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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안'과 무릉도원 요15:1~8
중국 사람들의 별천지 사상을 대변해주는 단어가 무릉도원 아닙니까?
중국에 무릉도원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잘 구체적으로 표현 된 것이
4~5세기에 걸쳐서 활동을 했던 중국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소개되는 내용 아닙니까?
그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중국의 허난성 무릉이라고 하는 곳에 어부가 살고 있는데 민물고기를 잡는 어부입니다.
어느 날 강물을 따라서 거슬러 올라가면서 고기를 잡다가, 계속 깊이깊이 들어가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근데 점점 계곡이 좁아지면서, 계곡 물가 양쪽으로 놀라운 광경을 발견하게 됩니다.
계곡 양쪽 온 천지가 다 꽃으로 뒤덮여 있는데 그 꽃 전부가 하나 같이 복숭아나무 꽃입니다.
너무너무 황홀하고 신기해서 그 물줄기를 따라 계속 갔는데, 물줄기가 끝나면서
계곡이 맞닿는 곳에, 그 계곡 물의 근원이 되는 샘이 있고,
바로 그 옆에 조그만 동굴이 하나 보입니다.
동굴 입구에 갔더니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아요 이상하게.
동굴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호기심에 차서 들어가는데,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동굴을 한참을 지나갑니다.
근데 갑자기 동굴이 끝나면서 끝이 안 보이는 대지가 펼쳐지고,
너무 정갈하게 손질이 되어 있는 논과 밭이 있고 뽕나무 숲이 있고 대나무 숲이 있고
사람들이 보이는데,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그렇게 얼굴이 평화롭고 즐거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런 별천지 세상을 봅니다.
그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서, 관리에게 알려서 그걸 다시 찾는데,
복숭아꽃도 찾을 수가 없고 그 동굴도 찾을 수가 없고,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도연명이가 도화원기를 쓴 게, 365년에 태어나서 420년 정도까지 살았으니
예수님이 태어나신 300~400년 뒤에 활동한 양반 아닙니까?
그런데 300~400년 전에 주님께서 이 세상 안에서 바로 그 무릉도원을 찾아 갈 수 있는
입구를 만들어 놓으셨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주님께서 약속을 해 주시는 거예요, 무릉도원이 있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의 얼굴이 평화스럽고,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우리에게 제공 되는 겁니다, 그게 주님의 약속이에요.
그래서 이 무릉도원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따져 들어가 보면,
예수님께서 제공하시는 회복된 에덴과 무릉도원은 차이가 있지마는,
형식적으로 비슷한 점이 있어요.
어떤 점이 비슷하냐?
모든 사람이 평안 가운데 거한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평안입니다.
평안이라고 하는 것.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어떻게 이 세상에 살면서 평안 할 수가 있습니까?
이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평안을 주신다는 거예요.
세상과 격리 돼 있다는 겁니다 무릉도원이.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도 이 세상 안에서 존재하고 있지만
인간사회와는 격리되어 있습니다.
이게 비슷합니다, 형식적으로.
그리고 동굴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게 아주 특징적으로 비슷합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별천지를 봐요.
▲주님께서 신앙인과 제자들의 삶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합에 비유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15:5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주님께서 4절과 5절과 6절과 7절까지 똑같은 말씀을 네 번 말씀하시는데,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 말씀을 네 번을 반복하십니다.
이렇게 ‘주님 안에 거함 - 연합’ 그 자체에 포인트를 맞추시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요?
이게 바로, 우리가 동굴을 쭉-빠져 나가서
그 무릉도원에 도달하는 그 과정을 말합니다.
자 그러면, 그리스도 안은 어디이고, 그리스도 밖은 어디 일까요?
우리가 흔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남녀 간에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 예를 들어 갑돌이 갑순에게 말합니다,
‘갑순 씨, 당신이 내 안에 있습니다.’
자, 내 안에 거하는 것이지요?
그때, 갑순 씨는 주체적으로 갑돌이 마음 안으로 들어 간 적이 없습니다.
갑돌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이유는
갑순이 주체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이 아니라,
갑돌이 갑순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냥 우리들을 주님이 마음으로 좋아하시면, 사랑하시면
당연히 우리는 주님 마음 안에 거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보고 거하라고 하니 어떻게 하는 겁니까?
또한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는 것도,
주님께서 우리 안으로 어떻게 주체적으로 들어오실 수가 있습니까?
내가 주님을 좋아하면, 그러면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거지요.
미스 김이 새로 입사했는데, 노총각 이 대리가 볼 때 결혼하고 싶어요,
그래서 마음에 둡니다.
근데 미스 김은 아무것도 몰라요,
이 대리가 자기를 마음에 두었는지 안 두었는지도 모르는데도,
이 대리 마음 안에 미스 김이 머물고 있습니다.
좋아하니까 그가 내 안에 들어와 머물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실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를 사랑하고 좋아하시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 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근데 이 얘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서 말씀하신 예수님 ‘안’이라는 게,
예수님의 마음 ‘안’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분명히 안과 밖이 구분되어지는 공간이 있고, 영역이 있다는 얘기에요.
그럼 그 공간이 어디고 영역이 어디냐?
예수님 마음 안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이게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관계할 때, 어떤 예수님을 관계합니까?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셨고, 그 공생애의 절정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완성이 됩니다.
공생애의 모든 의미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다 이루어집니다.
공생애,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사시던 모든 목적이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주님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주님을 우리가 상대합니다.
근데 그 주님만 관계합니까?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또한 관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만 관계합니까?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주님을 또한 관계합니다.
승천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아버지의 집이 있다는 걸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승천하시는 그 행동에 국한된 주님만 관계합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지금 현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 주님을 또한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과거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이고,
부활도 마찬가지이고 승천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사건들이 갖는 영적인 실제 내용은 “영원한 현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2000년 전에 주님을 보았던 베드로에게도 십자가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이고,
그 보다 뒤늦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사도바울,
예수님은 사도바울을 역사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지마는,
그 주님의 십자가가 사도바울에게도 나를 위한 죽음이 되고,
또 2000년 뒤에 태어난 우리에게도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 되어서,
영원한 지구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현재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이고, 승천도 마찬가지이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도 마찬가지이고.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주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의 영역이 생겨난 겁니다. *‘하나님 나라’
십자가로부터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이 공간과 이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패가 달려 있는, 예수 그리스도만의 영역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런 영역을 만들어 낸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거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뭘 말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패가 걸려 있는 이 영역,
십자가로부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보좌까지,
이 공간 안에 들어가 있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바울서신 전체를 놓고 보면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세상에 죽었다는 말을 계속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세상 걱정으로 빠져 들어가면 주님 바깥으로 나가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어디까지 얘기를 하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우리가 앉힌바 되었다’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고까지 얘기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얘기를 하고 하늘에 앉혔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 공간 안에 머물고 있는 거예요, 이 공간 안에.
우리 마음이 여기를 떠나지 않는 거예요.
이게 바로 내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우리 마음 안에 머문다는 뜻이 아니라,
이 본문에서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삶의 영역 안에
주님께서 거하시겠다는 얘기입니다.
▲자, 실제적으로 ‘예수님 안’과 ‘예수님 밖’을 구분해 봅니다,
제가 사업을 하는데, 마음이 사업 때문에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됩니다.
그래서 사업 현장에 마음이 다 가있고, 어떻게 사업을 진행할 것인가 깊이 빠져들어 갑니다.
예수님 바깥으로 나온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 어부가 동굴을 깊이깊이 지나서
동굴이 끝나는 자리에서 별천지를 만난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이 세상 인간사회와는 격리된 다른 세상으로 동굴을 통해 들어간 것처럼,
주님 안으로 거하려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과해야 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 인간사회로부터 빠져 나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주님 안으로 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는,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마음이 살아 있는 자가 되어서 이일 저일, 가정일, 사업일, 직장일,
결혼일, 입학 진학, 애 키우는 일, 이런 일에 마음이 연루되어 붙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 바깥으로 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십자가 저편으로 넘어가야 돼요.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신 그 저편으로 넘어 가야 됩니다.
그래서 집안에서 무슨 일이 생겨서 걱정이 팍 생겼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느냐?
그 걱정을 주는 세상 문제를 해결하려고 씨름하지 말고, 기도하러 들어가서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붙잡고, 그 문제에 대해서 죽으면서 세상을 빠져 나오는 겁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어부가 동굴로 들어가서
이 인간 세상을 빠져 나가듯이 빠져 나가는 겁니다.
빠져 나가서, 내 마음이 걱정 되고 있는 마음이, 승천하신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와
천국에 의해서 채워지고 평안을 느낄 수 있도록,
평안에 도달할 수 있을 때까지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렇게 계속해서 우리가 주님 안에 들어가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별천지인, 십자가 죽음부터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그 공간 안에 머물러 있을 때,
마음이 세상에 빠져 나가지 않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열매를 많이 맺게 된다’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열매가 뭡니까?
보통 사람에게도 열매가 맺혀져요,
마음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행위로 나타냅니다.
생각이 씨라 그러면, 생각이라고 하면 의도도 있을 수 있고 계획도 있을 수 있고,
생각 속에는 소원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모든 것을 다 하나로 뭉뚱그려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면,
열매는 행위로 나타나는 겁니다, 행위로.
그런데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내 안에 머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 안에 머뭅니다.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연결되는 그 공간 안에, 예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예수님만이 만들어 놓으신 그 공간 안에 우리 마음이 머물러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나님의 생각이 씨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아까 그 사업문제 때문에 걱정거리가 생겼는데, 마음이 그 사업에 빠지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주님 안으로 들어와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주님 안으로 들어와 머물러 있으면서, 그 보좌 우편까지 이루어지는 그 세계 속에서
마음에 평강을 되찾고 있는데 그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씨앗을 넣어 주십니다.
그 씨앗이 내 몸을 통해서 내 삶의 현장에서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8절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왜 우리가 열매를 맺는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까?
그게 다 하나님의 생각이, 하나님의 의도가, 하나님의 계획과 소원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의 몸을 통하여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니까.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을 내가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열매 맺혀지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열매 맺는 것이고, 어떡하면 나한테 하나님의 생각이 주어집니까?
열매를 맺게 될 씨가 하나님의 생각인데, 그 생각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어서 주님 안으로 들어갈 때.
그러므로 내 생각의 씨가 열매 맺는 게 아니에요, 우린 세상에 대해 죽었으니까.
하나님의 생각이 씨로 내게 임해서 열매 맺혀지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무릉도원의 평강과 무릉도원의 그 열매가 다 주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비현실이 아니에요, 이상향이 아닙니다.
그냥 밀고 나가는 거예요, 계속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죽음이라는 동굴을 지나가는 겁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내 가정에서고 내 직장에서고 난리가 났는데, 난리가 나면 날수록
십자가 붙잡고 동굴을 지나서 별세계로 빠져 나가 버리는 거예요,
‘망하려면 망해라’ 이런 마음으로.
그렇게 빠져 나가서, ‘내 마음이 세상 일 때문에 자극을 받아서 지금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데,
하나님! 이 마음에 하늘의 평강을 주시고,
아버지와 주님과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와 주시고 나를 거처로 삼아주세요!’
그럴 때, 내 안에 들어오시는 주님에 의해서, 내가 평강으로 가득 차게 되고,
이때 이 세상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시각, 내게 전해지고
나를 통해서 그것이 열매 맺게 될 때, 직장이고 가정이고 어떤 곳이든지 간에,
내가 그렇게 염려했던 그 모든 곳에, 하나님의 열매들이 맺혀지게 될 거라는 겁니다.
이게 이상향이 아니고 뭡니까?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릉도원이 아니고 뭡니까?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포인트가?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이 어디입니까?
십자가에서부터 부활-승천을 거쳐서 보좌까지의 공간,
여기서 마음이 떠나지 않는 겁니다.
이 세상으로 빠져나가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으로 빠져 나가는 삶은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계시는 것이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연명이 무릉도원을 묘사하기 전에,
주님께서 이미 400년 전 실제 무릉도원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 것으로 삼게 해 주시고,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로부터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이 공간 안으로 들어가 있게,
머물러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이어지는 next 설교문
어느 아파트든지 동마다 소방전이 있어요, 소방전에 짧고 굵은 파이프가 있습니다.
그 파이프를 잠가놓았는데 그걸 틀어놓으면 물이 콸콸 쏟아져요, 물이 바로 앞에 떨어집니다.
근데 거기에 호스를 갖다 꽂아놓으면 바로 앞에 떨어지던 물이
쭉쭉 멀리멀리 뻗어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할 때
사랑의 열매가 맺혀진다는 것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음으로써 가능한 얘기인데,
그건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주님께서 사랑의 진액을 뿜어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그 사람과 주님 사이에서
호스 역할을 하는 가지가 된다는 얘기에요.
그렇게 호스처럼 가지가 되어서 주님께 붙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열매를 맺게 된다는 얘깁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에요.
그러니까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주님을 통해 이 세상에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아버지와 주님이 승천하셔서 같이 계셔서 한 마음이 되어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체적으로는 내가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는데,
그 내가 만나는 사람을 향하여 뿜어대는 사랑의 진액이,
내가 호스처럼 가지처럼 주님께 붙어있을 때
그 사람에게로 흘러들어가서 내게서 행위로 나타나든지 열매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그때 사람들이 베드로를 숭배하려고 할 때, 베드로가
‘너희가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인 그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일이 나타났다’고 얘기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뭡니까?
예수의 이름, 하면 예수님께서 만드신 영역이 있는 거예요.
그 영역, 십자가와 보좌로 이루어진 그 영역 안으로 베드로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킴으로써 자기에게 유익이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앉은뱅이를 향한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랑의 진액이
베드로라는 사람을 통해서 열매 맺혀진 겁니다.
이런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자, 이 상태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기가 막힌 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마음의 방향을 이 세상에 살면서 이제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와서
십자가와 보좌까지 이어지는 주님이 개척한 영역에 마음을 두고,
더 이상 세상 것에서 나를 채우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11절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지를 지으실 때 함께 참여했던 그 하나님의 아들로서 갖고 있는
그 기쁨이 우리 마음 안에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려고
내가 지금 이 말을 너희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왜 기쁠까요?
나를 통해서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전해지고 있는데, 왜 그게 기쁠까요?
여러분, 축구경기를 볼 때 그냥 한 팀을 응원할 때 골을 넣느냐 마느냐에만 관심을 두지 마시고,
카메라로 비쳐지는 장면 장면을 꼼꼼히 보시면, 참 재미있는 게 많습니다.
골키퍼까지 열한 명이 상대방 진영을 향해 공격을 해 들어갑니다.
골키퍼가 볼을 받아서 앞에 있는 수비수에게 전해줍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패스합니다.
또 패스하고, 공격해 들어가서 맨 앞에 있는 공격수가 골을 넣게 됩니다.
맨 앞에 있는 공격수가 골을 딱 넣게 될 때,
이 공을 제일 먼저 전해준 골키퍼가 기뻐하는 모습을 카메라에서 본 적이 있습니까?
하~아, 공간적으로 너무너무 거리가 멀어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너무너무 여러 다리를 건넜기 때문에 관계도 없는 것 같아요.
팔을 벌리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이 골문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기뻐하고,
하늘을 향해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하고, 열한 명이 난리가 나지 않습니까?
골 하나 넣으면 골 넣은 사람은 몸 조심해야 돼요,
다른 선수들이 와서 덮쳐버리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다칠 것 같아요.
그리고 골키퍼는 혼자서 난리를 하며 기뻐합니다.
바로 이 원리와 똑같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내가 만나는 사람을 향하여 사랑의 진액을 골키퍼가 볼을 전해주듯이 전해주십니다.
나는 골게터가 되어서 그 사람에게서 주님이 원하시고 아버지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위를 해서
열매를 맺는 겁니다.
이때 나는 쓰러져요, 왜? 주님과 하나님이 나를 덮쳐서 기뻐하고 계시기 때문에.
골을 넣은 골게터에게 모든 선수들이 와서 덮쳐버리면서 기뻐하는 것처럼.
이게 일체감이라는 겁니다.
일체감은 어떨 때 생깁니까?
둘이서만 마주보고 있다고 생기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부부가 아무 말 없이 운전하고 갈 때는 일체감이 없어요.
그런데 어떤 차가 와서 백지 쓱 긁어놓고 지나갑니다.
둘 다 차를 세웠어요, 아내는 차 안에 있습니다.
남편이 얘기하는데 그 사람이 자기가 잘했다고 막 우기는 거예요.
화가 나서 부인이 나갑니다, 그래서 남편과 일체가 되어서 그 사람에게 따지고 달려듭니다.
이렇게 일체감이란 것은 제3자가 나타날 때 형성되는 겁니다.
골키퍼와 골게터가 너무 멀리 떨어져서 플레이를 하고 있어요.
그러나 골을 넣으면서 그 골로 인해 제3의 행동과 현상을 통해서
골키퍼와 골게터가 일체감을 누리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까? 어떻게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됩니까?
일체감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계기가 뭐냐 하면,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사랑을
그대로 막힘없이 흘려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서 주님이 원래 계획하시고 아버지가 원래 계획하신 그 사랑의 열매가 나타날 때,
나와 하나님과 주님이 하나가 되는 일체감의 기쁨이 거기서 생겨난다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됩니까?
마주보고 있으면 하나 됩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반복해서 얘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유가 뭔지 아니? 내가 지금 하나님과 일체가 돼서 기쁘거든?
왜 기쁘냐 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내가 그대로 다 통과시켜서,
나의 유익을 위하는 게 하나도 없이 그냥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다 통과시키므로 나의 공생애의 삶을 통해서 열매 맺혀지게 하고 있기 때문에,
나와 하나님이 일체가 되어서 너무너무 기쁜데, 이 기쁨이 너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서 흘려보낸 것 같이
나와 아버지가 사랑하는 그 사랑을 너희가 그대로 흘려보낼 때,
더 이상 세상에서 너희 자신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서 살지 않고,
아버지와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흘려보낼 때,
그래서 그 사랑이 너희 손끝과 발끝에서 그 사람을 위한 열매로 맺혀질 때,
너와 나는 일체가 되는 거야!’ ‘그 기쁨을 누가 알겠느냐?’ 이 세상은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기쁘게 하려고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릉도원의 삶이 어떻게 진행됩니까?
먼저 주님 안에 거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빠져나가서 마음이
절대로 이 세상으로 다시 내려와서 세상 안에서 뭐 먹을 것 없나, 내 배를 채울 게 없나?
세상에서 내 유익을 찾을 게 없을까? 기쁨을 좀 누릴 게 없을까? 이러지 말자는 거예요.
절대로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됩니다.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가만 보니까,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끝없이 세상을 향한 사랑의 진액을 내려 보내시는데,
지금 내가 만나는 가족과 이웃, 내가 만나는 직장의 동료 상사,
그렇게 맘에 안 드는 사장님, 그 사람에게도 사랑을 보내고 계시더라는 겁니다.
내가 사장에게서 유익을 찾으려는 마음을 중단하자마자
그 사장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그때 얼른 하나님의 사랑이 땅에 떨어지려는 것을
내가 호스가 되어서 사장에게 전달해주는 겁니다.
내가 안 하면 다 땅에 떨어져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열두 제자를 통해서 뻗어갔고,
120문도를 향해 뻗어갔고, 초대교회를 향해 뻗어갔고,
이제는 나를 통해서 내가 만나는 사장님에게, 내가 만나는 부장님에게,
내가 만나는 부하직원들에게 뻗어나가게 하시려고 나를 부르신 것 아닙니까?
나를 택하신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만을 위해서입니까?
아니요,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열매 맺혀질 때,
골을 넣었을 때 골게터와 골키퍼가 기뻐하는 것처럼,
일체감 안에서 하나님과 내가 일체를 이루며 기뻐하는
이 지상에서 무릉도원의 삶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얘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더 이상 세상에서 내 기쁨을 찾지 않게 하셔서 주님 안에 머물러 있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 세상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나타날 수 있게 됨으로써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아버지와 주님의 사랑이 열매 맺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나와 주님과 아버지가 일체 되는 감격이 날마다 풍성하게 경험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