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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 열린 바닷속 잠수함

LNCK 2019. 12. 30. 11:12

◈뚜껑 열린 바닷속 잠수함            슥5:1~11         스크랩, 출처, 축약 

▲본문 환상의 내용은 하늘을 날아가는 두루마리에요.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는 두루마리가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그런 환상입니다. 

지금 이 환상을 보고 있는 상황은 
성전재건작업이 중지되어 있던 16년의 기간이 끝나고 

이제 학개 선지자등과 같은 분들의 어떤 촉구를 통해서 
성전재건작업이 다시 재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두루마리의 (안과 밖) 양 면이 있는데, 
-한쪽 면에는 도둑질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저주가 기록되어 있고 
-다른 한쪽 면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망령되게 맹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저주가 
거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환상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두루마리의 크기가 엄청납니다. 
보통 두루마리 하면 가로 세로 해서 30~40cm정도 크기, 그것도 큰 편일 거예요. 

한 25cm 정도로 길이가 20cm~25cm 이런 정도로 되어있는 
이 양피지(양의 가죽)나 파피루스 크기, 이게 일상적인 크기거든요? 

근데 오늘 보면 하늘을 나는 두루마리의 크기가 20규빗과 10규빗이라고 그랬어요. 
길이가 9m가량 됩니다. 폭은 4~5m정도 크기가 되는 거지요. 
보통 양피지 크기에 비교하면 엄청난 크기죠, 그렇죠?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대형 현수막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대형 현수막인데 
그 현수막에 쓰여 진 글이 뭐냐 하면, 저주에 관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근데 이 두루마리의 크기가 10규빗, 20규빗이라고 하는 것은, 
솔로몬 성전에서, 성소앞 낭실과 그 크기가 똑같습니다. 
‘전의 성소 앞 낭실의 장은  20규빗이요, 그 광은 전 앞에서부터 10규빗이며..’  왕상6:3 

낭실이란, 
성전마당이 있고 번제단이 있고 그리고 성소가 있지 않습니까?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성소 출입문 앞쪽으로 번제단과 성소사이에 낭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로비 같은 거지요. (현관) 

그 로비에서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선민들에게 
대제사장이 거기서 율법을 낭독했습니다. 

근데 그 율법을 낭독할 때, 아주 중요한 내용이 뭐였냐 하면, 
바로 신명기 27장과 28장에 나오는 저주의 내용을 낭독하게 됩니다. 

왜 저주의 내용을 낭독하는가 하면, 
저주의 내용을 낭독하면서 
내가 바로 이 저주에 합당한 죄인이라는 걸 깨닫게 됨으로써 
번제의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에, 

내 대신 죽게 되는 저 양 한 마리, 소 한 마리가 바로 왜 죽느냐?, 
이러한 저주에 합당한 자가 나였는데 
그 저주를 대신 받아서 죽는 것이라는 걸 일깨워주기 위해서 

번제단 너머의 낭실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와 번제단 사이에서 
이 대제사장이 제사장들이 율법을 낭독해 주었는데, 그 내용이 저주였다는 겁니다. 
그 저주가 쓰여 진 두루마리의 크기가 바로 낭실의 크기와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 스가랴에게 보여주신 8개의 환상 중에 본문의 6번째 환상도 
역시 성전재건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다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인데, 
성전이 재건되어서 우리의 삶의 현장가운데 함께 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 

감추어져 있던 비밀을 드러내는데 
이 세상이 온통 저주로 차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자, 가을이 되었어요. 
들녘에 나가면 황금 빛 벼가 머리를 숙인 채 바람에 따라서 움직이는 
황금물결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을이 되어서 온 전국이 이제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기 시작을 합니다. 
단풍이 무르익어 갈 거예요. 
아름다운 산과 강과 바다와 계곡과 아! 살만하지 않습니까? 

그래 이 세상에 여러분 뭐가 차 있는 것 같습니까? 
신선한 공기가? 아름다운 풍광이? 바닷물이? 바닷속의 많은 생물이? 

아니에요, 저주가 차 있어요, 저주가. 
저주가 차 있어서 이 세상은 저주의 바다입니다. 
저주의 바닷속에 살고 있는 것이에요, 우리가. 

▲근데 본문 슥5장의 두루마리 환상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면 
성전 낭실에서 번제단에서 번제를 드리려는 선민들에게 
저주의 이야기가 읽혀집니다. 낭독되어 집니다. 

‘네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이러 이러한 저주를 받게 된다’ 
이것은 신명기 27장과 28장에 계속 반복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아니하면 네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부모를 거역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뭐 도둑질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거짓말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계~속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얘기가 계속 나옵니다. 
뭐 하지 않으면, 뭐 하지 않으면, 계명과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생각하면 여러분, 괜히 선민이 됐나 싶은 생각 들지 않아요? 
율법과 계명은 선민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계명과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 율법과 계명이라는 게 그대로 살기가 
무지무지하게 어렵습니다. 
그러면 선민 괜히 된 거 아닐까요? 

율법과 계명이 주어지지 않았으면 
율법과 계명을 어김으로써 이러이러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도 
효력이 없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괜히 선민 되어가지고,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그걸 과제로 붙잡고 살아야 되는 
그러한 더 엄청난 부담을 안고 살아가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선민 아닌 사람들’(불신자들)은, 어떨까요? 
그러면 그들에게는 도둑하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게 아니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본 적도 없으니까, 
본능대로 움직이다 보면 도둑질 하게 되는데 
도둑질 하지 말라 소리를 누구한테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럼 그들은 저주가 안 임합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설명해 봅니다. 
선민은.. 저주가 가득 찬 바닷속에서도 살 수 있도록 
잠수함 안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잠수함 안으로 부름 받은 게, 바로 성전 주변에서 살게 되었다는 거예요. 
성전(잠수함)을 중심으로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잠수함 안으로 들어가서 뚜껑을 닫았다는 얘기지, 

다른 사람처럼 율법을 안 지켜서, 
‘율법 받지 않은 사람들이 율법을 안 지켰으니까 그럼 그들은 저주가 없겠네!’ 
이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은 그냥 그 저주의 바닷속에 있는 겁니다. 
아예 빠져 있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그 저주의 바닷속에 있는 자들을 불러낸 자들이 선민이고, 
잠수함 안에 태워주시고 뚜껑을 닫으라고 말씀하신 게 율법이에요, 
그리고 성전입니다. 
성전의 존재의 이유가 거기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 세상은 저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야말로 ‘저주의 바다’에 모두 빠져 살고 있는 겁니다. 

아! 저 사람은 믿지도 않는데, 뭐 믿지 않는 사람 중에 우리가 소위 잘된다는 사람, 
SK 회장님, 삼성의 회장님 다 원불교 교인이라고 그러잖아요? 

기가 막히죠? 근데 여러분 말씀에 의지해서 단언합니다. 
저주 아래 있어요. 

저주가 지금 오늘 본문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슥5:4 
‘이것을’이 저주입니다 

▲자, 세상은 저주로 가득 찼어요. 
그래서 사람은 두 종류가 됩니다. 

1) 저주 친화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저주를, 가득 찬 저주를 바닷물 속에 빠진 사람이 
바닷물을 꿀꺽꿀꺽 삼키듯이 저주를 삼키는 저주 친화적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본래 자연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2) 그리고 선민은 누구냐? 저주 극복형의 사람들입니다. 
이 저주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오늘 본문에 저주 친화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어떤 거냐 하면, 
도둑질과 거짓맹세라는 것이에요, 도둑질과 거짓맹세. 

10m x 5m 크기의 플래카드가 하늘을 난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르고 살고 있었지만 
이 세상의 속사정을 까 내놓고 드러내보면 어떠냐? 
저주의 바닷속이라는 것이에요, 저주의 바닷속. 

그게 바로 하늘을 두루마리가 날아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이 세상이 저주의 바닷속이라는 걸 알려주는 역할을 
성전(또는 율법)이 한다는 얘깁니다. 

성전의 의미의 완성이신 주님의 십자가가 이 땅에 존재 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십자가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이 세상이 저주의 바다라는 걸 가르쳐 주는 겁니다. (중략) 

▲두루마리가 하늘을 납니다. 
숨겨져 있던 사실을 공개하는 겁니다. 

그 사실이란 
‘온~ 천하에 저주가 가득 차있는 저주의 바다다.’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극복합니까? 
성전이 들어섰습니다, 성전의 자리에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뚜껑을 닫아야 됩니다. 
저주 친화적 삶을 중단해야 됩니다. 
어떻게 저주 친화적 삶을 중단합니까? 저주를 극복합니까. 어떻게? 

철저하게 성전중심의 삶, 주님의 십자가 복음중심의 삶, 
십자가 앞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삶, 이 세상에 대해 죽는 삶, 
(‘이 세상에 대해서 뭘 잘해 보겠다고 개선해 보겠다’ .. 이런 건 다~ 도둑질입니다.) 

다 죽고 오직 하나님 한 분을 향해서만 마음을 다 드리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기 위해 날마다 씨름하고 날마다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은 저주의 바다입니다. 
율법을 안 지켰기 때문에 저주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저주가 주어질 수밖에 없는 삶을, 
율법이라는 뚜껑으로 막고 잠수함 타며 유유자적 하라고 주신 것인데, 

하나님 우리가 선민으로서 선민 아닌 자들과 똑같이 해치를 열어놓고 
이 저주의 바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올라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