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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P4, P5

LNCK 2019. 12. 30. 10:13

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 P4. 일제의 식민교육제도와 남장로회의 대응  (youtube.com)

◈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P4

◑일제의 식민교육제도와 남장로교 선교부의 대응 

인돈은, '한국에 대한 일제의 교육 목적은 
오로지 일본 천왕의 충성스러운 신민과  *신민 : 신하, 백성
독실한 숭배자로 길러내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선교부가 그 대안으로 기독교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것이 선교회가 한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봉사라고 여겼다. 
미국 남장로교를 포함한 재한 선교부는, 
교육선교를 위해 미션 스쿨을 운영하면서 
일제의 식민지 교육의 이념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정치와 무력을 통한 지배보다, 법과 교육을 통한 지배는 
조선인의 일상생활과 정신에, 일제의 식민통치를 뿌리내리게 하여 
영구적으로 한국을 지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인돈(린튼)과 남장로교 선교부는, 선교회가 한국에서 미션스쿨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교육선교의 목적과 정신을 분명히 하면서 
기독교적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제의 어떠한 요구나 강압에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교육제도 아래서, 학교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 총독부는 1911년 10월 20일, 사립학교를 식민지 교육체제에 포함시키고자 
"사립학교 규칙"을 제정했고, 이를 일부 수정 및 보완하여 
1915년 3월 24일 "개정 사립학교 규칙"을 공표했다. 

특히 1915년에 "사립학교 규칙 개정안" 제6조에 따르면 
"사립학교의 교과 과정은, 보통학교 규칙, 고등 보통학교 규칙, 여자 고등 보통학교 규칙, 
실업 학교 규칙, 또는 전문학교 규칙에 준하여
이를 정함이 가함"이라고 했고, 
"규정한 이외의 교과 과정을 추가하는 것을 불허함"이라고 명시했다. *성경교육, 민족교육 등

사립학교의 교과 과정을, 식민지 교육제도와 법령 안에 포함시켜 
자신들이 정한 교과과정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사립학교와 미션스쿨의 교육을 철저히 통제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일제의 식민주의를 이식하기 위한 교육목적에 어긋나는 
그 어떤 교육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기독교적 교육과 민족교육은, 
일왕의 충성스러운 신하와 백성으로 길들이려고 하는 
일제의 교육 목적과 충돌하는 것이었고, 
그들은 교육현장에서 이를 철저히 방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개정 사립학교 규칙은, 기독교 학교의 성경교육과 예배와 같은 종교 활동을 시행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컸고, "조선총독부 훈령제16호는 제국의 교육정책에 있어서 
국민의 교육을 종교 외에 세우려는 주된 뜻이 있다"고 아예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총독은, "종교상의 교육을 시행하거나 
그 의식을 행하는 것을 불허하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고 강조함으로써 
기독교 학교의 종교교육과 예배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 주된 목적임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이 법의 또다른 독소 조항은, "제10조, 사립학교의 교원은 국어(일본어)에 통달하고 
또 해당 학교 정도에 상응하는 학력이 있는 자"로 자격을 명시하는 규정이었다. 

'사립학교의 교사는 일본어에 통달한 자여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사립학교의 교사 임용도 그들의 손아래 두고자 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조선총독부는, '일본어에 통달하지 못한 사람은 
조선교육의 본 뜻인 충량(충성되고 선량)한 신민을 육성하지 못할 자이므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사는 모두 일본어를 통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특수한 경우도, 외국어, 한글, 한자, 또는 특수한 기술을 교수하는 자로 한정했다. 

기독교 선교의 중요한 영역이었던 교육사업에 대한 일제의 통제는, 
재한 선교부에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미션스쿨의 진로를 어둡게 했다. 

▲(교단 연합) 선교연합공의회는 1911년 6월, 교육선교의 목적과 입장을 일제히 대변하고 
협상 창구를 일원화 하여 공동 대응하면서 
법개정을 추진하기 위해 교육 평의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일제의 비타협적인 강경한 자세, 
-연합기구인 교육평의회가 각 선교회를 대표할 권한이 있는가에 대한 이의 제기, 
-학교인가를 포기할 때 발생할 불이익에 대한 선교부간 이해와 대응방식의 차이가 
교육평의회의 활동을 어렵게 했다. 

북감리회는 제일 먼저 사립학교 규칙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1916년에 교육평의회에서 탈퇴했고, 

이어 남감리회와 캐나다연합교회도 일제의 법령에 따라 학교인가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교육평의회는 아무런 성과 없이, 1917년 11월 20일에 해산되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강경했던 일제의 태도에 변화가 나타났다. 
1920년 3월 1일에 공표된 '사립학교 규칙 개정안'에 따르면 
'제6조, 보통 교육을 하는 사립학교는 그 정도에 따라 
정한 각 교과목이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교수상의 주의에 의해 교수함을 가함' 

'전항의 학교에 있어서, 교과목 중 수신(修身, 도덕) 국어(일본어)를 빠뜨리는 것을 불허함'
이라고 개정했다. 

이렇게 개정함으로써 일제가 정한 교과 과정에 
다른 교과목을 추가해서는 안 된다는 기존 방침에서 한걸음 후퇴하여 
도덕과 일본어를 제외한 과목들에 대하여 
사립학교 교과과정의 자율권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변화되었다. 

그런데 1922년 2월 6일에, 일제가 조선교육령을 개정하면서 
기독교 학교에 또 다른 위기가 닥쳤다. 

새로운 조선교육령은, 명목상으로는 그 이유를 
'일본과 조선의 공통정신에 기초하여 동일한 제도 아래에서 
시설의 완숙을 이루어 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과 한국의 학교 교육을 하나의 제도 안에 통합하여 교육의 평등을 이루고, 
한국의 교육여건을 높은 수준으로 개선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일본과 동일한 교육제도 아래 
그들이 요구하는 상당히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시키는 사립학교만
인가를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숨은 의도로는, 미인가 사립학교들을 각종 학교(문교부 인정 졸업장 없음)로 전락시키고 
졸업생들에게 상급학교 진학자격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교육 생태계에서 이들 (미션스쿨) 학교를 점차 도태시키려는 고도의 계략이었다. 

각종학교가 되면, 학생들이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학교를 
외면할 것은 당연한 이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학교는, 인가를 받아 일제의 교육제도 안에 편입되어 
교과 과정과 학교 운영에 통제를 받든지, 
예배와 성경교육의 기독교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인가를 받지 않고 각종 학교로 남아 불이익을 감수하든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인가를 받으면 학교가 발전하겠지만, 
재원 부족과 무리한 투자에 따른 학교 운영에 어려움이 생길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학교의 기독교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고 인가를 포기하면, 기독교적 교육을 할 수 있는 이점은 있지만, 
유능한 학생들이 입학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학교가 되어서, *학생들 지원 안 함
결국에는 학교가 생존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일제는 높은 교육열을 악용하여, 사립학교와 학생 및 학부모 사이에 
혼란과 갈등을 부추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학생과 학부모의 압박 속에서, 기독교 학교를 일제의 교육제도 안에 편입시키거나, 
그렇지 않은 학교들을 자연스럽게 도태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실제로 전문학교와 대학입학을 열망하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선교회가 운용하는 미션스쿨에는, 교육 내용과 방침이 시대에 뒤쳐졌다고 
불평하는 학생들이 동맹 휴학과 집단행동을 벌이며 
정규학교로 전환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사례가 빈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회가 주목한 대안은 "지정학교 제도"였다. *학력인정 학교
지정학교란, 본래 일제가 1921년 4월 25일에 공표한 
'전문학교 입학자 검정 규정'에 따른 조치였다. 

'제8조는 조선총독이 전문학교에 입학에 관하여 
중학교 또는 수업 연안 4년의 고등여학교 졸업자와 
동등 이상의 학력자로 지정한 자는 무시험 검정을 받을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 조항은 해당자가 없다는 이유로, 그동안 시행되지 않다가 
1922년 새로운 조선 교육령이 공표된 이후, 
1923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는 미인과 사립 각종학교(미션스쿨)가 
교과과정의 향상, 우수한 교원의 채용, 학교 설비를 개선함으로써 
조선총독부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면 
'지정학교'로 인가해 주어서 
졸업생들에게 전문학교 (상급학교) 입학을 위한 학력을 인정하는 제도였다. 

'지정학교'는 일제의 교육제도 아래에서 
선교부가 기독교적 교육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미인가 학교라는 차별과 불이익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그러나 공립학교에 준하는 시설을 갖추어 
지정학교로 인가를 받기 위한 요건이 매우 까다롭고,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기 때문에 
선교부는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 지정학교 인가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1923년 남장로교 선교부의 연례회의는, 교육위원회의 보고를 받고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고, 자격을 갖춘 교사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우며
이를 후원할 교회 구성원이 적다는 점을 고려하여 
선교회에서 오직 두 개의 고등학교, 곧 남학교와 여학교 각각 하나의 학교 지정을 추진하여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그렇게 유지한다."
 
어떤 학교를 지정학교로 추진할지는, 지정학교 추진을 희망하는 
남장로교 선교부 스테이션의 발표를 들은 후에 비밀 투표로 결정했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남학교는 전주 신흥학교와, 여학교는 광주 수피아여학교로 결정되었다. 

남장로교 선교부 교육위원회는, 지정학교 추진 결정을 받지 못한 다른 학교들은 
고등학교 과정의 상급반을 운영하지 않기로 했다. 

남학교의 경우 군산의 영명학교와 전주의 신흥학교가 
지정학교 추진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군산의 영명학교는, 1924년 당시 고등학교 과정까지 300명의 학생과 
8명의 한국인 교사가 있었고, 우수한 학교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지정학교 추진 탈락에 충격을 받고, 선교부의 결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군산지역의 교회와 선교부원 일부가, 군산 영명학교의 '지정학교 추진' 탈락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했고, 선교부는 교육위원장과 선교회 대표가 이에 대하여 답변하기로 했다. 
선교부의 결의에 따라, 전주에 남학교와 광주의 여학교를 지정학교로 추진하기로 하면서, 
선교부의 교육예산은 이들 학교의 시설 확충에 집중적으로 지출되었다. 

전주에 남학교, 광주의 여학교가 
다른 스테이션에 남학교 및 여학교의 예산과 비교하여 
거의 두 배 배정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24년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주목해야 할 언급이 있다. 
교육위원회 보고에서, 인돈이 전주의 남학교 지정학교 추진을 위해 옮겨가야 하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군산에 남학교를 담당할, 안수받은 선교사를 긴급하게 요청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군산 스테이션에서 영명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선교를 이끌고 있었던 인돈은 William Linton
전주 스테이션의 신흥학교로 옮져지면서 
시급한 전주 신흥학교의 지정학교인가 추진의 실무책임을 맡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광주의 수피아 여학교의 지정학교 인가 추진은
유화례 Florence Root 선교사가 책임을 맡아 주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거의 실패)

▲남장로교 선교부 교육선교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돈은 
미션 스쿨이 복음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복음을 전하는 수단은, 복음전도의 발전 단계에 따라 달라지는데 
한국선교는 교육이 복음 전파에 가장 효율적인 사역이 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다.   

선교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직접 전도를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도의 역할은 현지인들에게로 넘겨지고 있었고, 
선교사들은 현지인 사역자와 지도자들을 교육하는 일에 주력하게 됨으로써 
교육선교가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도 사역 전략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돈은 교육선교의 중요한 목적을 '교회 지도자 양성'으로 보았다. 
그에게 교육선교는 복음전도와 다름없었다. 

미션스쿨에 찾아오는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기독교적 환경 속에서 
기독교인 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이 
미션스쿨의 목적이라고 여겼다. 

인돈은 기독교인 학생, 기독교인 교사, 기독교적 환경
이 세 가지가 미션스쿨의 구성요소가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인돈의 교육선교 신념은, 군산과 전주에서뿐만 아니라 
나중에 대전대학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어졌다.

   *대전대학은 → 숭전대학을 거쳐 → 지금은 한남대학교가 됨.

인돈은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교육 목적은 
오로지 일본천황의 충성스러운 신민과, 독실한 숭배자로 길러내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선교부가 그 대안으로, 
기독교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것이 선교부가 한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봉사라고 여겼다. 

따라서 미션스쿨은 기독교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천황승배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길러내는 본연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며, 
학생들이 시설이 잘 갖춰진 기독교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며, 
최선을 다해 장래의 한국교회의 잠재적 지도자들이 
선교부가 할 수 있는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돈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우리 선교부 학교에 입학하는 소년과 소년은 대부분 기독교 가정 출신인데 
이들을 가르쳐서 먼저 올바르게 살아가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초등 과정에 있는 소년과 소녀를, 고등학교 과정까지 이끌어 나갈 작정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 교사가, 기독교적 환경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를 원합니다. 

만약 우리가 한국의 학생들을, 우리 학교에서 지도자로 길러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도자들을 정부 학교에 의탁해야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인들을 위한 일본의 교육 목적은 
오로지 일본제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일본 천황의 독실한 숭배자로 길러내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한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봉사는 
한국의 자녀들이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받는 특권을 주는 것입니다. 

남녀 학생들이, 좋은 시설이 갖추어진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입시다. 
그래서 미래의 한국교회의 잠재적 지도자들이,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합시다."

▲1924년 10월 31일의 선교 편지에서 인사례(인돈의 사모)도, 
미션스쿨이 교육선교에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하여 역설하며 
미국 교회의 기도와 후원을 요청했다. 

특히 전주의 신흥학교와 함께, 광주에서 지정학교 인가를 추진하고 있었던 
광주 수피아 여학교가, 여성교육과 교육선교를 위해 갖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지정학교 인가를 위해 필요한 예산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인사례는 여성에 대한 기독교적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한 선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여성교육'을 위한 물질적 영적 지원을 모국 교회에 요청했다.

「이 학교의 목적은 다음 세대 기독교인들의 어머니가 될 여성들에게 
기독교적 교육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교회와 국가의 안녕을 위해, 기독교 가정의 중요성을 (이 편지로)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한국인들도, 기독교 학교에서의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으며 
그들의 자녀가 결혼하기 전에 1~2년이라도 
우리 선교부 수피아 여학교에서 공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일본이 한국인들을 참된 일본인이 되게 하려면, 일본인 어머니를 가정에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국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면 
교육받은 기독교 여성을 가정에 두어야 합니다. 

주부가 될 여성을 준비시켜야 할뿐 아니라, 
초등학교에서 가르칠 미래의 교사들도 훈련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적 환경에서 미래의 교사들을 양성할 수 있다면, 
그들이 (교사가 되어) 가르칠 소년과 소녀의 삶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조그마한 학교 건물을 추가하고, 
학교 시설을 완전하게 갖추기 위해 5만 달러를 요청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적합한 시설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 정부가 우리가 원하는 '지정학교 인가'를 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학력인정 학교

여러분이 이 학교에 맡겨주신 헌금으로 
한국에서 미래의 기독교 가정이 만들어지는데 한몫했다는 확신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 교회의 젊은이들로부터 나온 헌금으로 모아진 이 금액이 
한 사람의 부자가 낸 금액이 아니라는 점이 더 기쁩니다. 

여러분의 재정적 지원은, 영적인 지원이 없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든 많든 후원하실 때
이 학교의 여학생들과 학교의 책임자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 Part 5. 전주 신흥학교와 기독교 학교의 이상 (youtube.com)

◈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P5

◑전주 신흥학교와 기독교 학교의 이상 

인돈은 "교육선교가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선교부의 가장 중요한 
복음전도의 사명"이라고 역설했다. 

선교의 목적을 상실한다면, 선교부가 교육사업을 해야 할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기독교적 교육과, 그를 통한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이 
미션스쿨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었다. 

인돈은 1926년 6월에 소집된 남장로의 제35회 연례회의에서  *내한 14년차, 1912년 입국
선교부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전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선교부의 결정에 따라 인돈가정은 1926년 초가을에 군산에서 전주로 이사했다. 
1912년부터 군산에서 시작된 선교가 14년 만에 마무리되고, 
이제 전주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선교부가 추진하는 교육선교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그것은 선교부의 역량을 집중하여, 신흥학교의 시설 확충과 
교사의 질적 수준과, 학생들의 학력을 일제가 요구하는 공립학교 수준에 맞추어 
조선총독부로부터 '지정학교 인가'를 받아내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결국 오래도록 인가 못 받음, 막판에 받기는 받았으나...

교육선교에 대한 확고한 비전과, 학교 교육에 대한 전문성, 
학교 운영과 발전에 대한 탁월한 행정력, 학교 발전을 위해 필요한 예산을 마련하기 위한 기금 모금, 
일제와 학교 문제를 놓고 협상하는 외교적 수완 등을 
종합적으로 발휘해야 하는 어려운 책무였다. 

▲인돈을 전주로 옮기기로 한 선교부의 결정은 
군산 영명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의 희망과는 크게 어긋난 것이었다. 

인돈이 오랫동안 군산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성실하고 친화력 있게 일했기 때문에 
군산의 선교사와 한국인 동료들은, 그의 이임을 매우 아쉬워했다. 

인돈과 인사례 사모의 셋째 아들 인휴 Hugh Linton 가 1926년 2월 22일에 태어났다. 
인돈부부는 갓난아기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마차를 이용해 군산에서 전주로 이사했다. 
이들은, 전주에서 남장로교 최초의 7인 선교사 중 하나인 최의덕 Lewis Tate 선교사가 
은퇴하며 비어있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인돈은 남장로교 선교부의 중심 학교인 전주신흥학교에 임시 교장으로 일하며 
전주로 이주하자마자 지정학교인가 추진의 실무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신흥학교 교장이었던 여부솔 Finley Everlsole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자 
그를 대신하여 임시 교장을 맡았던 것이다. 

여부솔이 복귀하면, 그가 교장과 종교교육의 책임을 맡고 
인돈은 교무 주임과 영어 과장을 맡기로 했다. 

인돈은 신흥학교 임시 교장과 함께, 후임자가 정해질 때까지 
군산의 영명학교 교장도 당분간 겸직하기로 했다. 

인사례에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제당국은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남성 선교사들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일본의 발전된 학교들을 탐방하고 주요 관광지를 돌아볼 수 있는 여행의 기회를 제공했다. 

인돈뿐만 아니라 다른 교파 선교사들도 이 여행에 참여했다. 
그들은 일본 전 지역의 우수한 학교들을 참관하고, 관광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일제의 의도는, 선교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일제의 발전상을 홍보하여 
한국에서 일제가 추진하려는 식민교육의 협조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일제가 지원하는 학교 순회 및 관광 일정에 
아무런 거부감 없이 참여했다. 

일제 식민통지에 대한 반감이 큰 우리로서는 좀 불편한 일이지만 
선교사들은 일제와 충돌하며 대립했다기보다는, 
대체로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관계에 있었다.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 였다.
그러므로 그 이전까지는 선교사들이 일제와 크게 부딪힐 일이 없었다)

일본이 식민통치를 하고 있던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하기 위해서 
제도적인, 일상적인 협력은, 그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을, 한국 민족주의 이념에 대입시켜 
민족을 위한 투사로 그리는 것은, 정확한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일제의 정책이, 선교부가 추구하는 선교의 목적을 훼손하거나 
기독교적 정체성과 가치에 도전하는 상황에서 
그들 선교사들은 일제의 순응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고 
선교의 목적과 가치를 끝까지 지켜나가면서, 일제의 강요된 시책에 반대했다*특히 1936년 이후

일제와 선교부의 갈등과 대립이 가장 확연하게 나타난 분야가, 교육선교 영역이었다. 
천황의 숭배자를 기르는 일제의 식민교육과 
그리스도의 사람을 기르려는 선교회의 기독교적 교육은 
그 목적과, 가치와, 방법에서 일제와 서로 공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일제가 자신들의 교육제도 아래에서, 미션스쿨의 기독교적 교육의 공간을 열어놓고 
그 가치와 정신을 지켜갈 수 있는 여지를 두었을 때, 
교육의 영역에서 선교부와 일제의 협력적 관계는 가능했다. 

지정학교 (학력 인가) 제도를 통하여, 미션스쿨이 기독교적 정체성과 학교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총독부로부터 지정학교인가를 받기 위해 힘을 기울였던 부분은 
이러한 공존과 협력관계의 예였다. 

그러나 1936년 이후, 일제가 미션스쿨 학생들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이에 불응할 경우, 학교 폐쇄를 압박했을 때 
남장로교 선교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장로교 선교부는 
일제의 요구에 불응하며, 학교의 자진 폐쇄를 단행했다.

이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따라서 일제와 선교사들의 관계를, 협력 아니면 대립의 이분법으로 단순화 해서 보는 것은 
이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 선교사들을 바라볼 때 
제국주의나 민족주의의 이념을 내려놓고, 
그들의 선교와 활동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우리의 이념적 잣대로 해석하지 말고 
그들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그들의 이해와 관점에서 해석하고,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평가하는 자세가 바람직할 것이다. 

인돈은 전주 신흥학교에서 지정학교 인가를 위한 업무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일의 계획을 세우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1923년에 신흥학교를, 지정학교 인가를 추진하기로 결의했지만 
실제적인 인가추진 작업은, 인돈이 1926년에 전주에 들어와서 업무를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었다. 

인돈은 당시 선교부의 재정 형편이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는 선교부의 큰 과업을 실현해 나간 사람이었다. 

그가 어떤 자세와 원칙으로 전주에서 학교발전을 이끌어 나갔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인돈과 친했던 한국인 교사 한 사람이,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복도에서 인돈과 마주치면, 인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시계를 꺼내서 쳐다보았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수업을 정시에 맞춰야 한다는 기본적인 자세를, 인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수업을 정시에 마치는 것은, 교사들의 기본 태도와 자세와 연관되는 일이었다. 

수준 있는 학교가 되려면, 교사들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교사들의 책임감과 성실성도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제멋대로 일하는 교사가 있는 학교는, 결코 좋은 학교가 될 수 없고 
질서와 규율이 없는 학교는, 발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돈은 무언의 교훈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후 남장로교 선교부가 대전에 세운 대학에 
인돈이 초대 학장으로 일할 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대전대학교, 한남대학교 전신

그가 교수들에게 요구했던 자세는, 수업은 정시의 시작하고 정시에 맞춰야 하며, 
교수와 학생 모두 결강을 해서는 안 되며,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어야 한다는 평범한 원칙이었다. 

교육선교와 관련하여 1926년에 남장로교 선교부가 결정한 중요한 내용은 
'한국교회도 미션스쿨 운영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정책이었다. 

그것은 남장로교가 한국 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학교 운영은 자립을 기본정신으로 하여,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직 한국교회의 여력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선교회와 한국교회가 학교를 함께 운영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한국교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학교를 운영해 나가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네비우스 선교)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1926년 남장로교 제35회 연례회의에서 
선교회와 해당 지역노회가 
'미션스쿨 연합 이사회'를 구성하여 운영해보자는 안을 채택했다.

이 위원회는 광주와 전주 지역의 한국교회가 
고등과정 뿐만 아니라 초등과정에 미션스쿨도 인가를 추진해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에서 
미션스쿨 운영에, 한국교회와 긴밀하게 협력하기 위한 통로로서 구성되었다. 

선교부는 산하 교육위원회에 연합이사회에 설치안을 회부했고 
교육위원회는 본격적인 시행에 앞서, 1년간 시범운영할 것을 선교부에 권고했다. 

교육위원회는, 미션스쿨 총 이사회는 총 10명으로 구성하되, 
선교사와 한국인이 반반씩 참여하고 
전남과 전북에서 각각 4명, 순천에서 2명을 (이사) 위원으로 선정하기로 권고했다. 
이사장은 선교부의 교육위원회 대표가 맞는 것으로 했다. 

1926년 교육위원회 보고서에는 
각 노회구역에 두기로 한 미션스쿨 이사회의 임시정관이 첨부되었고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남장로교 미션스쿨 이사회 임시정관 

1 명칭. 남장로회 미션스쿨 이사회 

2 목적. 선교회와 노회가 한국의 젊은 남녀의 기독교적 인격을 계발하고 
시대에 적합한 교육을 계획하는데 협력함 

3 위치. 각 노회 경내에 둠 

4 구성원. 이사회 구성원은 선교회와 노회가 임명함 

5 구성원의 수는 선교회에서 4명, 노회에서 4명으로 총 8명으로 하고 
순천지역은 예외로 각 3명으로 함 

6 이사회 임기는 2년과 3년으로 함. 임기가 만료될 때 선교회와 노회가 후임자를 임명함 
10 이사회는 선교회가 임명한 이사의 과반수와 
노회가 임명한 이사의 과반수가 출석했을 때 회의를 열 수 있음. 
이사가 아닌 교장은 참관의 특권만 있음. 
의장은 모든 사안에 대하여 투표할 권한이 있음. 

11 이사회는 필요시에는 교장의 지명을 받아, 교감과 학감을 임명할 수 있음 
교장은 반드시 선교회가 임명함 

12 학교 설립자는 교장에게 교사를 채용할 권한을 위임하며 
교장은 이사회에 임용된 교사들에 대하여 보고함 

13 이사회나 교장이 거부한 교사들은 채용될 수 없음 

15 이사회는 모든 학교의 규정을 제정하는데 권고할 수 있음 

16 이사회는 학교의 중요한 문제를 처리하는 것과 관련하여 교장과 상의할 수 있음 

17 이사회의 규정을 수정하고자 할 때, 선교회와 모든 노회가 수정 제안을 승인한 후 
이사회의 3분의 2의 표결로 가능함.」

남장로교 선교부는 사립학교를 고사시키려는 일제의 계략에 맞서고, 
상급학교 진학의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일제의 (문교부) 인가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한국인들의 요구 사이에서 
제한된 범위 안에서 지정학교인가를 추진함으로써 
미션스쿨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선교회와 한국교회의 연합은 중요한 문제였고 
미션스쿨 이사회를 두어 교육선교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했다. 

미션스쿨은 선교부만의 학교가 아니라, 결국엔 한국교회의 학교가 되어야 있기 때문에 
선교부는 연합이사회가 중요한 (연합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미션스쿨의 설립 목적인 기독교적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일제의 교육제도 아래에서 학교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선교부의 당면 과제였다. 

▲신흥학교의 지정학교 실무를 맡아 추진하고 있었던 인돈은 
1927년에 미국 해외 선교본부에 보낸 선교편지에서 
미션스쿨이 추구해야 할 기독교적 교육 내용과 
신흥학교의 지정학교 인가추진 상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그는 교육선교가,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선교부의 가장 중요한 복음전도의 사명이라고 역설했다. 

선교의 목적을 상실한다면, 선교회가 교육사업을 해야 할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기독교적 교육과, 그를 통한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이 
미션스쿨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미션스쿨은 
첫째, 교사가 지적이고 적극적인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둘째, 학생의 절대 다수가 기독교인이어야 하며 
셋째, 각 교과목이 학생들로 하여금 모든 세상의 창조주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생각은, 초기부터 그 이후까지 이어진 인돈의 교육선교의 원칙이었다. 
당연히 그가 설립위원장과 초대학장으로 봉직한 <대전대학>에서도 
이러한 원칙은 동일하게 강조되었다. 

인돈은 당시 일제 식민교육제도 아래서 미션스쿨의 존립은 
지정학교 인가에 달려있고, 이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여겼다. 

그는 일제가 한국에서 미션스쿨의 지정학교인가를 위해 
학교 시설, 교사진, 학생들의 학력 수준에 있어서 
다른 공립학교와 동등하거나, 더 나은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학 입학 자격과, 공직이나 교사직 임용의 자격은 
오직 공립학교나 지정인가를 받은 학교 졸업생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에 
만약 미션스쿨이 지정학교 인가를 받지 못하면 
뛰어난 학생들을 일본의 학교에 빼앗기게 될 것이며 

결국 유능한 학생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양성하려는 미션스쿨의 목적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인가 추진 과정에서, 일제교육 당국자들로부터 
미션스쿨의 시설과, 교사진의 수준과, 학생들의 학력이 매우 저조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남장로교 선교부 전체가 마치 한 사람처럼 움직이며 
신흥학교를 지정학교로 인가받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고 (선교편지에) 전했다. 

구체적으로 학교시설 보완을 위해서 7만 달러의 재정이 필요하고
이 중 5만 달러는, 다음 해에 지정학교인가 신청을 위해, 당장 필요한 자금이라고 말했다. 
선교부는 자금이 부족하여, 다른 미션스쿨의 고등 과정 상급반 2개 학년을 축소하고, 
그 비용을 우수한 기독교인 교사를 확보하는데 지출하도록 결정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미국 교회에 적극적인 후원을 간곡히 요청했다. 

인돈은 미션스쿨이 일제의 교육제도 아래 존립하며 
교육선교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서 
순응해야 할 부분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 대하여 언급했다. 

지정학교인가 추진은, 학교의 생존과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제가 요구하는 교육제도에 순응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교육선교의 사명과 본질을 지키기 위한 목적임을 분명히 했다. 

학교의 지속과 발전을 위한 타협이 아니라 
제도적인 불이익 속에서, 미션스쿨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었다. 

인돈은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 선교부가 일제 교육제도 아래 처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교육선교의 원칙과 현실적 대안을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는 일본의 교육 목적이나 그들의 제도에 동의하지 않지만 
우리 학교가 그들의 제도에 의해 규제 받고 있으므로 
우리가 한국에서 학교를 운영하려면, 그들의 기준에 따라야 합니다. 

일본 정부는, 인가받은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일을 금지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의 근본 목적은, 그리스도를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법에 따를 수 없었습니다. 

1923년에 일본 정부는, '지정학교'라는 것을 인가하는 법을 공표했습니다. *학력인정학교
지정학교에서는 정부의 교과 과정을 엄격하게 따라야 할 필요가 없으며, 
성경과 종교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충분한 시설을 갖춰진 학교에서, 우수한 교사들이 가르치는 시스템에서 
교육받지 않은 졸업생들은, 자신들의 학교와 동등한 자격을 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글에서 인돈은, 
신흥학교의 지정학교 인가를 취득하기 위해, 리처드슨 홀을 건립했지만 
그 건물에 필요한 시설 비용 1만 달러가 여전히 부족하고, 
유능한 교사를 확보하기 위한 재정이 부족한 당시 상황 상세하게 (편지로) 설명했다. 

재정부족으로 신흥학교와 수피아 여학교가 
학교 시설과 유능한 교수진을 갖추지 못해서 지정학교인가를 만약 받지 못한다면, 
한국교회의 훌륭한 남녀 학생들이 기독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일제의 공립학교로 가서, 각종 세속적, 물질주의적 이념에 물들게 될 것이며 
한국교회는 지도자를 길러낼 학교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1928년 당시 전주의 신흥학교와 광주의 수피아 여학교는 
지정학교 인가를 추진하고 있었지만 
선교회의 예산 부족으로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하여 답보 상태에 있었고, 
지정학교 인가 신청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신흥학교는, 리처드슨 부인의 후원으로 본관을 완공할 수 있었다. 
인돈은 '신흥학교 지정학교 인가'라는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숨가쁘게 활동하며 동분서주했다. 

그러는 가운데 1927년 12월 4일에 인돈의 넷째 아들 인도아 Thomas Linton 가 태어났다. 
바쁜 일상 중에도 그는 가정에 충실했다. 
토요일 오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가기도 하면서 
일과 쉼, 그리고 사역과 가정의 균형을 유지했다. 

인돈은 가족뿐만 아니라 동료 선교사들과의 우정과 사귐도 중요하게 여겼다. 
전주에 있는 독신 선교사들인 위에미 선교사와, 그의 오빠 위인사 선교사, 
그리고 예수병원의 간호사 계슬라 Ethel Kestler 선교사가 크리스마스 행사를 할 때 
인사례와 동행하여 그들과 함께 보냈다. 

인돈은 전주에서 교육선교 외에도 복음전도사역도 함께 맡고 있었다. 
전주 지역의 주일학교 사역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순회전도를 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일을 했다. 

그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성경과목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겨울에는 선교회가 주최하는 10일 사경회에서 마가복음을 가르쳤다. 

매주일 오후에는 소그룹을 대상으로 영어예배를 인도하며 설교를 했다. 
그는 예배 설교 요청을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따로 설교 노트를 만들지 않고 
성경 인물을 중심으로 설교했다. 

특히 성경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종종 설교의 주제로 삼았는데 
바나바, 마가요한, 그리고 로마서에서 언급된 인물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설교는, 마가, 다니엘, 엘리야의 시리즈 설교였다. 
교육선교뿐만 아니라, 복음전도의 열정이 컸고, 
설교나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이 일에 대한 기쁨과 재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목회에 대한 소명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