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애국자 전영창 선생

LNCK 2019. 12. 25. 18:15

https://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7947

 

애국자 전영창 선생

    1917~1976 (59세)

 

전영창 선생은 전북 무주에서 태어나 기독교를 믿어 성경 암송을 잘하여

미국 보이어 선교사의 도움으로 1938년 전주 신흥학교(남장로교 미션스쿨)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자진해서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이, 교장이었던 린턴(인돈)선교사의 눈에 띄었다.

 

이후 교장 윌리엄 린턴 선교사의 배려로 일본 고베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2년간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고 귀국했다.

 

전영창 선생은 8.15 광복 후 영어 실력이 뛰어나 미군정청 군종 통역관으로 활동하던 중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거쳐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 수학하던 중

박사학위를 받는 졸업식을 열흘 앞두고,

조국 대한민국에 6.25 동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조국이 망하면 박사학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하고

즉시 귀국하고자 학장을 찾아갔다. “학장님 조국이 망하게 되었으니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전쟁에 참여하겠습니다.”라고 소신을 밝혔다.

 

이때 뮬러 학장은 놀라 “아니 열흘만 기다리면 학위를 받게 되는데 무슨 소리인가?

자네는 전쟁이 끝나면 재건을 해야 할 인물이 필요한데 기다리게.

지금은 조국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네”

 

“학장님! 이건 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조국이 부를 때 가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라고 하자

감동을 받은 뮬러 학장은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학교 역사상 최초로 조기 졸업장을 주어 귀국시켰다.

 

전영창은 1917년 12월 26일 전라북도 무주군 여원리에서 출생하여,

1932년 전주 신흥고등 보통과에 진학(16세)하였고,

1938년 일본으로 유학(21세)하여 신호 중앙신학교를 마치고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고,

5년간의 집행유예로 출감하여 조국에 돌아와 주거 제한 속에 활동하였다.

 

해방 후 1947년 대한민국 정부 1호 유학 여권으로 미국에 건너가

웨스트민스트 신학대학에서 수학(31세)하고 웨스턴신학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전영창 선생은 귀국하여 부산 제3영도교회 교육관에 임시 본부를 두고

피난민을 위한 구호사업을 시작하고, 이들을 위한 병원설립을 추진하여

복음 구호의원, 즉 현재 부산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다.

 

이때 1·4 후퇴 시에 피난하여 육군 임시군의관이었던 장기려 박사를 만나

원장으로 초빙하여 함께 일했다. 장기려 박사는 북한에 부인과 자녀들을 남겨두고

남한에 와 재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의료선교와 구제에 헌신한 인물이다.

이때 전영창 선생의 나이는 34세였다.

 

전영창 선생은 휴전이 되어 다시 도미하여 컨콜디아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1956년 1월에 귀국하였다. 귀국할 때 그에게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이며,

한남대학교의 설립자 겸 학장인 린턴 박사가 보낸 부학장 초빙장을 받아 가지고 있었다.

 

린턴 박사는 전영창 선생이 다녔던 전주 신흥학교 시절의 교장이었다.

그러나 전영창 선생은 서울의 큰 교회의 담임 목사와 대학교 부학장 자리에 청빙을

모두 거절하였다.

 

▲전영창 선생은 학교를 세워 철저한 칼빈주의 개혁신앙으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가르치며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비전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앙과 애국심이 투철했던 그는 마치 화란의 개혁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것처럼

‘교육의 개혁 없이는 교회도 세상도 바꿀 수 없다.“는 소신으로 선택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거창고등학교는 처음 호주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를

주남선 목사의 장남 주경중 장로 등이 뜻을 두고 1953년 인수하여

남·녀 공학의 민주학원을 기치로 거창에 탄생한 첫 인문 고등학교이다.

 

그러나 학교의 재정이 매우 어려워 견디지 못하여 폐교 직전에 이르렀을 때

전영창 선생이 인수하여 학교 운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을 이어받아 향학열에 불타는 농어촌 청소년에게 복음을 심기 위해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학교 재정이 매우 어려워 교사회에서 자신이 먼저 학교를 위해 월급을 반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하자, 교사들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이때부터 흩어진 학생들을 모으고, 거창 땅에 전인교육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지만

학교가 진 빚이 너무 많아서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1958년 4월 학교가 넘어갈 수밖에 없을 때 전영창 선생은

성경 찬송과 담요 1장을 들고 거창읍에서 40리나 떨어진 산 중턱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펴고 1주일간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사흘이 지나도 아무런 응답도 없고 가슴만 답답했다. 그는 나흘째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일주일 금식기도 하는 이 기간 내에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서울로 올라가서 ’일간 신문에 하나님은 없다고 광고를 내겠습니다.’라고 억지를 부렸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니 조우복 이라는 미국의 한 성도가 보낸 수표 한 장이 도착해 있었다.

2,050달러, 이 돈은 그 당시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정확한 금액이었다.

 

전영창 선생은 ’청소년들을 바로 교육해야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소년들아 야망을 품어라’(Boys Be Ambitous!)라고 강조하면서

’정의는 후에 이긴다.‘고 설파(說破)했다.

 

기독교 학교를 운영하려니 어려움과 핍박이 많았으나

실력 있는 교사들을 초빙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교사들은 주야로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으며,

자신도 직접 과외학습과 영어특강을 지도하였다.

 

그는 한때 군사정권의 3선개헌에 반대하다가 정권에 미운털이 박혀

폐교에 버금가는 제재를 받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학교를 지켜낸 훌륭한 지도자였다.

 

전영창 교장의 열정으로 인하여 전국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거창고등학교는

시골 학교로서 대학 진학률 88%의 놀라운 기록뿐 아니라

졸업생 4분의 1이 명문대학교에 진학하는 소문난 학교로 발전했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씨도 두 아들을 이 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거창고등학교를 명문 학교로 성장시킨 전영창 교장의 철학과 가르침이 담긴

유명한 ‘직업 선택 십계명’은 제자들의 사회진출에 큰 교훈과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말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은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으니 의심하지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전영창 교장이 가르친 이 십계명은 거창고등학교 강당 뒷벽에 걸려 있다.

졸업생과 재학생은 이 십계명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거창고등학교 제3대 교장으로서 만 20년을 섬긴 전영창 교장의 십계명은

돈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라는 것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볼 때 너무 미련해 보이겠지만, 이는 거창고등학교와 전영창 교장을

유명하게 만드는 신앙과 애국심이 숨 쉬는 멋진 교훈이다.

 

성경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는 말씀과 같이 좁은 길을 가라는 교훈이다.

 

평생을 교육에 바친 전영창은 1976년 네덜란드 교회 연합회의 후원 기금으로

보도관을 건립하던 중 과로로 인한 담석증과 패혈증의 합병증으로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글쓴이 : 김형원 / 수필가, 서울영천교회 원로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