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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와 십계명 출20:1~5 2015.01.25.
서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Incarnation)사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큰 사건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법을 주시기 위해 강림하셨습니다.
십계명을 두 돌비에 써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음성으로도 들려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인간의 삶의 기준이 바로 십계명이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죄의 기준이 십계명입니다. 주1)
▲오늘 생각해 볼 것은 이미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십계명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또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십계명 말고 또 다른 법을 주셨는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20세기에 유행했고, 또 대부분의 이단들이 따르고 있는 세대주의 종말론은
율법폐기론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새로운 법을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새언약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십계명은 쓸데없고 신약성경이라는 새로운 법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강조하고 십계명을 사랑하고 지키라고 말하는 모든 주장을
율법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대주의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십계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목적은 이런 유형의 율법폐기론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것과
십계명은 역사상 단 한 순간도 폐지된 적이 없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고 중차대한 하나님의 법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십계명은 성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법인가?
▲1.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폐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구약의) 십계명이 아닌 신약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궤변입니다.
그저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 십계명과 신약의 법은 대치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은 고의적으로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려는 말에 불과할 뿐이며,
성립될 수 없는 논리입니다.
예수님도 십계명을 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5:17~18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일점일획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하나도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고,
완전케 하려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22:37~4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십계명은 첫째 돌비와 둘째 돌비로 되어 있었는데,
첫 돌비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고,
둘째 돌비의 내용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느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법을 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느 누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을 폐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 누구도 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십계명이 사람을 의인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십계명 속에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의인의 기준이 될 만한 것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성화케 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것은 잘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 목적대로 쓰여야 유익하듯이
십계명 역시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십계명은 성도가 복된 삶을 사는 지,
환란을 당하는 삶을 사는 지에 대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입어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에
어떤 사람은 복을 받고, 또 다른 사람은 환란을 당하기도 하는 데
그 기준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자의적으로 행하지 않으시고,
십계명의 기준을 가지고 복과 환란을 결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내용입니다.
“십계명을 잘 준수하면 가나안 땅에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을 어기면
기근과 전쟁과 질병을 겪게 될 것이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무시하였고,
서로 다투고 싸우고 우상 숭배하다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잘 지키고 살면 복을 받지만,
이를 어기면 환란이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거짓말하고 도적질하고 바람이나 피고 사기나 치는 사람의 삶이 복되겠습니까?
당연히 환란이 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섬기고 부모를 잘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살면
그 사람의 삶은 순조롭고 복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성도들이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삶의 기준으로서 엄연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너희가 십계명을 어기고 죄를 짓고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죄를 이기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면 너희는 반드시 살 것이고 흥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어제까지 죄를 짓다가, 오늘 돌이켜 의를 행하면 오늘부터 복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제까지 의롭게 살다가, 오늘부터 죄를 짓기 시작하면 환란이 닥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당장 이 시간부터 작심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을 받기 원하시면 십계명을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은 거듭난 성도의 새 성품 안에 내적으로 기록될 것이며,
성도는 그 법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렘31:33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하나님의 법이 심비(心碑)에 새겨집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우상 숭배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다!”,
“이웃을 학대하고 죄를 짓고 살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와 둘째 돌비에 새겨진 내용이 우리 마음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거룩한 법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롬7:22절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도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십계명이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가운데 존 머레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쓴 위대한 책 『구속론』(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에
“율법폐기론은 인간의 죄성에 자리 잡고 있는 사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죄성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십계명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습니다”
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도덕법인 십계명을 묵상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1편 1~3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은 그 속에 율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같이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법 십계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신학생 시절 세대주의 신학사상이 담긴 『율법과 은혜』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책 내용 중에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십계명을 비난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십계명은 마치 남편이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해 큰 액자에 열 가지 계명을 써 놓은 것과 같다”,
“나 외에 다른 남자를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는 내 사진이외에 다른 남자의 사진을 걸어놓지 말지니라” 등등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을 마치 의처증 걸린 남편과 같은 존재라고 표현하여
십계명이 매우 괴롭고 잔인한 법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매우 고약한 책이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의처증 걸린 남편이
자기 아내를 속박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갖게 하는 세대주의 신학사상이 담긴 책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성도들에게 십계명을 변경 없이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약2:11절에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엡6:1~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부모를 잘 공경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이 무조건 옳은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유교만이 효를 강조한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야말로 절대적으로 효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제5계명도 그대로 말씀하셨고, 6계명, 7계명도 마찬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7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옛 계명과 똑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과 똑같다는 의미입니다.
◑2. 신약성경에서 율법에 관하여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무슨 의미인가?
▲1. 신약시대에 율법의 정죄아래 있지 않지만,
그게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롬6:1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의 의미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Not under the Condemnation of the Law)는 뜻입니다.
십계명은 “네가 십계명을 어기고 범죄했으니 지옥에 가야 마땅하다”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계명의 정죄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기능은 ‘정죄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너는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십계명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의미이지,
이것을 “십계명 자체를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기능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기능이 ‘성도들의 삶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세번째 기능을 ‘율법의 제3용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율법폐기론자들은 이 기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이 세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세 가지 기능은 여전히 갖고 있는 것입니다.
갈2: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향해 죽었다’는 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십계명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죽을 노력을 다해보았으나
그런 시도는 모두 헛된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한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시도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저지른 범죄를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그 죄를 고발합니다.
“네가 한 짓을 다 알고 있다. 너는 지옥에 가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지옥가야 할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또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시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롬8: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고
죄 사함과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의 삶 속에 십계명은 여전히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율법폐기론자입니다.
그 사람은 혹 천국에 가더라도 지극히 작은 자라고 일컬음을 받게 될 사람인 것입니다.
◑3. 성도들은 십계명을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먼저 십계명의 모든 법을 외우셔야 합니다. 그래야 십계명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적용하는 첫 번째 방법은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내적인 동기 역시 그 대상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미워하지도 말라는 것이 포함되고,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음욕을 품지 말라는 것,
또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은 탐욕 또한 품지 말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둘째, 십계명은 소극적인 명령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명령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제1계명의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적극적으로 섬기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고,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셋째, 십계명은 부분적인 명령이라고 해도 전체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제유법’(Synecdoche)이라고 합니다.
제유법은 사물의 작은 부분이 사물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예를 들어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인데,
이는 “부모님만 공경하고 선생님에게는 무례히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즉, 위에 있는 모든 권위를 존중하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에
학교 선생님께도 최선을 다해 예를 갖추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넷째, 십계명 중에 물론 첫째 돌비에 기록된 내용이
둘째 돌비에 있는 내용보다 더 중요하지만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계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계명하나 사소한 법이 없습니다.
마5:19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론
여러분, 십계명이 괴롭고 답답한 법입니까?
십계명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십계명을 생각할 때마다 속박 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마귀의 장난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그 주권에 따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을 받는 것은 악을 버리고 의를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절, 한국 기독교는 성령충만을 방언이나 예언하는 것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해서
신비주의로 전락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이단들도 하고 불교의 승려들도 합니다.
힌두교에서도 하고 한국의 무당들도 합니다.
그런 현상만을 가지고 성령충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거룩한 법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법을 사랑하고 거룩한 능력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
모두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1)
이것(십계명)을 모두 다 지킨 사람만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일점일획도 어기지 아니하고 다 지킨 사람만 의인입니다.
그런 사람만 천국에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계명을 다 지킨 사람이 있을까요? 의인이 있을까요?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대 선언입니다.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십계명을 다 지켜 의인이 될 수 있는 가?”는 결론이
금방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럴 능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신성을 가지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시다가,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두 가지 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죗값을 해결 받는 죄 용서함의 복을 받고,
설령 십계명을 다 어겼다 할지라도 용서함을 받게 됩니다.
이 자리에 죄가 있어 고민하고 계시는 분들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전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이 땅을 사실 때 33년을 사셨는데 죄가 없는 완벽한 의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죄가 없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의의 전가’(Imputation of Righteousness)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의 의가 옷처럼 우리에게 입혀져서 의를 전가 받았습니다.
실질적으로는 의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 법적인 의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완전한 의의 옷을 입고 법적 의인 대접을 받으며
천국에 당당히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바로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십니까? 이 일에 우물쭈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의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천국에 당당히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사람은 죄 사함의 은혜와 칭의의 은혜를 다 받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