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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원수가 아니다 막6:53~56 2020.05.01. 출처
막6: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질병은 원수가 아니다" 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질병은 원수가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질병이 무슨 애인인 것도 아닙니다
질병을 마치 애인인 것처럼 내 옆에 끼고 두고 접촉 관계를 지속해야 되는
그런 대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질병이 애인이 아닌 것만큼 같은 정도로
원수도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은 굉장히 압축적이고 그리고 요약적이고 개괄적 입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지금 오병이어의 기적이 끝나고 나서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시는 그런 기적을 연이어 경험하고
제자들과 예수님이 이제 갈릴리 바다 서편 게네사렛 지방으로 오셔서 사역을 하시게 되는데
그 사역을 전부 '치유사역' 으로 압축해 버립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이 그렇습니다
치유사역으로 압축을 하면서
그 치유받는 환자들과 예수님과의 어떤 개별적인 만남에 대해 집중하지 않고
개괄적으로 전체를 싸잡아서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보고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예를 들어 12년 혈루병을 앓던 여인의 치유 현장,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부활의 현장,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에서 낫는 현장,
이게 다 개별적으로 현미경을 들여다보듯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근데 본문에 게네사렛 지방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치셨겠습니까!
근데 그 많은 사람들을 고치신 것의 개별적인 관심을 다 제거해 버리고
그냥 통째로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본문에서 얘기하시는 것은
도대체 질병이 무엇이고, 이 질병을 대하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무엇이냐를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6:53~56 이 본문에 근거해서 질병이 무엇인가요?
질병의 최대 유익을 이 본문이 말해주고 있는데,
본문을 통해 볼 때, 질병이 우리에게 주는 최대 유익은
바로 예수님을 찾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 *주제
보면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 메고 나오매' 라고 말씀하십니다 *막6:55
그러니까 질병의 최대의 유익은 예수님을 찾게 하는 겁니다
만약에 질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예수님을 찾아서 사람들이 쇄도해 오는 일이 없었을 것인데
이 질병때문에 예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이 상황에서
우리가 본문을 통해 주의를 집중해야 될 포인트를 정확하게 붙잡는 게 중요합니다
본문 중에서 어디에다 포인트를 주고 우리의 관심을 집중할 것입니까?
-많은 사람이 병이 나앗다 는 것에 포인트를 맞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병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데 포인트를 맞추라는 겁니다
본문의 의도가 그렇다고 봅니다
그래서 개별적인 치유 현장의 속사정을 본문이 기록하지 않고
이렇게 압축적이고 개괄적으로 얘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질병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왔다.. 이게 본문의 포인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질병을 고치셨다.. 가 아니라요 (물론 주님은 질병을 고치십니다)
▲그래서 이 상황을 보면, 정말 잠깐이고 순간이지만
한 병자가 예수님에 의해서 질병의 치유 기적을 수혜 받게 될 때
그 순간을 포착해 보면
그 환자와 예수님 사이에 아무도 끼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그 환자가 일대일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누구도 중간에 끼어 있지 않은 상태로 마주대하는 만남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지 않고 예수님의 옷에 접촉을 함으로써 낫는다는 말이 본문에 있지 않습니까? 6:56
그 접촉을 할 때도 예수님 옷자락을 붙잡는 순간에는
예수님과 그 붙잡는 환자 사이에는 중간에 아무도 끼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 상황을 질병이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어떤 상황?
예수님과 환자 사이에 누구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로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이 상황을
질병이 만들어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질병을 고치느냐 / 마느냐 라는 생각,
-질병은 우선적으로 원수처럼 여겨가지고 질병이 생겼다 하면
하루라도 빨리 질병을 퇴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그런 마음으로 본문을 읽지 말고
질병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를 보면,
환자가 예수님과 일대일로 만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이 마가복음의 관심은, 특히 치유의 기적을 반복적으로 기록하는 마가복음서의 모든 관심은
바로 이 순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예수를 찾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질병때문에 예수를 찾고, 예수 앞에 나와서 예수님과 면대면 일대일로 만남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
이 포인트에 중점적으로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가 뭡니까?
질병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도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바늘 끝 만큼도 틈새가 없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매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닫지 않는 부분이 없다는 거예요
전 세계에 3백만 명이 넘는 코로나19 확진자 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왜냐면 22만명이 죽었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나는 일인데
하물며 참새가 아니라 사람이 22만명이 죽었는데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마 3백만 명,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19 확진자들,
그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들어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개체수의 합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주권 아래서 내게도 질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에 주권적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근데 그 주권적 첫 번째 의도가 뭐냐면,
예수님께로 가게끔 만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이 상황을 주의해서 보면
'질병에 걸리면 예수님을 찾아라!' 이게 하나님의 의도라는 겁니다
▲근데 이 '예수님을 찾아라' 라고 하는 이 의도는
유대땅에서 지금 게네사렛 이라는 지역에 국한해서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힌두교의 스승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자기 엄마 뱃속에서 잉태되었다가 태어나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그 사람도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힌두교의 스승이 질병에 걸렸더라도
그 힌두교 스승이 걸려있는 질병에 담긴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의도는
'예수를 찾으라!'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예수님을 땅끝까지 전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전혀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소문이 들려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찾을 기회조차 없으니까요
이것은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질병에 걸리면
자기 종교의 신에게 의지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이런 뜻이 아니라
75억 명에게 임하는 모든 질병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가
'예수를 찾으라'인데
이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라든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규정해 놓으신 철칙입니다
'질병' 하면 무조건 예수님을 찾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세상의 의사들은 환자를 고칠 때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님 뜻에 맞냐면
'먼저 제가 당신에게 의술을 베풀기 전에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복음서의 기록된대로 예수님과 환자가 일대일로 만나는 것처럼 그렇게 만났습니까?'
를 확인해야 됩니다 이게 하나님의 의도에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병의 의미를 살펴보면
질병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우리가 바꿔야 되는 거예요
질병은 무엇이냐?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내게 넣어주신 의도를 담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도가 뭡니까?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로 가라는 겁니다
이게 질병에 담긴 의도입니다
무조건 예수님께 가야 되는데,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 낫는 장면을 얘기하지 않고 이렇게 압축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질병에 걸리면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예수님이 어디 계신가를 수소문해서 찾아가서
거기로 쇄도해 간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찾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질병을 바라보는 시각은
'왜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이 가라고 하시는 것일까?
왜 그런 거 같습니까?'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마음이
사이가 벌어져 버렸어요
이 사이가 벌어진 상태가 얼마나 큰 사건인가를, 커다란 위기인가를, 커다란 불행의 원인인가를
우리는 모르고 살아가요
그래서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가 벌어지고 관계가 부러진 이 상태를 알리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병을 넣어주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로 갑니까?
예수님을 마주 대하고 예수님을 접촉하고
예수님과 나 사이에 아무도 끼어있지 않게 예수님과 만남이 지속되는 상태가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밀착된 상태와 같기 때문에
예수님께 찾아가게 한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밀접하게 가질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예수님과 밀착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과 밀착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질병은 예를 들면 비상신호 와 같습니다
비상신호가 울릴 때 우리는
마치 그 비상신호를 원수로 삼아 가지고
비상신호를 제거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바보예요
비상신호가 울리면
그 비상신호가 가리키는 비상사태를 해결 또는 제거해야 됩니다
질병이라는 비상신호인 거예요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 있다는 비상사태에 대한 알림 신호입니다
근데 우리는 이제까지 어떻게 질병을 생각했냐면
하나님과 나와 거리가 멀어져 있는 것이
내 삶에 평강이 깨지고, 행복이 주어지지 않고, 기쁨이 없고, 만족이 없는 모든 불행의 원인인데
이 비상사태(거리가 멀어진 것)를 제거하려 하지 않고
이 비상사태를 알려주시는 비상신호인 질병을 퇴치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상신호가 내 원수가 아니라, 비상사태가 원수입니다
비상사태가 원수고, 비상신호는 내 편입니다
질병은 내 편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과 내 마음이 사이가 벌어진 것이 비상사태로 원수 같은 상황인데
그 원수 같은 상황을 내게 알려 주시는 신호로 사용하는 질병은
내 편인 것이고, 내게 유익한 것이지 내 원수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것과 같아요 우리가 뼈가 부러지면 깁스를 합니다
깁스는 굳으면 돌처럼 딱딱해지는 석고를, 붕대에 물 먹여 가지고 붕대를 감아 놓는 것입니다
각목을 대고 그 석고 먹은 붕대를 감아 놓으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돌처럼 딱딱해집니다
그러면 씻을 수도 없지요, 가려워도 긁을 수도 없지요, 움직이기가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깁스를 하자마자 그 깁스를 원수 삼아서 깨뜨리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혹시 깁스한 그 다음날 곧바로 친구가 보고, 그 깁스 하고 다니고 불편하니까
내가 망치로 깁스를 깨 줄게 하고 달려들면 그 사람은 원수 입니다
뼈가 붙을 때까지는 깁스가 그대로 유지돼야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질병이라는 것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내게 질병을 주셨습니다
이유는 비상신호를 주신 거예요 질병은 깁스와 깊습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뼈가 부러져서 틈이 벌어지고 간격이 벌어진 것과 같이
간격이 벌어져 있으니까,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가 부러지고 간격이 벌어져 있으면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비상 사태입니다 이거보다 더 큰 비상사태가 어디 있어요?
돈이 없는 것은 비상사태가 아니에요
사업이 잘 안 되는 것도 비상사태가 아니고
자녀가 뭐 대학을 못 들어가는 것도 비상 배가 아니고
목회가 잘 안 되는 것도 비상사태가 아닙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과의 간격이 벌어지고 있는 게 비상사태 입니다
이 비상사태 를 알려주고, 비상사태를 (그 간격을) 붙이도록 하려는 것이 질병입니다
그래서 내 몸에 발생하는 질병은
이렇게 깁스와 같은 부러진 뼈를 붙여주는 절대적인 내 편이요, 내게 유익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그의 몸에 '사탄의 가시' 라고 별명을 붙여 놓은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 질병을 위해서 진지하게 세 번을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들어 주지 않으셨어요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질병을 고치면서 전도를 하고 다녔습니까
근데 정작 자기 자신의 질병은 못 고쳤다는 거예요
근데 이제 사도 바울이 뭐라 그러냐 하면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필요한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때그때 주어지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면 그리스도와 내가 밀착되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밀착되기 위해서는
내가 평생 '사탄의 가시'라고 별명을 붙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내게 고통스럽고 괴로움을 주는 그 질병을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질병을 자랑까지 한다는 겁니다
질병은 원수가 아닙니다
질병은 깁스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부러진 간격을 좁혀주고 붙여주기 위한 깁스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질병이 하나님과 나 사이를 틈새없이 붙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예수님을 찾도록 나를 밀어붙이는 겁니다
이처럼 고마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질병을 이해하면 그 결과가 어떤 것이냐?
그러니까 우린 이제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쳐주셨다고 말씀하지 말고,
질병때문에 예수님을 찾게 되었고
질병때문에 예수님과 나 사이에 남편도 없고 아내도 없고 자녀도 없고.. (그래서 밀착되었고)
몸이 괴로우면 사실은 남편/아내 걱정, 자녀 걱정, 집안의 돈 걱정..
사실 이것 것들은 문제가 안 됩니다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이 심하게 아프면, 당장 죽음을 생각해야 하기에 그게 큰 문제로 여겨집니다
저도 이제까지 살면서 그런 몸의 아픔을 너무나 많이 겪었습니다만
그렇게 몸이 아프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납니다
심지어 이제 내일모레 죽게된 환자들은
아내나 가족들이 자기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면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다고' 그 정도로 밀착이 됩니다
낫기를 바라는 아내나 뭐 형제나 부모님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기를 하나님과 밀착되게 만드는 게 질병의 효과입니다
사업 뭐 이런 거 걱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질병이 이런 정도로 고마운 것이고 (주님과 밀착시켜 주니까)
그래서 그 질병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도를 바로알고
예수님과 밀착하려면, 천상 어떻게 밀착을 해야 됩니까?
십자가의 예수님 밀착해야 될 거 아니에요
무덤에 계신 예수님과 밀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밀착하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밀착해야 될 거 아닙니까
이렇게 질병 때문에 예수님과 틈새없이 밀착을 하고 나면
그 질병은 어떻게 될까요?
완치 확률이 엄청나게 증가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 한 사람의 예를 그렇게 크게 적용할 수가 있겠느냐
75억 명이 살고 있는 지구의 질병의 문제를 사도바울 한 사람을 통해 다 적용할 수 있겠냐 하지만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평생 질병을 안고 살았던 사람인데
그 질병을 안고 있는 사도 바울의 인격의 상태,
질병이 늘 계산되고 있고 질병이 고려되고 있는 그 인격의 상태를 통해
신약성경의 절반이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다가 몸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작은 질병의 신호를 크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자고 예수님과 밀착하십시오
하나님과 간격에 문제가 생기면, 내 몸에 이상 신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요!
'도저히 너를 그 멀리에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줄곧 쏟아져 들어와야 할 그 종에게는
아예 질병을 평생 달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계속 비상사태로, 예수님과 찰떡처럼 붙어다닌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님 아버지 아프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켜 보지 않으실 때가 없는 것이고
저를 지켜보시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오기를 바라지 않으실 때가 없는 것임을
뜻함을 기억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제가 십자가에 주님과 연합 하기를 쉬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의 밀착을 끝까지 유지해 나갈 수 있게
(질병의) 은총으로 우리 마음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