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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님과 함께 어디에 설 것인가? / 데이빗 윌커슨

LNCK 2020. 5. 28. 10:56

나는 주님과 함께 어디에 설 것인가 / 데이빗 윌커슨 - YouTube

◈나는 주님과 함께 어디에 설 것인가?                   출34:1~10              출처

부제 :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놀라운 계시 

데이빗 윌커슨  October 13, 2003

 

Where Do I Stand With The Lord?

An Incredible Revelation of God's Mercy

 

출애굽기 33장은 모순적입니다.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시니라”

 

그리고는, 단지 몇 절 뒤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 임이니라”(33:20)

 

이는 문자적으로,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한 절은 모세가 주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절은 분명히 그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실제로, 모세는 문자 그대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 이 절은 모세가 하나님과 나누었던 놀라운 친밀함을 뜻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모세 사이의 결속 때문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주었던 통찰력과 계시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모든 날들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 알기를 구하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주님께서 모세를 친구로 인식하셨다고 말합니다(33:11).

 

이것은 우리에게 모세가 하나님을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던 것처럼 보았다고 (또는 알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가 하나님과 함께 보냈던 충실한 시간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친밀한 지식과 이해를 얻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일은 모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시점에서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은 막 주님을 대적하여 불경스러운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보물을 녹여서 우상, 즉 금 송아지로 빚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의 주위를 악마적인 광란 속에서 춤추고 돌며 숭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그 이상이 관련된 것입니다.

사람들 또한 그들의 장막에 작은 우상을 숨기고 그것들을 숭배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몰록의 장막과 너희의 신 렘판의 별

곧 너희가 경배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들을 들고 다녔은즉”(사도행전7:43)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분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 내가 그들에게 맹렬히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출애굽기32:10)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는 나머지 이스라엘과 함께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시간 주님과 함께 산에서 있었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여전히 그 백성들의 행동에 책임을 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써, 그는 이렇게 언명하며 백성들의 죄를 자신과 동일시 했습니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들을 만들어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32:31)

 

모세는 주님께서 모든 진을 소멸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나라였던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그분의 정해진 사역자들이었고, 주님은 그들과 언약 안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말하며 하나님을 설득하려 했던 것입니다.

“네, 주님, 이들은 당신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끔찍한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만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당신 얼굴의 큰 빛 앞에서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그들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입니다. 그러니 만일 그들을 자르신다면,

우리는 망할 것입니다. 우리는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되돌아갈 사람이나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차라리 스스로 무덤을 파고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이 딜레마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우선 이스라엘의 죄 된 본성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확실히 퇴보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날에 모세는 이렇게 그들을 상기시키곤 했습니다.

“네가 이집트 땅을 떠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주를 거역하였으되”(신명기9:7)

 

그러나 모세는 또한 그 자신의 죄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금송아지에게 절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는 그 자신의 인간적인 의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받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 딜레마에 빠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현장에서 저희를 심판하실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당신이었어도 아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 위기에 대한 어떤 점은 제 스스로도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이름을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나의 모든 움직임,

나의 일어섬과 앉음을 아십니다. 저는 당신과의 친밀함을 나누었고, 당신 앞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이전 어떤 때와도 달리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무엇인가 당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저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호의를 얻었다면, 제발, 당신의 백성을 죄 가운데서 발견되었을 때,

그들을 향한 당신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십시오.

이 위기에 제가 지금 당신과 함께 어디에 설지 보여주십시오. 제가 여전히 당신의 친구입니까?

 

여전히 당신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당신의 백성은, 여전히 당신의 선하신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까?

 

저는 모든 위기를 통해 당신께서 우리를 보살피시는 것을 봐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위기상황에서는, 당신을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장면에서, 모세는 단지 이스라엘의 지도자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는 높은 하늘에까지 죄를 지은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죄도 그를 하나님 앞에서 정죄하였습니다.

성경은 모든 자들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결국 모세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주의 길을 내게 보여 주사 주를 알게 하시고”(출애굽기33:13).

여기 히브리 원문은 이렇습니다.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시오” 여기서 자신이라는 단어는

“마음”으로 번역됩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의 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계시기 필요합니다. 저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당신은 여기서 뭔가 당신 자신에 관해 저에게 보여주셔야 합니다.

 

저는 이런 류의 위기에서 당신께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떻게 당신의 은혜를 구해야 할지, 심지어 그것을 어떻게 믿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불결한 죄에 사로잡힐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도 모세의 입장에 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그분께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거나 작게 느껴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죄라도 그분의 심판을 살 만큼 큰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큰 친밀감을 나누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친밀감을 부정하고 그분의 우정을 화나게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큰 계시로 축복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받은 빛을 대적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큰 사랑을 보았지만 그 면전에서 범죄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급박한 울부짖음이 솟아오릅니다.

“주님, 이런 위기에 당신은 어떠한지 보여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이러한 면을 알아야겠습니다.

제가 죄 때문에 놀랐다면- 내가 내 마음에 금송아지를 세웠다면- 저에게 어떻게 반응하실 건가요?

 

우리의 위기에, 우리의 의식은 죄의식에 짓눌립니다. 깊게 침체되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라고는 모세가 들었던 그 진노의 음성입니다:

 

“나를 혼자 두어라. 나는 너를 소멸하고 내칠 것이다.

몇 번이고, 나는 너를 내 팔로 끌어 안았다. 모든 소망 없는 상황을 통해 나는 너를 안고 건넜다.

 

나는 너에게 친절하고 사랑 많은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너는 자진하여 심각하게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너를 포기한다. 나는 나의 길로 걸을 충실한 종을 찾을 것이다.

나는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바꿀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너를 원하지 않는다. 너는 반역하는 양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모세가 마주친 것과 동일한 딜레마에 직면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그의 친구처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회중의 죄와 마주치실 때 어떠할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친한 친구로써 아는 것으로만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시다시피, 이 관계의 인간적인 측면에서, 친구는 친밀함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편 모세는 이렇게 말할 수 도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친구이신 것으로 아는데.

그리고 나는 그분께서 나의 필요에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알아.

 

그분께서는 어떠한 친구라도 그러는 것처럼 공급해 주시지.

그리고 내가 기도할 때에 그분께서는 자비로 응하시지.”

 

그러나 이제 모세는 문제에 직면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내 삶에서 금송아지를 발견했을 때 말입니다.

내가 주님과의 친밀함의 신뢰를 배반할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그분께서는 거룩하시고, 순결하신데, 나는 그분과의 언약의 관계를 깨었습니다.

지금 나의 상처 받은 친구의 눈 앞에 어떻게 서겠습니까?"

 

네, 나는 그분과 함께 직면하여 이야기해왔습니다. 나는 그분과 함께 많은 시간을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친밀감을 나누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실패를 한층 더 나쁘게 만들 뿐입니다. 나는 심각하게 범죄하였고,

그분의 영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주님, 당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십시오, 우리 사이가 좋았을 때만이 아닌,

제가 반역하여 죄 지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제가 이 계시를 받지 못한다면, 저는 당신과 함께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주님의 성품을 알기 전에는

그분과 함께 어디에 서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이해하여야 할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범죄하였을 때 그분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다루실지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파라오의 강퍅함에 무시무시한 심판으로 응하시는 것을 거룩한 두려움 안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군대가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건드렸기 때문에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주님께서 어떻게 믿음과 순종에 반응하시는지도 보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이 안전하게 건너도록 초자연적으로 홍해를 가르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알았습니다.

 

더구나, 모세는 하나님을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알았습니다. 주님은 불붙는 떨기에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네 신을 벗어라, 너는 거룩한 땅에 있노라.”

 

그러나 지금, 현재의 위기에서, 모세는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경우의 하나님의 성품에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것은 더 이상 친밀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많이 기도했느냐, 그가 얼마나 신실했는가,

또는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봉사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과거는 여기서 상관 없었습니다.

 

이제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죄가 용솟음 칠 때의 하나님은 누구이신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성품에 관한 무엇인가를 더 알아야만 했습니다. 뭔가 희망을 줄 것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더 깊은 진리를 가져야만 했습니다. 백성들을 그분의 임재로,

그분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그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과 성품에 대한 더욱 큰 계시로

그를 이끌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계시는 우정이나 친밀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그의 상한 백성들이 알기를 원하시는 계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주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할 것이요”(출33:19)

그리고는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 임이니라.

내 옆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반석 위에 설지니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그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가는 동안에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33:20-22)

 

이 절에서 ‘영광’의 히브리 단어는 ‘내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내 자신이 네 가까이에 지나갈 것이다.”

 

Helen Spurrell의 히브리 원어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너를 바위의 움푹한 곳에 숨기겠노라.

그리고 나는 내가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능력의 보호로 지켜 주겠노라.”

 

주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 너는 나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나는 네가 안전할 장소에 너를 두겠노라. 그 장소는 바위 안이다.

 

그리고 나는 네가 거기에 머물기를 바란다. 의심을 품거나 두려워 말라.

나는 너에게 내가 누구인지 계시를 주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 자비 그리고 보호를 계시하십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을 실망시켰을 때, 즉 우리가 빛을 대적하여

중대하게 범죄하였을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숨었다고 말하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한 상황에서 꾸물거리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대신 우리는

재빨리 예수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반석 안에 숨기 위해서 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우리 조상들이…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이는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기 때문이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였느니라”(고린도전서10:1~4)

 

그 장면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바위 가운데 틈을 내셨고 모세를 그 가운데에

안전하게 두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의 종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자신이 네 옆을 지나가겠노라.

그리고 나는 너에게 나의 마음을 보여주겠노라. 그러면 너는 한번에 내가 누구인지 모두 알게 될 것이다.

너는 내 본성의 전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실패의 때에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와 같이, 우리도 바위 틈에서 안전하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을 실망시킬 때마다 주님으로부터 도망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안전한 장소에 숨길 뿐만 아니라, 내가 거기서 너를 덮어서 보호해 주겠다.

너는 완전히 안전하다. 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서도 말이다. 너는 알게 될 것이다.

네가 알아 온 나의 본성에 또 다른 면이 있음을."

 

“너는 크게 범죄를 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가 경건한 슬픔으로 나에게 달려오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나의 자비와 은혜의 확실한 계시를 얻을 때까지 너를 내 손으로 지켜주겠다.

나는 네가 내가 누구인지 보고 알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모세와 같이,

너는 이 계시를 구하여야 한다. 너는 ‘주님,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라고 울부짖어야 한다."

 

여기서 모세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는 것을 지적하겠습니다.

그가 산에서 돌아와 사람들이 금송아지 주위를 벌거벗고 춤추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분노로 타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써주셨던 돌 판을 들어 땅에 내동댕이쳤습니다. 

 

"모세가 크게 분노하여 자기 손에서 그 판들을 던져 산밑에서 깨뜨리니라”(출32:19)

 

이것은 거룩한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격노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뜨거운 분노였고

그것은 죄였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하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종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동일한 종이 사람들의 죄를 보았을 때, 그의 노여움은 난폭하게 터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돌 판을 깨뜨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로써, 이것은 저에게 거룩한 두려움을 줍니다.

그것은 나에게 하나님의 집 집에 죄에 대하여 감히 내 자신의 인간적인 분노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기 위하여

육신적인 열정으로 응하려고 할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대신, 저는 반석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 그분의 사랑의 친절에 대한

계시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백성들을 그분의 자비와 보호의 자리로

다시 이끌어야 합니다.

 

그 다음 장면도 모세가 여전히 분노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금송아지를 가루가 되도록 갈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그것을 물과 함께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개적으로 그의 형제인 제사장 아론을 책망하였습니다.

아론은 죄의식과 두려움에 짓눌려 부르짖었습니다. “내 주여, 크게 분노하지 마소서”(32:33)

 

그 시점에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분노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어떻게 죄를 다루시는지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난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의 그 백성을 향한 마음의 완전한 그림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는 주님을 잘못 전했습니다. 그는 오직 반쪽자리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듯이 말입니다. “사람의 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1:20)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전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주님께서 모세의 분노를 인정해 주셨는지 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행동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말했습니까?

그리고 그 행동들은 불신의 세계를 향해 무엇을 말했습니까?

 

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범죄하였을 때의 모습이시구나.

만일 네가 금송아지를 세우면, 그분께서 분노와 진노로 너를 대적하여 오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네게 쓴 물을 마시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너의 가족을 죽이고 너를 버릴 것이다.”

 

아니요, 절대로!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개념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두려움을 나을 뿐입니다. 주님의 사역자로써 저는

하나님의 자비 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네, 주님은 의로우시고, 그렇습니다, 죄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우시고, 인내하시며, 인자하시고, 용서하십니다.

 

모세는 단지 인간적인 열정으로 행동했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계시 없이 행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메시지로 소리질렀습니다.

 

“나는 주님의 편이다. 범죄한 너희 모두 나에게 오라. 나는 주님께 가려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너희 죄로 인해 속죄하여야 하리라,”(출애굽기32:20을 보십시오)

 

성경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로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이유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본성, 그분의 성품, 영광을 잘못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거룩하고 온유하고 귀한 사역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내게 범죄하여 이스라엘 자손 한가운데서

나를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네가 네 앞에 있는 땅을 바라다보기는 하려니와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리라”(신명기32:51-52)

 

여기에 주님께서 이 그분을 잘못 나타내는 문제를 얼마나 중대하게 여기시는지 나옵니다.

모세는 그의 최선으로, 그분의 자비로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세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 한가운데서 나를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하였음이라”(32:51)

 

베드로는 이렇게 이 문제를 언급합니다. “오직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베드로전서3:15). 베드로는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단순히 말해, “당신 자신의 마음대로 하나님을 잘못 드러내지 마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품의 흐름이 단호하게 자리잡게 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소망의 기초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시다시피,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충실한 때와,

반역의 때에 그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그분을 정확하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그분을 엄격한 판관으로써만 대표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의 아버지로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3:15).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소망의 이유는 여러분이 주님과의 경험을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비참할 정도로 그분을 실망시켰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금송아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리고는 반석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보호의 손길을 느꼈던 바위 틈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분의 용서, 자비,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여러분을 회복시키셔서 그분 안에서 자라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주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심을 압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품에 대한 진실한 계시를 확실히 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 소망의 기초입니다.

 

여러분이 한번이라도 죄에 의해 놀라거나 압도당한 적이 있다면 알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여러분은 죄책감에 눌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회개로 돌아가 반석 안에 숨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필요한 모든 자비와 사랑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자신에 대해 모세에게 주셨던 커다란 계시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 거룩히 구별해야 할 그분에 대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너는 아침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주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주의 이름을 선포하시니라.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이것은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출애굽기34:1,6-7)

 

여기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관한 완전한 그림, 더욱 큰 계시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이 바위로 올라오라. 내가 너를 지켜 줄 소망을 주겠노라.

나는 너에게 네가 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나의 마음을 보여주겠노라.”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모세가 주님께 간청했던 그 ‘영광’은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에 영광이 있습니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시는.

그러나 이것은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그 영광의 완전한 표현이십니다.

정말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아들 안에 구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기 위하여 땅으로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모세의 시대에는 물론 그리스도는 아직 육체를 입지 않으셨지만 하나님 안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성품에 대해 선포하신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진리로 가득하고, 순수하고 의로우시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묻습니다. “마지막 절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자비롭고 용서하신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그 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출애굽기34:7)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나의 영광이 있노라:

나는 너에게 자비와 은혜와 용서를 풍성히 주노라. 그러나 만일 네가 이 영광을 거절한다면

- 마음을 강퍅히 하고, 네 죄를 사랑하며, 나에게 되돌아오기를 거부한다면-

빨리 회개하고 너를 지키겠다는 나의 언약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너는 그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악한 죄를 범한 것이다. 너는 나를 거절한 것이다.

너는 나의 사랑의 품에서 뒤돌아 선 것이다.”

 

사실 예수님 품 밖에는 아무런 치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의 대단한 친밀함을 가진 것에 대해서, 많이 기도한 것에 대해서,

강력한 계시를 받은 것이 대해서 간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에 거룩히 구별하였습니까?

실패와 반역의 때에 그분의 풍성한 자비에 대한 소망을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물어볼 때에 이 소망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금송아지에게 절한 이후에 예수님에 의하여 회복된 것을 간증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께 달려갈 수 있다는

동일한 소망을 건네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의아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풍성한 영광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붙잡는

범죄하기 일수인 신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들이 그분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회복된다면,

그들이 계속해서 범죄하겠습니까? 이 풍성한 사랑의 계시가 그들로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놀라운 계시에 대한 모세의 반응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이 행한 것은 나의 영혼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모세가 급히 땅을 향하여 머리 숙이고 경배하며 이르되,

오 주여, 이제 내가 주의 눈 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우리 가운데서 함께 가시옵소서.

이는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기 때문이니이다.”(출애굽기34:8-9)

 

모세는 경배하며 재빨리 그의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의 강력한 환상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안에서 주님의 임재에 대한 새로운 갈망이 솟아올랐습니다.

 

갑자기, 그의 마음 속에 용서를 위한 더 큰 울부짖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죄를 마음 놓고 고백하기 시작했고 백성들을 위해 중보했습니다.

 

무엇이 이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에 대한 강력한 진리의 계시였습니다.

 

모세는 그가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나중에 그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았을까 합니다.

 

“왜 내가 아론이 그분과 대면하도록 조용히 끌어당기지 않았을가?

왜 나는 그렇게 빨리 칼을 빼 들었던가? 내가 이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만 받았었더라면”

 

여기에 모세의 부르짖음에 주님께서 반응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언약을 맺으리라.

내가 아직 온 땅에서 나 혹은 어떤 민족 중에서도 행하지 아니한 놀라운 일들을

너희 온 백성 앞에서 행하리라.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주의 일을 보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행할 일이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니라”(34:10)

 

마지막 절의 히브리 원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됩니다.

“참으로, 내가 너의 안에 둘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라.”(Helen Spurrell)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전성기가 앞에 있다, 모세.

나는 내 백성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 것은 너 뿐만 아니라

네 주위에 있는 자들 안에 나의 거룩한 두려움을 넣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는 경건한 두려움을 낳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자비의 계시를 여러분의 마음에 거룩히 구별하십시오.

여러분은 모세의 예로 인해 그것이 죄로 이끌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주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찬양하도록 감동시킬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 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다니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죄 가운데서 나를 찾으시고도, 바위 속 틈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입니까?

오, 제가 섬기는 그 하나님이시라니. 전세계가 당신에 대해 알기를 원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