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칼빈 신학이 압도적인 진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성령께서 이것이 진리라고 하는 확신을 제 영혼에 확실히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이 진리를 증거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마태복음 20장 28절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 2:14)
예수님께서 자신을 주셨습니다. 왜 주셨냐면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자신의 값을 치러 불법에 매여 있는 우리를 해방하시고 선한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8-19)
이 말씀은 구속에 대한 더 확실한 말씀입니다. 호세아가 가짜 은과 보리를 가지고 고멜을 산 것이 아닙니다.
진짜 은과 보리로 속전을 치르고 고멜을 다시 사들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진짜 피를 주시고 죄와 불법과 망령된 행실에 빠져서 영원한 형벌 받기 위해 지옥에 가는 우리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명령적인 사랑”이다.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 바로 살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전에는 호세아가 고멜에게 구애를 하고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호세아가 매달리지 않고 명령을 합니다.
호세아가 왜 명령을 하냐면 고멜을 노예시장에서 샀기 때문입니다. 돈 주고 샀기 때문에 이제는 고멜의 법적 주인이 된 것입니다. 명령할 수 있는 주인이 된 것입니다.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 3:3)
호세아가 고멜을 향해서 한 명령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다른 우상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명령권을 가지는 분입니다. 물론 창조하셨기 때문에 명령권을 가지시지만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명령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셔서 우리의 합법적인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향해서 명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명령하느냐 나는 명령받기 싫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명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출2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20:2)
우리는 광야에서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애굽에서 바로 왕의 노예 생활을 하고 거기서 중노동하고 사는 것보다는 비록 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쫓아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신을 우리 앞에 두고 살 수 없습니다. 내 생명의 주인은 자신이 아닙니다. 사람은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내 생명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생명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면 영원히 살지 왜 죽습니까? 결국 내 생명을 찾아가는 분이 계시니까, 죽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생명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는 것이 싫다면 그 사람의 주인은 딴 존재입니다. 마귀 악령이라 불리는 마귀가 주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마귀의 종노릇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나를 사셔서 내 주인이 되었으니,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여기에 명백히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명령하실 권한이 있다는 것을 항상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될 의무가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보상적인 사랑”이다.
호세아는 고멜에게 명령만 하지 않습니다. 호세아 3장 3절 후반을 보면 "나도 내게 그리하리라" 이것이 짧지만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정절을 요구하지만 나도 너에게 정절을 지키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도 남편으로서 너에 대한 정절의 의무를 다하고 너를 사랑하고 너와 교제하고 너를 떠나지 않고 너만 사랑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고멜은 참 망신스런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수치와 죄악과 노예 시장에 팔려나가는 그런 비참한 신세로 전락 되었지만 그런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도 죄짓지 않은 아내처럼 대우해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하니까 진노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다시 사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진실임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그대로 증명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요약한 말씀이 호세아 3:4-5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 3:4-5)
이스라엘 백성이 고멜처럼 우상숭배해서 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남 왕국 유다는 B. C. 587년에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포로 되어 살다 보니까 왕도 없고 궁도 없고 그리고 제사도 없고 에봇(제사장이 입는 조끼)도 없고 드라빔(우상)도 없었습니다.
우상숭배도 못 하고 하나님도 제대로 섬길 수 없는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고멜이 노예 시장에 나온 것처럼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B.C. 539년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게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고레스 칙령을 발표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
또한, 3;5절에 보면 “말일에는”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바로 신약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 그들이 여호와를 구하고 그 왕 다윗을 구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유대인이 말일에 신약시대의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 것입니다. 처음 복음을 전해준 열두 사도들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처음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와 선지자들은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유대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리고 복음을 세계에 증거하는 복음의 핵심 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머지 택함 받지 못한 유대인들은 불신앙을 했지만 택함 받은 유대인들은 기독교회에 기둥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호3:4-5절을 그리스도 재림 얘기라고 하는데 이것은 초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초림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로 실현되었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이스라엘에 대한 민족적인 사랑이 아니고 이스라엘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큰 사랑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
5절을 보게 되면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경외와 은총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를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무서워하거나 존경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존경하면서도 사랑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가까이하는 것이 경외입니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혜의 근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물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시오?”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경외만 받으시고 내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면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은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선하시다’, ‘좋으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온갖 선하심을 베풀어주십니다. 너희가 죄가 있으니 내가 죄를 용서해 주겠다는 사죄의 은총과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의가 없으니 내가 너희를 의의 옷을 입혀주겠다는 칭의.
그리고 전에는 내가 너희하고 원수가 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너희와 화목해서 내가 너희와 동행하겠다는 화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선한 것을 주셨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서 사는 삶은 비참한 삶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예수 믿으면 비참해지는 줄 압니다. 하지만, 예수 안 믿고 마귀 종 되서 사는 것이 비참하지 예수 믿고 사는 삶은 비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온갖 선하심을 체험하면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요즘 왜 이렇게 불평하면서 사는 사람이 많은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2011년을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입니까? 우리 대한민국 역사 가운데 지금처럼 잘 사는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선하셨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에 선하심을 더욱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북한이 아무리 우리를 위협해도 악은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이생에서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을 떠나 죽어서도 영원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축복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해보시죠. “나는 하나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겠습니다.” 항상 이 두 가지가 여러분 입술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