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 Part 7. 일제의 선교사 추방과 인돈의 youtube.com
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 Part 8. 해방 후 선교지 복귀와 선교 재건 youtube.com
◈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P7, P8 ☞시리즈 보기
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
◑Part 7. 일제의 선교사 추방과 인돈의 중단 없는 선교
(일제의 선교사 추방 조치로 미국으로 돌아온) 인돈은
미국 남장로 교단 해외선교본부에서 일하면서,
그의 판단과 경험과 능력으로 인하여
해외선교본부 직원들로부터 신뢰와 인정을 받았고,
선교정책 입안과 진행 과정의 그 어떤 단계에서도 그가 모르는 부분이 없었을만큼
선교본부 업무에 정통했다.
또한 탁상행정에 그칠 수도 있는 해외선교본부 안에서
한국에서 그의 오랜 선교 경험과 실전감각은 '현장의 견해'를 제공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인돈은, 테네시 내슈빌의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서
선교지원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인돈이 해외선교본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해외선교본부 총무의 업무가 과중했고, 수많은 선교사가 갑작스럽게 귀국하면서
관련 업무가 폭증했기 때문에, 그의 일을 돕기 위한 인력으로 선발된 것이다.
당시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 총무는, 행정업무 외에도
선교사 지원자 담당부서, 지정목적 사업부서,
모든 선교 현장에 있는 현지교회와 선교본부와의 해외교신 전체를 총괄하는 직무를
혼자 담당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선교사들의 대거 철수와 귀국에 따라 갑작스럽게 생겨난 업무가 더해졌다.
예를 들어 미국으로 복귀한 선교사들의 적응 문제로
주택과, 일자리와, 교회 임지를 찾는 일,
선교사들을 다른 선교지로 전출시키는 일,
현장에서 선교사업을 매우 축소된 인력으로 조정하는 일,
바다를 건너는 교통수단에 대한 지원,
안내 책자, 기사 보고서 등을 통해 모국 교회에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일,
전적으로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세계정세 앞에서
결정을 내리고 정책을 입안하는 책임을 매달 수행하는 일이었다.
총무의 역할을 분담해야 했고, 해외선교본부는 가장 유능한 사람을 찾아서
총무의 업무를 보조하도록 했다.
미국으로 복귀한 수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고,
신중한 선발 과정을 거쳐 인돈이 임명되었다.
인돈은 본부의 요청에 따라, 1941년 9월 말 이전에 내슈빌에 들어와
즉시 총무의 보조자로서 업무를 시작했다.
이로부터 인돈은, 일제 패망 이후 한국에 다시 복귀하기 전까지 5년 동안
해외 선교본부에서 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고, 탁월한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본부가 주는 상을 5차례나 받았다.
인돈은 해외선교본부에서 업무를 시작하면서, 선교사 지원자 부서를 전담해서
신임 선교사를 선발하여 임명하는 실무 책임을 맡았다.
이 일은 해외선교본부의 업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인돈은 그의 인격과 경험에서 나오는 특별한 능력으로 이 업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선교사로 헌신하는 근본적 동기에 대한 깊은 이해,
지원자들의 성격과 자질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통찰력,
부드럽게 협상하고 교섭하는 재능으로, 신임선교사를 선발하는 업무를 훌륭하게 감당했다.
인돈이 본부에 있으면서 선발한 남녀 선교사들은
이후 남장로교의 모든 선교지에서 가장 훌륭한 선교사들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으로, 선교사 인력과 선교자금이 위축되면서
대학과, 신학교, 교회에서 선교사를 모집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선교자원의 위축은 1940년대까지 이어졌다.
또한 미국이 1941년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선교사로 나갈 젊은이들이 군복무로 내몰렸다.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애국주의가 성행했던 이 시기에
군복무 이후로 선교사 지원을 연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교자원이 극도로 위축되었던 이 시기에,
인돈은 해외선교본부에서 신임선교사를 찾아 파송하는 어려운 일을 감당했고
이러한 노력으로 선교지의 선교인력 보강이 꾸준히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사역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인돈이 여기서 일하면서 많은 생각과 노력을 집중시켰던 특별한 목표는,
해외선교를 꿈꾸며 준비하는 젊은이들로 구성된 선교사 예비단체를 구성하는 일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아시아의 남장로교 선교지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는 일이었다.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의 기록에 따르면,
1945~1957년까지 12년 동안 445명의 신임선교사가 선교지로 파송되었는데
남장로교 선교 역사 속에서, 12년간의 기록으로는 가장 큰 숫자였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큰 업적을 거두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인돈이였다.
그는 미래에 있을 기회와 필요를 내다보고,
눈물로 씨를 뿌려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는 혜안과 열정이 있었다.
해외선교본부는 본부인력을 강화하는 조치로
1945년 1월 1일 리처드 길레스피 목사를 선교사 지원자담당 총무로 영입했다.
이전까지 이 업무는 인돈이 실무책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는 길레스피 총무가 업무를 파악하고 자리를 잡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로 보건대 인돈은, 해외선교본부에서 총무가 수행할 역할을 홀로 감당해 왔던 것이다.
해외선교본부가 이 일을 전담할 별도의 총무를 선임하면서
선교사 지원자 관리 업무에 인돈의 역할이 축소되자
본부는 인돈에게 새로운 역할을 맡겼다.
한국으로 복귀하기 직전 1년 동안, 인돈은 지정목적 사업부서의 주요 업무를 담당했다.
그가 맡은 일은, 교회나 개인의 후원을 받아
해외선교지에서 선교사나 특별한 프로젝트를 개별적으로 후원하도록
서로 연결시키는 작업이었다.
해마다 해외 선교지에 지출되는 예산의 3분의 1이
이 부서에서 나올만큼, 이 프로젝트는 남장로교 해외선교를 움직이는 중요한 업무였다.
인돈은 해외선교본부에서 일하면서, 그의 판단과 경험과 능력으로 인하여
해외선교본부 직원들로부터 신뢰와 인정을 받았고,
선교정책 입안과 진행 과정의 그 어떤 단계에서도,
그가 모르는 부분이 없었을만큼 선교본부 업무에 정통했다.
또한 탁상행정에 그칠 수도 있는 해외선교본부 안에서
한국에서 쌓은 그의 오랜 선교 경험과 실전 감각은, 현장의 견해를 제공했다.
그의 판단은 매우 직설적이고 솔직했지만,
반대 의견과 부딪힐 때 그의 친절함과 유머는, 회의 자리의 긴장과 어색함을 날려버렸다.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주고, 바른 판단과 결정에 이르도록 이끌어 나가는 그의 영향력과 리더십은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뿐만 아니라, 다른 교단 선교본부와의 연합모임이나
초교파 위원회 모임에, 남장로교 선교부 대표로 참석하는 데서 발휘되기도 했다.
▲참고로 인돈의 인격과 신앙에 대한 평가를 종합한 글을 소개한다.
「그는 신앙과 교리에 대하여 독실하고 건전하다.
그의 인격적인 신앙은 깊고 안정적이다.
전쟁 중에 실종되었다고 보고된 그의 아들의 생사가 불확실하여
그 문제로 몇 달간 마음이 괴로웠을 때에도
그는 침착하고 평온했던 것을, 그의 친구들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행동에는 진실함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는 말할 때나 친구나 적을 대할 때, 정직하고 진실했다.
그의 행동과 말이 순결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내숭을 떨지 않았다.
그는 언어나 행위에서 비열함을 드러내는 것을 혐오했다.
그의 예리한 유머감각과 온화한 성품은,
그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지울 수 없는 미소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일을 할 때 철저히 준비했다. 조지아텍을 졸업한 공학도로서,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중등교육 분야의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동시에 성서신학교에서 2년간 특별 과정을 밟았다.
이후 GA 디케이터의 컬럼비아 신학교에서 신학 교과목을 이수하여 신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1930년 서남부 조지아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1957년에는 벨헤이븐 대학에서 선교사와 교육자로서 그의 탁월한 봉사를 인정받아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헌신적인 기독교인으로서 그가 행한 모든 일에
그리스도께 흔들리지 않는 충성을 나타냈다.」
◑파트 8 해방 후 선교지 복귀와 선교 재건, 한국 조사위원회 활동
인돈이 한국 복귀 후 보낸 서신에서 인용한 글. ↙
"우리가 탄 배가 두 달 전 인천항에 다다르자
일본이 우리를 쫓아낸 똑같은 장소에 우리가 상륙한다는 생각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1940년 11월, 우리가 배를 타고 떠난 바로 그 항구의 발을 내딛었을 때,
그날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6년 후 우리가 같은 장소에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악한 세력들이 우리를 멈추게 했던 정확히 같은 장소로
우리를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사역을 재개시키셨습니다."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철수했던 선교사들의 복귀와 선교의 재건이 진행되었다.
당시는 선교사들이 복귀하기 위한 교통편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또한 미국 국무성의 여권 발급심사 절차가 까다로워,
아주 특별한 상황이나 긴급한 업무가 아니면, 여권을 발급받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은 미군정 체제였기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 선교사업을 재개하는데 필요한 모든 일에 권한과 절차는
미군의 소관이었다.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는, 선교사들이 복귀하기 전에
선교 현장에 가서 상황을 정돈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위한 선발대를 파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선발대에 참여할 인원의 선발은, 선교사들이 그들 중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추천하여
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한국조사위원회는 인돈, 구례인, 김아각, 조하파, 우월손으로 구성되었는데
인돈이 위원장이었다.
해방 이후 선교사들의 원활한 복귀와 선교사업 재건과 발전의 배경에는
이들 선발대의 지혜와 노력의 공로가 컸고,
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인돈은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일제에 의해 추방된 후 한국으로 복귀하여, 선교 재건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모든 선교사의 소망을 품고, 인돈은 남장로의 해외선교본부 한국조사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1940년 11월 14일에 한국을 떠나
1946년 7월 1일 한국 선교 현장으로 다시 복귀한 것이다.
인돈은 그날의 감격을 잊지 못했다.
일제 패망 후, 신속하게 선교부 복귀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혼란하고 어수선한 한국의 상황 때문이었다.
조사위원회의 입국은, 미비한 교통수단과 미군정의 관료주의로 인하여 지연되었다.
가장 먼저 한국에 들어온 사람은 우월손이었다.
그는 미국 정부에 초청으로 군용기를 타고 1946년 1월 15일 서울에 들어왔고
기차로 광주로 이동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순천 스테이션의 여수로 내려가
남장로교의 모든 선교사업 가운데 애양원을 제일 먼저 재개했다.
그 다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사람이 인돈과 김아각이었다.
그들은 1946년 6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편으로 출항하여
7월 1일 인천에 들어왔다.
인돈은 전북 지역을, 김아각은 전남 지역을 맡아서 조사위원회 업무를 시작했다.
인돈은 전주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학교를 다시 시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조사위원회는 1946년 7월 24일 변요한 선교사가 살던 순천 사택에서 모임을 가졌다.
인돈은 전주와 군산의 상황에 대하여,
김아각은 광주와 목포의 상황에 대하여,
우월손은 순천의 상황에 대하여 해외선교본부에 보고서를 보내기로 했다.
당시 선교회 재산과 건물 가운데 군산 스테이션의 피해가 가장 컸는데
군산의 재산은 일제에 의해 매각 또는 소실되었으며
특히 영명학교는 불에 타서 초토화된 상태였다.
또한 미군이 점유하여 사용하는 선교부의 건물과 주택은
미군 측이 원상복구를 하도록 협상했다.
인돈은 전주 스테이션의 선교회 재산복구와 보상과 관련하여 미군과의 협상을 맡았다.
특히 인돈은, 전주에서 미션스쿨의 재개교 요청을, 노회와 동문 대표들로부터 받았다.
이들이 제안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9월에 시작하는 가을학기에 두 학교를 다시 열기 위한 계획을 세워줄 것
2. 이 학교들은 이전의 미션스쿨의 목적에 따라 운영되어야 할 것
3. 당해 연도를 위한 학교재정은 운영기관, 곧 노회가 전액 충당할 것
4. 인돈이 당분간 설립자 및 교장으로 일해줄 것
5. 미군이 남학교 건물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올해는 여학교 건물에서 두 학교가 진행될 것
6. 개조, 수리, 학교 시설에 드는 모든 비용은
현재 학교 운영을 위해 지출을 고려하고, 선교부에 되갚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
시설은 학교의 자산이 될 것.
인사례를 통해 보낸 1946년 7월 16일자 인돈의 선교 편지에는
조사위원으로서 그의 활동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인돈이 전주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선교사들의 안부를 물으며
따뜻하고 진심어린 환영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선교사들이 속히 복귀해 줄 것을 긴급하게 요청했다.
그가 전주동부교회와 중부교회에서 주일오전예배와 저녁예배에서 설교했을 때
700명의 교인이 참석했고, 예배당의 인원을 다 수용하지 못하여
많은 사람이 건물 밖에서 예배를 드릴 정도로 인파가 넘쳐났다.
인돈은, 몹시 더운 날씨에 예배당과 창문과 출입문에 사람들이 가득하여 힘들었겠지만,
부채질을 하고 땀을 흘리면서도 따뜻한 환영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고
그날의 상황을 전했다.
한국 교인들이 얼마나 간절히 예배를 사모하고 있었는지,
선교사들의 복귀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인돈은 한국 교회가 예전보다 강해졌지만,
동시에 분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상황을 편지로 전했다.
특히 신학교 설립과 관련한 갈등과 분열,
그리고 신사참배 문제로 한국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문제도 소상히 보고했다.
또한 인돈에게 전주의 미션스쿨 동문과 노회 대표들이
학교를 다시 재개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 것과
그들의 요구사항도 자세히 언급했다.
이 편지에서 인돈은, 미군정의 전남지사인 피케 Peeke 대령이 현재
미군이 차지하고 있는 광주 스테이션의 선교사 사택을
1년 정도 더 사용할 것이라고 양해를 구하면서
사택을 수리하여, 미군과 선교사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고 제안한 내용을 전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하여, 인돈은, 미군이 선교사들과 가족들의 숙소와 음식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 같다고 반가워했다.
미군이 욕실, 난로, 하수도, 상수도, 냉장고를 설치해 줄 예정인데
현재 사택은 피난민들이 차지하고 있어 그들을 내보내기도 어렵고
선교부가 집을 수리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라서
미군의 제안한 대로 해준다면, 선교부로서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미군이 나가면서,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할 것이라고 상황을 전했다.
인돈은, 광주와 같이, 전주도 동일하게 일 처리가 되기를 원했다.
인돈은 전주 스테이션의 상황도 간략하게 보고했다.
선교부 재산은 관리인 박원평이 비교적 잘 관리하고 있었다.
선교사 사택은 일본과 미국 군인들이 사용했고, 일부는 피난민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전주신흥학교의 외관은 양호했고, 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학교의 난방 설비는 군산의 정부병원으로 옮겨졌고,
전주예수병원에 난방시설은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보이열과 인돈의 사택은 욕조가 붙어 있었지만 물이 샜고,
인돈의 집 상태가 더 안 좋았다.
독신 여성들의 사택은 좋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어,
미군 군목과 가족이 다음 달에 와서 사용하게 될 것이라 전했다.
전주의 기전 여학교 건물과 사택은 비어 있지만
일부 한국인 가정이 기숙사에서 살고 있다고 상황을 보고했다.
인돈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귀할 때
준비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파악하여 보고했다.
미군이 식량을 1인당 배급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공급이 선교사의 아내에게도 제공되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선교사 두 가정이 당분간 함께 지내야 할지 모르지만
선교사들은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올 때에는 이불, 수건, 베개와 베갯잇, 모기장을 가져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비누, 치약, 면도기, 화장실 용품은 미군 PX에서 구매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또한 기차 여행은 불가능하며, 자동차는 군인들에게만 제공되는데
사용 가능한 차량이 있으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미군 관계자의 허락을 받았고,
때때로 미군의 지프를 정규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놓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 편지에서 인돈의 조사 활동이 매우 꼼꼼하고 세밀하게 이루어졌고,
그가 선교사들의 복귀에 필요한 사전조사와 준비 작업을 성실하고 구체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미군정 시기에, 선교사들과 미군의 협조 관계가 매우 유기적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선교부의 복구와 재건작업에 미군이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 정부와 군대의 도움과 협력이, 기독교가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발전하고 성장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인돈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인돈이 1946년 8월 28일에 보낸 또 다른 편지는
다음 페이지에서 직접 인용하고자 한다.
이 편지에서 미군정과 선교사들의 유기적인 협력관계,
한국인들의 미군과 미국 선교사에 대한 호감과 기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통해 한국을 복음화하려는
인돈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다.
「한국에서 여러분에게 서신을 보내게 되어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떠난지 거의 6년이 지나는 동안, 이 나라는 믿을 수 없을만큼 변화되었지만
여전히 같은 나라이고,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있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우리가 탄 배가 두 달 전 인천항에 다다르자,
일본이 우리를 쫓아낸 똑같은 장소에, 우리가 상륙한다는 생각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1940년 11월 우리가 배를 타고 떠난 바로 그 (인천) 항구에 발을 내딛었을 때,
그날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일본인들은 우리 200명을 다섯 줄로 세웠고
대합실에서 배로 곧장 행진하게 했습니다.
6년 후 우리가 같은 장소에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단지 우연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무한한 섭리를 나타내신 것일까요?
그분은, 악한 세력들이 우리를 멈추게 했던 정확히 같은 장소로
우리를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사역을 재개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상륙하자, 미군정의 친절한 대표자들이 우리를 영접하여
관용차로, 25마일 떨어진 수도 서울로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우리는 그곳의 편안한 숙소에 머물며 최고위급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식당과 PX 이용 특혜를 누렸고, 콜레라와 전염병 예방접종을 했고
천연두 백신 접종을 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열흘간 머무는 동안, 그곳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들에게 따뜻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서울에서 저는 '복귀한 선교사들을 위한 특별 리셉션'에 4차례나 참여했고
전주로 내려온 이후로, 최소한 8번 이상의 행사에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많은 시골 교회가 콜레라가 잠잠해지고 여행이 일상화되는 대로
특별연합 환영회를 여는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개인으로, 단체로 찾아와
그들의 교회를 대표하여 환영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한 사람의 선교사가 전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다른 이들도 곧 돌아온다는 뜻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몇 년간 헤어져 있던, 여러 해 동안 다시 보고 싶었던,
이 생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두려움을 여러 해 품었던 사랑하는 친구에게
주는 것과 같은 환영이었습니다.
어떤이는 이상하게 웃었고, 어떤이는 울었습니다.
우리가 탄 트럭이 전주에 도착했을 때, 예전 나의 학교 제자는
내가 만난 첫 번째 친구였습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면서 눈물을 흘렸지만,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생각을 못하고, 그저 내 손만 잡고 있었습니다.
비기독교인들도 똑같이 다정하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한국은 지금 참으로 좋은 시기입니다. 새 나라를 위한 토대가 놓이고 있습니다.
한문과 중국 문화의 세워진, 일제 통치자들의 사상과 교육에 의해
심각하게 영향을 받은 옛 사고방식은, 그 기초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미래는 약속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이런 말을 좋아할지 어떨지 모르나,
한국은 우리에게 침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지 장군과 우리 군대가, 이 나라에서 모두 나가게 되더라도
침략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침략은 군사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침략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한국인은 미국으로부터 배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식 영어를 배우려고 합니다. 미국의 상품을 사고 싶어 합니다.
많은 이가 미국에서 공부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무엇이 미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런 나라가, 왜 한국과 같은 작은 나라의 해방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미군이 하는 모든 일이, 군중의 관심을 끕니다.
한국의 모든 미래는, 그리고 아마도 동양의 미래는
한국이 오늘 어떤 토대 위에 놓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국인들이, 문명화를 위해
우리나라를 주목하는 이때에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에게 토대를 보여줄 수 있는 현재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하도록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일본에게 치욕스럽게 쫓겨났던 바로 그 (인천) 항구에
불과 6년만에 다시 돌아올 때, 인돈은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중단되었던 선교를,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게 하시고
인돈이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다시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인돈이 위의 편지에서 말한 '좋은 기회'란,
한국이 복음의 기초 위에 세워질 수 있는 기회를 의미했다.
한국인들이 미국을 바라보며 문명화하고 발전하기를 원할 때,
선교사들이 그 기회를 잘 활용하여
한국이 복음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선교의 기회를 의미했다.
인돈은 한국의 복음화가, 결국 한국의 미래와 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 기회를 '침략'이라는 다소 거친 말로 표현했다. invasion
중국의 간섭과 일본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한국에게, 침략은 유쾌한 말은 아니었다.
한국을 해방시켜주었다고 믿는 미국인들에게도, 침략은 좋은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인돈은, 기독교가 한국에 끼치고자 하는 복음의 영향력을
'침략'이라는 강한 어조로 표현했던 것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함' 처럼
그는, 그것이 군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라고 부연하여 설명했다.
인돈에게, 일제 패망과 한국의 해방, 미군정과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을 복음의 터위에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으로 이해되었고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으로 이 좋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선교사들이 한국을 복음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장로교 선교사 복귀와 선교 재개를 위한 한국 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좀 더 살펴본다.
1946년 11월 28~29일 순천의 우월손 사택에서 열린 회의에는
인돈과 김아각 이후에 한국에 들어온 조사위원인 구례인과 조하파도 참석했다.
비로소 조사위원회 전체가 참여하는 회의가 열린 것이다.
인돈은 위원장으로서 회의를 진행했다.
이 회의에서 위원회는, 선교사 복귀와 선교 재개를 위한 미군정과 최종 협의를 위해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 총무 풀턴박사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가를 받기로 결의했다.
선교사 복귀를 위한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최종적인 협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례인은 미군 당국자와 지리산의 땅 소유자들과 협의하여
이 자산을 실제적으로 활용하는 일을 맡았다.
또한 의료 선교를 재개할뿐만 아니라 좀 더 확대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의료선교활동을 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원자들을 초빙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이도록 했다.
또한 부산의 고려신학교와 서울의 조선신학교가
남장로교 선교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에 대해서는
조사위원회로서는 그런 권한이 없으며,
향후 선교회가 그들의 요청을 진지하게 고려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1947년 2월 21~22일에 순천의 우월손 사택에서 열린 조사위원회는
5인의 위원들 외에, 인사례, 조화파의 부인, 구례인의 부인, 우월손의 부인도 참석했다.
또한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 대표로서 풀턴박사와 엘리엇박사도 참석했다.
이 회의는 지금까지의 조사위원회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선교재계를 위해 논의하는 자리였고
복음전도, 교육선교, 의료선교.. 세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검토로 진행되었다.
먼저 복음 전도사업은, '선교사와 한국교회의 관계'가 주된 주제였다.
조사위원회는, 선교부가 한국교회 총회나 노회 조직의 구성원으로 들어가지 말고,
비공식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다. *한국교회 자립을 도모함
또한 현재 복귀를 준비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도착하는 대로
한국에서 남장로교 선교부를 재조직하기로 결의했다.
둘째로 교육선교와 관련하여, 선교부가 직접 학교를 열지는 않고
다만 지역의 노회들이 현재 설립한 학교들을 지원하면서 협력하는 것을
일반적인 정책으로 결의했다.
이후 재정이 허락되면, 선교부는 가르치는 일과 조언하는 역할로서 도움을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지역의 여건이 허락한다면, 임시 교장으로서 일하는 것을 제한하지는 않는다고 단서를 달았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 인돈은 지역 노회와 동문들의 요구에 따라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교장으로서 학교를 재개교 하는데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의료선교와 관련하여, 각 스테이션에 선교회 병원을 재설치하는 정책을 결정하고,
그 중 하나를 중앙의료원으로 두기로 했다.
또한 미군의 잉여 자산 중에서, 의료장비를
선교부 재건 자금 1만 달러 범위안에서 구입하기로 결의했고,
미군과의 협상은 구바울이 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선교사들의 사역기간을, 부부 선교사는 5년으로,
독신선교사는 4년으로 정하기로 했다. *안식년 때문인듯
조사위원회는 1947년 현장 복귀를 요청하는 선교사들의 명단을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의 명단 중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의료선교사 박수로 부부, 백미다, 구애라, 도마리아, 유화례, 민유수
의료선교사 노재수 부부, 의료선교사 이계남 부부, 원가리 부부,
간호사 변마지, 보이열 부부, 위인사, 위애미,
의료 선교사 구바울 부부, 조요섭 부부 등이었다.
급한대로 15명이 먼저 들어오고, 주택 등 상황이 가능해지면
나머지 인원들이 입국하는 것으로 결의했다.
명단에 있는 인원이 들어올 수 없다면,
명단에서 제외하고 다른 이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미군당국이 자녀들을 동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 자녀들은 나중에 들어오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선교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전주, 광주, 목포, 순천 스테이션은 포함되었으나
군산은 제외되었다.
군산 스테이션의 훼손과 손실이 매우 심각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남장로교 선교부의 재건계획 속에, '대학 설립'을 위한 예산 14만 달러가 책정되어 있
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는 재건을 위한 전체 예산 70만 달러 가운데 20%를 차지하는 큰 비중이었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한국선교를 재건하면서,
대학을 설립할 대담한 장기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무너진 선교를 단순히 재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이전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업을 *기독교 대학 설립
그것도 막대한 예상과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거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사위원회는 "대학을 위한 항목의 경우
이 예산은 우리가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면,
선교부의 경내에 대학을 설립하는 것으로 지출될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들의 계획은, 이후 대전의 남장로교 대학을 설립하는 것으로 실현되었고,
그 중심의 인돈이 있었다. *지금의 한남대학교
무너진 남장로교의 한국선교부를 다시 복구하는 과정에서
대학 설립을 위한 원대한 계획이, 과연 누구에게서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후에 진행 과정을 보면, 이 계획의 발원지가 어디였는지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학 설립위원장과 초대학장을 맡았던 인돈이 아니라면,
그리고 남장로교 선교부가 대학 설립의 과업을 완수한 인돈에게 돌렸던 공식적인 찬사를 돌아본다면
바로 그 원대한 비전의 인물이 인돈이었다고 확신하는 것은 무리한 추정이 아니다.
이후 구바울의 회고에서 그 궁금증이 풀린다.
'남장로교의 교육선교를 이끌었던 인돈은,
대학 설립의 원대한 비전이 있었고,
해방 후 선교부 재건과정에서이 계획을 구체화했다.
인돈은 남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 기독교 대학을 설립하여
발전된 미국의 고등교육을 한국에서 시행하고,
그것을 통해 교회와 사회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소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었던 거대한 계획을
선교부 안에서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구체적인 계획으로 발전시키며 실제로 실현시켰다.'
해방 이후 선교부가 재건되면서, 인돈의 선교 활동은 이 일(대학설립)에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