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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어

LNCK 2019. 11. 29. 21:20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어                  창49:22-26                   출처

 

▲목자의 무성한 가지

 

창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이 받은 복은 샘 곁에 무성한 가지가 되는 복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가뭄이 오면, 웬만한 나무들은 다 말라죽게 됩니다.

샘 곁에 있는 나무만 견딜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별 차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뭄이 오면 금방 드러납니다.

비가 오면 모든 곳에 물이 넘쳐흐릅니다.

 

아프리카에도 비가 옵니다. 홍수가 날 정도로 비가 옵니다.
그런데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다 말라버리고, 샘 곁에 있는 나무만 살게 됩니다. 

 

비가 오면, 어디에나 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있으면 다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와 같은 삶인데, 평소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어려움이 오면,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분명히 결정됩니다.

삶의 기준은 샘 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잘 되면 마음을 놓습니다.

‘아 이제 되는가보다’라고 생각하며 아무 곳이나 따라갑니다.

세상을 보면 잘 되는 것 같아 보이다가도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뀝니다.

 

비가 내릴 때는 비가 신나게 오는데, 비가 멎으면 비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바뀌는 것처럼 세상이 그렇게 변화무쌍합니다. 요동치고 불안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잘 된다고 계속 잘될 줄 알고 있으면 안 됩니다.

특히 잘 될 때에는 눈이 어두워지고, 판단력이 무디어집니다. 

 그런데 지금 잘 된다고 계속 잘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외부적으로는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가지가 뻗어가는 모습입니다.

 

요셉의 생애는 겉으로는 광야를 지나는 시련의 연속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가지가 뻗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안 될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됩니다. 요셉의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샘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것은 밖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요셉의 삶은 환경적으로는 어려운데, 점점 무성한 가지가 되었습니다.

샘 곁에 있는 사람은 어려움이 올수록 진가를 발휘합니다.

이 ‘샘 곁’은 오늘날에 적용하면 어디일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곳입니다.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만족을 얻는 곳입니다.

은혜 가운데 영적으로 계속 자랄 수 있는 곳입니다.

요셉의 외적인 상황은 굉장히 척박했지만, 영혼은 계속 만족한 상태,

하나님의 은혜 속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에 시련과 고난을 통과했어도 전혀 상처입지 않고,

한 맺히지 않고, 과거에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품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샘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영적으로 계속 자라고 있지 않다면, 메마른 곳에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 가운데 어떤 경우에도 샘 곁을 고수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광야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모래바람이 불어 닥쳐 우리를 덮칠지 모릅니다.

우리가 가는 앞길이 언제 어떻게 끊겨버릴지 모릅니다.

세상은 아주 고약하고, 냉혹합니다.

샘 곁은 지속적인 축복이 있는 곳입니다.

축복이 주어졌다가 끊어졌다 하는 곳이 아니라, 은혜가 계속적으로 흘러야 합니다.

 

샘이라는 곳은 계속 솟아나는 곳입니다.

다른 곳은 다 마르더라도 샘은 땅 속에서 올라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날마다 은혜 안에 잠겨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다른 곳에는 굴곡이 좀 있다 해도 영적인 삶에는 굴곡이 있으면 안 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굴곡이 많이 일어납니다. 수없이 많이 일어나지만,

내 영혼이 은혜에 잠겨있는 샘 곁에 머물러있다면, 그곳을 사수한다면,

가지는 뻗어가고 있습니다.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어

 

창49:23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적개심을 가지고 그에게 활을 쏘았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형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습니다.
처음에는 요셉이 굉장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애굽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처음에는 어려웠습니다. 당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강자가 되는 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믿음을 가질 때,

처음부터 모든 것이 풀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지는 게임을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가 경쟁하면 어떻게 될까요? 지게 되어있습니다.

 

신자는 사업을 할 때, 편법을 쓸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구조악과 싸워서 이기기 어렵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합니까? 중상모략이 있고, 음해가 있고, 모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아주 우습게 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노골적으로 우습게 대합니다.

 

최근 신문에서 너무나 치열한 진급 경쟁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어느 공무원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진급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여 죽은 것입니다.

신자가 악한 세상 속에서 버텨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청년들 중에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직장에 들어갔다가

세상 가운데 몰아닥치는 거대한 세속의 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진짜 제대로 믿음 생활을 하면, 망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제대로 믿음 생활을 하는데, 위기가 오지 않는다면,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고 세상에 들어가면, 형통할 수 없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 밀어닥칩니다.

 

요셉에게 닥친 시련은 험악했습니다. 형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종으로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시련이 올 때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왜 이런 일이 닥치나’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내가 제대로 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23~24절에 보면,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역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신자의 삶에는 반드시 흐름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본문 23~24절은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처음에는 요셉을 겨누는 활들이 무수히 날아오고, 요셉이 죽을 것 같은데,

반전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굳세어지고, 그의 팔에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힘은 요셉 자신의 힘이 아니라,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은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요셉이 활을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화살에서 매우 강력한 힘이 드러나는데,

그 힘은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사람들은 요셉이 들고 있는 활을 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요셉의 팔 위에 다른 팔이 겹쳐져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판가름 납니다.

 

처음에는 세상이 강력해보입니다. 직장이든 어디를 가든 세상은 굉장히 화려하고,

굉장히 거대하고, 대단히 강력해보입니다.
아무리 봐도 세상에서 신자는 열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꾀와 모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량적인 담합으로 밀고 들어오면, 신자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중에는 그 꾀와 방법이 반드시 바닥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이 겨누고 있는 활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그들의 화살이 자신들을 겨누게 됩니다.

처음에는 세상이 대단한 것 같지만, 갈수록 별 수 없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얼마나 겨누어 쏘아 죽이려고 했습니까.

그러나 나중에는 형들이 요셉 앞에 머리를 떨구고 용서를 구합니다.

요셉 앞에서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릅니다. 갈수록 힘이 납니다. 뒷심이 중요합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중요합니다. 경기에서도 전반전보다 후반전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지구전을 잘해야 합니다. 신앙은 지구전입니다.

빨리 승부 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는 힘들게 되어있습니다. 처음에는 꼬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힘들다고 손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나는 안 된다”라고 실망하면 안 됩니다. 나중에 진가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지치지 않도록 우리를 떠받쳐주시는 전능자의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신기한 힘이 솟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힘을 가해주셔서 이기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도우시면, 자기 실력으로 이긴 줄 압니다.

 

처음에는 밀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론입니다.

우리는 처음보다 뒤가 강한 사람들입니다. 후반전에 더 힘이 나고, 광이 나는 사람들입니다.

초반부터 잘한다고 소문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른 나이에 성공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공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잘 하는 줄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을 믿다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지금 당장 무엇이 되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배후에 누가 계신가에 달려있습니다. 

다니엘서에는 참으로 숨 막히는 긴장(suspense)이 있습니다. 극적인 묘사입니다.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바벨론에 노예로 끌려간 신분인 다니엘이 바벨론의 국사(國事)를 책임지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순전한 소년 다니엘이 바벨론의 왕실에서 성장해갈 때,

바벨론의 많은 신하들은 다니엘에게 활을 겨누고, 그를 멸절시키려 합니다.

수없이 많은 음모와 중상모략이 빗발치는 화살처럼 그를 겨누고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의 이야기로 말하면, 다니엘은 그 속에서 죽어도 몇 번 죽었을 것입니다.

그는 철저히 약자였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통치하던 때부터 시작하여

바사의 다리오 왕이 통치하던 때까지 정권을 여러 번 지나는 동안

그는 총리의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었는데도

그의 자리는 여전했습니다.

 

처음에는 적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모든 것이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아슬아슬합니다.
그런데 그를 향해 활을 겨누었던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수없이 많은 적들에 둘러싸여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었습니다.

에스더서도 이와 비슷합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우리가 결과를 다 알고 보니

마치 재방송을 보는 것처럼 흥미를 잃지만, 에스더서의 내용을 영화로 만든다면, 

기막힌 각본이 될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죽을 것 같고, 하만이 이길 것 같았습니다.

모르드개가 매달려 죽게 될 장대 위에 하만이 매달렸습니다.

아슬아슬하고 숨죽이게 만드는 게임이었지만,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힘들지만 그래도 정직함을 잃지 않고,

믿음의 원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렵다고 자세를 바꾸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려면, 활을 쥐고 있어야 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활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수 없습니다.

활을 쥐고 있을 때, 전능자의 손이 활을 쥔 손을 붙들어주십니다.

 

이 말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할 일을 내가 다 하면, 힘들고 어렵지만 그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이 도우시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본문 창49:25절에 보면, 요셉이 받을 복이 어디서부터 온다고 기록되어있습니까?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