아니에요 또 있었어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갔을 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어요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의 누이라고 속여서 그때도 사라를 뺏길 뻔 했는데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그 여자는 아브라함의 아내이니 네가 손을 대면.. 하나님이 위협을 했습니다

아비멜렉이 혼비백산하고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 주었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저질렀어요 그게 끝이 아니에요

이제 아브라함이 점점 나이를 먹어가서 자식이 생길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이제 사라가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붙여줍니다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낳아라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어요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게 누굽니까

이스마엘이죠

 

만일 그 실수가 그대로 정착이 됐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또 물 건너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내보내라고 하시고

그리고 결국 사라의 몸을 통해 이삭을 낳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인데 그 약속이 무산될 뻔 한 위기가 여러번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에는 이런 성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약속(예언)을 믿어야 되고 믿음을 지켜야 되고 순종을 해야 약속하신 것이라도 이루어지죠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근데 만일 우리가 제대로 순종을 하지 못하면

(약속이) 100% 무산될 수도 있고

절반만 성취 될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만 성취 될 수도 있어요

 

아마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의도(약속)하신 모든 것을

100% 얻으면서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건 하나님이 인색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원래는 이만큼을 계획 하셨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그만한 믿음을 가져야 되는데 살다 보니까

타협하고 저희도 타협하고 이런 시험이 들고 저런 시험에 들고 그 믿음을 갖지 못해서요..

 

하나님은 이 만한 것을 예비하셨는데 사람은 그 절반, 그 일부,

그 정도만 겨우 맛을 보고 다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어느 정도는 그것은 눈치챌 것입니다

과연 내가 젊었을 때 젊었을 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 젊었을 때

주님이 내게 주신 약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분명히 내가 젊었을 때 주님이 주신 말씀은

 

이게 (지금 현실이) 전부가 아니었는데 어찌하여

나는 그대로 다 얻지 못했을까 그래서 오늘 본문 창세기 15장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15:2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렵니까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게 왜 중요합니까? 여러분은 요즘 이런 질문을 하십니까?

 

사람이 아브라함처럼 나이가 들었을 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염려가 많아지고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하는 마음은 점점 줄어들고

기대 하더라도 자손을 위해서 구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자녀에게 뭐 주실 거예요?'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할지언정

'내게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

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일단 기대를 접습니다

 

이 나이에 뭐 이 나이에 내가 무엇을 얻은들

이제 와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별로 이제 기대를 할 필요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직접 여쭈었어죠 뭐 복잡한 질문한 게 아니에요

'이 시대 이민족에게 어떤 일을 하시려나이까?' 뭐 이런 질문 한 게 아닙니다

'주여 내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그리고 한 말이 '나는 무자하오니 내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 입니다'

'나는 무자하다' 이 말은 (신약적으로) '나는 영적인 열매가 없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이제껏 믿는다고 살아 왔는데 지금 내 삶을 살펴보면

나는 이렇다 할 내놓을만한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무엇을 내게 주시려고 하시나이까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인생에 재고 정리를 해야됩니다 우

리 인생의 재고 정리를 해야 됩니다 과연 내가 그동안 몇 십년 동안

예수님을 믿고 몇 십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내게 열매가 얼마만큼 있을까 근데 아브라함은 아주 솔직하게 말했어요 '나는 무자하오니'

 

자식이 없다는 말이지요

열매가 없다는 말입니다

열매가 없음을 하나님께 아뢴 것입니다

내 상속자는 다메섹 엘리에셀 이니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때 당신의 계획을

 

더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성경 구절이 창15:4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품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아브라함이,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

내 후사 입니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상속자)이다

 

이것은 이제 어떤 무슨 교회를 물려 준다든가 그런 의미는 아니지요

여러분이라면 누구를 더 의지 하겠습니까 다메섹 엘리에셀을 더 의지하시겠습니까

자기 몸에서 날 자를 더 의지하시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이 어떤 방법으로 당신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시는 지를

아브라함에게 분명하게 말씀을 하시고

그리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스페인의 유명한 삽화가가 리더스 다이제스트 출판사를 통해서 출판한

어린이 성경책이 있습니다 저희 사무실에 오시면 그 컷(삽화)을 보실 수 있는데

성경의 삽화 중에 이 사람의 삽화처럼 뛰어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커버에 어떤 그림을 그렸냐면 아브라함이 밤 하늘을 쳐다 보는 장면을 그렸어요

그런데 예술가답게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아브라함 혼자 밤하늘을 쳐다보는 게 아니고

사라와 같이 쳐다보는 장면을 그렸어요 그게 정확하지요

왜냐하면 사라 없이는 사라 없이는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전을 갖는다면 아브라함 혼자 가져서 되는 게 아니고 부부가 같이 하늘을 쳐다 봐야 돼요

그래서 성경에는 두 사람을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삽화가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함께

밤 하늘 쳐다보는 장면을 그렸어요

 

여러분도 오늘 집에 가셔서

TV 를 켜시기 전에

배우자와 같이 여보 산책이나 합시다 그리고 밤 하늘을 좀 쳐다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그 동안에 직장도 다니고

돈도 벌고 집도 사고 뭐 애도 낳고 뭐 많이 했지요

남들이 하는 거 다 했어요 안 믿는 사람들도 다 하는 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직장 다니고

애 낳고 뭐 결혼하고 다해요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의 열매를 말한다면 적어도

남들이 하는 대로 사는 것 중에 내 믿음의 열매를 찾으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게 있어야 됩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것,

그러나 믿음으로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내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라는)

 

아브라함의 질문은 *15:2

우리 모두의 질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질문을 할 용기가 있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할 용기가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제 와서 내가 무엇을 믿고 이제 와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확신이 없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보여 주셨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다)'

여기서 '이를'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의로 여겨졌다고 하지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