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는 가장 먼저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지를 검토해야 한다 벧후1:10, 사14:10 출처
찰스 스펄전
▶목회자는 자신의 구원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가장 먼저 우리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지부터 검토해야 합니다.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복음에 참예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우리는 단지 젊은 신학생들이 목회를 당연하게 여긴다고 해서
그들에게 사도들의 뒤를 이을 자격을 덮어놓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대학에서의 경험이 영적이라기보다는 활동적이고,
그들이 받은 우등상이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가 아닌 운동 실력 덕분이라면,
우리는 그들이 내 보일 수 있는 것말고 다른 증거를 요구합니다.
박식한 교수들에게 얼마나 많은 등록금을 냈든, 그 대가로 얼마나 많은 고전을 배웠든
우리에게는 하늘에서의 소명의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참되고 진실한 경건이 첫 번째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소명’을 받은 척해도 성결의 소명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분명 사역의 소명도 받지 못한 것입니다.
▶회심은 목회자의 필수조건이다
“먼저 네 자신부터 단정히 하고 네 형제를 치장하라.”고 랍비들은 말합니다.
“더러운 손으로 남을 깨끗하게 하려 하지 말라”고 그레고리우스는 말합니다.
당신이 맛을 잃은 소금이라면 어떻게 남들에게 맛을 낼 수 있겠습니까?
회심은 사역자에게는 필수조건입니다.
강단에 서기를 열망하는 여러분은 반드시 “거듭나야”(요 3:7)합니다.
우리가 거듭났는지 아닌지를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는 말씀은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은 가짜로 가득하고 주검 주위에는 독수리 떼가 모이듯
육신적인 허영으로 가득한 떠돌이 들이 목회자 주위에 모여듭니다.
우리 자신의 심령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진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받지 않도록(고전 9:27)
진지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는 다른 사람에게 불행하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은 회심하지 않았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여기 계신 분 각자 자신의 내밀한 영혼에 조용히 자문해 보십시오.
“내가 선포하려고 준비하는 진리의 능력에 대해 나 자신이 무지하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회심하지도 않고 사역한다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은혜받지 못한 목회자는 소경이 막상 자신은 눈앞이 캄캄하면서 광학 교수가 되어
빛과 시각에 대해 연구하고 학생들에게
무지개 빛깔의 미묘한 차이와 섬세한 혼합에 대해 강의하는 것과 같습니다!
벙어리가 성악 무대에 오르고, 귀머리리가 교향곡과 화성에 대해 떠드는 꼴입니다!
두더지가 독수리 새끼를 가르친다고 떠벌리고, 우렁이가 천사를 다스리겠다고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잘 깨닫기만 한다면 이런 경우를 빗대어 아무리 괴상한 비유를 든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강단은 그런 사람이 서기에는 두려운 자리입니다. 그런 사람은 도저히 감당할 수없는 사역을 떠맡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적합하다고 해서 그런 사람이 사역을 맡지 못하게 막을 방법도 없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사역을 하겠다고 나서면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척적인 재능이나 정신적인 능력이 있어도,
영적인 생명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일에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 우선적인 가장 단순한 자격을 얻기까지 목회 직분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회심하지 않는 목회자는 자신에게도 불행하다
회심하지 않고 사역하는 것은 또 다른 면에서도 끔찍한 일입니다.
소명 받은 일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면 당사자에게도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성도들의 경험에서 어떤 위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참회하는 성도들의 울부짖음과 고뇌 석인 회의와 진지한 두려움을 접할 때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자신의 말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다니 그저 놀랍기만 할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말에는 영혼을 회심케 하는 복이 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 자체는 부인하실 지라도 당신의 진리는 높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성숙한 성도에게 신앙 상담을 요청받으면 얼마나 난처하겠습니까!
거듭난 회중이 오히려 자신을 이끄는 것을 경험하면서 어쩔 줄 모를 것입니다.
성도들이 임종할 때 발하는 환희에 찬 음성을 어떻게 귀 기울이며
성찬상의 즐거운 교제에 그가 어떻게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적성에 안 맞는 직업에 뛰어든 젊은이가 지겨운 일을 계속 하느니
차라리 바다에 가서 뱃사람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평생 거룩한 소명을 위해 정진해 온 청년이 경건의 능력에 대해서는
도무지 모를 경우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자신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매일 사람들에게 그분께 나아오라고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오 여러분, 이것은 분명 끝없는 고역입니다.
그런 사람은 분명 노예 뱃사공이 배를 싫어하듯 강단은 쳐다보기도 싫을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목회자가 설교하는 강단은 차라리 없애 버리는 것이 낫다
그런 사람은 얼마나 쓰임 받기에 부적절합니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여행객을 인도하고 아무 지형도 모르는 해안을 따라 배를 몰아야 하니 말입니다.
자신은 바보면서 남들을 가르쳐야 하니 말입니다.
비 없는 구름이요 열매없는 나무가 아닙니까?
사막의 순례자들이 작열하는 태양아래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일 때
마침 간절히 기다렸던 우물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나 물 한 방울 안 남아 있다면 얼마나 허탄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목마른 영혼이 은혜 없는 목회자를 만난다면
생명수를 찾지 못해 죽을 지경일 것입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메우느니 차라리 강단을 없애는 것이 낫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목회자는 심각한 해를 끼친다
안타깝게도 거듭나지 못한 목회자는 심각한 해를 끼치기까지 합니다.
불신을 조장하는 모든 원인 중에 분명 경견하지 않은 목회자가 일등을 차지할 것입니다.
1,200파운드짜리 오르간, 신앙 없는 성가대, 거들먹거리는 회중도 회심하지 않은 목사만큼
엄청난 파괴력을 미치지는 못한다는 글을 언젠가 읽었습니다.
지옥에서 나온 저주의 도구 중에 그보다 더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글을 쓴 사람의 견해였습니다.
사람들이 예배당에 가서 자신은 틀림없는 성도라고 착각하며 편안히 앉아 있습니다.
예배 시간 내내 한바탕 웅변이나 들으면서, 달콤한 음악으로 귀를 달래며,
아마도 우아한 손놀림과 매력적인 기품을 쳐다보는 것을 즐길 것입니다.
이 모든 광경이 오페라에서 보고 듣는 것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습니다.
미학적인 관점에서도 아마 별로 나을 것이 없을 테고 영적으로는 티끌만큼도 유익이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경건한 예배자로 추켜세우고 심지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 없는 거듭나지 못한 상태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삶을 삽니다.
형식주의 이상의 아무런 목적도 없는 이런 조직체를 이끄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자라기보다 마귀의 종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목회자는 참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형식적인 설교자는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해도 해를 끼칩니다.
그러나 그는 경건의 균형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므로 조만간 도덕적인 죄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됩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고 복음을 욕보입니까!
그런 사람에게 어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사후에는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한 선지자는 바벨론 왕이 지옥에 내려가고, 그에게 멸망당한 모든 왕과 방백들,
폐허로 변한 성들이 지옥의 처소에서 일어나 실랄하게 비꼬는 말로 멸망한 폭군을 맞이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사 14:10).
한때 목회자였지만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삶을 살다가 지옥에 내려간 한 사람의 모습과,
그의 설교를 들었던 옥에 갇힌 영들,
그의 동네에서 살았던 불경건한 영혼들이 전부 들고 일어나 통렬한 목소리로 “당신도 우리처럼 되었소?
의원이여, 당신 자신도 못 고쳤소? 광명의 빛이라고 자처했던 당신이 영영 이 어두운 데 던져졌소?
라고 외치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습니까?
오! 버림받으면 안 됩니다! 강단 아래에서 버림받은 것도 끔찍한데
하물며 강단 위에서 버림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
▶존 번연의 지옥의 탄식에 묘사된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의 비참
(존 번연의 <지옥에 탄식>이란 책에 나오는 한 끔찍한 대목이 종종 제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듯합니다.)
- 눈먼 목회자들의 무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혼이 멸망했는가?
그런 식으로 설교한다면 그들의 영혼에 쥐약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가 온 마을 사람들의 멸망을 홀로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두렵다.
오, 친구여, 내 분명히 말하지만 사람들에게 설교할 직분을 맡은 그대는
자기도 잘 모르는 일을 떠맡았을지도 모른다.
그대의 온 마을 사람들이 지옥에 내려가고 나서 이렇게 소리 지르며 다가온다면 괴롭지 않겠는가?
“이것만은 당신에게 감사해야겠군. 당신은 우리가 당신 밥줄을 끊을까 싶어
우리 죄를 솔직히 말해 주길 두려워했다.
이 비열한 인간, 눈먼 인도자인 주제에 저 혼자 구덩이에 빠지는 걸로 성이 안차 우리까지 여기 끌고 오다니!”
▶리차드 백스터의 <참된 목자>에 묘사된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의 비참
(리차드 백스터는<참된 목자>라는 책에서 다른 많은 진지한 문제를 다루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 그대가 남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정작 자신에게는 없거나,
그대가 전하는 복음의 실제적인 역사하심을 자신은 맛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세상에 구세주가 필요하다고 선포하면서, 마음으로는 주님을 소홀이 하거나 주님과
그분과 구원의 은혜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
남들에게는 멸망하지 않게 주의하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이 멸망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성도들에게는 양식을 공급하고도 자신은 굶어 죽을까 주의하라.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는 약속의 말씀은
자신이 먼저 옳은 데로 돌아 온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 약속은 전제가 성립되어야 비로소 실현된다.
영광을 누릴 기본 조건은 자신의 신실한 믿음이다.
반면 목회에기울인 노고는 더 큰 영광의 약속을 누릴 조건이다.
많은 이가 남들에게 고통의 자리에 가지 말라고 경고하고서도 자신은 그리로 급히 내려갔다.
많은 설교자가 회중에게 지옥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조심하고 열심을 내라고
수 백 번 촉구하고서 자신은 지금 지옥에 있다.
남들에게 구원을 전하면서도 자신은 구원을 거부하고, 남들에게 전하는 진리를
자신은 소홀이 하고 함부로 대한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라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재봉사는 보통 남들에게는 좋은 옷을 지어 주면서 자신은 초라하게 입고 다닌다.
요리사는 대개 남들에게는 비싼 요리를 내 놓으면서 자신은 요리에 손도 안 댄다.
형제여, 분명히 말해 주지만 하나님은 설교자라고해서, 심지어 유능한 설교자라고 해서, 구원하지지 않으신다.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어 그 결과 주님의 일을 신실하게 행한 자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당신이 남들에게 권면하는 삶을 스스로 살고 있는지,
그들에게 매일 같이 믿으라고 권유하는 대로 믿고 있는지,
당신이 전하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라.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신 그분의 말씀은,
당신 자신을 아끼는 것은 물론, 자신도 이웃도 미워하거나 멸망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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