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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건설을 위한 헌물의 원리 + 언약궤

LNCK 2019. 11. 26. 21:57

https://blog.naver.com/karamos/222138896127

 

◈성막 건설을 위한 헌물의 원리         출25:1~9            2015년 설교

 

서론

 

출애굽기는 총 40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전체 내용이 세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1~18장까지는 ‘출애굽’(구원)을 말씀하고 있고,

19~24장까지는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율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25~40장까지는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25~40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성막’(Tabernacle)입니다.

성막에서 드리는 희생제사를 통해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에 성막이 중요합니다.

 

출25:1~9절은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절은 ‘성막건설을 위한 재정은 어떻게 공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3~7절은 ‘성막건설을 위한 헌물 또는 재료는 어떤 것으로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8~9절은 ‘성막건설을 위해 헌물을 드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성막건설을 위한 재정공급의 원리(1~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출 25:1~2).

 

헌물을 낼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의 헌물을 받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헌물이나 가리지 않고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내라고 하셔서 할 수 없이 헌물을 드립니다”라고 하는 자들의 것은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헌물을 받는 분이십니다.

 

헌금의 기본 원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되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억지로 드리거나 의무적으로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 35장에 성막건설을 위해 헌물을 드릴 때

즐거운 마음과 자발적인 자세로 드렸습니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출 35:5).

마음에 원하는 자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출35:21절에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마음에 감동된 자, 자원하는 자가 드렸습니다.

 

또 35:22절에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가슴 핀과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거리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왔으되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마음에 원하는 사람이 드렸고, 35:25절에도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낳고

그 낳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을 가져왔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진 29절에도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빙자

하여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이러하였더라”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헌물을 드렸습니다. 마음에 원하는 사람이 드린 것이지

억지로 하거나 의무적으로 할 수 없이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헌금은 즐거운 마음과 자발적인 자세로 드리되 적게 드리지 말고

후하고 넉넉하게 드리라고 하십니다.

 

출36:5~7절에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무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헌물을 가져오는데 너무 많이 가져와서

모세가 이제 그만 가져오라고 명했을 정도로 쓰기에 남을 헌물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색하게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 사람을 향해 인색하게 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넉넉하게 드리는 사람에게는 풍성하게 역사하십니다.

 

▲헌금의 기본적인 원리는 자발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되 넉넉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고린도후서 8:2~4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리스의 북부 지역을 마케도니아라고 하고, 남부는 아가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마케도니아(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가야 지역의 아테네와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지금 흉년을 만나 굶어죽을 형편이 되었으니

너희가 좀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1년 전부터 헌금을 하겠다고 약정을 해 놓고

동전 하나 모아놓질 않았습니다.

 

바울이 약정헌금도 드릴 줄 알고 잘한다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칭찬하고 다녔는데

공연한 말만 하고 다닌 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하면서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을 칭찬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약정한 것도 하지 않느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의 성도들은 헌금 강요에 못 이겨서 의무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헌금에 참여할 기회를 주시도록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의 성도들은 돈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에 헌금한 것이 아니라

극한 가난 속에서도 헌금을 했고, 힘에 지나도록 풍성하게 했다는 것이 바울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헌금을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이 복된 마음입니다.

 

침례교회는 국가가 종교세를 거두어 목회자들에게 급여를 주는 것(국가교회제도)이

비성서적인 제도라 여기는 교단입니다. 국가가 왜 종교세를 거둬야 합니까?

종교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설령 종교세를 자발적으로 낸다 할지라도 국가가 거둘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제도인 것입니다.

침례교회는 이런 제도를 반대합니다.

 

예를 들어, 국가교회제도를 시행하는 독일과 같은 국가는 목회자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 번은 독일에 가서 현지 목회자를 만나 보려고 낮 12시에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잠옷을 입고 나오는 것을 보고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독일의 목회자들처럼 게으르게 일할 수 없습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교회에 나와 설교를 해야 하고 또 설교 준비를 하며

목회자로서의 임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국가가 목회자의 봉급을 지급하는 제도는 비성서적인 제도인 것입니다.

 

한편, “내가 하나님의 신령한 계시를 받았으니 헌금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악한 거짓말쟁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기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나 헌금의 기본적인 원리는

자원함으로 넉넉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2. 성막건설을 위해 드리는 재료(3~7절)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출 25:3~7).

 

성막 예물은 금, 은, 보석으로부터 시작해서 각종 진귀한 베실과 가죽, 향품 등 최고급 재료들입니다.

이것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유한 물건 가운데 가장 좋은 물품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성막을 건설하는데 최고급 재료를 사용해야 할까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최고급 재료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400년 이상이나 노예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광야에서 이런 고급재료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이 재료들의 출처가 어디인지 출3:20~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

 

하나님은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패물을 요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웃집에 가서 패물을 달라고 하면

주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12:35~36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하는 대로 다 주었을까요?

그것은 열 번에 걸친 재앙으로 말미암아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 집의 장자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집집마다 장남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재앙이 무서워서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때리시고 겁박해서 재물을 빼앗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런 차원으로 이해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430년 동안 임금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일한 임금이 이보다 많으면 많았지 절대로 적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물품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련해 주신 것들입니다.

이후에 성막을 건설할 준비로 애굽 사람들의 패물들을 모아 광야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전도서 2:26절에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이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면 하나님이 그것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로 옮겨 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재물을 모으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에게 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신약시대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원리는 동일합니다.

고린도전서 4:7절에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명을 주셨고, 가정을 주셨고, 직업을 주셨고,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것뿐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10~11절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농부가 농사를 지어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농부가 노력해서 얻은 것입니까?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심을 씨앗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씨앗은 작은 것이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씨앗을 만들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컴퓨터로 씨앗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모기 한 마리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생명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농부가 노력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할지라도 씨앗과 비와 햇빛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힘으로 번 것을 왜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느냐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그 일부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드리는 것이 원칙이고,

적게 받은 사람은 적은 것을 드려도 하나님이 크게 보십니다.

 

막12장에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예수님은 이 사람들 가운데 가장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누구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갖은 노력을 다 하는데도 굶어죽는 사람이 있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 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우리의 마음 상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께 헌신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정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넉넉하게 드리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28세에 예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항상 돈이 없었습니다.

술집에 가서 탕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니까

십일조를 드리고 선교헌금도 드리고 각종 헌물을 많이 드렸는데도

술집을 다닐 때보다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왜 자꾸 십일조를 내라고 하느냐?”고 묻기 전에

자기 쾌락을 위해 쓰는 돈이 얼마인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제 경우는 술집을 다닐 때 항상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아무리 드려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3. 성막 건설을 위해 헌물을 드려야 하는 이유(8~9절)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 25:8~9).

 

도대체 성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성막을 위해 예물 드릴 것을 명하셨고,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헌물을 드렸을까요?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가지 큰 의미가 있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첫째, 성막은 하나님이 지상에 특별히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편재하시는 분이시지만 성막에 특별히 거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거하실까요? 구름같이 거하십니다.

 

그래서 출40:34~35절에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완공하고 하나님께 봉헌할 때에 구름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 구름은 ‘영광의 구름’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쉐키나’(Shekinah)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임재하시며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는 곳이 바로 성막입니다.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둘째, 성막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하는 중심지(Center of Worship)입니다.

성막에는 찬양이 있고 기도가 있고 희생제사가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귀중한 곳입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반드시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막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의 보좌가 있는 ‘궁전’(Palace)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보좌는 하늘에 있지만 하늘 보좌의 지점이 바로 성막입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이스라엘과 열방의 모든 민족을 통치하십니다.

 

다윗이 솔로몬 성전을 위한 예비를 마친 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바 되었으나

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이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대상 29:1).

 

여기 ‘전’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궁전’을 의미하는 ‘Palace’로 쓰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왕이 거하는 처소를 의미합니다.

 

역대상29:11~12절에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 보좌에 앉으셔서 부하게 할 자를 부하게 하시고, 귀하게 할 자를 귀하게 하시며

크게 할 사람을 크게 하시고 낮출 사람은 낮추시며 강하게 할 자는 강하게 하시고

약하게 할 자는 약하게 하셔서 만유를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넷째, 성막은 하나님과 죄인들이 화목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죄인들이 와서 희생제사를 드리며 제물의 피를 여호와께 드리면

하나님이 그 피를 보시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매일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죄인이다. 내게 함부로 오지 마라. 그러나 너희가 희생제물을 가지고 와서

피를 바치면 내가 그 피를 보고 너희 죄를 용서한다”,

“너희를 위해 이처럼 희생제물이 될 메시아가 올 것이다. 너희는 그 피를 의지하여

죄 사함을 받고 그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매일 예표로서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출25:9절에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자 하는 죄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화목의 방식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타 종교인들의 열렬한 종교심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타 종교인들은 자기들이 정한 방식대로 각자의 신에게 접근하는 반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은 죄인들의 대속제물이 피를 흘려야 하고,

하나님이 그 피를 보시고 만족하셔야만 죄인들이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 피를 흘리셨고,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만족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사람들의 죄를 그 피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피로 죄를 사해주시도록 간구하고,

믿음을 보이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죄 사함과 화목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막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성막과 신약시대의 예배당은 의미의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막은 신약시대의 교회를 예표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은 건물이고,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점에서 의미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성막과 오늘날의 예배당은 공통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중심지라는 것과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예배당은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회 와서 예배도 하고 성경공부도 해야 하지만 놀기도 하고 운동도 하며

교제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이 성도들과 우리 후손들의 삶의 센터,

즉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센터가 지어져야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더욱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건설에 헌신했듯이 우리 모든 성도들도 예배당 건축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헌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blog.naver.com/karamos/222138895747

 

◈지성소 안의 언약궤            출25:10~22

 

서론

 

몇 편에 걸쳐 시리즈로 개봉된 유명한 영화 가운데 ‘인디애나 존스’가 있습니다.

1981년에 1편이 개봉되었는데, 그 제목이 ‘레이더스’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원제목은 ‘Raiders of the Lost Ark’(잃어버린 언약궤의 수색자)였습니다.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아 나서는 고고학자에 대한 이야기로 흥미로운 주제답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이 있습니다.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이 이끄는 군대를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무적의 군대로 만들기 위해

언약궤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히틀러가 언약궤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 동기가 되어 영화 ‘레이더스’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 지금도 언약궤를 찾을 수만 있다면 엄청난 부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언약궤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민수기 10장 35~36절에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 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모세는 언약궤가 나아가면 원수들이 물러가고,

궤가 정지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시도록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기도한대로 언약궤가 행진할 때 원수를 물리쳐 주셨고,

정지할 때는 백성들에게 평안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언약궤를 만들라고 하신 이유는 언약궤 자체에 뭔가 특별한 마술적인 힘이나

신비로운 능력을 넣기 위함이 아니셨습니다. 언약궤는 마술 상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 속에는 이 언약궤를 마술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려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4장을 보면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었을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를 ‘아벡 전투’라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대패하게 됩니다.

군사 4,000명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의 불량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당시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왔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에 언약궤가 있으면

반드시 블레셋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참하게도 이스라엘의 군사 3만 명이 죽고, 언약궤는 빼앗겼으며

홉니와 비느하스 역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아주 불량한 자들이었는데,

백성들이 와서 제사를 드린 후 고기를 삶으면 갈고리를 만들어 제물을 삶는 솥에 넣어

아무거나 걸려 나오면 그것들을 차지해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에서 수종드는 여자들과 동침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매우 탐욕스럽고 정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그들에게 언약궤가 있은들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전쟁도 패배하고 언약궤도 빼앗겼는데, 엘리 제사장이 패전 소식을 듣더니

의자에서 넘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또 비느하스의 아내였던 엘리의 며느리는

아들을 낳다가 죽었는데, 죽기 전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고 죽었습니다.

‘이가봇’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터로 나갔는데도 대패했을 뿐만 아니라 빼앗긴 적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언약궤 자체에 신령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할 때 언약궤가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언약궤의 구조, 역사 속에서 감당했던 역할,

그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언약궤는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언약궤’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200번 이상 사용되었고, 그 명칭도 22가지나 됩니다.

궤(출 25:14), 여호와의 궤(삼상 4:6), 하나님의 궤(삼상 4:18),

언약궤(수 3:6), 증거궤(출 25:22), 법궤(출 39:35)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언약궤’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여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10장 3절에 “내가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고 처음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언약궤를 만든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모세가 손수 만든 것은 아닙니다.

 

출 37장 1절에 보면 ‘브살렐’이라는 기술자가 나오는데,

그를 고용하여 자신의 감독 아래 하나님이 주신 계시 그대로 언약궤를 만들도록 한 것입니다.

브살렐은 성령의 감동으로 언약궤를 제작하였습니다.

 

언약궤를 만든 시기는 출애굽 연대가 B.C. 1446년이기 때문에

이와 비슷하게 B.C. 1446~1447년경으로 추정합니다.

언약궤의 재료는 ‘조각목’인데, 이 나무는 ‘싯딤나무’라고 불렸고 우리 말로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이 아카시아 나무는 하얀 꽃이 피고 향기가 대단히 좋은 나무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아카시아 꽃을 따 먹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공해가 있어서 먹기 힘들지만 대단히 향기로운 꽃입니다.

 

특히 아카시아 나무는 내구성이 강하고 벌레가 침투하지 못하는 나무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 싯딤나무는 언약궤를 만드는데 쓰였고

떡상이나 분향단, 성막의 기둥과 널판 등에 널리 사용된 재료였습니다.

 

언약궤는 직사각형으로 생겼고, 크기는 가로 2.5규빗, 세로 1.5규빗, 높이 1.5규빗의

작은 나무상자입니다. 여기서 ‘1규빗’은 ‘팔꿈치에서 중지 끝’을 가리키는데

45cm에 해당하는 길이였습니다.

 

그래서 2.5규빗은 116cm가 되고, 1.5규빗은 76cm가 됩니다.

그러니까 언약궤는 높이가 76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무상자입니다.

 

또 언약궤는 안팎을 모두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아랫부분에는 네 개의 도금한 고리를 만들었고, 두 개씩 채를 꿰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이 채 또한 싯딤나무로 만들어 금으로 입혔습니다.

그리고 채는 항상 끼워 놓은 상태로 지성소에 놓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언약궤를 다룰 때 사과상자를 다루듯이

아무렇게나 다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민4장에 언약궤를 운반할 때는 반드시 고핫 자손이 담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만지거나 뚜껑을 열어 보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

절대로 만지거나 열어 보지 말고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핫이 누구입니까?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셋째 아들이 레위입니다.

그리고 레위에게는 게르손, 고핫, 므라리라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아들이 바로 고핫입니다.

 

레위의 차남이었던 고핫에게는 아므람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고모였던 요게벳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아론과 모세가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핫을 특별히 사랑하셨고, 그래서 그 자손들로 언약궤를 메고 운반하도록 하셨습니다.

 

레위 지파 중에서도 고핫의 자손들이 법궤 운반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고핫의 손자였던 모세와 아론에게 지도력을 주셔서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었고, 아론은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을 삼으시고, 나머지 레위 지파 족속들은 일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을 멈추면 진 한 가운데 성막을 세웠고,

행진을 시작하면 다시 성막을 해체하였는데,

언약궤를 운반할 때는 함부로 만질 수 없었기에 지성소와 성막 사이에 있는 휘장으로 덮고,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덮은 뒤,

마지막으로 청색 앙장을 덮어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고핫 자손들만 메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경우에는 일반 제사장이 운반하기도 하였습니다.

 

여호수아 3장 4절에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앞서 메고 가면 백성들은 2,000규빗의 거리를 두고 뒤쫓아 오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작은 나무상자처럼 보이는 언약궤라 할지라도

극도의 주의와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지성소에 두었고, 위판을 ‘속죄소’라고 불렀습니다.

금판으로 만들어진 뚜껑 ‘속죄소’는 대제사장이 피를 뿌리는 곳이었고,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곳이라 하여 ‘시은소’(Mercy seat)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판에 두 그룹천사가 있었는데, 날개를 편 채 언약궤를 덮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은 천사라 할지라도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쳐다볼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언약궤 속에 들어 있던 것은 십계명, 즉 두 개의 증거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증거궤’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후에 두 가지가 추가되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4절에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과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모두 인간의 죄를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십계명은 인간이 십계명의 계명들을 어긴 죄를 상징하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도전한

고라, 다단, 아비람, 족장 250명의 반역죄를 상징하고,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먹고 살았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박한 식물이라며 항상 불평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나는 하얀 과자처럼 생겨서 먹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걸릴 일도 없는 최고의 건강식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것을 40년 간 무료로 먹었으면서도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언약궤 속에 있는 것들은 모두 인간의 죄를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그 위에 피를 뿌리는 것은 희생제물의 피가 인간의 모든 죄를 덮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언약궤는 어떤 역할을 했나?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Shekinah)이 임재해 계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절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도 본 자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친구처럼 이야기하던 자라고 했던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약궤 위 속죄소에 임재해 계실 때는 구름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을 ‘쉐키나’라고 하는데, 성경에 언급된 단어는 아니지만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미슈나, 탈무드, 미드라쉬에 나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실제로 임재하시는 장소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브살렐을 통해 만든 언약궤는 고핫 자손이 메고

진행시에는 이스라엘의 진영 선두에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 길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또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요단강이 가로막혀 있었는데,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강에 첫 발을 내딛자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끊어지고

요단강 바닥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이 어떻게 갈라질 수 있느냐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하지만,

저는 믿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강 하나 갈라지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강을 못 가르시겠습니까?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합니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큽니다. 우주에 있는 이 지구 하나는 지극히 작은 한 행성에 불과합니다.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강 하나를 못 가르시겠습니까?

바닷물을 증발시켜 버릴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 전투로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 성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수 6:3~5).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도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들 앞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곱째 되던 날 여리고 성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언약궤는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후 언약궤는 엘리 제사장시대까지 실로에 있었습니다.

언약궤가 처음부터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4장 6~7절에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엘리의 두 아들이었던 불량자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벡 전투에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다가

블레셋 군사들에게 언약궤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약 7개월 동안 블레셋의 여러 도시들로 가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언약궤를 먼저 아스돗의 다곤 신전의 다곤 신상 옆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다곤 신상이 신전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연의 일로 생각한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상을 다시 잘 세워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날에는 고꾸라져 있을 뿐만 아니라 목과 손목이 다 잘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하루를 더 놔두었으면 발목까지 잘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 언약궤를 다른 도시로 옮겨 놓았는데 독종이 생기고

환란이 생겨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이스라엘로 돌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수레에 실린 언약궤는 블레셋에서 가장 가까운 이스라엘 도시였던 벧세메스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주민들이 언약궤가 돌아왔다고 그 뚜껑을 열어 보았다가

70명이 즉사하게 됩니다.

만지지 말라하셨고, 열어보지도 말라 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후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20년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렇게 오래 언약궤를 모셨는데도

아비나답이 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주 이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오래 섬겼어도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다윗은 B.C. 1010년, 30세가 되던 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통치하고,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겨 33년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난 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 진실한 사람이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다윗은 언약궤를 운반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언약궤를 모셔오기 위해 30,000명의 군사를 모으고,

언약궤를 옮길 좋은 수레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운반하는데 무슨 군사가 필요합니까?

그저 고핫 자손과 제사장을 모시고 가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드디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게 되었고,

40년간 통치하다가 B.C. 970년 아들 솔로몬이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된지 4년 만에 성전건축을 시작해서 7년 만에 완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완공된 솔로몬 성전 안 지성소에 모셔두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을 하나님께 올려 드릴 때, 열왕기상 8장의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강한 임재와 능력으로 인해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으로 인해 제사장들이 감히 서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쓰러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 큰 영광을 올려 드리고도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과 언약을 어기고 죄를 짓고 우상숭배에 빠져

B.C. 58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바벨론 군사들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난 후 언약궤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70년의 기한이 마치고 바사의 고레스 칙령으로 말미암아

고향 땅으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지었는데,

외경에 따르면 이 스룹바벨 성전에는 언약궤가 없었다고 합니다.

 

오늘 날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자기 나라 안에 언약궤가 있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에티오피아 종교계의 최고지도자도 본 적이 없다는 언약궤가 그곳에 있을 리는 만무해 보입니다.

 

지금 언약궤를 발견한다면 고고학적인 가치가 있을지는 몰라도 영적인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재가 되어 모두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3. 언약궤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시는 곳’(Place of Revelation)입니다.

출 25장 22절에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이 언약궤의 속죄소에 영광의 구름으로 임재하시고,

그 곳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장소’(Place of Answering Prayers)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후 아이 성으로 침공을 시도했다가 패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7장 6절에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 앞에서 “하나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우리가 어찌하여 아이 성 전투에

패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아간이라는 자가 범죄했기 때문에 나의 영광이 너희와 함께 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간을 붙잡아 돌로 쳐 죽이고 아골 골짜기에 묻고 난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다니엘 역시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던 것입니다.

 

▲셋째, 언약궤는 당신의 백성들을 ‘용서하시는 곳’(Place of Mercy)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곳입니다.

 

레위기 16장에 보면 대제사장 아론은 제사장 의복을 입고 대속죄일(7월 10일)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딱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와 자기 가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수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속죄소에 일곱 번 뿌렸고, 다시 나와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또 피를 뿌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말 ‘화목제사’라고 번역된 영어 ‘Propitiation’입니다.

‘화목제사’라는 우리말이 적절한 번역은 아니지만 설명할 수 있는 그 밖의 단어가 없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범죄하는 죄인을 향해 하나님은 진노하는 분이십니다.

우상숭배하고 굿하고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게 됩니다.

오벧에돔처럼 3개월만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화목제사’(Propitiation)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Propitiation’을 적절하게 대치할 단어가 없지만,

이를 설명할 대표적인 이야기로 ‘심청전’이 있습니다.

 

심청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자신의 몸을 인당수에 던졌습니다.

용왕의 진노를 풀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이 ‘Propitiation’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십자가를 모진 고난을 담당하시며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것은 결국 자기 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향한

모든 진노를 없애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를 덮으시는 것입니다.

 

속죄소 금판은 죄를 덮는 판입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두 덮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그 피의 공로로 죄가 덮어져서 천국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예수님의 보혈로 덮인바 되지 않고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해 계신 곳’(Place of God’s glory)입니다.

영광의 구름이 속죄소 위에 임재하시면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도 무너지는 엄청난 역사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리면 언약궤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B.C. 587년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동문으로 나와 예루살렘 동편 산에 머물렀다가 바벨론으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언약궤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참으로 겸손한 분이십니다. 이 작은 나무상자 위에 임하신 하나님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모실 수 없는 광대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작은 언약궤 위에 임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매우 겸손한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겸손한 인품을 가져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마귀의 종입니다. 마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그래서 마귀 숭배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성품이 매우 교만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사과상자 다루듯이 취급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지고 열어봤다가는 다 죽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택한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언약궤를 볼 때에 십계명을 어긴 죄, 하나님께 반항한 죄,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며 살았던 모든 죄를 떠올리며 “나는 예수님을 믿고 그 피로 덮인바 되었다”고

고백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덮여진 그리스도의 피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람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그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가림 바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그런 성도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