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한 시대에 추구할 영성 약5:10~11 2023.12.22.스크랩
전략 주1)
◑초대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원인은 인내
앨런 크라이더 Alan Kreider 교수가 쓴
〈초기 교회와 인내의 발효 The Patient Ferment of the Early Church〉에 보면,
로마 시대에 심한 박해 가운데서도,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원인을 인내로 보았습니다.
교회 성장의 핵심 요인을 연구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인내로 인해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재임하기 이전, 기독교인이 5백만~6백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인구의 8~12%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빨리 성장하자, 권력자들은 기독교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혹독한 핍박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인내했습니다. 인내함으로 어려움을 견뎌냈습니다.
불같은 시험 가운데서도 인내했습니다. 이것은 이교도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것은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프로그램이나 전략이 전혀 없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약한 집단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내했습니다.
그들은 인내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독특한 모습입니다.
▲욥기에 보면, 욥이 많이 인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욥보다 더 많이 인내하셨습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핵심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내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인내하십니다.
히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인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인내를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품은 사람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이자 신학자 터툴리안은 “인내는 그리스도인 됨의 핵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터툴리안은 인내를 가장 높은 덕으로 보았습니다.
▲앨런 크라이더 교수는 ‘인내의 발효’라고 표현했습니다.
인내를 발효에 비유한 것은 참신한 생각입니다.
발효가 시작되면 안에서부터 생명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발효는 서서히 진행됩니다.
서서히 조금씩 진행되기 때문에 발효과정을 주목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발효는 강력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발효한 결과는 놀랍습니다.
복음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눈에 띄지 않지만, 복음이 역사한 결과는 엄청납니다.
기독교는 성장 전략에 따라 성장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인내를 통해 성장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인내를 통해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번성하여 로마의 국교가 된 후,
더 이상 핍박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성도들은 인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핍박 가운데 인내할 때에는 믿음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신앙생활 하는 것이 편해졌습니다.
더이상 인내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인내할 이유가 없어지자, 성도들은 조급해졌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우리는 위대한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살아낸다.”
라고 말했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자랑하는 것보다 그 일을 이루어 내기까지 인내한 것, 소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참은 이야기가 바로 신앙입니다.
참는 것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경험한 후에 믿음이 성장합니다.
힘든 가운데서 참아낼 때, 그 속에서 믿음이 놀랍게 성장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신자들이 더 이상 인내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인내가 사라지는 순간, 기독교는 폭력적인 종교가 됩니다.
선교지에서도 폭력이 드러났습니다.
선교지에서 현지인들을 환대하고 현지인들과 함께하려고 하기 보다
그들 안에 제국주의적 문화를 심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폭력성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받게 하려면 기다려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강압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을 전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정죄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획일화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한 때, 한국 교회는 교회 성장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교회가 빨리 성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성도 수가 빨리 늘어나지 않는 교회의 목회자는 무능한 목회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강압적으로 몰아붙였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 프로그램이 많아졌습니다.
성도들은 빨리빨리 훈련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후유증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과 한국 교회의 모습이 굉장히 비슷합니다.
급하게 세운 것은 빨리 사라집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려 주는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기다리려면 인내해야 합니다. 힘을 빼야 인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바로는 애굽의 말들과 병거들, 마병들과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섰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달려왔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합니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
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 14:13)”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기다려야 할 때에, 움직이는 것은 믿음의 행동이 아닙니다. 불신앙입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수 6:3)”,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수 6:10)”고 말했습니다.
인내하는 동안에는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을 주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야 말을 주의할 수 있습니다.
▲삶이 힘들면 인내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게 됩니다.
마음에 원망과 불평이 가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인내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 모세에게 보고했습니다.
열두 명 중 열 명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민 13:31)”고 말했습니다.
원망은 상황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원망하는 마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과거에 대한 것입니다.
뒤를 향합니다.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인내를 통해 얻는 것이 많습니다. 초점이 분명해집니다.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본질에 집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내하게 하셔서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우리는 연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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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전략된 부분
◑신앙인격, 인내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핵심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한다는 즐거움이자, 특권이죠. 골1:24
또한 환난을 통해서, 내 신앙인격이 더욱 성숙해지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를 알기에, 그걸 내다보며 즐거워하는 거죠.
세상 사람들은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환난, 시련, 고난을 겪습니다.
살면서 문제와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지 않든 사람들은 살면서 환난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환난과 시련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환난을 통해 우리는 인내합니다.
인내함으로 연단을 받습니다. 그리고 연단을 통해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소망을 품습니다.
롬12:12절에 보면,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소망 가운데 즐거워합니다. 환난이 있어도 참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는 것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소망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소망하는 사람은 기다립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소망하며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 수 없을 때, 기다리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므로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는 믿음의 실체입니다.
인내하는 것은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소망한 것은
지금 우리가 소망하는 것과 다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죽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는 것이 없으면, 믿음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소망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지만,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모든 것은 끝납니다.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나는 날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인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을 통해, 인내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내는 그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계14:12절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성도는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인내를 통해 믿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인내를 통해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인내입니다.
악1: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5:10~11절에 보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표하는 것을 이룰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조급하게 생각합니다. 조급하게 행동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빨리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현실이 힘들수록 조급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조급하게 생각하고, 조급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실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
조급하게 행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상황이 나빠지면 사람들은 조급해집니다. 조급해지면 실수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발생하는 문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내하지 못합니다. 버티지 못합니다. 빨리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타협합니다.
▲왜 인내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빠르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가장 적절합니다.
시곗바늘을 돌린다고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은 아닙니다.
시곗바늘을 돌려도, 시간은 때에 맞게 움직입니다.
아무리 재촉해도 소용없습니다. 시기와 때가 있습니다. 전3:1
시기와 때를 정확하게 알고 행동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열심히 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 것과 상관없이
기다려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 3장 1~4절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때를 알고 때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인내해야 하는 때에는 인내해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하는 것,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다리는 것을 무기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다리며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내하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가만히 있다고 해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출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가만히 있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왜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우리는 할 일이 없습니다.
인내하며 힘을 빼야 합니다. 인내하며 힘을 뺄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믿는 사람은 힘을 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초조해하고 불안해합니다.
허둥댑니다. 실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도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만삭이 되면 힘듭니다. 아기를 출산하기 직전에 가장 힘듭니다.
배가 많이 불러서 바로 누울 수도 없고, 몸을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때가 찼기 때문입니다.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가 가까워질수록 힘듭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할 듯합니다. 그럼에도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참는 것이 믿음입니다.
새벽이 오기 전, 매우 어둡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가 되면,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믿음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환난이 심해지면, 타협하고 싶어집니다.
그때 참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배교합니다.
믿음의 삶에서 인내하지 못한 결과는 매우 무섭습니다.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을 때, 한계에 이르렀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이때가 고비입니다. 이때를 이겨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