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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왕과의 첫 대면 출5:1~9 2014.10.19.
서론
오늘은 본문의 주요 등장인물인 모세와 아론, 그리고 바로 왕의 대화를 중심으로
그들이 나눈 말의 의미를 살펴보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신교에는 많은 교파와 분파가 있습니다.
구교의 뿌리는 ‘천주교회’와 ‘동방정교회’이고,
개신교의 뿌리는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시작된 ‘루터교회’(Lutheran Church)와,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
그리고 영국의 국가교회인 ‘성공회’(Anglican Church),
마지막으로 신령주의자들로 일컬어지는 ‘재세례파’(Anabaptist)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단들은
모두 이 여섯 가지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침례교회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혹자는 침례교회의 기원이 ‘재세례파’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상 최초의 침례교도들은 영국 성공회의 국교화를 반대하고 나온 청교도들 중에서도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신자의 침례(Believer’s Baptism)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침례교도의 조상은 신자의 침례를 믿는 청교도들이라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는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개신교 가운데 가장 많은 나라에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개혁교도들을 ‘위그노’(Huguenot),
영국에 들어간 성공회 가운데 개혁교도들을 ‘청교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독일에 들어간 개혁교도를 ‘독일개혁교’,
네덜란드에 들어간 개혁교도를 ‘화란개혁교’,
스코틀랜드에 들어간 개혁교도가 ‘장로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교는 개혁교회의 한 분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존 낙스(John Know)라는 사람의 지도로
1560년에 장로교를 국가교회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로마 가톨릭과 단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존 낙스는 12년 만에 죽게 되었는데,
그를 이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 앤드류 멜빌 Andrew Melville 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멜빌이 교회 지도자가 되었을 때, 당시 스코틀랜드의 국왕은 제임스 6세였습니다.
원래 장로교회에 우호적인 사람이었지만
왕이 된 이후, 장로교회는 장로들로 구성된 모임으로 개교회 자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교회를 지배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장로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제임스 6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국왕이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보니
장로교 목사들과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 앤드류 멜빌과 국왕 제임스 6세는
이런 갈등 속에 서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596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임스 6세가 앤드류 멜빌 목사를 불러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느냐?”
이 질문에 대답한 멜빌 목사의 유명한 연설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이시여, 이 나라에는 두 분의 왕과 두 종류의 왕국이 있나이다.
한 분은 정치적인 왕이신 폐하이시고, 또 다른 한 분은 영적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 왕국은 폐하가 다스리시는 정치적인 왕국(Political Kingdom)이고,
다른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영적인 왕국(Spiritual Kingdom)입니다.
그리고 폐하가 정치적인 왕국에서는 머리가 되시지만
영적인 왕국에서는 한 시민에 불과하고, 한 어리석은 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민적인 의무에 관해서는 폐하에게 순종을 하겠습니다만
영적인 영역에 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만 합니다.
왜냐면 폐하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도 없거니와
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영생을 빼앗을 권리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앤드류 멜빌 목사의 판정승이었습니다.
제임스 6세는 자신을 한 어리석은 종(One Silly Servant)이라고 표현한 멜빌의 말에
속이 상했습니다.
▲그리고 1603년부터 제임스 6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하나가 되면서
제임스 1세로 스튜어트왕조의 첫 번째 국왕이 되었습니다.
물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정치적으로 합쳐진 것은 1707년(Acts of Union)입니다.
그러나 한 명의 왕이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1603년 제임스 6세가
영국 잉글랜드의 왕을 겸임하면서 제임스 1세가 된 시기부터입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국교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이 감독을 세워서 감독의 통치를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스코틀랜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장로교회는 왕이 지배할 수 없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도 감독을 파견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앤드류 멜빌이 계속 저항하자 1606년에 그를 런던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리고 4년 동안 투옥되었습니다.
제임스 1세의 치적이 별로 없지만, 다른 건 몰라도 1611년에 King James Version(흠정역)을
번역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앤드류 멜빌 목사와 국왕 제임스 1세와의 갈등은
결국 누가 교회를 다스려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이 누구이며,
사람은 누구를 경배해야 하는가?”라는 이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침례교회의 기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침례교회는 물이 많아서 침례교회가 된 것이 아닙니다.
침례교회는 국가교회 제도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므로 ‘국왕이 교회를 지배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 침례교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교회를 자유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국가교회’(State Church, Established Church)는 하나님의 교회를
국가에 소속된 교회로 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침례교회는 자유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국왕이나 통치자가
교회와 성도의 신앙을 지배할 수 없다는 확신이 침례교회의 정신이고,
이런 점에서 장로교회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국왕의 지배를 원치 않으면서도, 국가에 종속되어 있으니
당연히 국왕이 다스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국가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간섭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신앙의 규범은 성경이고, 우리를 다스릴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심을 믿는 것이 침례교회입니다.
▲역사 속에 앤드류 멜빌 목사와 제임스 1세와의 대립과 같은 갈등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통치자들과 정치가들은 언제나 교회를 지배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갈등의 시작은, 본문 출5장의 모세와 바로의 갈등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미 80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나이 40세 때 애굽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으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바로는 투트모세 2세였습니다.
투트모세 2세는, 모세를 양자로 삼은 이복누이 하쳅수트라는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투트모세 2세가 모세를 죽이려고 해서, 미디안으로 도망가 버렸는데,
그 후 1년 만에 투트모세 2세는, 자식을 보지 못하고 요절하고 맙니다.
그래서 투트모세 2세의 양자이며, 나이 어린 투트모세 3세와
양어머니 하쳅수트는 함께 애굽을 통치하다가
투트모세 3세가 장성하여 단독통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종으로 투트모세 3세 앞에 서서 말을 하고 있고,
이들의 대화를 들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앤드류 멜빌 목사는 ‘스코틀랜드의 사자’(The Lion of Scotland)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국왕 앞에서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자처럼 증거했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별명은 ‘이스라엘의 사자’(The Lion of Israel)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자들은 모두 유다지파의 사자(The Lion from the Tribe of Judah)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모세와 바로,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와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모세와 아론의 첫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
모세와 아론은 바로를 향해 첫 번째 하나님의 메시지(Opening Statement)를 선언합니다.
출애굽기 5장 1절에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여기 이 말씀이 얼핏 보기에는 간단한 말씀 같아도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이 말씀의 주체는 모세 개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여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하였습니다.
이 메시지는 인간이 인간에게 수평적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투트모세 3세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 구절은 바울의 말이고, 저 구절은 디모데가 한 말이고,
또 다른 구절은 솔로몬이나 다윗이 말한 것이라고만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영원히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은 하나님이 수직적으로 위에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영혼이 은혜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을 수직적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둘째,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유권은 너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하나님의 것을 네 것인 양 차지하고 있다”는 질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의 장자인데 네가 나의 장자를 네 것인 양 차지하려 하면
내가 네 장자를 빼앗겠다”는 메시지입니다.
출4:22~23절에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목사에게 있을까요?
장로나 권사에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소유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핏값을 지불하고 사셨기 때문에 교회의 소유주이십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셋째, 내 백성을 보내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를 예배해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를 경배해야 할 사람들도 아니고,
애굽의 갖가지 신들을 예배해야 할 사람들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할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밖에 없다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예배하며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예배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는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성경이 사람의 말이라고 하는 사람은 바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배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여지를 두는 사람 역시
바로와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이사 아구스도도 신적인 위치에 올라가서 백성들의 경배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주’(Lord)라 하면 잡아 죽였습니다.
가이사가 ‘주’인데, 예수를 ‘주’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스스로 예배의 대상이 되겠다고 하며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으려 하는 자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차지하려는 ‘하나님의 영광 도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장로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책을 다 요약하면 다섯 글자가 되는데,
그것은 바로 ‘공짜는 없다’입니다.” 공감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은 구원이 공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제사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공짜라고 뭐든지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도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주면 정작 홀로서야 할 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용돈도 벌어봐야 합니다.
그렇게 독립심을 기른 아이들이 나중에 잘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어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Adversity makes men, and prosperity makes monsters” - 박토르 위고
‘역경은 사람을 만들고, 번영은 괴물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역경을 통해 자생력을 길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와 아론은 이 말씀이 위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수직적인 메시지고,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거한 것입니다.
◑2. 바로 왕의 반응
바로는 하나님을 향해 대단히 교만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출5:2절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그는 말했습니다. Who is the Lord?(여호와가 누구냐?)
그는 지금 여호와가 누군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교만합니다.
그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해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권세자는 바로 나 자신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배를 받을 자는 바로 나 자신인데
여호와가 누구길래 나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느냐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는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내 백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라’고 하시니 바로가 대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놔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서 벽돌이나 만들라고 합니다.
그들은 나를 위해 벽돌을 만들어야 할 존재이지,
가서 예배나 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이익을 채워줄 도구나
착취의 수단으로 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의 이기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는 지금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교만함과 이기심을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독재자인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가난한데 그의 은행잔고는 돈이 넘쳐난다면 그는 무조건 독재자입니다.
그는 부정축재한 독재자인 것입니다.
후진국에 가보면 통치자들은 모두 부자입니다. 1년에 한두 번도 가지 않을
개인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지만, 백성들의 가난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도로도 지저분하고, 치안도 좋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종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향해 교만하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벽돌 만들기 싫으니까 종교를 핑계로 노역에서 빠져나가려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유기된 존재를 대변합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인간이 있을까요? 성경은 바로 이외에도
가룟 유다나 아말렉 족속과 같이 유기된 존재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하나님은 버리실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바로는 인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 대표적인 인물이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마귀를 예표하는 존재입니다.
바로는 불신자를 대표하고 마귀를 예표합니다.
◑3. 하나님이 바로 왕과의 전쟁을 오래 지속하신 이유
그러면 하나님은 왜 바로의 거절을 지켜만 보고 계셨을까요?
왜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그 자리에서 처단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래서 “바로는 할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 주었더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얼마나 통쾌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열 번이 넘도록 모세와 아론을 바로 왕에게 보내셨고,
재앙도 열 번씩이나 내리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속전속결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중요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등학교 1학년생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1학년을 특별과외해서 6학년으로 졸업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1학년은 1학년이 배워야 할 것을 공부해야 하고, 해당학년의 공부를 마치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해서 대학교에 입학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모세를 바로에게 열 번 넘도록 보내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기 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각 학년에 해당하는 절차를 밟기 위함입니다. 지나친 월반은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열 가지 재앙까지 내리면서 훈련을 시켰는데도
그들은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열 번을 공부하고 십년을 공부해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 중보자를 통해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인간이신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를 통해서 받은 구원은 정치적인 구원이지만
인간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구원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구원이고
훨씬 차원 높은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
마귀로부터의 구원,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구원,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결론
여러분, 오늘 말씀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해야할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한민국 대통령이 입대를 하라고 하면 군대에 가야하고,
납세의 의무를 지우면 세금도 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민적인 차원의 순종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예배해야 할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찾으십니까?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살겠다!”라는 확신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