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을 넣을 땐 허락을 기다리지 말라 행8:4~7 출처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할 때
누구의 사전 허락을 받고 내려간 것이 아니고
누구와 의논을 하고 내려간 것이 아니고
누가 보내서 내려간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이끌려 단독으로 내려가서
단독으로 사마리아를 복음화 했습니다
스스로 내려가고 스스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어떤 조직의 결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빌립처럼 성령의 인도에 충성할 때 부흥했고
반대로 교회가 조직화되어서 어떤 단독적인 일을 윤허하지 않고
교회가 조직이 되어서 늘 회의와 권위와 위계질서를 따질 때
그때부터 교회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빌립이 사도가 아니고 집사입니다
그가 사도들의 허락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허락을 해서 내려간 것이 아닙니다
누가 그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빌립이 스스로 내려가서 거기에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는 것을 보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대로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렇게 그 말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마 빌립 자신도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였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더라면
빌립 외에도 가려고 했던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빌립이 왜 사람들의 허락을 구하고 가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나라의 일은 비전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비전을 남이 공유하리라는 보장이 없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 그 믿음을 남에게 설득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이 있는 사람이
그 일을 해야 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 그 일을 해야지,
그렇지 않고 자기의 비전을 남들도 똑같이 공유하리라고 기대하고
기다리다가는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비전을
남들이 그대로 공유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설득도 하고 설명도 하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애초에 그 사람에게 비전을 주신 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고
그 사람에게 주시는 사명을 있기 때문이지
그게 아니고 그 비전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기를 원하셨다면
그들에게 동일한 비전을 주시거나
함께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5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이 그 5명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다 같이 듣고 같이 믿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닐 때는
주님이 내게 주신 비전에 대해서
내가 그것을 남들에게 말한다고
남들이 그것을 동일하게 공유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면 좋지요
주님이 내게 어떤 믿음을 주셨을 때
그 믿음을 남들이 공유하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은 누구의 윤허를 받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의견을 묻지 않았습니다
만일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기 전에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의견을 구했다면
그래서 ‘사도들이여 내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해도 되겠습니까?’ 물어봤다면
그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라’고 선뜻 대답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다른 이유를 댔을 것입니다
왜요? 성령이 빌립에게 주신 비전을
다른 사람이 공유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이 ‘내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해도 될까요?’
라고 물어봤다면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말을 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그럴 자격이 없다느니
사마리아는 이방인들이라느니, 죄인들이라느니
그 외에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려가려고 하느냐,
당신보다 더 준비된 다른 사람이 있다’느니
여러 가지 의견을 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빌립에게 그 비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그 비전을 동일하게 공유하리라는 보장이 없고
만일 빌립이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면
허락이 떨어질 때 허락이 떨어진다는 보장도 없고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김이 샜을 것입니다
열심히 이미 식었을 것입니다
‘쇠는 뜨거울 때 두드리라’고 했는데
성령이 막 비전을 주시고, 그런 소원을 주실 때
그때 만일 이 조직에게 결정을 부탁했다면
그들은 세월아 네월아 이러면서
정작 그 비전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준비가 되어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이런 회의를 하고, 저런 말을 하다가 기회를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은 여러 가지 상황이
예루살렘의 교회가 흩어짐으로 이렇게 된 게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빌립이 혼자 갔습니다
혼자 갔더니 추수할 곡식이 많았습니다
‘추수할 곡식이 많으나 일꾼이 적다’ 라는 예수님 말씀이 맞아요
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 문제가 된 게 아닙니다
그 일을 하려는 사람이 적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빌립이 단독으로 한 일에 대해서
아마 사람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도인줄 알았는데
당연히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줄로 기대했는데
빌립은 집사에 불과한데
어떻게 빌립이 우리도 하지 못하는 일을 했을까?
얼마나 사도들이 놀랐으면,
베드로와 요한을 내려보냈겠습니까
‘과연 진짜인가, 제대로 복음화가 되었는가?
이들이 진짜 예수님을 믿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친히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놀랐을 것입니다
‘빌립이 혼자 이 일을 했다는 말이냐, 대단하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만 역사하실줄 알았는데
성령은 마치 럭비공과 같이
성령이 언제 누구에게 역사하실지 알 수 없구나’ 하며
놀랐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만 할 수 있는 일을 예비하셨죠
그래서 그들이 안수하매, 저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만이 갖고 있는 권한이 있어요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쓰시고자 하실 때에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남의 사전 허락을 구할 필요 없어요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요
왜냐면 똑같은 (성령의) 지시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비전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기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안 갖고 있는 사람에게
자기의 믿음에 대해서 말하면
사람들은 싱겁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싱겁게 대답합니다!
그건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유하는 같은 은혜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나는 신이 나고 나는 흥분을 했는데
똑같은 은혜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그게 얼마나 귀중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내가 기대하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에게 무엇을 받은 사람이
자신감이 부족해서, 내가 이것을 누구에게 말하면
‘그 사람이 나를 북돋아 주겠지’
‘그 사람이 나를 동의해 주겠지’를 기대하고 말을 했다가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응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게 말씀하셨는데
내가 그것을 충분히 믿지 못해서
남들에게 물어봐서, 그 사람이 내 믿음을 도와주기를 기대했다가는
실망할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거의 유일하게 누구의 비전을 말했을 때
믿음을 말했을 때,
그것을 공유하고 같이 기뻐해 준 사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 그 정도입니다
바울이 주님께 받은 사명에 대해서
베드로도 공감하지 못했고
야고보도 공감하지 않았고
오직 바나바만 이해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이해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믿어주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도와주었지요
그 이외의 사람들은 나중에 바울이
‘그들은 내게 더해 준 것이 없다’ 그 말은
상당한 섭섭함이 담겨져 있는 말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나 야고보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는데
‘그들이 내게 더해 준 것이 없고’ 갈2:6
그건 결국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을 내가 믿어야 하고
누가 같이 믿어주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이것이 서로 통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말을 하기 전에,
마리아가 뭐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말하기 전에
마리아의 안부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엘리사벳의 태에 있던 아기가 기뻐 뛰놀았다..
성령이 그것을 증거하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에게 일어나는 일을
엘리사벳이 알고 같이 기뻐했지요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이게 정말 성령안에서의 교제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교제!
우리는 이런 교제를 꿈꿔야 됩니다
이런 교제를 꿈꿔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늘 하는 식으로 모여서 무슨 정치가 어떻다느니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느냐느니
이런 것은 성도의 교제가 아니에요
그건 성도가 아니고 뭐 이발소에 가도 똑같은 대화하고요
택시 기사하고도 똑같은 대화를 합니다
성도가 모였을 때는
안 믿는 사람도 할 수 있는 말은
거기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걸 하기 위해 교회가 모이는 게 아니에요
다만 우리는 성령으로, 성령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눠본 적이 많이 않다보니까
어떻게하는지 잘 모릅니다
어떻게하는지 잘 몰라요
성도의 교제는 말이 많아야 되는게 아니고
성령이 그 가운데 함께 역사하실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두 세 사람의 마음을 하나되게 하실 때
그 일치감과 동료의식과 그 기쁨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그 모든 사람들이
성령안에서 순종하고 열려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하냐면
사도신경에도 그것을 포함시켰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교제)하는 것과’
그게 바로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거기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정도로
성도의 교제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만큼
우리가 성도의 교제를 경험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코이노니아 라는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태반입니다
그 이유는, 어떻게 하는지 잘 몰라요
어떻게 하는지 잘 본 적도 없어요
그러다보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슨 성경교재 위주로 모인다든가
봉사 위주로 모인다든가
뭔가 하나가 되어야 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사람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에요
▶그러나 모두가 성령에게 열려 있고
깨어진 그릇, 질그릇처럼 서로가 깨어진 부분을 인정하면
다시 말하면, 나는 깨진 것이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감추고 완벽한 것처럼, 모범생인 것처럼
의로운 것처럼 이렇게 하게 되면
성도의 교제가 불가능해 집니다 서로 뻔한 말만 합니다
언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느냐,
나도 깨어진 질그릇이고,
저쪽도 깨어진 질그릇이고,
그 사실을 서로 인정하고
그리고 깨어진 질그릇안에
보배를 담는 주님의 은혜를 인정하게 될 때
그때 이제는 서로 감추는 것이 아니고
있는 모습 그대로 교제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더 이상 어떤 척 하는 게 아니고
뭐 의로운 척 할 필요가 없고
내가 믿음이 좋은 척 할 필요가 없고
그러나 성령이 그 사람을 통해서
서로 돕고,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하는
이것은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반드시 배워야 되는 부분이고
그리고 배우기가 어려운 부분 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정말 어려워요
아마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도 그런 성도의 교제를
목말라 하지만 경험하지 못하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건 비극적인 것이고, 그것은 아쉬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 있었는데
성도의 교제가 더 순수할 수 있었는데
더 흡족할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
그건 사람이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한다든가
자기 있는 모습 그 이상을 보이려고 한 것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참 모습보다 더 의로울 수 없습니다
자기의 참 모습보다 더 착할 수 없고
자기의 진짜 모습보다 더 거룩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깨어진 부분, 우리 모두가 질그릇입니다 질그릇!
흙으로 빚은 질그릇이기 때문에 금이가고 깨집니다
우리나라는 그릇이 금이 금이 가거나 깨지면
결코 그것을 내놓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깨진 그릇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던데
인간은 다 깨졌어요 여러분도 깨진 부분이 있고
저도 깨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걸 뭐 시멘트로 덮을 수가 없습니다
덮으려고 하면 그게 회칠한 무덤이 됩니다
사람이 깨진 부분을 무슨 본드로 커버할 수 없어요
깨진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질그릇이기 때문에요
그럼에도 성경말씀에 ‘질그릇에 하나님이
보배를 담으셨다’ 라고 했어요
질그릇에 보배를 담으셨어요
깨어진 사람을 주님이 쓰십니다
그게 위대한 것입니다
깨진 사람을 쓰십니다!
어떤 면으로 깨졌다는 말입니까!
이혼한 사람, 과거에 뭐 교도소에 다녀왔다든가,
아니면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고생고생을 한 적이 있다던가,
아니면 자녀가 부모를 괴롭게 해서 그것 때문에
오래 동안 아파하면서 인내했다던가
아니면 무슨 이런 저런 별의별...
그래서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제 더 이상 자기가 젊었을 때 소망했던 것처럼
‘나는 사람들앞에 반듯한 인간이 되고
모든 면으로 모범적이고, 모든 면으로 부러워할만 하고
전혀 부족한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꿈을
버린지 옛날이에요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주님은, 내가 나를 더 이상 자랑하지 않고
나를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네 그런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말할 때
그것이 사람에게 와 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하면 내가 잘 믿는 것을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
역설적인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하셨어요’ 라든가
‘주님이 하셨습니다’.. 하는 간증들
여러분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은
마치 다른 사람들은 주님이 안 하셨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 내가 이런 일을 했고, 자녀를 어디 학교를 보내고
뭐 어떻게 했고.. 주님이 하셨어요, 주님이 하셨어요!’
그 말을 남이 들었을 때는
‘그럼 나한테는 주님이 안 하셨구나!’
이렇게 들립니다
‘주님이 하셨어요’라고 말을 했지만
사실은 ‘내가 했어요, 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어요!’
라고 들릴 수도 있습니다
‘나같은 믿음이기 때문에 되었어요!’ 로 들립니다
‘주님이 하셨어요’ 라고 말하지만
‘나였기 때문에 주님이 하신 것이에요’로 들립니다
그러니까 그게 주님을 높이는 것 같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 거죠
‘아 내가 40일 기도를 해서 되었어요!’
이렇게 말을 하면
‘나는 40일 기도를 안 해서 그런 것을 경험하지 못하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시나?
하나님이 누구를 더 사랑하시나?
내가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그러니까 여러분, 사람이 주님을 높이는 것처럼 말하는데
실제로는 주님을 높이는 게 아니고 자기를 높이는 식으로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듣는 사람이 그게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낙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 나는 멀었구나, 나는 안 되는구나!
저 사람은 어떻게 그게 되었을까?
저 사람에게는 어떻게 주님이 그렇게 하셨을까?
왜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그것보다는,
때로는 ‘내가 믿지만
내 삶에 아직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 제일 정직하고
그것이 듣는 사람에게
‘아 저 분도 나처럼 고난받는 부분이 있구나
저 분도 완벽하지 않구나’
‘하나님이 누구를 편애하는 것이 아니구나
세상에 있는 모든 형제들이 동일한 시험을 당한다고 했는데 *벧전5:9
그게 맞구나!’
그러면서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을 불신하게 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그럼에도 하나님께 충실하고
그리고 믿음의 도리를 다 하고,
기뻐하려고 애쓰고,
섬기고 사랑하는,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건 그렇다고
‘뭐 나는 이런 문제가 많고, 저런 문제가 많고
나는 문제투성이요’ 그것도 문제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백화점처럼 어떻게 문제가 사방에 있고
그럼 믿으나 안 믿으나 마찬가지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당연히 있어야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문제가 없고 모든 것이 완벽해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라 함은, 깨어진 그릇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서
깨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경험할 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치유가 되고
거기에서 위로가 있고
성경말씀을 찾아봐야 됩니다
............... 아래는 Audio only 부분 ..................
고린도후서로 가서 보시면
고린도후서 1장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이예요,
고린도후서 1:4-5
우리의 모든 환란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난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듣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사도 바울이 한 말이예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한 말이
이 환란중에 하나님께 받는 말이 위로로서
모든 환란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도다.
그러니까 나는 위로가 필요없는데
당신을 보니까 위로가 필요해요.
그래서 내가 당신을 위로할 게
그것을 말하는거예요.
' 너를 보니까 위로가 필요해
그래서 내가 너한테 줄게'.
그건 얄미운 거예요,
자기는 위로가 필요없다고 하면서
내가 너를 위로할 게
그건 얄미운 거예요.
그게 아니고 나도 하나님께 위로를 받아야 되는 입장인데
그것이 내게 넘침으로 그 위로로
당신에게 위로한다.
예, 나도 하나님이 필요하고 당신도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가 내게 넘친다,
그것을 당신과 나누겠다.
얼마나 얼마나 인간적으로 정직합니까?
사도 바울이 어떤 일로 위로를 필요로 했는지는
알 필요가 없어.
알아봤자 소용이 없어.
이유가 있겠지.
사도 바울도 인간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위로가 필요한 부분이 있어요.
그 이유를 우리가 알 필요가 없어요,
알아봤자 무슨 도움이 돼요.
사람들마다 바울이 육신의 가시가 무엇이었을까?
그걸 알아내려고 애를 쓰지만 알아서 뭐하게
그게 뭔데 알면 무슨 소용이 있는데
뭐가 있었겠지요,
즉 중요한 것은 바울에게도 육신의 가시가 있고
모든 사람에게 육신의 가시가 있다면,
그게 뭐냐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주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그사실이 중요한 것이지요.
어떤 육신의 가시가 있던지간에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이 쓰시려고할 때
하나님이 소명을 주시면
그것으로 족하지
누구의 윤후를 받는게 아니예요.
우리가 그 사실을 주목해야 해요.
하나님께서 내게 기름부음을 주시고
그리고 소명을 주셨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그것으로 충분한 권한이 되는
누구의 윤후룰 받아야 하는게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빌립은 누구와 의논하지 않고
단독으로 사마리아로 날아갔어요,
단독으로 사마리아를 복음화시켰어요,
이외에 에디오피아 사람을 만났어요.
누구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으며,
에디오피아 사람은 최초의 이방인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예요
그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고넬료가 아니예요,
최초로 이방인으로 사람을 받은 사람은
에디오피아 사람이예요,
빌립이 그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어요.
세례를 주기전에 허락을 구하지 않았어요.
누구에게 허락받고 한것 아니예요,
그 사람이 자기가 세례받은 것이예요,
그래서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 구주"이신것을 믿느냐?
그리고 거기서 세례를 줬다.
그랬어요.
여러분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이러하다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이렇게 따를수 있었을 때
기독교도 부흥했어요.
그러나 제도화됐어요.
이제는 연회가 모이고 교회의 위계질서가 있고
뭐 그것을 의논하고 회의를 하고
뭐 허락을 하고 뭐 이렇게 되면서
뭐이런 능력은 사라지고
"교회의 이 권위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거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제도라든가
위계질서가 필요없다 하는 말을 하는것입니까?
단독 플레이를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축구경기를 해도 단독으로 하는 선수는
사람들이 따르지를 않는데 팀웍으로 해야지
팀플레이를 해야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단독으로 어떻게
단독으로 드리브를 하고 단독으로 슛팅을 하고
팀원이 필요없다는 말입니까?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공이 뉘게 있으면 내가 몰고 가야지,
내가 드리브를 하고 내가 슛팅을 하고
내가 기회가 있을 때 그걸 남에게 넘길 필요 없지요,
그러잖아요,
내가 스윗팅 할 기회가 있으면 스윗팅을 해야지
그때 일부러 아니야
나는 후배야
선배에게 먼저 기회를 드려야 돼
그러다가 슛팅 찬스가 사라져 예
공이 내게 있으면 내가 설사 초보라도
새로운 들어온 팀 멤버라도
나이가 어리더라도 나보다 선배가 많이 있더라도
공이 내게 있을때에는 내가 그공을 책임져야 되요.
만약 내게 슛팅할 기회가 있다면 슛팅을 해야 돼
그때에 가서 나는 뭐 어리다느니
선배에게 양보해야 된다 한다느니
아니면 주장에게 허락을 구한다고 생각하고
주장 이것 써도 돼요,
그럴 때 벌써 슛팅 기회가 사라져요.
성령이 우리에게 사역할 기회를 주신다는 말이예요,
우리에게 슛팅할 기회가 생긴다든가
공이 내 발에 올때
그 때는 내가 그공을 내발로 차야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이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길 원하신다는 뜻인데,
성령이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길 원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왜 그런 시간에 무슨 회의를 하고
뭐 허락을 구하고 뭐...?
만약에 그게 필요했다면
성령이 그런식으로 하시지 않으실거예요.
이 6일 전쟁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시라아
그러니까 1966년, 67년인가
6일 전쟁을 할 때에
이스라엘 공군 파일럿이 에이스
그가 말하기를 미그기와 공중전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파일럿의 관역에
이집트기를 쏠수 있는 기회가 왔어요,
그런데 이 파일럿이 편대장에게 쏠까요,
편대장이 비켜라 그래서 비꼈어요,
그랬더니 편대장이 쏘더라고요
편대장이 격추를 시켜버리더라고요,
그때 이 파일럿이 결심을 했어요.
다시는 다시는 내가 허락을 구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자기가 적기를 격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냥 하면 되는데
편대장에게 물어보고 편대장이 비끼라고 그러고
편대장이 영광을 얻고
하나님의 일에 영광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예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성령이 내게 비젼을 주시고
내게 기회를 주셨을 때
아니 그것을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고
남의 의견을 구하고 윗사람의 윤후를 구하고
그렇게 하면 아마 그들 중에는
사마리아, 사마리아 아직 때가 안됐다
이렇게 말하든가
너는 아직 적임자가 아니야
다른 사람을 내가 보낼 게
내가 가서 할게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령이 너와 함께하니 네가 그 일을 해라"
말할 사람이 몇 명이 될지 알 수 없다.
왜 여러분 사역을 하다가 주의 종들끼리
불화를 빚고 충돌을 빚는지 아세요.
아주 중요합니다.
왜 주의 일을 같이 하려 하지 않는가?
왜 그중에 갈등을 빚는가?
그 이유는 누구에게 리더십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누가 리더쉽을 발휘해야 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불화가 생겨요.
내가 슛팅을 해야할 기회가 있는데
내가 해야 돼 라고 만일 누가 주장하면
당연히 그 2 선수끼리
그러니까 리더십은 누구에게 있느냐?
성령이 쓰시는 사람에게 리더십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순간 순간 리더십이 다를수 있어요. 예
찬양시간에는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을 성령이 쓰신다면
그 사람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거예요.
찬양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자기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되요,
만약에 그때에 다른 사람이 참견을 하면 그건 불화를 일으켜요.
일으키게 되요.
왜냐하면 리더십에 대해서 소재가 불분명해지니까?
그러나 그 순서가 끝나고
이제 성가대가 찬양을 한다
그러며는 성가대 지휘자에게 리더십이 있는 거예요,
성가대 지휘자가 자기의 책임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 성가를 잘 지시할 책임이 있어요.
만약에 지휘자가 그때에 아니야
나는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고
나는 뭐 성도들 앞에서 지휘를 발휘할 자격이 없어라고
최선을 다하지 않게되면 성가는 은혜가 없게 되고
사람들은 은혜를 받지 못하고 후회가 막심하게 되는 거예요,
그럴때에 담대해야 되요,
그 순간이 왔을 때는 이 순간은 내가 주인공이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하하실 것이다.
담대해야 되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최대한 활용을 해야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요,
성령이 역사를 하시고 그런 권한을 위임을 해야되요.
교회 지도자 당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이 은사 주시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하라
위임을 해야되는 거예요,
아니 목사가 그걸 못해서 한순간이라도
그런데 나보다 누가 빛을 못본다.
그래서 뭐 성가대 지휘자가 아주 멋있게 했는데
불러가지고 너 그렇게 하면 안돼
너 교회에 스타가 될려고 그래
이렇게 해봐야요
그렇게 되면 자기를 쓰고자 하시면 주눅이 되어서
눈치를 보고 나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
이렇게 했으면 은혜가 될 텐데.
그러다 그걸 하지 못하고 결국은
성도들이 손해를 보고 교회가서 손해를 보고
하나님이 역사하고자 하는 일을
다 이루지 못하게되요.
제가 말씀드리는 걸 이해하시겠지요.
그러니까 그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이 이미 쓰고자 하시는 사람에게 리더십을
리더십의 권한이 있는 그때에는 믿음으로
최대한 발휘해야 되는거예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내 자신에 대한
내 의무예요,
그때에 눈치보면 안 되어요,
하나님의 역사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예요,
늘 뭐 누구에게 의견을 구하고 뭐
자기에게 믿음대로 뭐 믿음을 사용하지 못하고
뭐 자기 비젼을 공유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과 늘 태격티격하는 그건
여러분은 성령이 역사하실 수가 없어요,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을 통해서
여러분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느낄때가 있을 거예요,
그때 주저하면 안돼요.
그때 사람 눈치보면 안 되요.
그때 주저하면 안돼요
그때 사람 눈치를 보면서 주저앉으면 안 되요.
그 순간은 여러분이 주인공이 돼야되요,
그 순간만큼은 여러분이 주연이예요.
주연 배우예요.
그때에는 하나님이 주신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서 최선의 성과을 거두도록
노력해야 되요.
그럴 자격이 있어요.
빌립 보세요,
얼마나 멋진 사람이요. 빌립이
오죽하면 12 제자중에
베드로, 요한,아고보를 제외한
다른사도들은 뭘 해야 했는지
사도행전에 안 나와요.
그래서 빌립이란 말이
이게 시사하는 바가 커요.
사도란 직분을 받았다고
반드시 사도인게 아니예요,
때로는 직분은 사도가 아니지만
사도도 하지 못하는 일을
집사가 할 수도 있어요.
직분이 그 일을 그사람이 하는 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직분을 만드는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직분이 그사람이 하는 일을 결정하지 않아요.
빌립이 사도가 아니었지만
사도처럼 일을 하니까
사도의 이름 대신에 사도행전에
그이름이 기록된거나 마찬가지 잖아요.
직분이 그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예요,
일을 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직분이 되요,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누가 나에게 직분을 맡기면
맡겨주기를 바라고
직분을 맡았는데도 딱히 하는 일이 없는것보다 나아요.
직분의 상관이 없이 빌립이 자기가 살기위해
일을 한게 아니예요
인정을 받기위해 일을 한게 아니예요,
칭찬받기 위해 일을 한게 아니예요,
빌립은 칭찬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성령이 인도하시는대로 일을 했던 거예요,
사마리아가 오픈 휠드가 됐어요.
오픈휠드가 그를 위해 열려있었어요.
사마리아가 준비가 되어 있어요,
준비된, 준비된 밭이고
사마리아에 들어가서
그 땅을 단독으로 복음화했어요,
베드로와 요한이 그걸 보고 놀랬어요.
야! 그리고 주님은 위대하셔요.
아! 성령은 위대하시다.
성령이 이렇게 역사하시다.
성령의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어요,
성령의 사람
우리는 일평생 신앙을 하면서
"성령의 사람이 되는 훈련을 해야되요."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사람이
성령의 사람
성령이 쓰시는 사람
할렐루야
타자 Y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