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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LNCK 2019. 12. 30. 06:44

https://blog.naver.com/karamos/222138896406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출25장 1~9           2015.04.19.

 

서론

 

출애굽기는 총 40개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 애굽의 노예가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는 ‘출애굽 사건’(Exodus)에 대한 내용

 

2)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기록해 둔 ‘하나님의 율법’(Law of God)과

이 율법을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내용인

‘언약의 서’(The Book of Covenant)입니다.

 

3) 마지막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해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 것인지에 대한 (성막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인 25~40장까지의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어는

‘장막’이나 ‘회막’으로도 번역되는 ‘성막’(Tabernacl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계속 출애굽기 강해를 해 나가면서 ‘성막’이라는 단어로 통일하여 사용합니다.

 

25~31장까지는 하나님이 시내산 꼭대기에서 모세에게 성막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성막의 식양에 대해 계시해 주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고,

 

32~34장까지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 돌비와 성막에 대한 계시를 받고 내려오다가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와 그 앞에서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는 모습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35~38장까지는 성막을 식양대로 제작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39장에는 성막이 완성되고,

40장은 이 성막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출25~40장까지는 (32~34장까지의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성막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성막은 왜 중요한가?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 성막에 관한 기록이 성경에서 차지하고 있는 분량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장 가운데 총 50개장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출13개장, 레위기 18개장, 민수기 13개장, 신명기 2개장과

신약성경 히브리서 4개장을 모두 더하면 50개장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성막에 관한 기록이 성경에서 차지하고 있는 분량만 봐도

성막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둘째, 출25:8절에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한 마디로 성막은 ‘하나님이 지상에 거하시는 임시처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지상에 오시면 어디에 거하실까요? 성막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내가 거할 처소를 짓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출39장에 완성된 이후 약 480년 동안 사용되었습니다.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교체되었습니다.

 

열상6: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년 시브월 곧 이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한 것은 B.C. 970년경입니다.

아버지 다윗이 즉위했을 때가 B.C. 1010년이고, 거기서 40년을 제하면 B.C. 970년이 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 만에 성전건축을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B.C. 966년에 성전건축이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480년 전에 출애굽이 시작되었으니

출애굽 사건의 연대는 B.C. 1446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은 성전이 건축되기까지 약 480년 동안

하나님이 지상에서 거하시는 임시처소가 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이유로 성막의 모든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히8:5절에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성막을 지은 것이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계시 받은 성막의 설계도는 모두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실체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성막의 실체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눅24:27절에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데

이는 모두 자기에 관한 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글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신약이 숨겨져 있고, 신약은 구약을 완성하고 설명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은 예표이자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경이 중요한 것인데, 특별히 구약성경에서도 성막의 모든 구성요소가

예표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성막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실체를 비교연구하면

더욱 분명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구약의 예표를 가지고 신약의 실체를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이후 르비딤에 이르러 물이 없다고 불평했을 때

모세가 반석을 쳐서 생수를 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는 반석을 쳐서 생수가 나온 것처럼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치셔서,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생수를 공급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히브리서 10장 20절에도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던 휘장이 그리스도의 육체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 것은

대제사장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예표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표로서 설명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이 신약에서 모두 실현되었으므로

신약성경의 내용만 잘 알면 된다는 주장은 엄청난 오류입니다. 구약의 예표를 알아야

신약의 실체를 알 수 있고, 신약의 실체는 구약의 예표를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표는 영어로 ‘Type’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상징’(Symbol)입니다.

특별한 형태의 상징을 가리킵니다. 상징과 예표는 다른데,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시고, 문이시고, 떡이시라”는 것을 상징이라고 하고

예표라고는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표도 상징이기는 한데 특별한 상징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어떤 사람이나 사건,

사물이 신약에 나타날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그림자일 경우 그것을 예표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2. 예표의 여덟 가지 특징

 

▲1. 첫 번째 특징은 반드시 ‘미래적인 요소’(Future Reference)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훗날에 예표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속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을 예표라고 합니다.

성막이 예표가 되는 이유는 미래에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특징은 반드시 역사 속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나 실존했던 인물,

또는 사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표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마12:39~4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요나에게 “너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지만 요나는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원수국가이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하나님이 보내신 풍랑으로 말미암아 배가 파선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풍랑의 원인을 찾던 중 배 밑창에서 잠자고 있던 요나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를 바다로 던지게 됩니다. 마침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신 하나님이 요나를

그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물고기 위 속에서 소화액으로 말미암아 녹아 죽어야 마땅한 요나를

하나님이 소화액을 분비되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니느웨 가까운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목숨을 부지한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헛소리가 어디 있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땅 속에 들어가셔서 삼일 간 계시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오실 육신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표는 반드시 역사적인 사건이라야 합니다.

 

요3:14~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21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에돔 땅을 거쳐 가려다가

그들이 허용해 주지 않아서 주변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한 백성들이 40년 동안 만나를 주신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괘씸하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부르짖었고,

모세가 백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명을 따라 장대 위에 매달린 놋뱀을 본 자는

깨끗하게 나음을 입었지만, 쳐다보지 않은 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게 될 것과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받게 됩니다. “나는 그런 것 믿지 않는다”고 하면 자기 죄를 지고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으면 보고 믿으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놋뱀 사건입니다. 놋뱀 사건은 예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체인 것입니다.

이 예표와 실체는 역사 속에 뿌리를 가진 사건이라야 합니다.

 

▲3. 세 번째 특징은 예언적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110편 4절에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사장 되심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본디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 나올 수 있는 일인데, 유다지파의 예수님이

어떻게 제사장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레위지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고 그를 축복한 제사장입니다.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반차에서도 제사장(예수님)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예언한 것이

바로 창세기 14장의 살렘 왕 멜기세덱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내용은 레위지파가 아닌 곳에서도 제사장이 나오는데

그 분이 바로 메시야가 되신다는 예언인 것입니다. 예표는 예언적입니다.

 

▲네 번째 특징은 예정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를 예정에 따라 움직이는 분이십니다.

예정된 계획을 따라 역사를 운영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에 대해 지나치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한다고 고민한대로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역사는 계획 없이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정이라고 하면 성질부터 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획도 없이 움직이셔야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예표라고 하는 것은 수백, 혹은 수천 년 뒤에 그 실체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예표를 주신다는 것은 수백, 혹은 수천 년 뒤에 그 실체를 보내실 것을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시는 분이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어로 예표는 ‘Type’이라고 하고, 실체는 ‘Antetype’이라고 합니다.

‘Antetype’은 ‘원형’이라고도 번역이 되는데, ‘예표’가 있으면 ‘원형’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실체를 예정해 놓지 않으셨으면 예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표는 하나님이 예정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된 것입니다.

 

▲5. 다섯 번째 특징은 실체가 예표보다 더욱 우월하고 분명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캄캄한 방에 촛불을 켜 두고, 그 앞에서 손으로 그림자를 만들며 놀았습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새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토끼를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이것은 모두 손으로 장난한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실체는 예표보다 더욱 분명하고 우월한 것입니다.

 

요1:29절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 양은 예표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린 양보다 훨씬 우월하고 분명하신 존재인 것입니다.

 

▲6. 여섯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하면 말씀에 근거가 있고,

요나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한다고 했을 때도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표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말씀에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경우 그것을 예표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할례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어난 지 8일 만에 치르는

이 할례 의식이 유아세례의 예표라는 근거가 신약성경에 없습니다.

신약성경 어디를 읽어봐도 ‘유아세례’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 어린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었으니까

신약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유아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예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주장입니다.

예표와 실체를 바르게 연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 침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유아세례를 베푸는 장로교 목사가 아니라 신자의 침례를 주는 침례교 목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장로교 간판을 걸어야 부흥이 된다고 말을 하지만,

저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예표와 실체가 전혀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구약의 할례는 신약에 ‘마음의 할례’를 예표한다고 보아야 정확합니다.

 

롬2:29절에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즉, ‘중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할례는 신약시대의 중생을 실체로 삼는 예표라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고 성경적입니다.

 

구약의 할례가 유아세례와 연결된다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성경적인 근거도 없습니다.

장로교회는 아주 좋은 교회입니다. 침례교와 90%이상 동일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할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는 유아세례를, 침례교는 신자의 침례를 주고 있습니다.

 

▲7. 일곱 번째 특징은 비슷하지만 차이점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예표이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가 실체이십니다.

 

히7:23~26절에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여러 명이지만 신약의 제사장은 한 분이십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요? 구약의 제사장은 모두 다 죽기 때문이고,

신약의 제사장은 죽지 않기 때문에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차이점을 통해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8. 예표의 여덟 번째 특징은 구약의 모든 예표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구약의 모든 예표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눅24:44절에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한 것은

구약성경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예표 없이 실체를 이해할 수 없고, 실체 없이 예표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성막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세 가지 면

 

▲1. 첫째, 성막의 위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군할 때에 40년을 살았는데,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성막도 일종의 텐트입니다.

 

그런데 성막은 백성들의 진영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막 가장 가까운 곳에 레위 지파가 있었고, 동남서북으로 세 개 지파씩 흩어져 텐트를 치고 머물렀습니다.

 

동쪽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

서쪽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 북쪽에는 단, 납달리, 아셀 지파입니다.

 

열두 지파가 성막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정착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동할 때는 어떻게 행군했을까요? 맨 앞에 법궤가 있고, 동남서북 순으로 행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운데는 고핫 자손들이 지성소의 기구들을 어깨에 메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막이 이스라엘의 진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의 삶과 교회의 중심에 서 계셔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삶에 중심에 계십니까?

어떤 분은 졸리거나 피곤하면 교회를 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조금 더 수면을 취하는 것보다 못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주일에 골프 치러 갈래? 교회 갈래?”하면 고민도 하지 않고 골프를 치러 갑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아주 먼 변두리로 밀려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삶의 중앙에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자식이 중앙에 있는 사람도 있고,

돈이나 쾌락이 중심에 있는 사람도 있고, 자존심이 중앙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의 삶, 그 중심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자기가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에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중심은 목사가 아닙니다.

제가 이 교회 중앙에 있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 교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장로님, 권사님도 중심이 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교회의 중심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인간이 중심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어납니다.

담임목사나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중심이 되면 그 때부터 교회는 온갖 문제로 홍역을 앓게 됩니다.

 

성막이 이스라엘 진영 중앙에 있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에 계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계1:2절에도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종들을 붙잡고 교회에 임재해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찬양대를 하고 예배 중간에 일어서서 나갑니다.

왜 나가는지 물어보면 결혼식을 가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결혼식만도 못하신 분이십니까?

 

예배에 임재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주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해 계신 예배시간은 매우 소중한 시간입니다.

만홀히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2. 둘째, 성막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성막에 거하시며 백성들을 만나주셨을 뿐만 아니라(Meet)

그들에게 말씀하시고(Speak), 그들의 제사를 받아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Forgive).

 

그러면 신약시대에 어떻게 하십니까?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만나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죄 사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막에서 하셨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3. 셋째, 성막의 모든 기구와 시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성막은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문이 동쪽으로 한군데만 열려 있습니다.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문이 하나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문이 되신다는 의미이고,

번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예표하고,

물두멍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야 함을 예표합니다.

 

성소 안쪽으로는 떡상과 분향단과 촛대가 있는데,

떡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생명의 떡임을,

분향단은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촛대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또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도 그리스도의 육체를 예표하고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법궤 위에 시은소도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예표하는 자리였습니다.

성소의 모든 기구와 시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모세가 마음대로 성막을 건축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시내산 꼭대기에서 보이신 식양 그대로 건축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가 보니 건축을 하면 이 사람 저 사람 참 말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골프 연습장에서도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배운지 3일밖에 안 된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모두 전문가인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도 얼마나 자기 뜻대로 하고 싶었겠습니까?

 

이렇게 짓는 것이 튼튼합니다. 저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여준 식양대로 지을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도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막의 모든 요소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성막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고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원자로 알고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예배하며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아 의를 받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 분을 창조주요, 구원자로 알고 예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우리 모두 진실로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