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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채색옷

LNCK 2019. 7. 5. 10:31

https://blog.naver.com/karamos/220307680615

◈요셉의 채색옷      창37:5~11        2014.03.30.

서론

지난주에 “설교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주제로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중요한 것은 성경의 어느 본문이든지 
먼저 본문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풀기위해서 여러 가지 작은 질문들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질문들이 제1대지, 제2대지, 제3대지가 되는 것이고, 
결론에 가서는 처음 던졌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성경적 설교는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이 던지는 질문을 풀어나가면서 
답을 찾는 과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7장을 읽을 때에도 이와 같은 접근이 필요합니다. 
본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어렵겠지만 본문을 여러 차례 읽다보면 질문이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본문을 두고 몇 시간이고 계속 묵상하면 “이것이 문제구나!”하고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진의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창세기 37장이 제시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먼저 본문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절과 23절, 그리고 32절에 등장하는 ‘채색옷’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7장에서 ‘채색옷’은 3단계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창 37: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창 37:23).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채색)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창 37:32). 

첫째는 입혀진 채색옷이고, 둘째는 벗겨진 채색옷이며, 
셋째는 숫염소의 피로 망가진 채색옷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채색옷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채색옷은 여러 가지 색으로 단장된 옷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여러 가지 색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3절의 ‘채색옷’을 NIV성경으로 보면 'Richly ornamented robe'라고 기록되어 있죠. 
채색옷은 ‘여러 가지 장신구가 달려 있는 옷’이라는 것입니다. 
색도 알록달록할 뿐만 아니라 장신구도 많이 달려 있는 아주 화려한 옷입니다. 
옷의 길이도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옷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화려한 채색옷을 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일반 사람은 손으로 노동을 해야 하지만, 
채색옷을 입은 사람은 손으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입니다.

사무엘하 13장 18절에 “암논의 하인이 저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채색옷은 왕자나 공주의 신분정도는 되어야 입는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바로 이런 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채색옷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1. 요셉의 입혀진 채색옷

창세기 37장의 채색옷은 3단계로 변화되었습니다. 먼저 3절에 기록된 ‘입혀진 채색옷’입니다.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도 요셉을 더욱 사랑하여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채색옷을 입혔다’는 것은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17세가 될 때까지 채색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요셉인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 양치는 일을 맡겼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자생력을 키워주려는 아버지의 깊은 배려인 것입니다. 

부모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자식에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자생력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사막 한 가운데 떨어뜨려 놓아도 먹고 살 수 있도록, 전갈이라도 잡아서 
껍질을 벗겨먹을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를 양육할 때 자생력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도록 공생력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자생력과 공생력. 이 두 가지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자생력을 겸비한 인물이 되도록 양치는 일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왜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혀 주었습니까?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요셉은 야곱의 네 아내 중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라헬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노년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여럿 키우다 보면 어려운 상황에 정신없이 기르게 됩니다. 
그러다 아버지의 연세가 지긋하게 되고 먹고 살만 하니까 늦둥이 막내는 너무 귀여운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요셉을 사랑한 것입니다. 

셋째, 요셉은 어려서부터 행실이 올바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주 악하고 못된 사람들입니다. 사람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자기 아우를 죽이려고 하고 돈을 받고 팔아먹은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이 잘못해서 범한 과실을 다 아버지에게 고했습니다. 
과실을 고했다는 것은 요셉이 형들과 함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요셉은 어려서부터 행실이 올바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7장의 기록목적은 자녀 교육의 바른 지침을 주기 위함이거나 
자식을 편애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도 아닙니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해서 채색옷을 입혔습니다마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너는 부모교육의 기본도 모르냐? 왜 요셉을 편애했느냐?”고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책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7장은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할 구원자(Savior)를 
준비해주시는가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채색옷을 입었다는 사실은 야곱의 식구들이 앞으로 닥쳐올 기근에 
다 굶어죽을 위기를 만나지만 요셉을 미리 구원자로 세워서 
이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구원자(왕, 통치자)로서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아들들이 많이 있는데, 
첫째 아들 르우벤, 둘째 아들 시므온, 셋째 아들 레위, 넷째 아들 유다와 같은 형들은 안 됩니까? 
이 사람들은 구원자가 될 수 없고, 야곱의 후계자도 될 수 없습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서모를 겁탈한 사람입니다. 서모를 겁탈한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 남자들을 속여 대량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살인을 가볍게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창세기 38장에 보면 난봉꾼과 같은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야곱의 후계자로 탈락되고 야곱의 선택이 열한 번째 아들인 
라헬의 아들 요셉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혔다는 것은 
요셉을 가문을 대표할 후계자로 생각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요4:5절에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창세기에는 야곱이 요셉에게 땅을 주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얻은 유일한 땅을 요셉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을 자기의 뒤를 이을 가문의 대표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요셉이 연이어 꿈을 꾸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요셉을 야곱의 후계자로 세웠다고 하는 것을 인준해 주신 것입니다.

첫 번째 꿈은 요셉이 형제들과 밭에서 곡식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곡식단이 가운데 일어서더니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을 주위로 둘러서서 가운데 요셉의 곡식단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이 꿈은 요셉이 형들의 지도자가 되리라는 의미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야곱의 아들들이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꿈에 곡식이 아니라 양으로 보였어야 맞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양이 두 다리로 벌떡 일어서고 다른 형들의 양들이 요셉의 양을 향해 무릎을 꿇더라고 
기록되어야 합당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바로 야곱의 아들들이 후에 
애굽으로 가서 농사짓고 살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을 향해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꿈을 두 번 겹쳐 꾸게 하신 것은 “요셉이 가문의 대표자가 되는 것이 옳다”, 
“요셉이 채색옷을 입은 것이 옳다”는 것을 하나님이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꿈을 두 번 겹쳐 꾸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창세기 41장의 바로 왕도 두 번이나 꿈을 겹쳐 꾸었습니다. 
내용은 곧 7년 풍년이 있을 것이지만 이어서 7년 흉년의 때가 올 것이라는 의미였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였습니다. 

창세기 37장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7장에 기록된 모든 사건의 주인공은 단연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혀준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기근으로 굶어죽을 가족들을 건지시고, 
가족들뿐만 아니라 근동지방의 많은 사람들을 건질 구원자로 세워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채색옷은 구원자라는 의미가 됩니다.

◑2. 요셉의 벗겨진 채색옷

요셉의 채색옷은 형들의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사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과실을 많이 저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형들의 과실을 보고 아버지께 일러바쳤습니다. 

그러니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만 보면 혈압이 오르고, 성질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것을 저 채색옷 입은 요셉이 다 고자질한다”, 
“꿈도 보니 우리의 왕이 되려고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채색옷을 입은 요셉은 형들에게 항상 스트레스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채색옷을 입고 다니는 요셉을 볼때마다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고 
급기야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품게 되었습니다.

창37:4절에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의 과실을 일러바친 것만 해도 미운데, 꿈 이야기를 두 번이나 한 것은 
상황을 매우 악화시킨 것입니다. 

요셉이 나이가 어리고 미숙해서 그 꿈꾼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않고 경솔히 말했기 때문에 
요셉이 잘못했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창37장의 핵심은 요셉의 미숙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형들이 꿈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여 요셉을 미워했다는 것에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8절에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원래도 미워했는데,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11절을 보면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요셉의 형들은 심리적으로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지 않고 
꿈도 잘 믿지 않는 사람들인데, 요셉이 꾼 두 번의 꿈 이야기를 확실히 믿었습니다. 

요셉이 꿈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해몽하니까 이 꿈들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고, 
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믿고서 그렇게 요셉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네가 참으로 왕이 되겠느냐?”, 
“네가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겠느냐?”하면서 시기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어느 날 요셉을 불러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세겜으로 양을 치러간 형들의 안부를 살펴보고 오라는 심부름이었습니다. 
세겜이라는 곳은 야곱의 아들들이 동생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인해 
그 곳 남자들에게 할례 받으면 디나를 주겠다고 다 속인 후, 
삼일 째 아파서 쩔쩔매고 있을 때 가서 그들을 모조리 죽인 곳입니다. 

이곳으로 양을 치러 갔다는 것은 야곱에게 큰 근심이었습니다. 
“혹 세겜의 남자들이 우리 아들들에게 복수하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입니다. 
야곱은 이곳이 위험한 곳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보냈던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시키는 것을 무엇이든지 다 합니다. 
“아버지 이렇게 위험한 곳에 왜 나를 보내십니까?”, 
“나는 못가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길을 묵묵히 순종하며 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헤브론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30km 남쪽의 헤브론에 살고 있습니다. 
세겜은 어디입니까? 세겜은 예루살렘에서 약 65km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30km와 65km를 더하면 95km가 됩니다. 요셉은 헤브론에서 95km 북쪽 세겜까지 갔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 거리를 걸어서 가는 것입니다. 17세 된 요셉이 혼자서 걸어가는 겁니다.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장소로 가는데, 순종해서 갑니다.

세겜에 도착해서 보니 형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잘됐다하고 위험한 곳에, 
형들도 안 보이는데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형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하면 그만 아닙니까? 

아버지의 심부름은 세겜으로 가서 형들이 잘 있나 보고 돌아오라는 것이지, 
어디 갔는지 찾아서 보고 오라는 것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요셉은 그냥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찾으려고 계속 들에서 방황합니다. 끝까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요셉은 그만큼 착한 사람이었고, 성실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성실해야 합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절대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요셉과 같이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생활 가운데서도 “이 사람 참 성실한데, 어떤 사람이야?”라고 했을 때, 
“OO교회 다니는 집사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달라도 뭔가 확실히 다르구나!”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출근시간에 꼭 10분씩 늦게 오고, 퇴근시간에도 20분씩 일찍 가더라!”고 하면 
“이런 사람 다시는 채용하지 말아야 겠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성실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가족, 친지들도 채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세겜에 보냈더니 들에서 계속 형들을 찾기 위해 방황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방황하는 요셉을 보고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무엇을 찾느냐?” 요셉은 대답합니다. “저의 형들을 찾습니다. 

혹시 우리 형들이 어디를 갔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자네 형들이 얼마 전까지 여기에 있었는데, 옆에 있다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도단이라는 곳으로 간다고 하더라.”

▲도단은 세겜에서도 24km 더 북쪽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오늘날 나불러스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나불러스는 지명이기도하지만 
이스라엘에서 만드는 비누의 유명한 브랜드 이름이기도 합니다. 
나불러스라는 비누가 굉장히 값비싼 고급비누입니다. 

아무튼 도단은 24km 더 북쪽에 있다 보니까 요셉은 점점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그 말을 듣고 도단으로 가서 형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형들의 눈에 멀리 지평선 상으로 요셉의 모습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 37:19). 
당시에 채색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그들은 먼 곳에서도 요셉을 정확하게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이려고 마귀적인 음모를 꾸몄습니다.

요셉을 죽이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항입니다. 
요셉을 죽이면 그 모든 꿈들이 개꿈이 될 것 아닌가하며 
하나님이 주신 꿈이 어떻게 되는 지 한 번 보자는 반항심리입니다. 

그러나 출10:22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흑암 중에도 광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칠흑 같은 어둠속을 걸어가도 광명이 나타납니다.

맏아들 르우벤이 말했습니다.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창 37:21). 
르우벤은 요셉을 살려서 아버지에게 점수를 따려고 했습니다. 
그동안 잃었던 신망을 회복하고 다시 장자권을 되찾으려는 계산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23~24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창 37:23~24).

요셉이 형들이 있는 곳에 이르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요셉의 채색옷을 벗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를 때리거나 발로 차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채색옷부터 벗겼습니다. 
형들이 얼마나 채색옷을 보기 싫어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덩이에 집어넣었습니다. 

여기 본문의 동사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벗기고 잡아 던졌다. 아주 숨 돌릴 틈도 없이 재빠르게 진행됩니다.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물이 없었습니다. 요셉이 3일만 있어도 목이 말라 죽게 되는 구덩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애걸복걸하며 살려달라고 하는데 형들은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창42:21절을 보면 나중에 형들이 그 때 요셉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창 42:21). 

요셉이 애걸복걸해도 형들은 들어주지도 않고 앉아서 음식만 먹고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악마의 회식’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채색옷은 벗겨졌습니다. ‘벗겨진 채색옷’은 형들의 하나님의 대한 반항과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에 대한 미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자에 대한 반항입니다.

◑3. 요셉의 망가진 채색옷

요셉의 채색옷은 숫염소의 피로 완전히 망가집니다. 
채색옷에 피를 뿌렸으니 그 옷을 어떻게 입을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망가지는 것입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빠졌던 도단이라는 지역은 시리아에서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의 길목이었습니다. 
마침 형들이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이스마엘 족속이 약대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넷째 형 유다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26~27절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창 37:26~27). 
동생을 노예로 팔아먹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결코 동생에 대한 사랑으로 했던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동생을 은 20개에 팔아먹었습니다. 
은 20개는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반 노동자의 임금으로 2년 치 임금이었습니다. 

유다가 이 돈을 받아서 무엇을 했는지 정확한 성경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창세기 38장에 기록된 그의 인간됨으로 보았을 때, 무엇을 했을지 뻔히 보입니다. 
이 유다라는 사람은 아주 부도덕한 난봉꾼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며느리와 바람피우는 아주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이후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에 숫염소 피를 부어 아버지에게로 가져갔습니다. 
당시 피 묻은 옷은 해당 주인의 사망을 입증하는 법적인 증거로 사용되었습니다. 

야곱은 수십 년 전에 자기 아버지를 염소 털을 가지고 속였는데 
지금 자기 아들들에게 염소를 가지고 속고 있습니다. 
그는 그 일로 아버지의 축복을 다 받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를 속였던 야곱은 자기의 아들들에게 똑같이 속습니다. 
그야말로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악을 심으면 나중에 악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의를 심으면 후에 반드시 의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를 속였더니 자식들에게 당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마음이 찢어질 듯합니다.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하며 굵은 베를 입고 오래도록 아들을 위해 애통하였습니다. 
보통은 일주일 애통하고 너무 슬프면 한 달을 애통하는 법인데, 
야곱은 아주 오랫동안 애통하였습니다. 

아들들이 아무리 위로를 해도 위로를 받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아들들도 얼마나 가증스럽습니까? 이 얼마나 거짓된 위로입니까? 
요셉의 ‘망가진 채색옷’은 주인이 팔려 죽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완전히 사라진 듯 했고,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론

요셉의 채색옷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채색옷을 입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고, 
채색옷이 찢겨졌다는 것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았다는 것이고, 
채색옷이 망가졌다는 것은 은 20개에 팔려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채색옷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독생자입니다. 
이 세상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 30개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팔아먹은 것도 유다고,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도 유다입니다. 
이름이 똑같습니다

요셉은 은 20개, 예수님은 은 30개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채색옷은 바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성육신하시기 1,500년 전에 
그림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스데반 집사가 순교당하기 직전 대제사장과 유대인들 앞에서 했던 
마지막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그대들은 하나님이 구원자들을 
세울 때마다 그들을 미워하고 대적하지 아니하였는가? 
요셉을 세울 때도, 모세를 세울 때도, 지금도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해서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했는가? 그러나 그 분이 구원자이시니라.” 
이것이 스데반이 한 설교의 내용이었습니다.

요셉의 채색옷이 찢기고 망가져 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간 듯했지만 
그것은 요셉이 자기 백성을 후에 닥칠 기근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요셉을 구원자로 택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지만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 풍년이 있을 때 양곡을 잘 모았다가 다가올 7년 흉년을 준비해서 
형들과 아버지, 자기 어머니들도 다 요셉 앞에 절을 하고 양곡을 얻어 
생명을 건지는 구원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도 미움을 받고 은 30개에 팔려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지금도 살아계시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도 훌륭하고 공자도 훌륭하고 마호메트도 훌륭하지만 그들은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는 아닌 것입니다. 그들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채색옷을 입혀주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살아있는 동안 내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결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 사이에 세워주신 구원자, 
하나님이 채색옷을 입혀주신 구원자를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은 20개, 30개에 팔아먹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세워주신 구원자를 마음의 구주로 믿고 순종하며 
구원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겠습니까? 이 결단은 확실하게 내려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반드시 내려야 할 결단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를 여러분이 받아들여 영접하겠습니까? 아니면 거부하겠습니까? 
이것은 영원한 복과 영원한 벌이 결정되는 중요한 결단임을 잊지 마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