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포로 P1, P2 고후2:9~16, 6:1 2019.04.05. 스크랩
김형익 목사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아멘'
어느 시대나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습니다
갑이 있고 을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패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이만큼 이정도 왔으면 나는 평균 이상이다' '승자다!'
아니면 여러분들은 패자 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어떻게 인식하나요?
세상에서 사람들이 우리한테 말하는 거 말고요 세상에서 사람들이
'당신만큼 성공했으면 당신은 승자라고'
전에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뭐 키가 작으면 패자(루저)고 뭐 신랑감을 찾을 때 뭐 이런 식의 이야기들
그렇게 해서 패자와 승자가 그렇게 구별이 되나요?
그런 '세상의 정신'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거는 정말 놀랄 만한 일이죠
세상에서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기준이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서
교회 안에서조차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일들이 적지않게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그러는데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럼 패자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승자들을 더 높은 자리로 올려주고 성공한 사람을 더 큰 성공으로 이끌어 주고
부자에게 더 많은 부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복음이고 예수의 능력이라면
여전히 내가 나를 패자로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고
여전히 나에게는 내가 죽는 날까지는
나에게는 이런 고난의 터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게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복음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할렐루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대부분의 간증이라면
그 간증의 진정성 간증 하는 분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 밖에 없다면 과연 패자들은 언제 간증할 수 있나요?
패자(루저)들이 누리는 복음은 어디 있나요?
패자들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때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잡수셨고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에게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대부분 사람들, 자신들의 상식과 기준으로는
승자라고 여기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은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뭔가요?
오늘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고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요?
세상의 모든 원리는 승자독식입니다
교회도 그런가요?
세상에서 어느정도 승자가 되어야 교회에서도 승자가 될 수 있나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에서
나 스스로가 패자라고 느끼고
사람들이 나를 패자라고 봐주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무엇입니까?
물론 여기서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는,
또 제가 말씀을 '패자를 위한 복음'이라고 얘기를 했을 때
여기서 '패자'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에서 얘기하는 패자,
칼 막스가 얘기하는 프롤레타리아 계층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패자라고 하는 개념은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이런 겁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말씀하실 때 팔복을 말씀하실 때 그러셨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이 사람이 패자입니다
하나님 없이 나는 실패한 인생 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이 패자입니다
복음은 그런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는
이미 배부른 사람들에게 복음이 더 큰 배부름을 안겨주는
그런 정도의 기능 이상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복음을 축소시켜 버리는 느낌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야기하고 있는 복음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를 멍들게 하고 한국교회에서 복음을 부정하게 만드는 가장 큰,
한국교회에 들어와 있는 이 세상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승리주의" 라는 정신입니다 승리주의!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서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못 읽으면 *고후2:14
승리주의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오늘 이 말씀입니다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이 말씀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말씀아닙니까?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2:14
나 때문에 내가 가는 곳마다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신 하나님께..
그럼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요? 우리를 항상 이기게 하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나타나요
그러면 우리의
내가 가지고 있는 성공,
내가 가지고 있는 성취
내가 가지고 있는 직업
내가 가지고 있는 전문성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이 세상에서
나를 돋보이게 만드는,
나를 승자답게 만드는
어떤 그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우리는 결부시킨다 말이죠
근데 성경이, 이 본문이 그 말씀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완전히 정반대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승리주의의 망령이 교회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교회 안에,
이 교계에서 팔리는 신앙 서적들이
어떤 책들이 많이 팔리는가 하는 것을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부자가 되게 하는 것 깨끗한 부자가 되게 하는 것
성부론(거룩한 부자) 청부론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또 이런 주제를 다루는 책들이
얼마나 많이 팔리는지 알수없습니다
고지(점령)론도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 코스타(한인유학생수련회)에서
한 강사에 의해서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대학원을 마치고
이제 학위를 받고 돌아오게 되는 청년들에게
'너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사회의 고지를 점령해라!'
고지를 점령한다는게 나쁘기야 하겠습니까
깨끗한 부자가 된다는 게 뭐 나쁘기야 하겠습니까 거룩한 부자가 되는 거 필요하죠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 속에는 이 세상의 승리주의 바이러스가
하나님의 순전한 복음가운데 교회 가운데 얼마나 놀랍게 들어와서
우리들의 신앙을 왜곡되게 만들고
마치 뱀이 여자에게 말한 그 말 한마디로
여자의 신앙을 흔들어 놓았고 무너뜨렸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십자가의 복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해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오해 하게 되면
결국 복음을 오해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두 가지 기둥이 잘 세워져야 되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 입니다
1)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가 알고 싶은 대로 투사해서
그 하나님을 규정하고
그 하나님을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설명한 대로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2) 그리고 또 하나는 복음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같이 갑니다 이 두 가지에서 우리가 어긋나게 되면
우리는 율법폐기주의로 가든지 율법주의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어그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망가집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복음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이번에 나누려고 생각을 하는데
특별히 고린도후서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그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복음에 대한 오해는
근본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게 되는 복'
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자가 되는 얘기가 아니라 성공 하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정말 예수를 정말 잘 믿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 되고 싶다 전도를 기가막히게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것들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만약 이것이 그리스도와 분리가 되면
그것은 우리를 망가뜨립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끌고가지 않으면
우리는 기독교의 어떤 덕목에서
탁월함을 지니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그렇게 해서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런 승리주의가 가져오는 문제는 복음을 오해하게 하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은혜와 복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하나 이 승리주의 해악은 어떤 것인가 하면 고난의 문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욥의 세 친구가 고난에 대해 접근했던 방식
이상으로 갈 수 없습니다
결국은 '네가 잘못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그 이상으로 절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이런 말 많이 들어보셨죠? '빚갚은 다음에 전도하겠다' 안 들어 보셨어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복음을 오해하는 것을 기가 막히게 표현하는 말이라고 생각을 해요
내가 빚 다 갚고 좀 뭔가 반듯해진 다음에
내가 사람들 앞에서 내가 뭔가 좀 걸리는 게 없어지면 내가 그때 복음을 전하겠다고...
복음전하는 거하고 빚갚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우리는 세상에서 1등 해야 복음 전할 수 있나요?
1등해서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나요?
1등 하는 것과 꼴등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하고
무슨 상관 있어요? 아무 상관 없어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
것을 증명하는 것은 성공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 길을 걸어감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구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승리(성공)주의라고 하는 이런 천박한 세상의 정신은 이겨야 된다는 거죠
승리 해야 된다는 거죠 올라가야 된다는 거죠
이런 것들은 복음 안에서 설 자리가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래서 (오늘날에) 복음의 풍성함은
세상에서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지 못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위로 대신에 희망고문을 하는 것이죠
당신도 기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면 이 고난의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더 많이 현금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열 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런 식의 희망고문이 복음으로 왜곡되고
복음이 축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투영하게 되면
그 하나님은 결코 즐거워 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대상이 됩니다
그 하나님 하고는 딜을 해야 되는 거죠 적절하게..
▲고린도후서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승리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승리주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었던
1세기의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바울사도가 복음을 다시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1세기의 고린도교회 와
21세기의 한국 교회가 어찌나
닮은 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1세기의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18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였는데
바울이 떠난 다음에 거짓 교사들의 들어와서 거짓 복음을 들여놓았고
그 거짓 복음의 핵심은 승리주의 라고 하는
이 세상의 기준이
그 교회 들어와서 이 세상의 승리주의 라고 하는
렌즈를 가지고 복음을 보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은 바울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를 쓸 때만 해도 나이가 50대 중반의 넘겼을 나이인데
50대 중반, 지금의 50대 중반 하고 그때 50대 중반은 다르지요 (
바울은) 인정을 하나도 못 받고 있었다 말이에요
여전히 바울은 자기 앞가림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고요 돌아다니면서 맞고, 핍박을 당하고,
오갈데 없이, 잠잘 곳 없이 그 고생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고요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고생을 합니까?'
여러분 많이 들어본 얘기 아닙니까?
어떤 분이 신실하게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근데 세상적으로 보면, 너무나 성공하지 못하고
세상적으로 보면 너무나 돈이 그 분에게 주어지지 않고 여전히 힘겹게 힘겹게 살아간다고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앞에서 말은 안할지라도
'아니 저 분은 하나님 앞에 뭘 그렇게 잘못해서 가지고
저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하시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냐고요
무서울 정도로 우리는 이런 반 복음적인
거의 뱀의 혀에서 나올 만한 그런 생각들이 우리의 생각 속에 너무나 많다고요
복음을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비틀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를 쓰면서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너희가 은혜 받은 거 진짜 맞냐?
은혜를 진짜 받았다면 여전히 너희들이 그런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의 기준과 방식대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냐?'는 거죠
은혜를 헛되게 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뭘까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의 30년 50년 60년 해 오셨을 수 있습니다
그럼 은혜를 여러분들이 받았다고 말씀 할 때 그 은혜를 받은 것은 어떻게 증명이 되는 겁니까?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데
그 은혜를 헛되게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됩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은혜를 제대로 받았구나'
이것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고린도후서 6장 1절에서
바울사도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받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받지 말라!
바울사도가 봤을 때 이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다고요 진짜 근데 지금 하고 있는
지금드러내고 있는 그들의 생각, 말, 태도, 행동
들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었어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이런 것들은 단순히
교회에서 싸움이 일어나거나 분쟁이 일어나거나
그럴 때만 '이 사람들이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이 맞나?' 그것만이 아니라고요
정말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다는 걸 지금 전제하는 거예요
은혜를 받았어요 근데 헛되게 받았다고요
은혜를 받으면 은혜가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중요한 수단이에요
은혜 밖에 없어요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근데 은혜를 받았는데
이상하게 은혜를 받은 결과가 안 나와요
내 삶에서!
그럼 은혜를 헛되어 받았다는 거죠
바울사도는 그것은 뭐를 지적하고 있냐 하면
고린도후서 전체를 통해서 하고 있는 얘기는
너희가 은혜를 제대로 받았다면 너희들이 그 전에, 예수 믿기 전에
예수를 만나기 전에
너희가 가지고 있었던 세상적인 판단 기준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바뀌어야 되는데
너희들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지고 들어온 그 생각,
그게 뭐냐면 승리(성공)주의에요!
그게 승리주의에요
그 생각가지고 여전히 오늘도
너희들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영적인 분별력이 완전히 흐릿해져서
그들은 가짜 목사를 진짜 목사라고 떠받들게 되고 진짜 사도바울을 가짜라고 판단하게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여전히..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시죠
오늘날 한국교회에 번영신학 이라고 하는 것,
소위 기복신앙이라고 하는 게 참 널리 (퍼져있어요) 옛날에는..
교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기복신앙이다
그래서 비판을 많이 했어요(받았어요) 근데 지금은 한국교회 거의 대부분의 강단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죠
번영신학이 기복신앙이
이 뿌리가 승리주의라고요
그건 '기독교 새마을운동'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복음이 새마을운동을 하는 도구가 되는 거라고요 '잘 살아보세' 아시죠?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복음의 힘으로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이게 어떻게 복음이에요?
이게 어떻게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이 세상이 전부인 걸로 생각하던 우리의 안목이
영원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우리 눈을 열어서
영원을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뭘로 행해요? 믿음으로 행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환란의 가벼움,
그게 가벼워서 받았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죠 영원의 시야가 열리니까
영원한 영광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영접하시고
하나님이 내게 주실 영원한 기업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기업의 영광과 비교하면
'이거 (환란) 이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럴 수 있는, 영원을 보는 관점이 생기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가난해지는 것
이런 게 별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하고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이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거죠
이게 제가 얘기하는 '패자 (루저)'의 개념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밑바닥 인생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주눅 들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영광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알고
그 누구도 거기서 '자족'이라는 말을 꺼낼수조차
없는 인생의 조건 가운데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이까짓 거! (하고 무시함)
이게 복음이 유효하게
작동되는 '패자'라고요
세상에서 단순히 패자라고 그래서
패자가 아니죠
나도 한번 이를 악물고 한번 살아보겠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도움을 빌건 복음의 능력을 빌건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다시 한번 일어나 보겠다.. 그들은 복음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패자'이고 *자아가 죽은 자
복음은 그들에게만 유효 합니다 그들에게만 유효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고후2:14
아니 여러분 이렇게 명확한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달리 읽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분명한 말씀 아닙니까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이 말을 어떻게 우리가 이해를..
바울 사도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 말씀을
어떤 의도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이 말씀을 쓴 것입니까?
도대체 설교자인 제가
이 말씀은 의미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여러분은 추측이 되십니까 (언뜻 보면) 예수 믿으면 잘 된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 믿으면 하루종일 우리가 대인관계에서도 승리하고
우리가 취업전선에서도 승리하고 우리의 과중한
우리가 감당해야할 업무로부터도 승리하고
우리의 삶에서 뭔가 승승장구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라고 묻고 싶죠 그
러나 그런 의미로 쓴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을,
딱 이 문구를 읽을 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이 말씀이 의도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 정확한 의미를 전달해 주는 것은
오히려 공동번역인데 이렇게 번역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말이 전혀 없죠
'개선행진'이 어디서 나온 걸까요?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바울사도가 썼을때
고린도 사람들은 그 당시의 문화와 그 당시의 정황속에서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렇게 제대로 알아 들은 겁니다
말하자면 이 말씀은 로마에서
굉장히 큰 도시였던 고린도에서는
이런.. 우리가 영화에서나 보는
벤허 같은 영화에 보면
개선 행진을 하지 않습니까
이제 로마군이 멀리 가서 원정을 나갔다가
이제 적군들을 다 이기고
포로로 잡아서 점령하고 그 포로들을 데리고 이제 귀국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개선문을 지나서 이제 개선 행진을 들어오게 되는데
그게 개선행진의 끝에는
원형경기장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원형경기장으로 들어가는 이 개선행진이 굉장히 긴데
그 맨 앞에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이제 그 총사령관이 장군이 타고 들어갑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게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끼워 주신다' 그랬죠
하나님이 이 개선행진에 장군이 총사령관이 맨 앞에 있어요
그 다음에는 부사령관이나 큰 전공을 세운 사람들이 있어요
그 다음에는 뭐가 들어오나 하면 그 노획물들 전리품들이
그리고는 그 뒤에 끝에는 누가 따라 들어오나 하면 적장들이 따라 들어옵니다 적장들,
적의 우두머리 에요
그러면 여러분 여기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끼워주신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총사령관이죠 맞아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끼워들어가는 걸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예수님 바로 뒤의 전차!
그렇게 생각이 되지요? No!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말하는 것은 우리를 포로로 끌고 가신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포로라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들이 지금 끼어 들어왔어요
은혜로 끼워 들어왔어요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는 앞에 있는 주님과 함께
전쟁을 해서 이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 말씀을 읽으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그랬으니까
'아 이거구나'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개선행진 까지 우리가 이해한다 해도
우리는 앞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는 (개선행진 끝의) 포로라고요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포로라는 얘기를
바울사도는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14절 하반절에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낸다" 고후2:14b
여러분 이제 개선행진이 있게 되면
로마 시민들은 다 나와서 즐거워합니다
로마의 시민들은 다 나와서 즐거워하면서 환호를 하는데 그들에게 바구니에 꽃잎을 담아서
요즘 같으면 왜 벚꽃 떨어지잖아요
그러면 꽃잎을 다 가지고 나와서
꽃잎을 막 뿌리는 거예요
향기가 진동할 것 아니예요
개선행진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향기가 진동한다고요
그러면 아 개선행진이 있구나
시내가 꽃향기로 진동하는구나
그걸 알 수 있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사람들이 거리에서 개선하는
장군들, 개선하는 군인들을 위해서
꽃을 막 꽃잎을 뿌리면서 환호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고후2:14b 개선행진을 비유로 지금 틀고 있는 거예요 그
리스도께서는 전쟁에서 이기셨어요
그리고 바울사도는 적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적의 장수죠 이 사람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두기 위해서 이 사람처럼 특심한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람의 지도자가 누구였습니까 이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적장을 그리스도께서 포로로 붙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개선행진 행렬의 맨 뒤에 데리고 들어가십니다
어디로 들어가나요? 원형경기장으로 들어가죠
그리고 그들은 사자와 싸우는 사자의 밥이 되든가 어떤 검투사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든가
그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이 말씀을 고린도전서 4장 9절에서 바울사도는 똑같이 하고 있는데 훨씬 더 실감나게 쓰고 있죠
4장 9절에서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지금 이게 그 얘기예요 '죽이기로 작정된 자'는 포로, 적장이에요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개선행진의 끄트머리에 지금 끌고 들어 오신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얘기는 우리가 극장으로 끌려들어가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정확하게 지금 같은 이야기를
고린도전서 4장 9절에서 한 것을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 지금 바울사도는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만 우리가 제대로 이해 한다고 해도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함께 우리는 승전의 기쁨을 나누며
단순히 그런 차원의 애기가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 포로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고 좇아가는 사람이라는 거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굉장히 다른 거죠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옆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싸워서 우리가 이겼어요
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님을 향해서 우리가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주님 주님이 저를 이기셨습니다
저같이 고집 세고 저같이 자기중심적이고 우주의 중심이 나 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이 고집불통인 인생을 주님이 정복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고백을 하고 따라가는 거라고요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게 뭐예요?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오라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따라갈 길이 없다고요
주님을!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를 이기신 거예요
내 모든 감각, 내 모든 생각, 내 모든 꿈, 내 모든 계획
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께 복종되는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길이 라구요 예수 믿기 전에 내가 가졌던 생각을
이제는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이룰 수 있게 되었구나.. 가 아니라
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항복하는 거라고요 그래서 로마서 14장 에서는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하잖아요
"우리 가운데 아무도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도다" 롬14:7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는다 이렇게 바울사도가 얘기하는 것은
고도로 헌신된 몇몇 기독교인들에게 한 말이 아니라
교회를 향해서
'이 고백은 우리의 전제입니다'
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는 날 우리가 넘어지죠
하루에도 수 차례 넘어지죠 그러나
하루에도 수없이 넘어진다고 해서 우리가 이 전제를 부정하지는 않아요
적어도 내가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우리는 이 말을 부인 하지 않아요 우리 중에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아무도 없어야 돼요
우리 중에는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어요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서예요
이게 교회의 전제입니다
교회는 이 고백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아니면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 고백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한낱 일회성 고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는 매일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이 길을 걸어가는 겁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포로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날마다 끼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 내가 그리스도의 포로가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우리는 아는 거죠
이 사람이 진정한 '패자'(자기가 죽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포로가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아는 사람!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어서 '내가 세상 재미는 더 이상 못 보고 살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얼마나 큰 은혜인지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기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이것을 알고 가는 사람이라고요
그래서 이런 관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싫어하는 약함,
여러분 약한 거 좋아 안 하시죠
강한 게 더 좋죠
약함 우리가 그다지 환영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고난,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느 누구가
'고난이여 오라' 이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죽음,
약함과 고난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 P2 /////////////////////////
바울사도는 고후2:14b절에서 각처에서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라고 말씀하는데
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느냐면
우리가 뿌리는 고급 향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 우리의 고난,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고린도후서 1장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는
‘고난, 환란, 위로’입니다
고난, 환란, 위로!
그러니까 고난이라는 말이 고후1장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고린도후서가 어떤 분위기 속에서 씌여진 것인지
우리로 짐작하게 하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처럼 바울사도가
자기가 이걸 뭐 무용담이라 해야 할까요?
자기가 고난 당한, 자기가 힘든 이야기들을
고린도후서처럼 많이 쏟아낸 성경이 없습니다
한 번 잠깐만 볼까요?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뭐라고 그럽니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바울의 자기 인생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이 지금 그렇다고..
그런데 이것 때문에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사도가 아닐 것이라고 짐작한 거죠
‘아니 하나님의 사람이면 뭔가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제 50대 말로 가고 있는 바울 사도 정도 되면
이제는 연세도 지긋이 드신 분이니
이제는 좀 뭔가 안정이 되어야 되는 거 아니야?’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인생이면
사람의 사도라면 뭔가 좀 그래야 되는 것 아니야?
어떻게 아직도 제 앞가림을 못하고
이 분은 이렇게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고,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지?’ 라고 묻는 것입니다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사도는 사람들이 볼 때
거짓 교사들을 지금 우리가 바울 사도가 유명하다고 대단한 거 알죠
이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말이에요
도리어 거짓 교사들이 더 잘 나가고
거짓 교사들이 스펙도 좋고
거짓 교사들이 진짜 목사처럼 보였다고요
진짜 사도처럼 보였다고요
그래서 거짓 교사들을, 그 사람들을 찬양하고
그들을 따라다니고, 그들이 뺨을 때리면 다른 뺨도 돌려대고
그들이 주머니에서 돈을 달라 그러면 이쪽 주머니에서도 돈을 털어서 주고
그렇게 했다고요
그런데 바울 사도를 보면,
뭔가 없어보이는 것입니다
무명하다는 얘기가 그 얘기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같으나’
뭔가 생기가 없어..
‘근심하는 자 같으나’
이 사람은 맨날 걱정근심이 많은 사람 같애!
‘가난한 자 같으나,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그게 사람들이 바울 사도를 보는 모습이었다고요
그런데 바울사도는 뭐라 그럽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그렇게 보이죠 제가?
그런데 정 반대랍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패자 라고 규정한 거에요
패자라고!
사회적인 기준에 의해서 형성된 그 판단능력을 가지고
바울을 패자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어찌 이 사람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보세요
이게 얼마나 매력적인 표현이에요?
여러분, 항상 기뻐하는 자 같으나
속으로는 다 속이 썩어들어가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제가 볼 때는 세상에 많아요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희희낙락 하는데
속은 다 썩어들어가는거죠
보세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으나
한 사람도 부요하게 할 수 없는 인생이 있어요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그래요?
자기는 가진 게 없는데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기가 막히는 말이죠
복음은 이런 일을 한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그 복음을
그렇게 경험하고 있나요?
복음의 능력, 복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 인생을 역전시켜 주는
내가 바라는 의미에서
인생 역전 한 번 시켜주는
그런 능력인가요? 복음이?
바울사도는 훨씬 더 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후11:23절을 봅니다
거짓교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쭉 하면서
고후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하루 밤낮)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얘기하고 있고요
자기의 고난을 얘기하고 있고요
자기의 죽음, 예수의 죽음을 날마다 짊어진다고 그랬죠
죽음을 얘기하고 있어요
사람은 우리가 다 알죠
우리가 경험하죠
자기가 막 헤프게 자랑하는 사람도
헤픈 사람이지만
우리는 그래도 적절하게 우리가 자랑할만한 것들을
표현할 줄 알아요 남들이 싫어하지 않게!
하지만 우리의 약한 것을 얘기하기는 굉장히 힘들어요
적당히 약한 것들은 적당히 표현할 수 있지만
가장 깊은 나의 약함과 나의 고난을
말하기는 쉽지가 않아요 사람은 그래요
그런데 바울은 아니 복음은
그런 우리를 굉장히 자유하게 해 줍니다
그게 사실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대해서 제가 거는 기대는
너무나 높습니다
교회는 보이는 복음이니까!
복음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가
그 열매가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가
그게 교회니까!
소위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만 있는 데가 교회니까!
은혜를 매 주일 수도 없이 셀 수 없이 많이 받았으니
그 은혜가 우리에게는 어떤 열매와 어떤 결과와
어떤 현상, 어떤 것들을 맺어갈 수 있는가요?
하는 게 그게 우리가 교회, 우리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나를 좇으라 말씀하셨어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오늘 본문 고후2:14절과 똑같이
예수님의 옆에서 영광을 받는 게 아니라
예수님은 이 승리를 어떤 방식으로 하셨는가 하면,
고린도후서 전체를 통해서 바울사도가 말하고
또 성경전체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원수인 죽음을 죽이셨어요
죽으심으로써 이기셨어요
우리는 죽음 없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고
자기 부인 없이 자기 긍정의 힘으로 예수를 따라가려고 해요
이게 세상에서 들어온 승리주의 라고 하는
여간해서 없어지지 않는, 말을 듣지 않는 바이러스 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에 얼마나 감염되어 있으셨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복음의 은혜 앞에
보세요 디모데전서 6장에서 바울사도가
‘자족함이 없으면 경건이 유익이 없다’라고 말씀한 이유가 뭐죠?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6:6
복음이 아니면 자족할 수가 없어요
순전한 복음이 아니면, 사람은 사람이라고 하는 내 존재가
절대로 자족할만한 존재가 아니에요
복음이 없는 경건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은혜를 받았는데, 순전한 복음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제대로 깨닫지 않으면
그 은혜를 헛되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인생에서 매주일 반복된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반영하는 경건한 사람으로
빚어져 가지 않죠
약함 이라는 것을
복음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함,
소위 나를 패자라고 규정짓는 그것,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게 다 있어요 사람에게는!
나한테만 있는 게 아니고 그게 없는 사람이 없어요
대통령 한테도 있고, 왕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죄인에게는
그 구석이 다 있다고요
자기가 애써서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그리스도께 포로가 될 수 있는 소지가
다 있어요 인정하기는 싫죠
우리의 약함과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영광스러운 수단이라는 생각에 좀처럼 이르지 않아요
거꾸로, 내가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내가 일등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내가 이 세상에서 뭔가 탁월한 어떤 업적을 남겨야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자연히 누가 안 가르쳐줬는데,
누가 안 가르쳐 준게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데도
왜 우리는 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요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는 왜 부정하고 살아가는지요!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의 논리, 세상의 방식,
세상의 정신이 교회에 그대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걸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하박국이 고백한 것처럼
‘감람나무, 포도나무, 우리 간에, 외양 간에 보면
아무 것도 없어요 도대체 있어야 될 게 없어요
인생이 이렇게 철저하게 실패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즐겁고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겠다는 고백이
이것은 예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신경질나게 하고, 화나게 하고, 의아하게 하고
그들을 견딜 수 없게 하는 거에요, 이런 것들은!
(오늘날) 이런 고백이 없다고요!
우리는 외양간에 소가 많고
우리에 양이 많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풍성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많아야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말합니다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너무너무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간증이 너무나 많죠
그런데 그런 간증보다는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왕이 되어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말한 게 아니라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자기 목숨이 언제 끊어질지
사울에게 발각되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그가 여호와의 선하심을 너희는 맛보아 알지어다’
내가 너희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뭔지 가르쳐 줄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것은
왕궁에서 왕이 된 다음이 아니에요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빚더미에 앉아있을지라도
성경은 그것을 넘어서는 능력이 있고
복음은 그것을 그런 환경과 상황들에 좌우되지 않을만큼
아니 우리의 상황과 환경을 뒤집어 놓을만큼
힘이 있는 것이죠
▲성취와 성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포로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을 따라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찬양, 예수님 찬양 노래를 부르면서
앞에서 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를 빛나게 해 주는 것은
포로들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포로의 존재가 없으면 개선행진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개선행진은, 장군들이 한 번 하고 싶어서 하는 쑈가 아닙니다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적장을 사로잡고 포로들로 잡아서
그들의 모든 금은보화를 전리품으로 가지고
귀환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빛나게 해 주는 것은
포로들의 존재입니다
가령 포로 중에는 로마 시민들이 두려워 떨던
그런 좀처럼 정복되지 않고 있던,
끝까지 로마제국에 뭔가를 흔들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위협이 될만한 존재가 있었는데
그 존재, 그 적장을 포로로 잡아서 끌고 온다면
이 개선행진은 기가 막힌 개선행진이 되겠죠
어떤 면에서는, 바울은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세상에! 바울이 예수를 믿다니!
이 인간이 예수를 믿다니!’ 이런 사람인 것이죠
바울도 포로로 붙잡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바울 같은 인간도 굴복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
사람들은 그 개선행진을
그 그리스도를 찬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낸다고
바울 사도는 얘기를 하는 거죠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잘났어도
저 사람을 하나님이, 그리스도께서 굴복시키시는구나!’
‘자기 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평생을 살아왔던 저 노인을
주님이 굴복시키시는구나!’
‘저렇게 기고만장하고, 저렇게 잘 나가고..’ (하는 사람도 굴복) 그런 거죠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포로가 됨으로써
뭐 그렇게 잘나지 않았어도 괜찮아요
나는 그리스도의 포로입니다
잘났든 잘나지 못했든 다 자기가 중심이 되고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갔던 인생들이에요
세상에 쉬운 인생이 어디 있어요
그렇게 누구에게 굴복하나요, 사람이?
그런데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굴복시키셨어요
이 얘기를 바울사도가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겠다는 허영심!
이런 것들이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제가 이렇게 성공했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여기에는 없습니다
그런 게 설자리가 없습니다
▲이 바울 사도가 얘기하고 있는,
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진동하게 하는데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굉장히 놀라운 것은
이중적인 냄새라는 거죠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고후2:16
똑같은 냄새인데, 어떤 사람들은 이 냄새를 맡고 살아나요
어떤 사람들은 이 냄새를 맡고 죽어요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것을 어떻게 감당할꼬
고후2:15절과 16절을 보면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냄새라고 말하죠)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아니, 우리가 주님의 개선행진을 따라가고 있는데
우리가 따라가는 이 길에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은 막 살아나요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지나가는데
우리의 냄새를 맡고 죽어요
무슨 얘기를 지금 바울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이 냄새는 엄밀히 말하면 포로들 자신이 풍기는 냄새라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각처에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2:14
우리가 개선행진을 따라가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런 개념으로 바울은 얘기하는 거에요
내가 직장으로 가요,
내가 집으로 돌아와요
내가 친구들을 만나러 가요
내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포로로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모르죠
그러나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지 않을 수 없어요
그 전에 그 사람이 아니거든요
저 사람을 붙잡고 있는 주인이 있거든요
그 사람을 완전히 굴복시킨, 나를 굴복시킨 주인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각처에서 내가 가는 곳마다
나는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끌려가는 그리스도의 포로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타내는 냄새가 아니라
포로가 나타내는 땀냄새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께 포로가 됨으로써
나를 정복하신 그리스도가 드러내는 향기가 되는 거에요
이게 꽃향기에요!
개선행진을 축하하는 꽃향기에요!
근데 이게 곧 복음이죠
근데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이 냄새를 맡고
사망으로 사망으로
어떤 사람들은 생명에서 생명으로
어떤 얘기를 하는 겁니까?
복음이 그런 가르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복음은 모두를 통일시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복음은 언제나 가르는(나누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당신의 공생애 첫 설교를 하셨을 때
이사야 61장을 읽으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데리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산상설교를 예수님께서 하셨을 때 사람들은 놀랬습니다
‘아니, 이 분처럼 말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어
이 분의 말은 권위가 있어!’
여러분, 역사상 영국의 8세기에 조지 휫필드 같은 분들이
그렇게 탁월한, 20세기 역사에 가장 탁월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얘기하는데
주님의 설교를 어찌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보다 나은 설교를 할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설교를 하셨을 때
사람들은 때로는 돌을 들어 치려했고
사람들은 갈렸습니다
모두가 다 그 능력 앞에 고꾸라진 게 아닙니다
복음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다 환영해 주는 복음은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주님은 언제나 그들을 부르십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으니..’
이게 ‘패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가 꼿꼿하게 살아있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며
십자가를 거절할 것이며
자신이 주인이 된 영광스러운 인생을 여전히 붙잡고
살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들에게는
이 냄새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된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후2:16절에서 감당할 수 없다고 예기합니다
내가 가는 곳바다 사는 사람이 있는 것은 좋은데
내가 가는 곳마다 죽는 사람도 생기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복음이 된 것처럼,
내가 가는 곳에서 복음이 들려지고
내가 가는 곳에서 복음의 향기가 진동하는 거죠
왜?
내가 복음이라서가 아니라
나를 정복하신 저 분을 사람들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죠
세상은 결국 둘로 나눠집니다..
승자와 패자
승자와 패자로 나눠집니다
승자와 패자!
패자는 누군가 하면
그리스도에게 포로가 된 자들입니다
승자는 여전히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누가 감당하리요’에 대한 대답을
나중에 고후3:5에서 하게 되는데 좀 있다 살피고요,
바울 사도는 결국 2:17에서
고린도교회를 와서 승리주의의 망상과 그 망령된 생각으로
고린도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거짓 교사들을 의식하면서
2:1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수많은 사람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고린도교회를 흔들어놓았던
거짓교사들, 승리주의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을 뜻합니다
‘나는 그 사람들처럼 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
이 말은 하나님 말씀에 물을 타지 않는다
희석시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희석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순전함으로 백퍼센트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대로
내가 그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복음을 전했으면’
무슨 얘깁니까? 승리주의의 적절히 양념을 친 복음을 전했으면
내가 이렇게 고생할 일이 없다고,
가는데 마다 바울도 환영받았을 것이고
대접받았을 것이고
떠받들어짐을 받았겠죠
그러나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은 ‘왜 너 나를 죽이려고 그래?’ 하면서
달려들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물을 타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왜요?
그래야 이 냄새를 맡고 어떤 사람들이 살아나니까!
고난도 있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들을 살리는
믿는 모든 사람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을 아니까
바울은 그렇게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지난 2천년의 역사속에서 조금도 바뀐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거짓과 참된 것을 분변하느냐,
참된 복음과 거짓된 복음을 분면하느냐,
참된 목사와 거짓된 목사를 분별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것이 물을 탄 것이며
어떤 것이 물을 타지 않은 순수한 것인가?
어떤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대로 말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가?
어떤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인가?
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는 내용과 태도에서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있는 사람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위에서 주무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무르고
요리를 해서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설교자가
이게 바울 사도는 그게 가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두려운 말씀 아래에서
그 말씀을 청종하고 수종드는 것입니다
▲바울의 확신을 4절과 5절에서 표명하는데
고후3: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바울사도가 확신이 없으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겠어요?
확신이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 확신이 어떤 것인가 하면,
바로 2:16에서 얘기했던 말에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가 가는 곳마다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나타나고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때문에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살아난다 말이에요
두려운 거죠
사람들의 생사가 걸려있는 일을 지금 바울이 하고 있고
바울이 그 사람들의 생사가 걸린 그 삶을 자기가 살아가고 있고
그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고 얘기하는 거죠
심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죠
그런데 이 확신이 있답니다
고후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여러분, 이 5절과 6절을 보면,
여기 ‘만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만족’이라는 말은
‘능력, 자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읽게 됩니다
‘우리의 자격,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3:5
‘우리가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요’ 3:5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능력이 있어가지고.. 이런 얘기가 아니고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
내가 시험을 봐서 합격해서 내가 얻은 자격증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사도라는 게!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4: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보십시오 낙심할 만한 상황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제가 생각할 때는, 우리 인생이 낙심할 만한 상황이 너무 많죠
그래서 존 번연도 <천로역정>에 보면
천로역정, 인생의 순례여정 속에서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 언젠가 하면
‘절망 거인’에게 잡혀서 ‘의심의 성’에 갇혔을 때입니다
그때 크리스천(주인공)이 자살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그래서 가장 큰 위기죠
낙심과 절망의 문제는 우리 인생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큰 대적입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목사님들한테 연락을 요즘 많이 받는데
저보다는 조금 젊은 목사님들이 연락해 오는데
목회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저한테나 하겠지, 교회에서는 하겠어요?
‘우리가 사역을 하고 싶다고 하냐? (이 말씀을 들면서)
바울도 하기 싫었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이 있어야 되는데
바울은 1년 반동안 자신의 삶을 고린도 교회에 다 드렸는데
이들은 자기 영적인 아버지와 같은 바울에게
‘당신 가짜지?’ 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역을 하고 싶겠어요?
낙심천만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왜? 바울에겐 이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사도를 시켜 준 게 아니라
나는 천 번, 만 번 죽임을 당해서 지옥에 떨어져도
마땅한 존재인데
그런데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굴복시켜서
이 개선행진에 저 끝에 끼워주셔서
내가 주님을 따라서 여기까지 지금 가고 있다고요
이게 영광스럽다는 얘기입니다
그 인식,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서 이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실력이 좋아서 직분을 준 게 아니고
불쌍해서.. 나를 사도를 시켜 준 것입니다
그 인식이 바울 사도에게 있으니까
‘내가 낙심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나를 가짜라고 그러지?
그래 나는 가짜보다 더 형편없는 인간이다
맞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무 불쌍해서 나를 사도로 만들어 주셨다’
사도라는 게 겉으로 보면 멋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포로로 개선행진 대열의 끄트머리에, 세상의 구경거리 spectacle로
나를 끌고가고 계신다
이게 나는 영광이고, 이게 은혜라는 것을 나는 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게 가문의 영광이죠
아니 어떻게..? 생각해보세요
제가 공부를 잘 못했어요
뭐 잘난 게 없었어요
평범 그 밑 언저리에 항상 살았어요
뭐 특이한 게 없었어요
재주가 있나? 없어요
저는 목사가 안 되었으면 밥 벌어 먹기 힘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굶지 않고 이렇게 배까지 나와서 (살쪄서)
이제까지 살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많은 영혼을
섬기게 하셨든지에 상관 없이
큰 교회 목사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매 주일 제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신 게
저는 너무나 큰 영광이고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몰라요 근심하는 자 같이 보일지도
어떤 사람들은
그러나 항상 기뻐하고
근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리스도인이 똑같아요
여러분, 자기가 자기를 불쌍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습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요법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여러분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부르심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면
심히 우리는 불쌍합니다
이걸 알지 못하면 우리는 승리주의를 붙잡게 되어 있습니다
‘나도 한 번 성공해야지!’
이미 바울 사도는 지금 3~6절에서 하는 말씀이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우리의 자격, 우리의 능력, 하나님께서 온다는 것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되요
여러분, 목사도 성공하는 것도 큰교회를 하는 목사가 성공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것이 나의 실력도 아니고요
그것이 나의 만족도 아니고요
그런데서 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의 포로라는 인식
교회에서 내가 장로가 되고
교회에서 내가 무엇이 되고
이런 것들이 오늘날 얼마나 심각하게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습니까
이것도 승리주의적인 정신이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민교회는 더 심하더라고요 제가 보니까
서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에요
‘아니 너는 교회를 10년이나 다녔는데
장로도 안 됐냐?’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런 식의 말과 생각들을
할 수 있죠?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속에 빠져서 살아가는 거에요
세상적인 성공과 성취의 방식으로
교회 안에서도 성공과 성취를 추구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얘기하는
지금 바울사도가 예기하는 바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이 말씀은 *고후3:5
우리는 부적격한 존재라는 사실,
우리의 약함, 그 사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볼 때는
장애물이 아니고
오히려 이게 절대적인 필요한 조건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아까 제가 그랬죠
은혜를 받으면 약함, 고난, 죽음, 이런 데 대한 관점이 바뀐다고요
세상에서는 나의 약함과 고난은
열등감의 요인이 돼요
‘나는 왜 이렇게 못 났지?
나는 왜 이러지?’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냄새를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는’ 고후2:14
하나님의 정하신 수단으로 일하기 시작한다고요
▲모세가 40세 되었을 때
어머니가 모세를 길렀잖아요 유모처럼
얼마나 그 히브리인의 아이덴티티와 신앙과 이런 것들을
넣어주었습니다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뜻을 세우고
‘드디어 때가 되었다 이제 내가 거사를 일으켜야 되겠다’
아마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자격이 있잖아요
‘나 말고 누가 나서겠어?’
‘아니 지금 히브리 민족 중에 누가 나만큼 성공한 사람이 있어?
누가 나만큼 똑똑한 사람이 있어?’
애굽의 궁궐에서 왕자로서 교육받았고
세상 지식과 학문과 모든 것들을
무예와 모든 것들을 배웠겠죠
나만큼 준비되고, 나만큼 조건을 갖춘 사람이 없었겠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뭐 나쁜 것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기가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그 시도 자체, 그 동기 자체를 성경이 부인하지는 않아요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애굽의 왕자로서 누리는 낙보다 더 원했다’고 그랬으니까요
그 동기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모세를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모세의 자신만만함이었습니다
소위 ‘나의 자격과 만족은, 능력은
나로부터 나느니라’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고후3:5참조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모세의 물을 빼십니다
물 빠지는 것은 어렵습니다
‘내가 왕년에 누군데’ 라는 생각, 안 빠집니다
그런데 물을 완전히 빼시는데 40년이 걸립니다
그리고 이제는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80노인이 되었을 때
그리고 이제는 과거에 애굽 궁궐에 있었다는 것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희미한 사건으로 역사속에 사라져 버렸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부르십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의 부적격함, 우리의 능력 없음,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절대적인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능력과 자격과 만족은 나에게서 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은 철저하게 보여주십니다
근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한다는 것이죠
왜? 승리주의 때문에 그래요!
스캇 헤이프먼은 이렇게 고린도후서 주석에서 말합니다
‘모세의 소명은 바로 그 장애물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필수적인 부분임을 입증하며
선지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자격의 원천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하나님의 은혜가 답입니다
내가 얼마나 준비가 잘 된 사람이고
내가 얼마나 능력있는 사람이고.. 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나타날 수 있을만큼
준비되는게 답입니다
자신만만한 게 아니라!
우리의 부적격함은 장애물이 아니에요
핸디캡이 아니에요
우리의 모자람, 우리의 약함,
우리의 약점,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수 없는 조건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포로’ 라는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 고후2:14
본문의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하고 싶은
‘여러분들은 심히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옆에서 버금 수레에 타고
여러분들이 따라가는 장군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포로입니다!
여러분들의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의 허영심을 채워줄 수 있을 만한
복음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위 세상말로 승자들을 찾지 않으십니다
승자들에게는 복음이 먹히질 않습니다
스스로 부적격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래서 보면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우리 인생에서 정말 겸손하게 되는 때에
주님께 나아오죠 일반적으로! 그렇죠?
자신만만하고 승승장구하는 인생속에서
교회를 다닐지는 몰라도
굴복하지는 않죠
우리가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어서
행진의 맨 끝에서 끌려가는 구경거리가 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을 이기셨고 나를 포로로 잡으셨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우리가 가는 곳마다 드러내게 됩니다 비로소!
빚을 다 갚은 다음에 하는 게 아니고요
내가 그리스도께 포로된 인생이고
나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포로로서 맨 끝에서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내가 서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할 때
내 삶의 자리가 얼만큼 만족스럽든지
내 삶의 자리가 얼만큼 흡족하든지 상관없이
우리들은 그냥 걸어가는 곳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에게 주목하잖아요 너무나
내가 실패한 인생인가?
내가 뭐 될려나, 안 될 것 같은데?
이 짧은 인생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되나?
우리는 나에게 모든 포커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 사도가 얘기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아니 내가 이러자고 사도가 되었나?
아내 내가 이렇게 1년 반동안 수고해서 복음을 심어서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나?’
‘아니 내가 누군데 내가 아라비아에서 3년동안 주님께 개인지도를 받은 사람인데’
‘아니 내가 삼층천에도 갔다 왔던 사람인데’
‘아니 내가..’
바울이 이러지 않아요
바울은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나는 그리스도의 포로입니다’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고요
‘나를 보세요’가 아니고요
(겸손하게) ‘저 분이 나를 이기셨습니다
나는 그렇게 고집 센 망나니 같은 존재인데
고집 센 망아지 같은 존재인데
저 분이 나를 이기셨습니다 저는 저 분을 따라가는 중입니다
저 분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저 분이 나를 이기셨습니다
저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영접할 때 처음에 하는
내가 내 마음의 왕좌에서 내려오고
그리스도가 내 마음의 왕이 되시고..
이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라
내 평생에 우리는 입으로 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가는 곳마다
우리의 삶이 사람들이 존경할만하고 흠모, 소망, 부러워할만한 것이든/아니든
가는 곳마다 우리는, 우리를 정복하신
위대하신 장수, 그리스도를 보세요!
저 분이 나를 꺾으셨습니다!
저 분이 나를 정복하셨답니다!
이 말을, 이 메시지를
우리의 삶으로 전하면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교회는
‘포로공동체’입니다 포로수용소입니다
여러분, 포로수용소에서 무슨..
영화에 포로수용소를 보시면 거기도 사람 사는 데니까
다 허술하게 옷도 입고, 다 그냥 포로잖아요
여기서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우리는 포로공동체, 포로수용소입니다
바울사도는 편지를 쓰면서 종종 이렇게 말하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중의(이중)적이죠
감옥에 있기에 그렇게 쓰기도 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내가 붙잡힌 자다
이 인식을 항상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죠
그게 바울의 자기정체성, 자기를 인식하는 너무나 중요한 열쇠인 것이죠
여러분, 여러분들이 재물이나 학식이나 경험이나
성공이나 성취나 세상의 그 어떤 것들에 의해서
여러분들이 규정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리스도께 포로된 존재라는
그 아이덴티티, 그 자기정체성보다도 더 중요한 것입니까?
그런 것들 때문에 여러분들은 속이 상합니까?
그런 것들 때문에 여러분들은 우쭐합니까?
아뇨.
'우리 가운데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가 없다' *롬14:7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포로다
우리는 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간다..
그리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2:14
이게 바울 사도의 고백이고, 또 오늘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포로가 포로로서 누리는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도 놀라운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성공의 기준에 의해서,
은혜를 받았다 함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바울이 고후6:1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은 은혜를 지금까지 헛되게 받으셨군요!’
40년 50년 60년 믿어도 은혜를 헛되게 받으셨군요
은혜를 제대로 받은 증거가 이것입니까?
라는 말을 우리는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능력, 성취, 성공, 만족,
행복, 즐거움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께 정복된 자로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