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30 새벽 /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YouTube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의 전도 2 행13:32~52
※본문은, 바울의 공식적인 첫 설교인, 비디시아 안디옥에서의 설교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1)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2)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란
바울 신학을 보게 됩니다. 참고로, 이 점을 강조하는 데가, 장로교 칼빈주의죠.
▲개요
우리는 지금 바울의 1차선교여행 여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지금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의 첫 번째 설교'가 선포되어진 거예요.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선포했던
공식적인 첫 설교의 '결론'에 대한 부분이고,
그리고 그 설교의 결과에 대한 부분입니다.
13:43절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설교가 끝이 났어요.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이방인)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반대하는 반응도 있었어요.
13:45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그래서 결국 50절에 보니까,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이렇게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딱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여기 비시디아 안디옥 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믿고 주께로 돌아오거나
-아니면 박해하고 거부하거나...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제 비시디 안디옥에서 쫓겨나서
이고니온으로 가게 됩니다. :51
이런 본문속에서 우리가 두 가지를 나누어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첫 번째는, 하나님의 구원은 주권적이시다.. 라는 사실입니다.
올바른 복음 선포는, 반드시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38~39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선포한 후에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예수 그리스도)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복음 선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되는 거예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주시며,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죄사함을 받고,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 얻지 못했던 의를 얻는다.'
이렇게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해요.
그리고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난 이후에
진정한 복음 선포는, 바로 모든 사람들은 선택(결단) 앞에 세운다는 거예요.
13:40~41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언하셨어요.
'너희가 못 믿을 거다.'
이렇게 선지자들이 한 말이, 너희에게 실제가 되지 않도록
이제는 선택을 잘 해라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참된 복음 선포는, 듣는 사람을 선택 앞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 내가 지금 선포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무릎을 꿇을 것이냐,
아니면 거부하고 거역할 것인가? 하는 이 선택은
결국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가르게 되는 것이죠.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46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또 다른 측면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즉 '나의 구원이 나의 선택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다'
라고 선포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 양면성의 균형을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48절을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구원론은, 자기 자신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 라는 거죠.
즉 나의 구원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기 이전에,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고, 그것이 근원적인 이유다.. 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어떤 구원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선택하기 전에,
먼저 창세전에,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작정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나에게 역사하셔서
우리의 지,정,의에 역사하셔서
내가 지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의지적으로 그분을 붙들 수 있도록 미리 역사하셨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내 안에 먼저 역사하셔서, 믿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구원받지 못하도록 역사하신 게 아니고
하나님이 구원받는 사람에게 주셨던 은혜를, 그에게는 주시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신 거예요.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은혜를 빚졌습니까? No
모든 죄인들, 지옥으로 향해 가고 있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뭘 해 주셔야 되는 의무가 있으십니까?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자는 선택하시고,
또 어떤 자에게는 은혜를 주셔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셨어요.
그러면 저기 믿지 않는 자는요?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믿지 못하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명확하게 구원의 현장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선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8
▲그래서 로마서 9장을 보면,
롬9:14~16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18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아니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고,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은혜를 안 주셔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인데
그렇다고 누가 하나님이 허물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네가 누구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21~23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무슨 말입니까? 사람은 원래 자기 죄로 다 지옥 가는 인생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긍휼히 여기시고자 해서,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구원해 주셨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냥 지옥 가도록 등떠미신 것도 아니고,
내버려 두셨는데... 그래서 그가 자기의 길로 가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시다... 라고 말할 수 있느냐?
그 중에 몇이라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되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되지.. 그렇지 않느냐?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이렇게 말하면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을 얻은 자는, 결코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어요.
저와 여러분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다?
이건 구원받은 사람의 자세가 아니에요.
왜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들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까?
그분이 나를 선택하셨고, 그분이 나에게 믿음을 주셨고,
그분이 나를 중생시켜 주셨으니... 내가 반응한 것 아닙니까?
내가 믿은 게 아니고, 믿음을 주셔서, 내가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해주셨고
그분이 나에게 중생의 은혜를 주셔서, 내가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어요. 왜요?
하나님께서 그가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신 게 아니에요. 내버려 두셨던 것 뿐이에요.
자기는 자기의 뜻대로 갔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본문 46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네가 선택한 거 아니냐? 네가 버린 것 아니냐?
하나님이 뭐 그렇게 선택하지 못하도록 했느냐?
너는 너의 죄를 향해 갔고, 네 선택에 의하여서 그렇게 된 것 아니냐?' 라고 말하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는 거예요.
구원받은 자는 스스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선택에 의하여 그리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구원의 현장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구원의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 복음 전파에
그 하나님의 주권 신학이 내재되어 있었던 거죠. :48
후에, 이 내용을 더 자세히,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
9장에서 이 '하나님의 주권 신학'을 더 풀어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10101010
◑2. 본문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의 바울의 설교에서) 또 한 가지 기억해야 될 것은
"구원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구원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아울러,
또 하나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참 은혜로우시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바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눠져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여전히 은혜로우시다 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돼요.
유대인이 어떤 자들입니까?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부했던 자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셨어요.
계속해서 말씀을 주시고, 또 훈계도 하시고, 징계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선지자들을 다 죽였어요. 유대인들은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했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선지자가 누구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요한이에요.
세례요한의 말도, 주류는 거부했습니다. 세례요한도 목베임을 당하고 죽었어요.
그리고 유대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자신들의 왕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는데,
그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의 선교 현장에서도 어떻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도
계속 예수를 거역하고 있는 자, 그들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유대인들에게 롬11:1~5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마다 롬1:16절에서 보듯이 순서를 정하셨어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잖아요.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마다
오늘 여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그렇고, 계속해서 그가 채택한 방식은,
먼저는 그 지역에 가서 회당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요.
그리고 난 이후에 그들이 거부하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전히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은혜로우시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도 46절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하나님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유대인에게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그래서 먼저 너희에게 전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지 아느냐?
너희가 그것을 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흘러가는 이유는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말씀을
그들이 거부했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기 때문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보면
바울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방인의 빛, 이방인의 사도로 부른받은 그가
새로운 도시에 가면, 이방인들을 먼저 만나지 않아요. 회당부터 찾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난 이후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기를 거역하고 있는 유대인에게
하나님 은혜로우시다 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은혜로우시다.. 라는 거예요.
하나님 없이 살았던 이방인이에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았던 이방인이에요.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거역함을 통해서
이 복음이 이방인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거예요.
유대인들도 계속 복음을 거역하고, 거부하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셔서
하나님은, 이 복음이 유대인들의 거역함을 통해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갈 수 있는... 즉 이방인을 향한 은혜를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47절과 48절을 보시면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렇게 말씀하면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거역하는 동안, 잠시 그들을 우둔한 가운데 내버려 두시고
그 기회를 타서 어떻게 해요?
복음을 이방인에게 흘러보내시면서,
하나님 없이 살던 이방인들에게 은혜로우신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들이 예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에게도, 또한 동시에 이방인에게도 은혜로우시다.. 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은 모두에게 이렇게 여전히 은혜로우시다.. 라는 것을 보게 돼요.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하신 이유는 또 뭐예요?
그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나게 하시려고,
거역하는 이 유대인들을 보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이방인들이 막 찬송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걸 보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그것을 보고 '저건 내 자리인데, 우리가 받아야 되는 은혜인데...'
그러면서 몇 이라도 더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시는...
그래서 하나님은 모두에게 은혜로우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버린 것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악을 사용하셔서, 유대인들에게도 은혜로우시고,
이방인에게도 은혜로우시면서, 모두를 다 은혜 가운데 두고 계신다...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11:11~15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이방인인 바울이 깨달은 것은 이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거역하는 유대인들, 그 악독함 때문에,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향하게 하셔서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데 사용하셨다.
그런데 이 이방인이 주께로 돌아오는 그 은혜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다시 시기나게 하셔서
유대인들에게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사용하셨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시냐?'
이렇게 말하면서 25절과 26절로 마무리합니다.
11:25~26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왜 저렇게 계속해서 거역하는가?
하나님께서 잠시 그들을 우둔한 중에 두시는 동안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를 교회에 들여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믿는 자와, 유대인 믿는 자 모두를 뜻합니다.
그 영적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모든 자를 구원하려 하십니다...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거역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은혜로우시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에게도 은혜로우시다... 라고 말씀하면서
이 구원의 현장 가운데서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과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높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이 명확한 하나님의 진리... 그가 이걸 다 로마서에 기록했잖아요.
그가 어떻게 이것을 다 알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의 이러한 진리에 대한 앎과, 그리고 그 지식의 풍성함은
그가 책상에 앉아서 예수께 배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책상에 앉아서 배운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과, 복음을 전파하는 현장 가운데서
복음을 전파하던 중에, 이 모든 진리들을 깨달았다... 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 속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면서
구원은 진짜 나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예수를 박해했고,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했고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가려고 하던 그때에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역사심이 자신을 구원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고, 그분이 나를 선택하셨고 역사를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았다.
그래서 구원은 그분에게 주권적으로 달려있더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는, 자기의 친족, 유대인들에게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어디로 보내십니까?
유대인들의 사도로 보내지 않고,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세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권적이시다'라는 것을
그는 삶과 그의 사역 가운데서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은, 그것 또한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 현장 가운데서 알게 돼요.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를 먼저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세요.
그리고 돌에 맞을 수도 있고, 핀잔 받을 수도 있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은 참 은혜로우시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가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없는 인생들, 어리석은 인생들, 그들에게 가게 하시는 하나님은 참 은혜로우시다...
라는 것을 복음의 현장 가운데서 알게 돼요.
그리고 사도 바울이 뭘 깨닫습니까?
'나는 내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더라도
나는 내 친족, 유대인들의 구원을 바라는데,
왜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향한 애끓는 심정을 가지고 있는 나를 이방인에게 보냈을까?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그렇게 사랑해서 내 이름이 지워지더라도
그렇게 원하는 유대인들의 구원이 어디에 달려있는 거예요?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와야 유대인들이 구원 받는다'는 걸 아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 사도 바울이,
'유대인을 위하여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구나.
아 하나님이 내가 정말 원하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나를 이방인에게 보내주셨구나. 그래서 빨리 유대인들을 구원하게 하시려는구나'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구나' 라는 것을
복음을 전하는 현장 가운데서 안단 말입니다.
우리도 진리가 선포되는 현장과,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현장 가운데서, 또한 나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면서 순종하면서,
바울과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진리에 대해서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