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강론한 의, 절제, 심판 행24:25 설교일부 녹취
믿음은.. 심판을 믿는 것이다.
행24~26장에, 사도바울이 벨릭스 총독에게 복음을 전해준 내용이 나온다.
사도바울은 벨릭스 총독에게, 복음이란 단 세 단어로 설명했다; 의, 절제, 심판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행24:25
▲1. 의
의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뜻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하는 젊은 남녀가 ‘배우자’에게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상대가 가져올 ‘혼수’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아무리 결혼식을 성대하게 잘 치른다고 해도
그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올바로 맺어질 수는 없다.
인간은 <하나님께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의>이다.
하지만 죄인인 인간은, 죄의 값으로 인해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잘 맺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인간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믿음으로써,
죄인인 인간이 속죄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
▲2. 절제
우리가 이해하는 ‘절제’란 - 정도를 넘지 않고 알맞게 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헬라어 ‘절제’(엔크라테이아)란 - ‘적절한 조절’이 아니라,
아예 제쳐놓음 put aside을 뜻한다.
즉, 마약/알코올중독자가 ‘절제’한다는 것은,
정도껏 양을 적절하게 조절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끊어버리는/잘라 버리는 것을 뜻한다.
성도들이 ‘절제’한다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정도껏 조절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답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용기 있게 끊어내는 것이 바로 <절제>이다.
절제를 뜻하는 헬라어 ‘엔크라테이아’는
엔(안에)+크라토스(힘)의 합성어다. 즉 ‘힘 안에’가 어원적 뜻이다.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 안에서’, 성령의 ‘힘 안에서’
성도가 겪는 세상적 유혹을 ‘절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화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3. 심판
우리는 매주 사도신경을 통해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신앙고백하면서, 우리 모두 이렇게 심판을 믿고 있다.
심판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예고하셨다.
바울의 강론을 들은 벨릭스 총독은,
의, 절제, 심판으로 요약되는 복음을 듣고, 마음에 두려움을 느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행24:25
그렇지만 벨릭스는, 여러 차례 바울의 설교를 들었지만,
주님을 믿지도 않고, 의/절제/심판의 메시지를 듣지 않았다.
그는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 하더라 24:26
그가 바울의 설교를 듣고자 한 것은
혹 뇌물을 받고자 했던, 헛된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 어리석은 벨릭스 총독이 바로 우리 자신은 아닌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기 보다는
돈이나 더 벌려는 마음 마음이 아닌가?
믿음은 요3:16절로 시작하지만, 그것이 전부/마침은 아니다.
그렇게 시작된 ‘마음으로 믿는 믿음’은
‘절제’의 삶으로,
또한 ‘심판’을 믿고 기다리는 삶으로, 계속 성장해 가야하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복음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하지 않는 것은.. 온전한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많은 사람들조차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믿으면 잘 된다는 식으로 전하는 것은.. 재고되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