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롬5:1~11 칭의의 결과

LNCK 2020. 4. 27. 05:34

www.youtube.com/watch?v=MecV6jk7ZKY

◈칭의의 결과                     롬5:1~11              출처

 

이번 집회에 특별히 로마서를 택한 이유는

로마서가 구원과 우리 신앙생활의 원리에 대해서

성경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자세히 가르쳐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롬1~4장은, 구원의 시작을 다룹니다.

우리가 이 부분은 비교적 많이 아는 편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 죄가 용서함 받고,

내가 하나님께 용납되고..

 

이런,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느냐 하는

이 점은 우리가 비교적 많이아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롬5~8장까지는

실제 구원이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우리 안에서 시작된 이 구원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며, 어떻게 완성되는가 하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들이 아는듯 하면서 또 잘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번 집회에 우리가 롬5~8장을 아주 꼼꼼이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그 결과 여러분이 이제 롬5~8장은 이러이러한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는

내용을 분명히 깨닫게 되시길 바라고

그럼으로써 로마서가 가르쳐 주는 그 복음의 진리가

우리들의 실제 생활에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강의개요 outline(아래 박스)을 보시면서 제 강의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7강입니다. 좀 강의가 많다 생각이 들더라도

롬5~8장의 이해라는 이 목표를 도달하려면 7시간은 공부해야 될 것 같으니 잘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롬5~8장은 정말 한 번 뿌리뽑겠다는 각오로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롬5:1~11의 개요>
 
  5:1~8 칭의의 <현재>적 결과        
        1) 하나님과의 평화
        2) 우리가 믿음으로 그 안에 들어가서 서 있게 된 은혜 
        3)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소망

  5:9~10 칭의의 <미래적> 결과

        1) 그의 진노하심에서의 구원 얻음 :9
        2) 그의 살으심으로 부활과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됨  :10
 
◑ 5:11 칭의의 <전천후> 결과
         '즐거워하게 되었다' 

 

▲여러분 롬5:1절과 9절을 보십시오.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비슷한 말씀이 위 두 구절에 나옵니다.

여기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되었다,

우리가 칭의를 얻었다, Justification(칭의)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은, 그 칭의의 결과이겠구나.. 하는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가운데 5:1~8절의 시제는 '현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현재 이러이러한 일이 있다.

그래서 '칭의의 현재적 결과'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5:9~10절을 보시면 시제가 미래형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칭의의 미래적 결과'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 5:11절은, 다시 현재 시제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칭의의 전천후 결과'라고 제가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그러면서 1절에서는 '믿음으로 얻었다 하심을 얻었은즉'

다시 말하면, '믿음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조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9절에 보면 '너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9절에는 '그 피가 칭의이 조건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이라고 여겨주시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그 조건은 본문에 의하면 두 가지인데

'그 피', '믿음'입니다.

 

여기서 '그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켜요

이것은 객관적인 사건입니다.

내 밖에서 일어난 일이예요.

 

그래서 이것을 '칭의의 객관적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믿음은 '내가 반응'하는 거죠.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도

내가 믿지 않으면, 그 십자가가 나에게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그 피가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어요.

그 피를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지만) 어떤 면에서 내가 믿었고, 이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칭의의 주관적 조건'이라 부릅니다.

 

자 이 정도면, 우리가 로마서 5:1~11절의 구조를 대강 파악했어요.

 

롬5:1~11절은 <칭의의 결과>에 대해서 말하는 본문입니다.

그러면서 1절에서는 "칭의의 주관적 조건의로서의 믿음"을 설명하고

9절에서는 "칭의의 객관적 조건인 예수님의 피, 십자가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5:1~8절은 "칭의의 현재적 결과"를 말하고,

5:9~10절은 "칭의의 미래적 결과"를 말하고

5:11절은 "칭의의 전천후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큰 아웃라인을 살펴보았고, 이제 세부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롬5:1~2절에 '칭의의 현재적 결과 3가지가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이 3가지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의 평화

2) 우리가 믿음으로 그 안에 들어가서 서 있게 된 은혜 

3)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소망

 

칭의의 현재적 결과 3가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줄여 말하면 평화, 은혜, 소망 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좀 이해가 안 됩니다.

아니 몸이 피곤한데 일요일에 집에서 좀 쉬지.. 무슨 교회를 가느냐,

이렇게 날씨 좋은 일요일에, 좀 야외 나가서 피크닉도 가고 그러지..

이런 날에 꼭 교회를 가야 되느냐?

 

옆에서 불신자들이 보면, 우리가 1년 내내 주일에는 교회 가고,

주중에도 무슨 이런 모임, 저런 모임 때문에 교회에 가고

피곤해도 교회 가고, 또 그렇게 힘들게 돈 벌어서 교회에 헌금하고...

또 몸으로 봉사하고...

 

왜 우리가 그러는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우리 신자들은 우리를 이해하나요?

우리는 우리가 왜 그렇게 하는지 알고서 하나요?

그냥 억지로 합니까? 가끔은 힘든데도 억지로 교회갈 때가 있겠죠.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기뻐서 하고, 즐거워서 합니다.

 

다시 말하면 왜 예수 믿느냐, 누가 이렇게 질문하면

우리에게 뭔가 즐거움이 있고, 기쁨이 있고, 예수 믿는 것이 좋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좋습니까?

좋으니까 예수를 믿죠! 예수 믿는 것이 좋은데,

그 좋은 것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좋아보이지 않아요!

이건 우리만 아는 비밀입니다.

 

찬송가499장에 '저 장미꽃 위에 이슬' 맨 마지막 후렴이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저는 이 가사가 너무 제 마음에 와 닿아요.

이건 정말 비밀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지요?

우리가 받은 기쁨이 있어서 인데, 이건 비밀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 비밀을 만약 펼쳐 보인다면, 여기 나오는 3가지입니다.

예수 믿은 우리가 누리는 것,

예수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 기쁨과 그 유익과 그 복이 무엇이냐?

-하나님과 평화

-그 안에 들어가서 서 있게 된 은혜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 이 세가지 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겉으로는 힘들어보일지 몰라도

열심히 예수 믿는 그런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씩 더 자세히 생각해 보죠.

 

1) 하나님과 평화

5: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것은 번역을 좀 바꾸는 것이 좋아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다'

권면하는 게 아니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금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속에 있다! .. 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여러분, 예수 믿고 나서 믿음의 결과 여러분이 하나님과 지금 평화하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이게 무슨 평화죠? 이것은 조건적인 상황적 평화가 아닙니다.

'내가 사둔 주식도 계속 올라가고, 내가 건강검진 했더니 건강도 다 좋다 그러고,

우리 아이들은 말썽부리지 않고 모범생으로 학교생활 잘 하고 있고,

배우자와 사이도 좋고..' 모든 조건이 다 좋아서 누리는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이 평화는 환경과의 평화도 아니고, 세상과의 평화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불편한 관계,

또는 심지어는 대적의 관계, 어떤 전운이 감도는 그런 관계가 아니고

이제 화목한 관계, 평화의 관계, 하나님과 내가 서로 이제는 친근해진 관계!

가까와진 관계!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다.. 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평화' 와 '하나님과의 평화'는 구분해야 합니다.

Peace with God 과 Peace of God 은 구분해야 됩니다.

 

어느 것이 더 먼저입니까? Peace with God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립니다.

하나님과 이제 화목한 관계가 되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임합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려야 되요.

 

이것은 나의 외적인 환경이 어떻든, 지금 내가 건강이 좋든/나쁘든

사업이 잘 되든/안 되든, 이 사회가 불안하든/그렇지 않든

심지어는 내일 세계에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흔들릴 수없고, 변할 수 없는 하나님과 나의 기본적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평화 하지 않는 한 진정한 평화는 우리 삶에 없습니다.

나의 존재 가장 깊은 심연에 나는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20세기 전반부를 휩쓸었던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 내용입니다.

'인간은 불안하다'는 겁니다. '인간의 실존은 불안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들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더 이상 염려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셨다는 그 확신처럼,

나의 존재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긴장이 풀리고, 정말 쉴 수 있고,

정말 안심할 수 있고, 내가 정말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2) 두번째는 은혜입니다

5:2 '우리가 믿음으로 그 안에 들어가서 서 있게 된 은혜'

 

무슨 말이냐면, 은혜는 하나의 영역 sphere, 하나의 세계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이 영역에 우리가 들어갔어요.

어떻게 들어가죠? 믿음으로 들어갔어요.

 

이제 그 안에 서 있어요. 다시 말하면 예수 믿고 난 우리는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기본 영역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두 가지로 뜻이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대하실 때,  이제는 은혜로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하나님이 나를 대하시고, 또 하나님이 나를 율법으로 대하실 수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율법으로 대하신다는 말은,

'내가 잘 하면 상주시고, 잘못하면 벌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게 율법적 대함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택하면, 그건 절망 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대하시는 자세가, 이제는 은혜입니다.

이걸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이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종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자녀 삼아 주셔서, 이제는 내가 잘 하면 상 주시고,

못 하면 벌 주신 그런 율법적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의 무한한 사랑을 그저 쏟아부어주시는 그런 은혜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그 태도(자세)의 결과, 실제 매일 매일 우리에게 공급되어지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이제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데,

매일 매일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은혜, 힘이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받아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여러분, 아십니까?

 

지금 하는 이 이야기가 '그런 게 있었나?' 이렇게 반응하시면 참 곤란합니다

'맞아, 그것이었어! 내가 신앙생활 하면서 느꼈던 게 바로 그 은혜였구나!

하나님이 나를 은혜로 받아주시고, 매일 필요한 그 힘과, 능력과,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내게 공급해 주셨구나!' 이것이 은혜 안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안에서 즐거워함 

하나님의 영광 자체는 미래에 있을 일입니다.

미래에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영광이 무엇인가요? 이것은 굉장히 엄청난 주제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아무튼 무지하게 좋은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만 생각하시고 넘어갑니다. 다음 강의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앞으로 나를 위해서 영광이 준비되어 있다'

'영광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그 영광을 내가 지금 누리면서.. 동시에 바라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 기쁘고 즐겁습니다.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러분, 그 공상과학 영화들을 보시면 인류의 미래를 다루는 영화들이 많습니다.

   스타워즈, 스타트랙, 아바타..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미래에 대한 영화들..

   그 미래에 대한 수많은 영화들 중에 평화로운 영화가 있습니까?

   제가 생각해 보니, 미래에 대한 영화가 참 많은에, 그 많은 영화들 중에

   인류의 미래를 아름답게, 정말 낙관적이고 평화스럽고 행복할 것이라고 묘사하는 영화가

   몇 개가 있나요? 저는 거의 한 개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인류의 미래는, 더 엄청나게 무서운 무기들, 가공할만한 그런 무기들을 가지고

   여전히 서로 싸우고, 인류는 끊임 없이 멸절할 수 있는 그런 위기에 접하고 있고,

   그 미래는 암울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집단 무의식이 그 영화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미래에 대해서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우리가 그동안 발전시켜온 과학과 기술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까!

   핵무기라든지, 자원의 고갈, 환경의 오염, 이런 모든 것들을 인류 스스로가 알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탐욕스럽게 쾌락을 추구하며, 부를 쌓으며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큰 일 난다!  사실 인류는 소망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미래를 다르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미래를 생각할 때, 어떤 인상을 받습니까?

미래를 생각하면, 거기에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이런 이미지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뭔가 본향에 간다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까?

 

뭔가 주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죽음을 싫어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이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이예요!

죽음이란, 쉬고 안식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삶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바라볼 때, 우리는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그 소망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가 아주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표적으로 대답할 수있는 말은 '영광'입니다.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장차 올 영광은, 지금 우리가 받는 이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바울이 그렇게 말씀했죠.

 

이 영광의 소망을 갖고 있는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그 대답은 '즐거워합니다' 롬5:2

기뻐한다는 말도 되겠죠. 이 말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 그런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내가 상속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내 앞으로 상속되어질 그 유산이 어마어마 해서,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걸 내가 오늘 알았어요.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런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면.. 그러면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 내가 살아가는 삶이 좀 불편하고 힘들어도

나에게 그 엄청난 상속이 주어질 것이라고.. 정말 우리가 안다면

우리가 얼마나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겠습니까! 지금 바울은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안에서 우리가 즐거워하느니라!'

 

그런데 이 기쁨은, 그 어떠한 어려움이나 나에게 닥칠 고난도 꺾을 수 없는, 그런 기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절에서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한다'

이 기쁨은, 환란 때문에 방해받는 기쁨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는 기쁨입니다.

 

5:3~4 '이는 환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앎이로라'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설명해 볼게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데요

성경공부 때는 우리가 '그렇죠, 목사님, 하나님의 영광을 나는 믿습니다. 기뻐합니다.'

 

그렇지만 평소 현실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잘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무엇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반대로 낙심합니까?

우리 자신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사업이 안 되면 기분이 우울해집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성적이 떨어지면 속이 상해 합니다.

그리고 병원에 갔는데, 검사결과가 좋지 않다고 의사가 말하면

뭔가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아~ 나는 어떻게 되나?' 하고 낙심합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 이렇게 되어야 하지만

환란이 오면 우리는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두렵고 걱정되고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나나 보세요. 환란이 와도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목사님, 하나님 정말 계시는게 맞아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더니,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나요?'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이런 말 안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닥쳐도 우리는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물론 힘드니까 불평을 가끔 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포기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는 것을 인내라 그럽니다.

 

환란이 오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인내합니다.

인내하는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연단이 일어납니다.

 

'연단'은 쇠가 풀무불에 들어가서 단련되는 그런 모습입니다.

우리 믿음이, 성품이, 속사람이 정결케 되고 단련됩니다.

 

그러면 이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말씀하는데. 

'연단'에서 '소망'까지 가는 것은,

드디어 비로소 우리가 세상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한다고 간증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이 세상 것에 집착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환란이 닥치면, 이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미련과 집착에서

점점 우리가 정결케 되고, 그런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그 믿음의 연단을 거치면서

이젠 정말 주님만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만 소망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변에 환란을 많이 겪은 분들, 환란을 겪되 믿음으로 인내한 분들을 보셨습니까?

그분들의 특징이 뭐죠? 그분들을 만나면, 왠지 세상 것에 초연한 듯한, 그런 모습이 있어요.

 

그렇게 쉽게 뭐 무슨 일이 잘된다고 막 좋아하지도 않고

무슨 좀 어려운 일이 닥친다고 쉽게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뭔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듯한..

뭔가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자세가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진정한 신앙적 소망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는 겁니다.

환란은 결국 다시 우리에게 소망으로 가게 합니다.

소망을 불일듯 일어나게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설명합니다.

 

5:5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은'

즉, 내가 이 소망을 갖고 있다가 실망하게 되지 않을 것은,

소망이 나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바랬는데, 나중에 그 바랬던 내용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꽝이 될 수 있죠.

그러면 그 소망은 부끄럽게 됩니다. 그 소망은 정말 후회스럽고, 내가 자랑했던 모든 것이 창피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이 소망은, 우리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요?

 

우리에게 있는 소망이 확실하다는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바울은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5:5b

이것은 제가 아까도 주관적/객관적.. 이런 말씀을 드렸는데, 내가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부음바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은혜의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의 그 강한 임재, 하나님의 강한 사랑을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느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을 알기 때문에

이 소망이 확실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여러분, 이런 은혜의 체험이 있으십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부어진 일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이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 믿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이지만

이것이 항상 생생한 감격으로 남아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에게 끊임없는 성령의 충만이 요구되는 이유는,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에 내가 계속해서 젖어있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에 젖어있지 못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랑의 reality(현실, 실재)을 알고 있어요.

성령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라는 확신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주관적인 증거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고요. 하나님의 사랑이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갈보리 십자가 입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아주 시위하듯 나타내주셨어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어디 계셔?, 하나님이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야? 그럼 한 번 보여줘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한 번 보여줘봐!' 이렇게 도전합니다.

 

거기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십자가를 보라! 입니다

갈보리 언덕에 가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러분 어떻게 이 이상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 독생자를 주셨어요.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어요.이것이 하나님의 증거요, 증명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주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이 있는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한다면...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아들을 주셨건만, 사람들 부인하며 욕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느냐면,

그 아들을 주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 사랑의 대상인 우리가 어떤 존재였을 때, 그렇게 사랑해 주셨습니까?

 

5:6 '우리가 연약할 때'

이 말은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을 때, 우리가 helpless, hopeless 했을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또 5:6b '우리가 경건치 않을 때'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하고 살았을 때였습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던 그 당시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었는가요?
우리는 연약하고, 경건치 않았고, 죄인들이었고,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입니다.
   

여러분, 요즘 교회에서 조차도 죄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죄인은 하나도 없고 다 원인이 있고, 그래서 치유가 필요한..   

그래서 상담이 필요하고, 카운셀링이 필요한 환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설명과 다릅니다.

   우리는 물론 치유받아야 되지만, 우리는 용서받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회개해야 되는데  

   요즘 우리는 '하나님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변명하는 사람들은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왠지 아세요?  

   변명이란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는 내가 왜 우리 어머니를 그렇게 미워했는지 아세요?  

  이러이러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변명입니다.
  

  '하나님, 제가 어머니를 미워한 것은 제 죄였습니다.  

  제가 너무 악하고 나빴습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이건 회개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이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며 치유받기를 바라는데요.. 잘못입니다.
   '하나님도 제 남편/아내를 보시면 저를 이해하실 겁니다.'  

   '저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만 생각하면 지긋지긋해요'

 

모든 사람이 변명합니다. 자기를 합리화, 정당화 시킵니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왜 죽으셨겠습니까!
실상을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했고하나님을 무시했고, 하나님을 미워했고,

하나님을 향하여 삿대질하고하나님을 향하여 주먹을 휘두르던 반역자들이었습니다.

그게 '원수되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저는 최근에 드라마 <추노>를 봤습니다.

보셔야 얘기가 되는데...   그 드라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길거리 왈패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은혜는 못 갚아도, 원수는 꼭 갚는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꼭 반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원수는 갚지 말고, 은혜는 꼭 갚는다!'
   

드라마를 보면 악당들이 나옵니다. 굉장히 밉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든 픽션인데도, 우리 마음에 복수심이 불탑니다. 원수를 갚아야 되니까요!  

그래서 악당들이 망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드라마를 시리즈 끝까지 봅니다.  

너무나 분하고 너무나 괘씸해서 '저 놈들 한 번 당해야 돼!' 하는 마음으로 드라마를 봅니다.
  

여러분, 원수에 대한 우리의 미움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원수를..

사실 정확히 얘기하면 그렇게 원수도 아니에요. 나도 많이 잘못했거든요.  

그런데도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고,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나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원수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이를 박박 갑니까.

 

이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하나님도 조금 잘못한 것이 있고

우리가 좀 더 잘못했다 할지라도 '책임을 나눠야 됩니다' 이럴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100% 우리의 반역이고, 잘못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자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5:10

하나님의 사랑은 객관적으로 갈보리 언덕위에 십자가로서 드러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관적으로 그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습니다.

이 체험이 있기 때문에,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우리는 소망을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초대되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1) 하나님과의 평화,

2) 우리가 그 안에 서 있게 된 은혜,3)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이것이 예수 믿고 난 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열매, 칭의의 결과들입니다.근데 이게 전부가 아니라 더 있습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이 세 가지는 '현재적' 결과들입니다. '미래적' 결과가 또 있다는 것입니다.

 

◑ 칭의의 <미래적> 결과

 

롬5:9~10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5:9

이것은 미래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진노'란 무엇인가요?

여러분, 언젠가 우리는 다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점도 우리가 분명히 해야 되는데요, 예수 믿는 사람도 심판대 앞에 섭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는데

여기서 요한의 의도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진노에 이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심판대 앞에 우리는 다 서는데,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도 진노를 받지 않는다.. 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진노하심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 피로 인하여,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에게 '너는 유죄다, 너는 죄인이다!'가 아니고

'너는 무죄다, 너는 의인이다!' 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그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심판은 받고요)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를 아십니까?

   오늘날 우리가 잘 모르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 중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악을 미워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는지

   그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성경을 꼼꼼이 읽어보세요. 그러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믿음의 기본입니다.

   근데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알면 두려워할 수 밖에 없어요.

 

   근데 그 두려움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우리가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우리가 그 은혜와 사랑안에서 쉼을 누리게 되는 거죠.

 

   그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은 롬1:18절 이하를 보시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어떻게 진노하시냐면,

   불신자들이 죄의 길을 가고자 할 때 '내버려 두심'으로 그 진노가 드러납니다.

   '그냥 죄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내버려두고 계시기 때문에, 이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날 것입니다.

 

계시록에 '산이 무너져라, 바위야 나를 덮어라, 그래서 그 어린양의 진노로부터 나를 가려다오!'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가 두렵고 무서운지, 산이 무너져서 나를 덮었으면...

바위가 내 위에 쏟아져서 나를 가리워줬으면... 사람들이 그렇게 외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 우리는 그 진노에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2) 두 번째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5:10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지금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수관계를 화목의 관계, 평화의 관계로 만드시기 위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그 아들이 죽으셨어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양 팔을 벌리셨는데,

그것은 한 손으로 하나님의 손, 또 한 손으로 우리 인간들의 손을 맞잡게 하신 것으로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케 되었어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위하여 죽으신 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다면..

얼마나 더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이 이 화목을 누리고, 구원을 얻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의 관계, 화목의 관계로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죽으신 그 주님이,

부활하셔서 다시 나타나셔서 이제는 살아나신 모습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를, 화해를 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든든해요. 예수님이 우리 구세주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이제는 예수님이 영원히 죽지 아니하시는 생명의 존재로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히 우리의 대언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영원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의 관계를 이루어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릴 부활의 영광이며, 영생입니다.

예수님이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살아날 것입니다.

그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두 가지 일, 1) 심판대에서 진노를 받지 않는다,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는다

2) 예수님의 살으심을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어

우리가 영원히 부활과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칭의의 <전천후> 결과

 

5:11 '이 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5:2절에 이어) 다시 '즐거워하느니라' 로 돌아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되었죠? 화목케 되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게 되었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즐거워한다'는 말이 본문에 3번 나옵니다.

2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절에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11절에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구원 받은 우리는 칭의의 결과, 늘 기뻐하게 되었다

늘 즐거워하게 되었다.. 는 말입니다.

이 즐거워함이야 말로 우리의 전천후 모습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을 말합니다.

성경공부를 해서, '구원은 이렇게 받는 것이구나.. 그러니 나는 구원 받았구나' 이렇게 확신합니다.

 

여러분,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요

그런데 구원의 감격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나요? 있기는 있지만 많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받았다는 교인은 많은데, 이상하게도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는 교인은 많지 않습니다.

확신을 받았다면, 당연히 감격도 따라와야 되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왜 믿습니까?

우리는 기쁘기 때문에 믿습니다. 그건 기본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5:2, 3, 11

 

그렇지만 평소의 우리 모습은, 구원의 감격 속에서, 기쁨 속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모든 구원의 복으로 인하여 정말 즐거워하며 예수 믿는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순간 의무적으로, 습관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신앙생활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복음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이 놀라운 구원의 복들, <칭의의 결과>들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되새겨야 합니다.

다시금 되돌아가서 우리를 위하여 일어난 일들이 이런 것이구나.. 이걸 우리가 봐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내가 의롭다 함을 얻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그 피를 믿음으로 인해서, 내가 의롭다 함을 얻었느냐?

 

그렇다면 내게는 하나님과의 화평이 주어져 있어요.

이제 하나님은 나를 은혜로 대하십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진노하심의 심판에서 벗어날 것이며,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백은 항상 기쁘고, 즐거워하는 그것이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가족수련회 첫 시간입니다.

오늘 저희가 <칭의의 결과>들에 대해서 롬5장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주셔서 이 진리를 우리가 밝히 보게 하시고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행하셨으며

어떤 일들을 예비하셨는지 우리가 잘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항상 우리가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하며 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