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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 8 출처
존 라일
◑8. 마지막으로, 성경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위로 가운데 맞도록 하는 유일한 책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습니다. 죽음을 피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예외 없이 건너야할 강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 엄연한 실체를 외면하려고 하는 경향이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는 동안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무에 힘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또한 죽음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알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또한 자신이 어떻게 죽어야 할지도 잘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닥치는 엄중한 현실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계획과 기대를 순식간에 접게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함께 살던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큰 고통으로 신음하며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죽음은 우리 몸을 무덤으로 데리고 내려갑니다. 썩어 구더기의 밥이 되게 합니다.
죽음은 심판과 영원으로 난 문입니다. 천국으로 난 문과 지옥으로 난 문을 열어젖힙니다.
죽음이 한번 들이닥친 후에는 변화의 기회가 없습니다. 회개를 위한 여지도 없습니다.
그래도 그 전에는 실수나 잘못을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침상에 누워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한번 넘어진 나무는 그대로 쓰러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관에 들어간 후에는 회심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둔 후에는 새롭게 태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을 금세 맞이할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 이 세상을 떠날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좀 더 나중에 죽든, 좀 더 일찍 죽든 모든 사람은 죽기 마련이고,
더구나 홀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해야합니다. 이는 심사숙고해야 할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신자들에게조차 엄중한 일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사망의 쏘는 것”은 없습니다(고전15:55).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죽음마저도 특권이 되었습니다.
사나 죽으나 신자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 땅에 살 때는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십니다.
죽어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곳으로 갑니다.
신자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 1:21).
죽음을 통해서 많은 시련 -즉 연약함 몸, 부패한 마음, 미혹하는 마귀, 미혹하고 핍박하는 세상 -에서
벗어납니다.
죽음은 신자를 많은 복락으로 누리는 곳으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수고를 그칩니다.
소망으로만 간직하던 기쁨의 부활이 이제 확실하게 미래의 사실로 변합니다.
구속된 거룩한 영혼들과 함께 합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신자에게조차 죽음은 엄중한 일입니다.
혈과 육은 본성적으로 죽음에 움츠러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난다는 사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문을 통해 나아가는 세상이 우리의 본향이기는 해도 여전히 미지의 세상입니다.
죽음이 신자들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고 심지어 벗과 같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대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죽음은 항상 엄중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사려 깊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죽음 맞이할지 잠잠히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담력을 가지고 이 엄중한 주제를 대면해야 합니다.
우리가 치달아 가는 이 마지막에 대해 몇 가지를 말하겠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세상에 유익하다는 것들로는 죽음으로 내려가는 사람을 위로 할 수 없습니다.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모든 금으로 이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밝게 하지 못합니다.
많은 돈을 들여 탁월한 간병인과 약을 구할 수는 있어도
죽어가는 자의 양심과 마음과 영혼에 평화를 사 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종들도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육신의 필요를 정성껏 채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침상 밑에서 뜬 눈으로 밤을 함께 지새우면서 온 정성을 다해 간병할 수도 있습니다.
머리맡에 베개를 부드럽게 해주고 꺼져 가는 육신을 품에 안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까지 시중들지는 못합니다.
괴로운 마음의 고통을 멈추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두려워 떠는 양심을 가려주지는 못합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죽음으로 내려가는 사람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화려한 무도장, 즐거운 춤 , 한밤의 향연, 엡섬 경마장의 흥분, 카드놀이,
오페라 극장의 특석, 극장 가수들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같은 것은
죽음을 남의 일인 양 생각하던 때 주던 감흥을 더 이상 주지 못합니다.
흥미진진한 사냥 이야기와 아슬아슬했던 전장에서의 무용담도 조금도 재미가 없습니다.
큰 잔치자리와 요트 경주와 진귀한 것들을 펼쳐 놓은 전시장에 초대를 받아도
아무 런 위안이 안 됩니다.
임종의 순간에 이런 것들은 모두 공허하고 허탄하며 자신을 위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양심의 귀를 거슬리는 소음으로만 들릴 뿐입니다.
건강할 때 즐기던 이 모든 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 전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잔인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해일과 같이 밀어닥치면 이런 것들은
그의 괴로운 양심과 마음을 손톱만큼도 막아 주지 못합니다.
이제 곧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할 것을 알고 두려워 떠는 사람의 양심을 이런 것들로는 진정이 안 됩니다.
책이나 신문 역시 죽음으로 내려가는 사람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합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나 토머스 매콜리(Thomas Macaulay)의 탁월한 글을 들려 줘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타임>지의 현란한 논설도 재미가 없습니다.
<에딘버러>나 <쿼털리>의 기사들도 관심이 없습니다.
풍자만화나 만평, 신간 소설도 한 번도 들춰 보지 않은 채 곁에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의 이목을 끌던 시절은 갔습니다.
건강할 때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만 죽음을 코앞에 둔 지금은 아무런 흥미가 없습니다.
▲임종을 맞은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성경입니다.
성경 구절, 성경의 내용을 담아내는 책만이 임종하는 사람에게 위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평소에 성경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는데도
임종시 머리맡에 성경만 갖다 놓으면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성경을 머리맡에 놓아 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봐 왔습니다. 평소에 성경을 무시한 불신자가
임종시 머리맡에 놓은 성경 때문에 별안간 믿고 위리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만이 죽음으로 내려가는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경이 아닌 다른 것에서 얻는 위로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죽음의 해일이 닥치면 허망하게 쓸려 버리고 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신분이나 계층을 막론하고 이는 사실입니다
왕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매한가지입니다.
죽음으로 내려가는 어느 누구도 성경이 아니고는 참된 위로를 얻지 못합니다. 전혀 얻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누구에게라도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등지는 사람은, 귀로 듣고 배우며 마음으로 받고 의지했던 성경 구절과 약속,
교리로부터만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믿지 않으면서
곧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성례를 받는 것은 무익합니다.
이교 마술사가 주문을 외는 것만큼이나 양심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평소에는 성경이 없이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편하게 사는 것 같아 보인다고
속으면 안 됩니다. 임종시에는 전혀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성경과 상관없는 사람들은 손톱만큼의 위로도 얻지 못합니다.
“죽는 순간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책은 성경뿐이다”라고 했던
존 셀던(Jone Selden)의 고백은 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한 것을 확인해 주는 증거와 실례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경을 멸시하던 사람들이 어떤 임종을 맞았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다.
불신자로 유명한 볼테르(Voltaire)와 페인(Paine)이
어떻게 비참함과 비통함과 분노와 낙담과 비통 가운데 죽음으로 내려갔는지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또 그런 임종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행복한 영향을 주었는지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온 교회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목사인 세실(Cecil)은 말합니다.
“어머니의 침상 맡에서 임종을 지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죽는 것이 두려우세요, 어머니?’라는 제 물음에 어머니는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전혀 모르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불안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더니
"하나님께서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에 들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시잖니!”(사 43:2).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로서
사람들의 임종을 지키면서 했던 경험 몇 가지를 말하고
이 주제를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많은 이들이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임종을 맞는 모양과 태도는 가지각색입니다.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씁쓸하고 침울하게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는 순간에조차 앞으로 자기에게 닥칠 일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무덤덤하게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래 병으로 시달리느라 지칠 대로 지쳐 죽기만을 기다리다가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 역시 하나님 앞에 갈 준비가 되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믿음의 반석에 굳건하게 터를 둔 증거도 없이 무턱대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고백하며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임에도,
죽을 때 큰 위로와 안전을 누리지는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말 그대로,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그리스도의 미쁘심을 영광스럽게 의지면서 죽음의 강을 건너는
불굴 씨(Standfast)처럼, 소망을 확신하면서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평소에 성경이 주는 평화를 누리지 못한 사람이 임종의 침상에서
참되고 견고하게 잠잠하고 합당한 평온 가운데 죽은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감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자신의 위로자요 동반자요 벗으로 삼고 동행하지도 않으면서
당당히 죽음으로 내려갈 수 있다고 떠벌리는 사람처럼 무모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와 같은 영혼은 성경을 통해서만 위로를 얻습니다.
성경이 주는 위로를 붙들지 않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위해 붙들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임종을 맞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은 성경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바로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있는지 여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멸망으로 치닫는 세상에서 저물어 가는 인생을 사는 한 사람으로서,
곧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과연 무엇으로 위로를 얻을 것인지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