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깨달은 자들은 개혁운동으로 떠밀려갔다 계2:2~3 19.10.27.계시록강해(13) 중
◑종교개혁은 우연히 일어났다, 루터는 의도하지 않았다
오늘은 종교개혁 502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에 교수로 있던
33살 밖에 되지 않은 마르틴 루터 교수가
자신이 그 시대의 로마교회가 가르치고 있던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그리고 성경으로부터 자기가 확신하고 있는 그 95개 논제를 써서,
그 당시 교수들이 보통 그렇게 하던 방식인데,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에 대좌보처럼 부쳤습니다.
붙였는지, 안 붙였는지는 역사적인 팩트체크가 더 필요한데
하여튼 그 일이 도화선이 되어서 세계의 역사를,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흔들어놓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그런 일대 사건이 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루터가 의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일이 그렇게 커질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만큼,
그리고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들이 시시각각 있어야 하는
그런 상황으로 치닫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그 일을 했던 것이죠.
시작은 루터의 신학논제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그 일을..
그런 얘기 하잖아요. '역사는 우연인가 필연인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가 막히고.. (기가 막혀서 우연이죠)
근데 우연이라고는 절대로 돌릴 수 없는,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섭리라고 우리는 보통 말아죠.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말하면 잃어버린 복음을 회복한 사건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로마교회의 기득권, 전통, 기타 여러 가지
그들의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그런 역사가 켜켜이 쌓이면서
하나님의 복음은, 오래된 복음,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
그 복음은 장사 지낸 바되어 거의 무덤에 묻혀 있었고
아무도 그 무덤을 파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그런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시작하신 것이죠.
오늘 특별히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있는 이 말씀을 계속해서 상고 하지만
이 말씀이 종교개혁 502주년을 기념하기에 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종교개혁> 이라는 이 교회사의 대사건이 주는 놀라움은
세계사를 변혁 시킨 하나의 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제가 '운동'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어떤 일단의 사람들이 의도를 가지고 조직화하거나
그 조직화 해서 사람들은 동원하고,
그들을 통해서 뭔가를 이루어내는
그런 의도된..
그리고 일단의 무리들이 의해서 조직화된
그런 운동 차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 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시작이 되는데
의도 하지도 않았고, 계획 하지도 않았던 일이었고
그는 다만 한 사람의 신학자였고, 신학 교수였고, 설교자였고, 탁월한 저술가 였습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시편과 로마서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주로 강의했는데,
그러던 중에 그는 복음을 깨닫게 됩니다.
천년동안 묻혀 있던 복음을 깨닫게 된 거죠.
우리는 다 그 시대의 아들과 그 시대의 딸 들입니다.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정신사조와 그 시대가 가르치고 있는 세계관과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것들의 세례를 받으면서 자란다고요.
알게 모르게 우리들은 그 시대를 뛰어넘을 수가 있는 그런 탁월함을
일반적으로 지니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1세기에 바울이 전했던 복음,
그리고 1100년 전에 어거스틴이 얘기했던 은혜의 복음을,
다시 루터에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가 이런 고백을 하는데, 제가 인용합니다.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몹시 애쓰는 나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하나님의 의' 였다.
그것은 이 '의' 라는 말을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요,
불의한 사람들을 공정하게 처벌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의 상황으로 말하면 수도사로서는 털끝만치도 흠잡을데 없었지만,
(바울의 고백 같은 얘기죠)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괴로운 죄인이었기에
도무지 나의 공로를 가지고는 그분을 누그러뜨릴 그분의 의로움을 누그러뜨릴 자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공정하고 성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증오하고 그분에게 투덜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는 바울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 말에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계속 생각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던 어느날,
나는 '하나님의 의' 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죄 없는 것으로 여기시는 그 '의' 라는 걸 깨달았다. (이신칭의죠)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지녔고,
전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내 속은 증오로 차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게 되었고 더 큰 사랑을 불러일으켰다.
바울서신에 이 대목이 나에게는 하늘로 통하는 하나의 문이었다."
여러분들도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을 배우면서
하늘로 통하는 한 문을 발견하셨나요?
하늘로 통하는 한 문!
루터에게는 로마서가 그랬습니다.
그는 자기를 사로잡은 복음의 진리를 부지런히 설교했고, 가르쳤고, 글로 썼습니다.
그런 말을 하죠. 교회사가들만 얘기가 아니라 일반적인 세계역사에서
'구텐베르크가 아니었으면 종교개혁은 성공할 수 없었다!'
구텐베르크가 마르틴 루터보다 뒤에 나왔으면 종교개혁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텐베르크가 루터보다 약 50년 앞섰고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그 당시에 소위 가장 잘 나가던 산업은 프린트(인쇄) 사업이었습니다.
출판 사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무슨 글을 쓰기만 하면,
그들 인쇄업자들은 그 글을 받아서 책으로 만들어서 유럽 전역으로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돈도 벌었죠.
당시 인쇄업자들이 종교개혁에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물론 루터는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루터의 설교와 루터의 글들이 출판되어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면서
당시 독일이라고 하는 나라는 근대 역사에서 가장 후진국이었습니다.
민족 국가들이 막 유럽에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독일은 여러 제후들에 의해서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근대국가가 제일 늦게 형성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로마 교황청이 볼 때 독일은 정말 시골 중에 시골이란 말이에요.
근데 그 시골에 있는 한 시골 수도사가 쓰는 글과 그가 하는 설교들이
로마의 교황청을 흔들었다고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와 여러 유럽의 제후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고요.
기가 막힌 일이지요.
결국 루터는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가 거부할 수 없는 자리까지 가게되는데
1521년 37살이 된 루터는 독일의 보름스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제후들이 모이는 의회에서
발언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발언할 기회라기 보다는
이것은 루터 한테
'네가 지금까지 주장하는 신학적 견해, 네가 써온 책들에 나타나는 주장들,
네가 설교 하고 있는 그 얘기들, 그것들을 철회 하겠다고 인정하라'
하는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공적으로 그에게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요구하는 것이죠.
루터는 그 무시무시한.. 거절하면 자기 목숨이 더 이상 붙어 있을 수 없고,
거절하면 더 이상 자기를 이 땅에서는 합법적으로 지켜줄 수 있는 왕도, 제후도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그리고 그 당대 유럽의 최고의 왕들이 모인 그 의회에서
이 시골 수도사 한 사람이 서서 압박을 받는 것이죠.
철회하라고!
아마 루터의 생애를 전기를 통해서나 영화를 통해서 읽어 보셨거나 보신 분들은
루터의 생애에 가장 유명하고 가장 멋진 장면으로 기록하는 한 장면이 여기서 나옵니다.
루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와 제후들 앞에서
자기가 쓴 책들과 주장들을 철회하겠느냐 하는 질문을 받자
루터는 떱니다. 그리고 하루만 자기에게 시간을 달라고 구합니다.
그리고 이틑날 그 시간이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철회할 수도 없으며 철회 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면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도우소서!" 이것이 그가 한 대답이었습니다.
서슬 퍼런 황제의 권위 앞에서
자기 목숨이 걸린 순간에 루터는
자기가 깨달은 복음의 진리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에서 발견했던,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발견했던
그리고 그 렌즈로, 복음의 렌즈로 성경을 보기 시작하자
성경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다 복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 복음이 자기를 사로잡은 것을 그는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숨이 떨어진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는, 이 대답이 자기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고, 그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참 복음을 믿은 분들로 인해 되어진 종교개혁의 전개
종교개혁은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한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전개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이 마르틴 루터 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한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그 전개는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한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전개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자기 신앙 논제를 붙이던 1517년 즈음에
스위스의 아인지델른 에서는 울리히 쯔빙글리 라는 한 수도사이며 사제가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도 역시 로마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부인하면 안 되는 것이죠.
로마교회의 권위는 성경보다 위에 있었으니까요. 부인하면 안 되는 거죠.
부인 하면 안 되는 것을, 그는 자기가 발견한 복음의 진리 앞에서
로마 교황청이 아무리 높고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있어도 진리를 거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설교했습니다. 쯔빙글리는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한 것은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 설교와 글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그 역시 자기의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임을 알고서도
거침없이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울리히 쯔빙글리와 마르틴 루터는 서로 짜고 벌인 개혁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종교개혁자보다는 좀 늦은 시기에
프랑스에서 존 칼빈도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칼빈은 프랑스 사람이기 때문에 불어로 쟝 깔뱅 이라고 부르는 거지요 요즘엔.
옛날에는 미국식 발음으로 하다가.. 원래는 쟝 깔뱅입니다.
우리는 존 칼빈 이라고 미국식으로 바꿔가지고 부르죠.
여하튼 존 칼빈,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이 법률 공부하던 20세의 법학도,
칼빈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회심을 경험하게 되죠.
칼빈은 자기 얘기를 거의 안 한 사람입니다.
놀라울 정도로 자기 얘기를 안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편 주석 서문에서
자기 회심의 대한 얘기를 간단하게 쓴 게 있는데, 잠깐 인용하면
"그래서 나는 철학 공부를 그만두고 법률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육신의 아버지)
신실하게 그 일을 행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숨겨진 섭리의 고삐로
(멋진 표현이죠 자신의 숨겨진 섭리의 고삐로)
내 인생의 길을 결국 다른 방향으로 굽게 하셨다.
처음에 내가 천주교회의 미신들에 너무나 완고하게 빠져있어서
그렇게 깊은 수렁에서 나를 끌어내기가 더더욱 쉽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내 나이에 비해 매우 고집스러웠던 나의 영혼을
예기치 못한 회심을 통해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갖도록 정복하였다.
이런 식으로 나는 참된 경건의 어떤 맛을 본 뒤에
더 무관심했던 다른 과목들을 전적으로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러한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신학을 접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1년이 채 못 되어 더 순수한 교리를 갈망하던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초보자였던 나에게 배우기 위해 나를 자주 찾아왔다."
이 사람 칼빈은 좀 독특한 사람이에요 정말로.
1년 동안 공부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칼빈에게 배우기 위해 찾아 왔어요.
그리고 나서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살았던 7년이 지나고,
27살이 되었을 때 그는 교회역사의 불후의 명작 중에 명작, 고전 중에 고전인
<기독교강요>를 출판하게 됩니다. 27살이에요, 만으로는 26살이었습니다.
이 책은 종교개혁의 신학적인 기틀을 잡는데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칼빈이 평생 했던 일, 그것은 설교와 저술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운동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유럽을 뒤집어 놓겠다 세계역사를 뒤흔들어 놓겠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했고 복음을 글로 썼습니다. 이들 만이 아닙니다.
독일의 스트라스부르크 에서는 마르틴 부처 라는 사람이,
그리고 존 칼빈을 스위스의 종교개혁 제네바의 종교개혁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던
불어권 스위스 지역의 종교개혁자 귀욤 파렐 이라고 하는 사람,
또 이탈리아의 피터 마터 버미글리 (Peter Martyr Vermigli 1499~1562) 라는 사람,
제네바에서는 또 다른 테오도르 베자 (Théodore de Bèze, 1519~1605),
스코틀랜드에는 존 낙스
잉글랜드에는 토마스 크랜머..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놀랍죠. 서로가 짜고 (개혁) 한 게 아니에요.
그들은 놀랍게 하나님께서 복음의 진리를
자기들이 있는 나라에서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설교하게 하셨고
그것을 글로 써 나가게 하셨어요. 소름이 돋는 일이죠. 16세기 어간에 말이에요.
15세기 말에 태어난 사람들, 16세기에 태어난 사람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런 일들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단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복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단순히 '아 약이 배탈에 좋다더라' 하는 것을 깨닫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것은 자기 인생을 뒤집어놓는 사건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인생이 그 전과 그 후가 도무지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게 만드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자기들을, 율법의 고삐로부터 해방시키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한 사람들!
문법적으로 모순입니다.
사람들이면 사람들이고, 한 사람이면 한 사람이지
'한 사람들'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사람들'이 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뭔가 하면,
그들은 다 고독한 주장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거해보면 많지만, 실제로 그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제들이 있었고,
그 시대에 로마 교황청이 가르치는 얼마나 지배적이고 힘이 있는 교리와 거짓된 가르침들 속에서
그들은 고고하게 자기들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복음의 진리를 선포했고
그리고는 죽음의 자리로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자 토마스 크랜머 (Thomas Cranmer 1489-1556)는
많은 강력한 가톨릭교도였던 메리 1세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서
결국은, 루터 와는 달리, 자기의 종교개혁의 교리를 포기하겠다고 하는,
철회하겠다고 하는 문서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생명을 부지하게 되죠.
그리고 나서 곧 그는 그 사실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베드로처럼, 그리고는 철회한 것을 다시 철회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 그는 화형장에 서게 되죠.
유명한 일입니다.
토마스 크랜머는 그 화형장에서, 그 타오르는 불길 속에
자기 오른손을 가장 먼저 집어넣었습니다.
왜냐면 이 오른손이 주님을 배신 하겠다고 배반 하겠다고 서명한 그 손이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화형대에서
"내 마음으로 생각했던 진리에 모순되게
내 손으로 썼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거부합니다.
사실상 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겁쟁이처럼 서명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쇠퇴해지면서 내가 직접 썼거나 서명했던 목록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들은 모두 진실하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내 마음과 모순되게 서명했기 때문에
내 손이 제일 먼저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불에 탈 때, 내 손이 제일 먼저 불탈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거짓 복음'과의 싸움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을 듣습니다 칭찬을 됐습니다.
지난주까지는 책망을 봤는데, 칭찬을 듣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칭찬입니다.
1세기, 사도들이 살았던 시대에
초대교회를 어지럽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다른 복음의 문제였습니다.
1세기의 교회는, 우리처럼 제도적인 신학교가 있어서
제도적인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담임목사를 한 교회가 하는 그런 체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사도들의 추천서, 유명한 사도들, 베드로, 요한, 바울이라든지
사도들의 추천서를 받아와서 '내가 누구에게서 배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와서 한 달 남짓, 혹은 보름 남짓 머물면서
교회에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순회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추천서를 가지고 오면
추천서를 보고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이 머무는 동안에 그들의 모든 쓸 것들을 공급하고 교회들은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니까 거짓 교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죠.
말하자면 사문서위조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들은 배부르게 잘 대접을 받고, 대접을 요구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그들은 거짓된 교리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초창기에 그 거짓된 교리의 대부분은 율법주의, 유대주의 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흘러가면서 온갖 사이비 이단 같은 교리들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하고 나서 교회가 세워진 다음에
갈라디아를 떠나자마자 이 사람들은 어떻게 냄새를 잘 맞는지
바로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와서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죠.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험한 말로 시작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갈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거짓 교사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저주를 거듭 말하면서 바울 사도는 굉장히 심하게 책망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요!
그리고 다른 복음의 반응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사도가 이렇게 강한 논조로 말할 수 있는 힘,
여러분 웬만해서 우리가 어떤 편지를 쓰거나 사람을 대면할 때 쉽지 않습니다.
바울사도가 이렇게 심하게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복음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갈라디아서 2장 으로 가서 보면
베드로가 외식하는 걸 보고 베드로를 면전에서 책망합니다.
여러분, 베드로를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이 주님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주님 하고 3년 동안 같이 있었던 사람이고
자기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주님의 수제자 격이라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권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을 3년동안 따라다닌 사람도 아니었고
도리어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뒤늦게 그는 사도의 대열에 합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짜 시비가 늘 좇아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감히, 감히 베드로한테
그것도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면전에 대 놓고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왜요? 복음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성격이 굉장히 좀 까칠하고 못됐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아니요 우리는 아무리 순하고 아무리 부드러워도
복음 앞에서는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성경은 얘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바울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요한사도, 사랑의 사도라고 일컬어지는 요한이
요한이서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이서 7절 한번 보십시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성경을 사랑한 루터
1533년 50세가 된 마르틴 루터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해마다 성경을 두 번씩 읽어 봤다.
성경을 크고 강한 나무,
성경 안에 기록된 말씀들을 작은 가지들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가지들에 무엇이 달려 있는지,
그리고 그 가지들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열망에 불타올라
모든 가지들을 흔들어댔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죠.
이것은 신학자나 목사, 교회사의 어떤 위인들만의 전유물 일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다시피 말이죠.
벧샬롬교회는 21세기 초반에 고고하게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교회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시고, 일하시고, 역사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래된 복음,
사도들이 바른 복음이 한국교회 강단, 강단에 회복되는 일에
우리를 사용해 주시기를 겸비한 심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종교개혁 만이 아니라 2천년 교회역사 전체가
사실상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의한 역사였습니다.
언젠가 허락하시면 제가 목회서신에 썼습니다만
교회사를 여러분들과 같이 강의,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역사 속에서 우리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 그 어마어마한 하나님께서 큰 복락을 부어주셨던 사건들,
그것을 '부흥' 또는 '영적 각성' 이라고 얘기합니다
'부흥'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당신의 교회에 찾아오셔서
교회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급격하게 회복하게 하시는 사건입니다.'
주권적으로 찾아오셔서, 갑자기 찾아오셔서,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신을 벗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다는 것이 아무런 두려움도,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는
그런 교회들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로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를,
급격하게 찾아오셔서 그것을 가르쳐 주고 회복시키는 그런 사건이 부흥입니다.
교회역사에서 하나님은 부흥을 통해 잠자는 교회를 깨우셨고,
무능력한 교회를 흔들어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찾아오심!
이 부흥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가장 놀랍게 확장시켰습니다.
진정한 선교의 능력은 언제나 부흥과 함께 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부흥입니다.
여러분 한국교회 지금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이 아닌 것들을 전하는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흥 입니다.
벧샬롬 교회에 부흥이 필요합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고, 한 사람 두 사람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한 몇 사람이 아니라
우리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바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교회,
그리고 성도의 삶을 회복하는 것, 이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부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종교개혁도 인간에게 달려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애당초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만 주님의 명령을 이 말씀을 통해서 받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성도가 되라,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교회가 되어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심정으로 우리는 그렇게 그렇게 해야겠습니까?
제가 오랫동안 사랑해 온, 너무너무 제가 좋아하는 인용문이 하나 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목사님이었던 윌리엄 스프레이그의 말입니다.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William Sprague, 1795 - 1876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겸손해지며
자신의 무능함을 깊이 느끼는 곳마다
또한 단순한 도구들로 사용될 마음을 가지게 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고 부유한 복락이 부어졌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신적 감화의 필요성을 조금밖에 느끼지 못하고
자신감을 갖고 일하는 곳에서는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부지런히 수고 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노력한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그들이 수고하는 자취에 아무것도 없는 비참함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연약하다고 느끼는 순간,
여러분이 하는 일이 너무 큰 것 같아 보일 때,
여러분이 가는 곳에 가장 무서운 장애물들이 가로 막고 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소망의 다른 모든 원천에서 떨어져 나간 것 같을 때,
그런 때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교리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수고하는 수고를 멈추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기뻐하십시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말씀이고
하나님을 계시하여 드러냄으로써
저희속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말씀들인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말씀을 더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사랑하게 하시고,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502년 전에 종교개혁을 통해서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이 복음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대에도 저희들이 이 복음의 진리를 위해 싸우게 하시고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게 하셔서,
고고하게, 비록 지금은 외롭고, 대세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어서 힘들지라도
이 길을 주 앞에 신실하게 잘 감당하며 걸어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교회,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느 날 저희들 가운데 주권적으로 찾아오셔서
(부흥으로) 저희를 놀라게 하시는
그 복된 역사를 구하며 그런 날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