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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LNCK 2019. 12. 30. 06:24

https://blog.naver.com/karamos/22213467899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3:7~15        2014.09.21.

 

서론

 

출애굽기 3장은 일명 ‘모세의 소명장’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며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신가?”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영적으로 살아있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작명소에서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름을 갖고 계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갖고 계신 이유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고, 가볍게 언급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 앞에서 가볍게 행동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깜짝 놀랄 일이 있을 때 “Oh! my God!”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의 감탄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히브리어로 ‘영광’을 כבוד(카보드)라고 합니다. כבוד(카보드)의 의미는 ‘무게가 있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을 무겁게 모셔야 할 분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 비중을 많이 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아주 중요한 분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무거운 존재, 비중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비중 있는 존재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약 600년 전, 아브라함을 통해 출애굽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600년이나 지난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 일이냐며

비중을 두지 않고 그들의 현실과 상관없는 일로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애굽에서 당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노예생활이

하나님의 약속보다 훨씬 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상황 속에서 “너희가 지금 현실적으로 당하는 고통보다

내가 더욱 중요하고 비중 있는 존재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을 비중 있는 존재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5번이나 거절하고 변명하였습니다.

 

▲출3~4장을 보면 그의 변명들을 볼 수 있는데,

 

1) 첫 번째 변명은 출3: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는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 두 번째 변명은 출3: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는 하나님 이름도 모르고 대답할 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3) 세 번째 변명은 출4:1절에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는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4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배척을 당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4) 네 번째 변명은 출4: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나는 말을 잘 하지 못하니 갈 수 없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후에 스데반이 설교할 때에 “모세는 말과 행동에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도

다른 사람을 보내달라고 변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4번까지 참으셨지만,

5번째는 노를 발하셨습니다.

 

5) 모세의 다섯 번째 변명입니다.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 4:13)

하나님은 이러한 모세의 변명에 “가라고 하면 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만 적어도 모세의 경우를 보면 4번까지 참고

5번째는 노를 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 질문 형식의 모세의 두 번째 변명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하나님은 여기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영어로 자신을 ‘I am’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I am’이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 발음은 ‘여호와’라고도 하고, ‘야웨’라고도 합니다.

 

◑1. 하나님이 이름을 계시해 주신 상황은 어떠한가?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배경(Context)에서 자신의 이름을 계시해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출6:2~3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엘샤다이)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자신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אל -שדי’

(엘 샤다이-전능한 하나님)라고 계시해 주셨지,

‘여호와’라고 계시해 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지식적으로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내게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순종해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올라 칼을 들어 그를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은 수양을 준비해 주셔서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때 창22:1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사람들은 모리아 산을 여호와의 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창세기는 훗날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사람들은 모리아 산이 여호와의 산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지식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갖는지 실질적으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임을 머리로 아는 것과

그가 나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실질적으로 경험해서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기는 했지만,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는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אל -שדי’(엘 샤다이), 즉 ‘전능한 하나님’으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שדי’(샤다이)은 ‘전능한’이라는 뜻이고, 히브리어

‘ אל’(엘)는 ‘어머니의 젖가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어린아이를 젖먹이시고, 양육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체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엘 샤다이로 계시하셨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인구도 적고, 소규모 가족에 불과했습니다.

430년 전, 야곱이 식솔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올 때 이스라엘의 인구는 7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면 충분합니다.

젖을 먹이시고 양육하시는 하나님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처음에는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초신자들은 기도하다가 진동이 오고, 방언도 터지고, 꿈도 꾸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모두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되고, 신앙생활의 재미를 느끼는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고센 땅에서 70명으로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을 지나며 젖을 먹이시고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인구 200만 명이 넘는 국가의 규모를 갖춘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더 이상 고센 땅 요람에서 젖만 빨고 앉아 있어야 될 일이 아니라

광야로 나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거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학생이 학교를 다닐 때는 집에서 밥을 먹고 다니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아침, 점심, 저녁, 밤참까지 먹고 밤늦게 나가

술이나 먹고 돌아다니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요즘 일본 젊은이들의 문제가 이런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양육해 줄 때는 집에 있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어른이 되면 광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생력을 가지고 독립심을 길러야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부모를 의존하지 말고 사회 속에 들어가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스스로 문제를 헤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광야로 나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광야로 나가서 200만 명이나 되는 그들이 거기서 무엇을 먹고 살겠습니까?

무엇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입고, 무엇을 신겠습니까?

그리고 외적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막겠습니까?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애굽이라는 요람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더 이상 엘 샤다이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경험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장성하고 나서야 이런 이름을 계시해 주셨을까요?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Be동사 ‘חיה’(하야)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원래 자음만 있고 모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을 읽는 발음은 어른들이 읽는 것을 듣고

아이들이 배우는 방식으로 전수되었습니다.

 

그런데 AD 70년, 로마의 장군 Titus(타이터스)에 의해 이스라엘이 패망하고 이후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시간이 지나며 유대인들도 히브리어 성경을 읽는 발음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학자들 가운데 맛소라 학파에 속한 사람들이 AD 500~1000년까지

히브리어 성경에 모음을 기재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맛소라 학파가 모음을 찍은 성경(Masoretic Text)을 기초로 번역된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자음 네 개(יהוה)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음이 없다 보니, 이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3계명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나의 주’를 뜻하는 ‘י󰗺󰕌󰔣’(아도나이)라고 바꿔서 읽었습니다.

그래서 맛소라 학파의 학자들은 위의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찍어 발음하게 한 것입니다.

그 발음이 오늘날 ‘여호와’(Jehovah) 내지 ‘야웨’(Yahweh)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야웨든, 여호와든, 하나님의 이름이 정확하게 있는 이름이라는 것이고,

그 발음이 조금씩 상이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알라’라고

엉뚱하게 부를 수는 없습니다. 비슷하게는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여호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Self-Existent)이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고, 시작이 없는(No Beginning)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요5:26절에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시작이 있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을 만든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 이전에 어떤 존재가 있었을까요?

하나님 이전에는 어떤 존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신 분’(Self-Sufficient)이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No Need).

 

광야에서 물이 부족하면 하나님은 물을 공급해 주십니다. 떡이 부족하면 떡을 공급해 주시고,

광야에서 신발이 필요하면 신발을 닳지 않게 해주십니다.

 

또한 군대가 필요하면 하나님이 군대가 되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충족하고 어떤 필요라도 다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시편 50편 10~12절에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온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 중에 일부를 맡고 있는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관리인입니다. 내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이야기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죽을 때가 되면

내 것이 아니었음을 다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물이 부족하면 “여호와여, 물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바위에서 샘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떡이 없어서 “여호와여, 떡을 주소서!”라고 부르짖을 때, 만나가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와

그것을 먹고 배부를 수 있었습니다. 또 고기를 먹고 싶어서

“여호와여, 고기가 먹고 싶습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광야로 보내어

메추라기 냄새가 질리도록 먹게 해 주셨습니다. 외적이 쳐들어올 때도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군대가 되어 주셔서 그들을 막아주셨습니다.

 

실로 여호와는 스스로 충족하시고,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십니까? “여호와여, 스스로 충족하시는 하나님이여,

내게 주소서!”라고 기도해보세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이고! 죽겠네! 없어서 어떡하나! 아이고! 망하겠네!”

이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큰 아이가 유치원을 가야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 월급이 600불이었고, 유치원 등록금도 600불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사모가 유치원 원장에게 가서

우리는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월급이 600불밖에 되지 않아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수 없으니,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큰 아이를 무료로 등록시켜 주겠다고

연락이 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충족시켜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기 바랍니다.

 

▲3. 세 번째로 하나님은 ‘스스로 불변하시는 하나님’(Self-Consistent)이십니다.

하나님은 일관성이 있는(No Change) 분이십니다.

 

말3:6절에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은 인격의 일관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중에는 변덕스러운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루는 천국에 있는 것처럼 좋았다가, 다음 날은 지옥에 있는 것처럼 인상을 쓰고 다니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대하기 곤란합니까?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He is unpredictable”(예측불가능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 이 문장은 아주 심한 욕 가운데 하나입니다.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102:26~27절에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또 야고보서1: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물을 달라고 하면 물을 주시고,

지금도 물을 달라하면 물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하나님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뱀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 분은 항상 강하시기 때문에

더 강해지실 필요도 없고, 완전히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더 지혜로워지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는 소리, 앓는 소리 하지 말고,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면 되는 것입니다.

 

◑3. 인간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는 누구신가?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I am’이라고 소개하신 구절이 무려 17개나 있습니다.

이 단어를 헬라어로 ‘εγο ειμι’(에고 에이미)라고 하는데,

이 17개의 구절을 ‘εγο ειμι 구절’이라고 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구절이 요8:2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I am’인줄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신약성경의 사복음서 가운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이심을 명백하게 증거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 이름’입니다.

신6:4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אלהים’(엘로힘)은 복수명사로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대표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될 때는

언제든지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예수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셨고,

신약시대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도 여호와, 성자 하나님도

여호와, 성령 하나님도 여호와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분이며

동시에 한 분으로,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에게 계시될 때에 성부 하나님이 계시되지 않고,

성자 하나님으로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8:5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던 여호와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단순히 존재했다는 ‘I am’의 의미였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I am’임을 밝히셨을 때,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들은 가룟 유다를 앞세워 횃불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었습니다.

 

요18:4절을 보면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고,

예수님이 이어지는 5절에서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I am’이라고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다 고꾸라졌습니다. 왜냐하면 ‘I am’이라는 말 속에

‘나는 여호와’라는 권위가 실려 있어서 그들은 땅에 고꾸라졌던 것입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나타나

애굽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신 구원자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그를 믿는 자에게 죄와 마귀와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이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예수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을 가진 구원자는 없습니다.

예수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의 구원자를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임마누엘(God with us)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

이 얼마나 더 명백한 말씀입니까? 얼마나 더 분명하게 말씀하셔야 합니까?

 

여러분은 제가 교황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도 교황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제가 왜 그를 싫어할까요?

왜냐면 그는 종교다원주의를 믿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이든 자기가 믿는바 해당 종교의 가르침을 착실히 따르고 의무를 다하면

그들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조잡한 인간의 사상에 불과하고, 인간이 믿어서도 말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믿으면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

 

여러분, 성경에는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구원자시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경고가

2,000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낭떠러지 앞에 “여기 가면 떨어져 죽습니다”라는 경고판이

하나만 붙어 있어도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2,000개가 넘는 경고판이 붙어 있는데도 낭떠러지로 가는 어리석은 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여호와, 우리의 구원자로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심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