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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적을 허락하시는 이유

LNCK 2019. 11. 24. 06:39

www.youtube.com/watch?v=frZfld1vM20

하나님이 기적을 허락하시는 이유            막1:35~39             19.07.24.출처       

 

※'기도에 대한 입장'이 기존의 전통적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만

  신학의 발전을 위해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연합을 위한 깊은 기도의 몰입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기복을 위한 연합기도는.. 성경적 근거가 약하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편집자

 

1:35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신앙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기적의 존재를 믿고

또 기적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들이 종교를 버릴 수 없는 이유는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성령사역이 각광을 받느냐?

성령사역의 목적은 사실은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성령의 은사가 부각되면서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으로 연관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은사가 있는 사람, 특별히 예언의 은사가 있다던가,

병 고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그 은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한 것인데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은사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집회가 되기보다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식으로 목적이 바뀌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분명히

애초부터 주님이 행하신 목적을 알고 기억하고 지키지 않으면

이것은 그야말로 물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결국은 그런 식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목적은

사람들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한 게 아니고

당신이 전하시는 말씀의 확실함과,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과,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와 구원을 드러내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섭리를 보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당장 급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고,

이후에 어떻게 되든 간에 당장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들을 탓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접했더라도 우리도 똑같이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실 때

감수할 수밖에 없는 위험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기를 기뻐하시지요

이것은 하나님께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되면, 그 목적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사람들이 생각하기보다는

당장 그 기적의 수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기적을 내가 입으면 나의 문제가 해결될 것을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사람들이 간절히 사모하되

 

원래 주님의 뜻보다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용도로 바뀌는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막1:35~39)을 우리가 여러 번 읽고 또 읽는 이유는

예수께서 이와 같은 가능성을 아셨기 때문에

당신이 새벽마다 기도하시고

 

참고로 예수께서 새벽에 기도회를 여신 게 아니고

'홀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 하셨다'고 했지요.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기도회를 가지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다' 라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도 하실 때는 당신 혼자 기도하셨어요

밤이 맞도록 기도하실 때도 혼자 기도 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기도하실때도 같이 기도하신 게 아니고 혼자 기도하셨어요

 

다만 3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너희도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돌 하나를 던질 만한 거리에 가셔서 혼자 기도 하셨다'고 했지요

 

왜 예수께서 함께 기도하지 아니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기도외에 효과를 얻으려고 할 필요를 못 느끼시고

기도는 결국은 각 사람이 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믿음으로 기도할 것을 가르치시고

제자들이 기도할 필요를 가르치셨지만

그것은 결국은 각 제자가 자기가 알아서 할 부분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랬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필요성과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이렇게 기도하라'며 주기도문을 예문으로 주셨지만

 

한 번도 제자들을 닦달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너희가 기도를 안 한다' 라든가

'기도를 더 하거라' 라든가

이런 문제로 기도의 양, 기도의 어떤 스타일을 가지고 제자들을 닦달 하신 적이 없고

 

이것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기 이전에

그들이 유대인 전통을 따라 이미 갖고 있는 기도의 훈련과 기도의 전통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 만큼은

제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할 줄을 믿으셨고

그들에게 일임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기도에 대해서 그들을 닦달하지 않으시고

그리고 함께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이 기도 하실 때는 단독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단독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왜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 하셨느냐?

그 시간만이 예수님이 혼자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과 단독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어나게 되면

 

그때부터 사람들이 예수님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유일하게 단독으로 방해받지 않고 기도하실 수 있는 시간이

그때 밖에 없었으리라고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교회가 이 구절을 따서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된다 라고 생각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것이 하나의 교회가 강요하는, 교회 차원에서의 기도회가 되는 바람에

 

마치 새벽 기도를 참석하는 사람은 남들보다 더 신앙이 좋은 것처럼

당연히 이렇게 해야 되는 것처럼 만든 것은,

그것은 주님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도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우리가 침소봉대 해서, 확대 해석해서,

모든 사람에게 요구한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참고로 새벽기도가 문화화 된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고

이것이 한국 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분명히 이바지 했으리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권장 할 수 있는 것이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를 어떤 놀라운 현상인 것처럼 만들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우리 교회가 이렇게 열심히 새벽에 기도 한다는 것을

마치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믿느냐! 우리가 얼마나 믿음이 좋으냐!'

라는 기준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강남에 있는 유명한 사찰에 거기 주지스님이 새로 부임한 후에

개신교회를 본따서 새벽 불당 시간을 열어서

'40일 새벽 불당' 그래 가지고 개신교를 본따서

많은 불자들이 새벽 시간에 참석을 하고

 

그러니까 여러분 제자훈련 하는 교회에서

제자훈련 하는 법을 배우다가

사찰을 열어서 그 방법론을 써서 부흥하는 사찰도 있고

또 새벽 기도 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것을 실행하는 교회도 있고...

 

그러나 이것은 얼마만큼 우리의 신앙적인 컨텐츠가 빈약한 가를 보여 주는 것이고

우리의 어떤 열심, 우리의 어떤 새벽 잠을 부인하고

우리가 그만큼 희생하는 그 희생 자체에 어떤 신앙적인 메리트(훌륭함)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신앙이 우리 삶에 적용해서 나타나는 열매와

신앙적인 컨텐츠를 가지고 승부하는 것이

훨씬 더 사람들에게 타당성이 있고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고

 

세계 어디를 가서 하든

그것이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이냐면,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자 할 때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 하느냐' 하는 것은

그 자체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무슬림들이 얼마나..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지요

1년에 한 달입니까? 40일! 이 라마단, 일 년에 한 번 금식을 합니다

 

온 국가가, 무슬림 문명 전체가 그렇게 합니다

해가 뜰 때 부터 해가 질때까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슬림 국가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거죠

왜냐면 낮에 사무를 봐야 되는데

사무직 맡은 사람들이 자리에 없던가,

금식 하느라고 힘이 없어서 일을 해 주지를 못 하니까

일이 스톱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누구도 무슬림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그 자체로써 감동을 받아서

'나도 이렇게 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무슬림 국가에 가서 하루에 다섯 번씩 스피커로 알랄랄랄라 알라리알라 방송이 나옵니다

기도 시간이라는 얘기죠

아무도 그것을 듣고 거기에서 어떤 감동을 받는다든가

어떤 경건함을 느낀다든가

'아 이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거 보니까 나도 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고

 

새벽 잠을 설치고, 시끄럽고,

'과연 이들이 21세기에도 저런 식으로 그들의 신앙을 공적으로 선언을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듣도록 해야 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을 좀 더 자치적으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소화하게 하지 않을까?'

'왜 차라리 단체 문자를, 주면 기도 시간에 단체 문자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핸드폰이 그 시간이 되면 삐삐 하면서 싸인을 받아서

알람을 받아서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공적으로 길거리에 대놓고 스피커로 그것을 방송을 해야 될 필요가 있을까?'

 

21세기에 사람의 종교를 감동하는 방법이

과연 그것 밖에 없다는 말인가?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슬림 사회에서는 한 곳에서만 그 기도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고

여러 모스크가 각자 방송을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들리고 저 곳에서도 들리고

마치 '우리 모스크에 오라'고 방송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니까... (난감합니다) 

 

▲여러분 신앙을 갖는 것과

그리고 그 신앙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에 소화해서 그것을 적용하고

그리고 남들에게 의미가 전달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끊임없는 생각을 필요로 하는 부분입니다 끊임없는 연구를 필요로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한 때 '우리가 이같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남들에게도 감동이 되지 않을까?'

라고 기대할 때가 있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볼 만큼 보고 알만큼 알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지 않고

 

감동이 되는 것은 "컨텐츠(내용)" 입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믿고,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었고,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내 안에 하나님이 얼마만큼 함께 하시느냐?

이런 것이 사람을 감동하는 것이지

 

그러지 않고 신경질은 있는 대로 내면서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은 신경질적인 인간의 신앙 형태로 보일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그렇게 하는 만큼 더 너그럽고, 선하고, 친절하고, 또 사랑을 베풀고,

이것이 훨씬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고

하나님을 경험을 한다면, 그런 데서 하나님을 경험할 지언정

 

수십 억의 무슬림들이 1년에 한 번 라마단으로 금식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힘들겠다 배고프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아~ 과연 알라가 위대해!'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에 대해 그동안 오랫동안 보고 경험하고 생각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이제는 리얼리티, 즉 신앙의 실체를 보기 원하지

사람들의 외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만으로

신앙의 실체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슬림을 계속 예를 들지만

그들이 얼마나 열심이 있고, 신앙의 순수함과

그 신앙의 순수함을 그들의 사회에 강요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래서 여자들에게는 히잡을 쓸 것을 강요하고

외국에 서양으로 이민 간 여성들도 히잡을 쓰고

그래서 프랑스정부 같은 데서는 히잡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릴 정도로

이런 이 모든 것은 신앙적인 열심에서 필요 되는 것이고

신앙적인 독실함이에요

 

그러나 외부 사람들이 그것을 봤을 때는 불편하고, 거리감을 느끼고,

차이를 느끼고.. 왜 이들은 이런 식의 방법을 고집할까?

 

더 이상 그 자체로서 감동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거리감, 차별, '저 사람과 나는 다르다'

 

'우리는 이렇게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저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설사 신앙에 관심이 있더라도

나는 이런저런 많은 것을 강요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할지언정

그 (신앙의) 실체 reality 를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나도 믿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제가 '목사'라는 사실이 그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만들 것 같습니까?

 

처음엔 그랬어요 처음에!

처음에는 이런 (미국 법조계)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청년이 신학교를 가기로 했다더라

그 자체만으로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때가 있었어요

 

놀랠 노자다 라고 놀라기도 하고

뭐 신학생이 돼서 헌신하고 섬기는 것을..

 

그러나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제가 목사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나도 그럼 예수를 믿어야지'라고 생각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고

 

이제는 더 사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그들이 믿을 만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더 일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더 사명이 커진 것입니다

 

제가 목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러기 때문에 제가 하는 말이든, 제가 제 삶을 사는 방법이든,

이런 것들을 지켜볼 것이라고 믿고

 

그러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하면 그것이 신앙으로 전달이 될까 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 것입니다 섣불리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성령의 인도를 기다리고, 마음이 열릴 때를 기다리고,

적절한 기회를 찾고,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저 사람이 받아들일지..

어떤 상황에 내가 신앙을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아마 여러분도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권사, 집사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고

그 자체로 예수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오히려 지켜볼 것입니다 '저 사람이 집사 라는데, 권사 라는데'

그래서 그 신앙이 자신의 삶에 어떤 도움을 줄까?

그것을 어느 정도는 지켜볼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거기에서 감명을 받는다면

'나도 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겠구나'

'그렇다면 나도 교회를 나가는 것이 좋겠구나'

'나도 기도를 해야 되겠구나' 라고 스스로 생각할 때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지만

이건 우리 모두의 과제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대에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할렐루야!

 

▲사람낚는 어부 fishers of men 사람낚는 어부

이보다 더 흥분되는 직분은 없지요 사람 낚는 어부!

 

다만 과제는 이 세대에 어떻게 사람을 낚을 것이냐 하는 것,

어떻게 하면 사람을 낚을 것이냐

이것은 시대에 따라서 바뀐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옛날에 통했던 방법이 아마 이제는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큰 형이 교회를 다니면 동생들이 따라갔어요

그것이 합당할 때가 있었어요

 

저희 집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희 아버님(장남)이 장로님이 되셨을 때 

동생들이 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지금은 형님이 교회를 다닌다고 동생들이 다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마 지금은 '신앙은 자유야, 아마 형님이 급한 일이 있으신 모양이지!'

이런 식으로 세월이 달라진 것입니다

생각하는 방법이 달라졌어요

 

옛날에는 사단장이 교회를 다니면

그 사단에 있는 모든 장병들이 세례받게 할 수 있었어요 가능했습니다 그럴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아마 지금 그렇게 하면 난리 날 거에요

신문에서 떠들 것입니다

'사단장이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다' 난리 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통했던 방법이

지금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국가가 복음화 되는 방법이 단순했어요

그 나라의 왕이 세례를 받으면

국민 전체가 세례를 받았던 적도 있었어요

 

아주 쉬워요 왕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 나라가 복음화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러나 지금은 대통령이 교회를 다니던

뭐 공적인 자리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든

국민들은 그것 때문에 자신도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건 그 사람 일이고 나는 내 사연이 있다' 라고 생각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죠

 

그만큼 사람 한 명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그냥 제도로 되지 않고, 어떤 분위기 때문에 되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야말로 한 영혼 한 영혼을

건지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날처럼 사단장 한 명이 믿으면 그 사단이 전도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장병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믿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더 제대로 전도 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냥 왕 한 명이 세례를 받아 국가가 기독교화가 된다고 해도

실제로 국민들 마음 속에 예수님이 있는 것을 보장할 수 없었지요

외적으로 기독교 화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것과 상관이 없이 각 사람이 회심하고,

각 사람이 거듭나야 됩니다 

각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해야 됩니다 

 

그건 저절로 되는 게 아니고

그건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대해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고 기도하고

제대로 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월이 바뀌고 룰이 바뀌었어요!

옛날 방법에 의존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 시대에 맞는 방법을 우리가 찾아야 됩니다

이시대에 통하는 방법!

 

우리는 자녀들에게 '엄마가 네 나이었을 때는..' 이라고 말하기 좋아하지요

젊은이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그거라고 합니다

'아빠가 네 나이을 때는..'

 

왜 그런 말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세월이 흐르면서 룰이 바뀌었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법이 달라졌어요

 

옛날에 통했던 방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아요

옛날에는 그게 통했어요 옛날에는 통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통하지 않아요

 

세상이 더 나빠진 것이냐, 사람들이 더 악해진 것이냐,

예수님 믿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냐?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다만 룰이 바뀐 것 뿐이에요

 

옛날에 통했던 방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우리는 새로운 더 나은 방법을 찾을 필요를 갖게 된 것뿐입니다

찾으면 돼요 찾으면 됩니다

 

소위 포스트모던 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단어는 많이 들었지만 도대체 무슨 뜻이냐?

포스트모던 이란 말은 '옛날에 통했던 방법이 이제 안 통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되는데,

새로운 방법이 어떻게 보면 옛날 방법보다 더 쉽다, 쉬울 수 있다! 이게 포스트모더니즘 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따졌는데

이제는 따지는 것보다는 자기에게 유익하면 받아들이는 그런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때문에 믿음에 대해서 거부하던 사람도

이제는 내가 마음에 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필요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옵니다

그러지 않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헌신적인 이유로 찾아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처음부터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까?' 이거 생각하고 교회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처음에는 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언가 필요하기 때문에 와요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든, 이적을 행하신 목적이든, 병자를 고치신 목적은

그 자체를 위한 게 아니고

당신의 복음, 당신의 천국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온 동네가 주님 찾나이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전혀 요동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일어나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 일을 위해 왔느니라'

당신은 그 새벽마다 기도 하시므로 왜 이 일을 해야 되는지를 일깨우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어떤 인기, 사람들의 필요에 좌우되지 않고

당신이 왜 오셨는가, 무엇을 하기 위해 오셨는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끊임없이 깨우치셨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당신의 사역의 순수함을 보존할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하나

사람들의 여러 가지 현실에 부딪히면서 그 순수함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는 이 목적으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까 저 목적을 위한 것이 될 때가 대부분입니다 대부분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이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 하는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도하느냐?'

 

예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신 후에

사람들이 다 당신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도

'우리가 다른 데로 가야 된다 내가 그 일을 위해 왔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담대함이 있으셨는데

 

우리는 기도하면서 무슨 기도를 하길래

'내가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이고, 그것을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잊어버릴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신앙을 통해

이것을 확인해야 되고, 또 챙겨야 되고, 바로 잡아야 되고,

그럴 때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일평생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