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메뚜기 재앙

LNCK 2019. 12. 29. 22:22

https://blog.naver.com/karamos/80137633983

 

메뚜기 재앙        출10:1~20            2001.05.27.

 

◑강퍅에 대하여.

 

바로가 강퍅한 것이 하나님께서 강퍅케 하신 것이라면

바로의 책임이 아니지 아니한가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로마서 9장에서 야곱과 에서, 모세와 바로를 말하면서

‘내가 태중에 있을 때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는 말씀합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내가 긍휼이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한다’고 하십니다.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자가 자기 마음의 원대로 만들 권한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퍅한 그릇이 되지 않음을 인하여 감사 할 뿐이지

왜 저 사람은 강퍅하게 만들었는가라고 따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입니다.

 

모두가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인데 그중에 얼마를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여

하나님의 긍휼의 부요하심을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아니라면

죄인을 의롭다하여 주시는 것도 성립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따지고 공평치 못하다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바로 강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퍅이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강퍅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못마땅한 일이 없습니까?

원망과 불평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하필이면 이러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지고, 나는 이러한 남편, 아내를 만나 가지고,

저런 자식을 낳아가지고 아이고 웬수다 웬수 하는 것들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불평과 원망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웃을 이런 사람들을 만나기 위하여 기도하였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웃으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환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못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강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겸비(謙卑)치 아니하면, 계속하여 재앙이 내리는 것입니다.

꼭 열가지 재앙만이 재앙입니까?

애 먹이는 사람을 옆에 붙여주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낮아짐입니다.

 

10:3절을 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어느 때 까지 네가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네 마음이 겸손하고 낮아지지 아니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강퍅이란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관대?’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 이후에 생긴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있기에, 모두가 강퍅하여, 질대로 강퍅하여 있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오직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기분이 좋아지는게, 우리이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아니할 때 기분이 좋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만사가 내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하도록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강퍅하여진 마음이 말씀으로 깨어져서 부드러워 지고

낮아진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오늘도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낮추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낮추어지지 아니함이 강퍅이고 교만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미 속은 곪을대로 곪아 있고 썩을 대로 썩어 있는데도 계속하여

회칠한 무덤처럼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범죄한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우박 재앙을 통하여 애굽의 살림이 거의 거덜이 났습니다.

짐승이 독종으로 죽었고 우박으로 죽었고,

우박으로 곡식과 나무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로는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다른 말로 강퍅입니다.

이러한 강퍅을 하나님께서 다 드러내심으로 인간이 어떠한지를 지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8th 메뚜기 재앙이라고 경고를 합니다.

메뚜기 재앙이란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우박 재앙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푸른 것들을 완전히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10:5-6절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너희를 위하여 들에서 자라나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또 네 집들과 네 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

이는 네 아버지와 네 조상이 이 땅에 있었던 그 날로부터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돌이켜 바로에게서 나오니’

 

메뚜기 재앙을 경고하고 나오자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간청합니다.

‘지금 애굽이 망한 것인줄 모릅니까? 왜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까?

빨리 항복하여 우리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바로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자존심이 있지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강퍅한)는 것 아닙니까?

신하들이 다시 모세와 아론을 불러 왔지만

바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러 갈자가 누구냐고 합니다.

 

아직도 다 항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른들만 가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볼모로 잡아 두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란 어른들만 드려도 됩니다.

 

출23:17절에 보시면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여자나 어린이는 성전까지 올라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릴려면 어른만 가도 되지 않느냐는 바로의 제안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남녀노소 짐승까지 다 데리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가 거절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자신의 재산인데

그렇게 하면 재산이 통채로 날아가는 것이 되기에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애굽에서 단지 제사만 드리는 것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까지 떠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먼저 떠남이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아니함이 메시지가 되는 것처럼

애굽의 상황에서 떠남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아론이 거절하자

바로가 ‘너희의 경영이 악하다’면서 모세와 바로를 쫓아냅니다.

 

▲자신이 다 망한 것을 알고서도, 아직도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집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지고는 못산다.’ 어느 광고문구 아닙니까?

 

이것이 어필하는 것은 우리안에 그러한 마음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지고는 못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데 지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의 강퍅입니다.

 

이제 그 강퍅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쫓겨나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강퍅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꺽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여 내셨는지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알고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육에 관하여

 

다시 2절을 봅니다.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왜 한꺼번에 재앙을 퍼부어시고 단번에 출애굽시키시지 아니하시는지를

2절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과정들을 너희의 자손들과 자손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출애굽을 행하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이러한 강퍅함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꺽어시는가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도 너희의 마음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교육입니다.

 

바로만 목이 곧고 강퍅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인 것입니다.

그 목의 힘줄이 놋쇠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목도 얼마나 곧은지

도대체 하나님앞에 겸손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출애굽의 모든 상황들을,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두고 두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에게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만 섬기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12:26-27절을 봅니다.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애굽을 여호와께서 치실 때의 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너희가 구원받아 나왔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로와서 구원받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착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서 살아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를 바른집은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이 당하는 여러 가지 재앙들을 함께 당하지 않은 것은

결국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박이나 메뚜기 재앙이 닥치지 아니한 것도

어린양의 피가 소급적용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박이나 메뚜기 재앙을 당하지 않아도

장자가 죽었다면 애굽과 같은 재앙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퍅지 아니함이란,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이 강퍅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이스라엘에 계속된 가르침으로 전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는 강퍅하여 망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가르쳐야 합니까?

 

신명기 6:4-15절까지 봅니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가르치는 내용은 아브라함와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은 바로와 같은 강퍅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95:1-11절을 봅니다. "각자 찾습니다"

바로의 강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강퍅을 말합니다.

이러한 강퍅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 우리에게는 어떻게 말씀합니까?

역시 주님의 말씀에 강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1-19절입니다. 구약을 한 장으로 요약을 하고 있습니다.

각자 찾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강퍅지 아니함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자신의 힘을 믿고 자신을 의지하면서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주인이 되어 가려는 것은 바로의 강퍅이며

이스라엘백성들의 강퍅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오늘 우리에게 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강퍅지 아니한 심령입니다.

이것이 안식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