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3:8 ‘방언도 그치고’의 해석 고전13:8~10
송태근 목사
성서학당 고린도전서 25강 ‘방언 ’ 중 발췌
제가 오래 전에 맹인 교회에서
사역을 오랫동안 한 적이 있어요
맹인 청년들을 지도할 때인데 정기적으로
'삶의 체험현장 '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했었어요
왜냐면 맹인들은 앞을 보지 못하니까 세상을 이해하는 통로가 결국은
감각하고 청각이에요
그래서 1 년에 한두 번씩 청년들을 직접 시골로 데려가요
농사 짓는 법도 이렇게 손으로 만져 보게 하고
근데 이제 어느 핸가 30 여 명이 소를 만지러 갔어요 소를 이렇게 더듬게 했어요
소 라는 게 뭐 있나 보다 이렇게 듣다가
자기 손으로 이게 더듬어가면서 감각으로 느끼고 만지도록 하니까
얼마나 설레이고 신기했겠어요
끝난 다음에 이제 툇마루 같은데 앉아서 앉아 가지고 얘기를 시켰어요
"오 나는 소가 이렇게 그렇게 큰 줄 몰랐어요 "
또 "소 뿔이 의외로 그렇게 크지는 않데요 "
이렇게 나름대로 자기가 주관적으로 느낀 대로 설명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주관적 체험이 온전할까요 ? 조금만 알고 , 부분만 아는 거죠
그렇죠 !
이렇게 자기가 경험한 영역 밖에는 얘기 못 하는 거에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앙세계 또는 은사를 경험한다는 것이
결국은 주관적인 수밖에 없어요
내가 경험한 것을 일반화시키거나
원리화 시켜서는 굉장히
신앙의 전체적인 불균형을 가져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 상우씨 같은 경우에 학교 갔다 오다가
교회 지하에서 기도 방에서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았어요
그러면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되죠 방언이라는 것은 지하에서 받아야 돼 지하에서 !
그게 진짜 방언이야 !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또 빙언이라는 것은 기도원에서 받아야 돼
이렇게 주장하면 안 되죠
어디서든지 자유로운 하나님 만큼 풍성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은사를 주시고
방언을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 방언에 대해서 굉장히 교회마다 논란이 많았어요
심지어 어떤 교회는 방언으로 막 기도하고 있으면 권사님이 와서 막 등을 때려요
조용히하라고!
그런 경험이 있었어요 방언하다가 야단 맞고
입을 틀어 막는 제지를 당하기도 했어요
근데 거기에도 또 나름대로 이유가 있더라고요 보니까
(*너무 극단적인 경우 )
오늘 그 얘기를 좀 실질적인 문제와
원리적인 문제를 양날개로
우리가 한번 균형을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고린도교회에도
이런 방언의은사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은사가 있었죠 근데 두 종류로 나눠졌어요
첫째 은사 없는 사람, 못 받은 사람이죠
그럼 반대로 은사 받은 사람 은사 받은 사람과 은사 못 받은 사람이
교회안에서 쫙 나눠지는 거예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아 나도 방언 받아 가지고
저렇게 기도 한 번 해 봤으면 좋겠다 어떤 느낌일까 ?'
어떤 신비한 경험일까 ? 궁금하단 말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은사 받은 쪽에서 이것을
자랑을 삼고 자기 의를 삼아서
이쪽을 정죄하기 시작했어요
이건 은사에 대한 잘못 이해죠
근데 이러한 경향과 분위기가 그동안 방언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에서 쭉 이어져왔어요
은사 못 받은 사람은 방언하는 사람들 보고
'그거 가짜다 !
그리고 (방언 )은사중지론자 와 페지론자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면 벤자민 B 워필드 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분은 방언의 은사 라는 것은
사도들에 대한 확정의 표시로서
이미 사도시대가 지나갔기 때문에 끝났다
이렇게 해서 (방언의 ) 은사에 대해서 폐지론자 입니다
"그건 없다 이제 ! 왜냐면 그 당시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도 라는 하나의 표시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은사가 주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은사폐지론 쪽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리차드 게핀 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분은 오래 전에 한국에도 방문해서
총신대학에서 강의도 했는데 은사중지론자 입니다
그다음에 또 한 쪽은
'아니다 은사는 지금도 계속 된다 '
많은 사람들이 (이쪽입니다 ) '계속 된다 !'
근데 현실적으로 오늘날 교회 안에
방언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없어요 ? 있어요
있는 정도가 아니죠 아주 많아요
만약 내가 방언을 못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하는 방언에 대해서
그런 삐딱한 시선이나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면 안 되죠
방언이 과연 현실적으로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는
어떤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요
성경은 뭘 얘기하는가 ?
이것이 가장 중요한 기초이어야 하겠죠
▲자 우선 성경을 좀 보십시다 고린도전서 12 장 7 절 읽어 보세요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전 12:7
자 여기 보시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이렇게 돼 있어요
근데 이 말이 온전한 번역은 아닙니다 부분적인 번역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여기서 이 번역을 온전하게 하려면
앞에 '유익 '이라는 말 앞에
무슨 글자가 더해져야 되냐면
'공동의 유익을 위함이라 ' 이렇게 돼야 돼요 *the common good
그래서 모든 은사는 그 초점이 뭡니까 ?
공동 ! 공동 (교회 )의 유익에 그 초점이 있는 겁니다
은사의 마지막 목표 goal 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그 목적지가 있는 거에요
방언도 마찬가지죠 방언도 결국은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첫째는 공동체를 생각해야 되고
두 번째는 자기 경건의 성장을 위해서
방언이라는 은사가 주어지는 겁니다
▲왜 그러면 이런 벤자민 B 워필드나
리차드 게핀 같은 학자들은
오늘날 방언은 중지되거나 폐지되었다고 말하느냐 ?
그건 조금 문맥적 고려를 덜 했던 거 같아요
진짜 그 부분을 우리가 한번 지적해서 살펴보죠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
여기에 보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죠 ?
그래서 지금은 방언이 중지되거나 폐지되었다는
주장을 (워필드 , 게핀이 ) 이 본문을 근거로 합니다
그런데 고전 13:10 절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온전한 것이 오기 전까지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지속되리라)
그러면 '온전한 것이 ' 뭐죠 ?
"예수님의 재림 "
그렇죠 !
'온전함이 오는 ' 그 시간은
언제를 기준으로 얘기하는 걸까요 ?
예수님이 (재림해 ) 오셔서 모든 것들을 완성할 때 !
여러분 완성할 때는 믿음이 필요 있어요 없어요 ?
필요 없죠 !
소망이 필요 없어요 없어요 ? 없죠
이미 소망이 완성이 됐는데
뭐만 남을까요 ?
사랑만 남죠 !
그리고 (재림 후 ) 은사 이런 것들이
다 필요 할까요 , 안 할까요 ?
안 할 거예요
여기서 "온전 " 이라는 말은
그 시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를 얘기합니다
근데 그만 그 문맥 , 그 부분에 대해서
(워필드 , 게핀이 ) 미스언더스탠딩 , 오해를 했어요
성경을 잘 보세요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
방언이 폐해지는 시점이 지금이 아니에요
언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얘기일까요 ?
온전한 것이 올 때 !
(재림 때 폐해지는 것은 )
당연하죠 !
그런데 이제 이런 학자들은
그것 고전 13:8 '폐하리라 '의 시제를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보지 않고
그 시대의 시각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이건 굉장히 큰 미쓰를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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