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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를 예비하신 하나님 출2:1~10 2014.09.07.
서론
출2장의 내용은 주일학교 학생들도 잘 알고 있는,
모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출2장이 갖는 중요성을 간과하기 쉬운데,
출1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이 필요했던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면,
출2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를 예비하시는 모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 2장을 읽을 때 “하나님이 구원자를 어떻게 살려주시고, 어떻게 훈련하시고,
어떻게 구원할 백성을 예비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1. 구원자의 기원(Origin of Savior)
1절에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출6:16~20절을 보면 레위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레위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가 게르손이고, 둘째가 고핫이고, 셋째가 므라리였습니다.
이 중 레위의 둘째 아들인 고핫이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아므람이었습니다.
또 출 6장 20절에 “아므람이 그 아비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취하였고
그가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수는 일백삼십칠 세이었으며”
아므람이 고모인 요게벳과 결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므람이 요게벳과 결혼해서 아론과 모세를 낳았는데, 그 전에 딸도 한 명 낳았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부모였던 아므람과 요게벳은 딸을 하나 낳고 아들을 둘 낳았던 것입니다.
그 딸의 이름이 미리암이었습니다.
출15:20절에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미리암은 선견지명이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나일강에 떠내려가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지켜보고 있다가
바로의 공주에게 가서 “유모를 소개해 주리이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므람의 자식들 가운데 미리암이 첫째고, 둘째가 아론이고, 셋째가 모세입니다.
그러면 모세와 아론은 몇 살 터울일까요? 출 7장 7절의 기록에 따르면
출애굽 할 당시 모세의 나이가 80세였고, 아론이 83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 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미리암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모세가 나일강물에 떠내려갈 때
이미 바로의 공주에게 가서 어머니인 요게벳을 유모로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분별력과 지혜를 가진 소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 문헌에 따르면 미리암은 광야 방황 39년째, 그녀의 나이 127세가 되었을 때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40년째였기 때문에
미리암이 죽지 않았다면 128세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세의 나이가 120세였음을 감안할 때,
모세와 미리암의 나이 차이는 8살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에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게벳이 막내아들을 낳고 보니 참으로 인물이 준수하였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대 사명을 수행할 지도력을 가질 정도의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외모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고 하지만, 사람은 외모를 보지 않습니까?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외모를 보고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가 남자아이를 낳으면 나일강에 던지라고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요게벳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의 명을 어기고 집안에서 모세를 길렀습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자 울음소리도 커지고 워낙 우렁차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석 달 동안 아들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냥 한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한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믿음으로 이 아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석 달 동안 키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성질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위 지파의 조상인 레위는 아버지 야곱과 세겜에 있을 때,
세겜 추장 아들이 자기 누이 디나를 겁탈한 것을 보고 시므온과 함께 세겜에 살고 있는
남자를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레위는 성질이 불과 같아서 야곱이 창세기 49장에 아들들을 축복할 때도
“이스라엘 중에 흩을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온 땅에 흩어진 제사장 지파가 된 것입니다. *48개 성읍에 흩어짐
레위 지파는 한 성질 하는 지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도 분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직접 써주신 두 돌비를 받고 내려오는 길에
그것을 던져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향해 우상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두 돌비를 던져버렸습니다. 보통 성격이 아닙니다.
모세는 인물도 좋고, 성격도 까칠하니까 모세의 어머니가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다” 싶어서 석 달 동안 길렀지만 어쩔 수 없이
나일강에 띄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구원자를 특별한 섭리로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2. 구원자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보호(Providential Protection)
모세가 태어난 해는 BC 1526년입니다. 출애굽 연대가 BC 1446년이고
당시 모세의 나이가 80세였음을 감안해 볼 때, 모세는 BC 1526년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는 애굽 18대 왕조의 세 번째 왕인 투트모세 1세였습니다.
투트모세 1세는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이방족속에게 강력한 탄압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전 셈족 중심의 힉소스 왕조는 이방족속들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나 함족 왕조인 애굽의 18대 왕조는 다른 민족을 핍박하였습니다.
출 1장 22절에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아이는 다 강물에 던져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사람이
투트모세 1세였습니다.
그러나 투트모세 1세의 딸은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딸의 이름이 ‘핫셉수트’(Hatshepsut)입니다.
모세를 나일강에서 건져준 공주가 바로 핫셉수트입니다. 그는 자비심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이 모세를 더 이상 숨기며 키우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나일강에서 많이 나오는 갈대를 엮어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다 역청과 나무 진을 발라 방수작업을 한 후,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고 나일강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왜 갈대 사이에다 두었을까요? 그것은 상자를 천천히 흘려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야 누가 건져도 쉽게 건져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갈대상자 속에 들어가
나일강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지만 핫셉수트라는 바로의 공주가 모세를 건져내었습니다.
‘핫셉수트’의 이름의 의미는 ‘여인들 가운데 으뜸인 자’라는 의미입니다.
핫셉수트는 투트모세 1세가 죽고 투트모세 2세와 결혼을 하였지만
투트모세 2세는 병약하여 왕이 된 지 십 년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핫셉수트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투트모세 2세는 조카를 양자로 들였습니다.
그 양자가 바로 투트모세 3세입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가 어리니까 대왕대비인 핫셉수트가
섭정통치를 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의 양모인 핫셉수트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섭정자가 되었습니다. 핫셉수트는 애굽의 실질적인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핫셉수트라는 여자 밑에는 왕으로서 정통성을 가진 투트모세 3세와
자기 양아들인 모세가 함께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둘 사이에 왕권을 놓고 치열한 갈등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애굽 사람 한 명을 죽였습니다.
왕족이 일반 백성 한 명을 쳐 죽였다고 해서 왕가에서 큰일 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2:15)
그 때 바로가 투트모세 3세였는데,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이러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갈등이 표출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딸 핫셉수트는 모세가 갈대상자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히브리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불쌍히 여겨 건져주었습니다.
그 당시 8세였던 미리암이 그것을 보고 쫓아갑니다.
그리고 바로의 공주에게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라고 현명한 제안을 하였습니다.
핫셉수트가 그 어린 소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미리암은 얼른 가서
어머니 요게벳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래서 요게벳은 자기가 낳은 아들을
자기 모유로 키울 수 있게 되었고, 아울러 돈을 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공주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양수겸장(兩手兼將),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고 하는 것이죠.
제 자식을 제 손으로 키우고 더불어 돈도 받게 되는 전화위복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출 2장 10절에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요게벳이 모세를 모유로 키워서 그가 세 살 내지 네 살이 되었을 때,
핫셉수트가 그를 불러 양자로 삼는 법적인 절차를 밟았습니다.
이름을 모세라고 한 이유는 ‘모세’가 ‘태어났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의 이름의 뜻은 ‘물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인데,
‘모세’라는 단어 앞에 ‘물에서’라는 의미의 단어가 붙으면
혹시 나일강에서 건진 자식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살까봐 그냥 ‘모세’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와 출애굽 때에 갈등했던 바로는 누구입니까? ‘투트모세’입니다.
‘투트’는 ‘신’이라는 의미이고, ‘모세’는 ‘태어났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신이 태어났다!”라는 뜻의 ‘투트모세’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은 신으로 태어난 존재와
물에서 태어난 존재가 맞붙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왜 나일강에서 건짐을 받았습니까? 다른 아이들은 모두 죽는데,
모세는 왜 살아났겠습니까? 바로의 딸은 왜 어린 여자아이의 제안을 받아들였겠습니까?
어떻게 해서 모세는 자기 어머니 요게벳의 모유를 먹으면서 자라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에게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행전 7:20~21절에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 설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행 7:20~21).
모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사람 보기에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모세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이십니까?
우리 스스로를 보면 아름다운 존재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름다운 존재로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여 주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부활의 생명과 영생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름답게 보시지 않고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헵시바’라고 부르셨습니다(사 62:4).
‘헵시바’는 영어로 “My delight is in you”(나의 즐거움이 네게 있도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즐거움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름답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에서 구원자를 준비하시고
이 구원자를 특별한 섭리로 보호하시고 살려주셨습니다.
◑3. 구원자에 대한 하나님의 훈련(Training of Savior)
출애굽기에는 모세의 교육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7:20~37절에 기록된 스데반 집사의 설교 가운데
모세가 받은 교육과 훈련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모세는 크게 세 가지 방면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첫째, 지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행7:22
우리는 모세가 말을 잘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모세는 겸손했기 때문에 스스로 말이 어눌하다고 표현한 것이지,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진실로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말과 행동이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은 잘하는데 행동을 잘 하지 못하고,
행동은 잘 하는데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설교하면서
“모세는 말과 행사가 모두 능한 사람이었다!”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40세가 될 때까지 애굽 사람들의 학술을 다 배워서
지적인 훈련을 충분히 감당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모세오경을 기록하기에 충분한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기에 제일 중요한 요소가 지적인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 후보생들은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충분한 지적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제자훈련을 한답시고 구멍을 메우는 식의 성경공부와 같은 활동은
성도를 지적으로 마비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짓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자훈련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모세오경을 써야 될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식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지적인 훈련을 충분히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영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이 애굽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 세상에서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
천국에서 하나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이 훨씬 유익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에게서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이 모든 지식은 어머니 요게벳에게 배웠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애굽 백성이 아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네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애굽의 신은 가짜다!” “애굽의 신을 따르게 되면 너는 멸망한다!”
“인간에게는 영원이라는 것이 있다. 하늘의 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늘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니 1살때는 잘 몰라도 3, 4살이 되면 익숙해져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영적인 훈련을 잘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11: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세라면 ‘공주 아들’로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도망 다니며 ‘광야 목자’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자연적 본성을 따르자면 공주 아들로 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게다가 공주인 어머니는 최근에 섭정통치를 하여 왕 노릇까지 하고 있습니다.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놀고 싶은 만큼 놀고, 예쁜 여자 친구도 얼마든지 사귈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런 자연적인 본성으로 육신적인 욕구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육신적인 욕구를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본성의 유혹을 이겨낸 것입니다. 그만큼 모세는 영적으로 훈련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실질적인 목양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방인의 영접을 받으면서 40년 동안 목자로 훈련받았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목자로서의 훈련을 철저하게 받은 것입니다.
모세의 나이 40세 때, 내 백성을 돌아봐야겠다고 밖에 나가보니
애굽 사람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을 억울하게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에 파묻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를 갚아 주었습니다. 모세는 정의감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다음날 나와서 보니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왜 같은 동족끼리 싸우느냐며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간섭하니까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누가 너를 우리의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 하느냐?”며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살인한 사실이 들통났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기에 했던 일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똑같습니다(요 1:11).
모세는 그 당시 바로였던 투트모세 3세와 갈등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애굽 사람을 살해했다는 것을 빌미로 바로가 자기를 죽이리라 생각하고
광야로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로 도망가 우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그 때 우물가로 여자 목자들이 양을 끌고
와서 양떼에 물을 먹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들이 이 여자들을 희롱하며 양에게 물을 먹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모세가 보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 남자들을 물리쳐주었고, 여자 목자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모세가 궁중에서 격투기도 배운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모세가 도와준 이 여자 목자들은 미디안의 제사장 르우엘(이드로)의 딸들이었습니다.
이드로는 일곱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들이 오늘 우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아버지에게 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드로의 집으로 초대되어 공궤함을 받고,
일곱 명의 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십보라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십보라는 모세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게르솜이고, 둘째가 엘리에셀이었습니다.
이 두 아들의 이름을 보면 모세의 처한 형편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첫째 게르솜은 “여기서 내가 나그네가 되었다”는 의미이고,
둘째 엘리에셀은 “나의 하나님은 도움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방에서 객이 되었지만, 나의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 되셨다”는 의미를
아들들의 이름 속에 남겨둔 것입니다.
모세 아들들의 이름은 모세 자신의 현실적인 처지를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여인과 결혼하지 아니하고
미디안 여자와 결혼하였을까요? 그것은 도망자의 신세였기도 하고,
미디안 제사장의 딸인 이 십보라가 앞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줄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40년동안 방황할 때
다른 유목민족들과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미디안 출신인 제사장의 딸 십보라는 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불필요한 전쟁을 막아주는 역할을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가 담당해 주었던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여인입니다.
또 십보라는 자신의 두 아들인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모세의 후계자로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십보라가 남편인 모세에게 바가지를 긁으며
“여보! 당신이 이 백성을 이끌고 나온 지도자인데,
당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야 할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면
여호수아와 게르솜이 허구한 날 싸우다가 성경은 출 3장에서 끝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십보라는 비록 이방여인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여자였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있어도 그들은 모세의 후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애당초 달리 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십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모세의 광야생활은 양무리를 치는 목자로서 받은 훈련이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를 다니면서 그곳의 지리를 익혔고,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200만 명을 이끌고 가도 어느 누구도 감히 모세의 지도력에 대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만큼 광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실 때에도 지적인 훈련, 영적인 훈련,
나아가 실질적인 훈련을 병행하셔서 당신의 종으로 만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훈련하고 예비하시는데 철저한 분이십니다.
◑4. 구원하실 백성의 준비
출2:23~25절에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투트모세 1세, 2세, 3세로 계속해서 왕이 바뀌고 있는데도 핍박정책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에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출애굽하기 바로 직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괴로우니 살려주십시오! 구원자를 보내주십시오!” 기도로 준비한 것입니다.
여기 23~25절에 중요한 네 동사가 나옵니다.
첫째는 부르짖었다(Cried out to God).
둘째는 들으셨다(Heard).
셋째는 기억하셨다(Remembered).
넷째는 방문하셨다(Visited).
하나님은 구원자도 준비해 주셨고, 구원하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도로 준비시키셨고,
이제 행동하실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출 3장부터는 하나님의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결론
애굽의 18대 왕조는 아흐모세로부터 시작해서 투트모세 1,2,3세로 이어지다가
핫셉수트가 잠시 섭정을 했던 왕조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애굽의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했던 사람이 바로 출애굽 때의 바로였던
투트모세 3세입니다.
그래서 20세의 역사가들은 이 투트모세 3세를 두고 ‘고대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투트모세 3세와 갈등관계 속에 있었고,
이 갈등이 표출된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모세는 광야로 쫓겨나, 양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현세적인 안목으로 보면 투트모세 3세는 성공자요, 모세는 실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트모세 3세는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이고, 모세는 광야의 보잘것없는 목자였습니다.
투트모세 3세는 현세적으로 성공자였고, 모세는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안목은 세상의 안목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투트모세 1,2,3세 어느 누구하나 아름답게 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아름다운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오직 모세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호하시고, 훈련시키시고,
그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에 하나님의 모든 안목이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28세에 입대하여 4년간 공군장교로 복무하고 32세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동기들이 그 때 “너는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느냐?”며 불쌍하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친구들의 눈에는 독일어 단과반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고 있는 제가
실패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안목으로 성공자인지 실패자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안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
이것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성도들을 실패자로 볼지라도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으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구원하신 자기 백성을 향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백성, 내가 아름답게 보는 백성, 하나님은 이들을 주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유명하지 못하고 실패자로 보일지라도
우리가 진정한 승리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까스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자입니다.
모세처럼 하늘의 상이 많은 우리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