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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기 선교사 아마존 선교 간증기 전문

LNCK 2020. 6. 2. 11:21

 

www.youtube.com/watch?v=wdgy4ETh9XU

 

www.youtube.com/watch?v=QiBYqKgxcJ8&feature=youtu.be

www.youtube.com/watch?v=5pwL3XYzOvM&feature=youtu.be

 

◈김철기 선교사 아마존 선교 간증기  P1 P2 P3    행14:22  *홈페이지 gramin.org/

 

◑1 아마존을 품은지 29년이 흐르다.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존 선교사가 되고 싶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가정하에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살기 좋은 곳이 아닌,

좋아하지 않는 곳, 살기 어려운 곳인 아마존의 선교사가 되고 싶다.

 

자아가 죽기 좋은 곳, 끊임없이 자신을 주님께 드리며 주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곳,

아마존에서 주님을 나누는 선교사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오래 전, 우리 내외는 두 아이와 함께 아마존에 왔다.   *1991년 경

이제 아이들은 모두 장성해서 아마존을 떠났고 아내는 여러 해 전 본향으로 돌아갔다.   *2013년

나만 이곳에 남았다.

 

나는 선교사가 되리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더욱이 아마존 선교사가 되어 평생을 살아야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선교사가 된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다.

 

군대에 입대하기 전,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근무하면 영어를 익힐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주님 제가 군대에 입대하면 카투사로 근무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때 교제 중이던 현재 아내에게도 기도를 부탁했다.

그런데 실제로 군에 입대했을 때, 카투사로 근무하게 됐다.

기도하고 잊어버렸는데 주님은 기억하시고 나를 카투사로 보내셨다.

이때 기도를 기억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3년간 카투사로 근무하며 타문화권 선교 훈련을 받았다.

미국 군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웠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서구의 수평적인 문화를 경험했다.

후에 선교사가 되고 난 다음 주님께서 선교사로 훈련시키고자 이렇게 인도하셨음을 감사했다.

 

23세에 기독교로 개종한 아내 허운석 선교사는 필자와는 다른 믿음의 소유자였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난 몇 년 후, 허 선교사는 내게 이혼을 제안했다.

새벽기도를 게을리 한다는 이유로 헤어지자고 했다.

 

나는 이혼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 해 1월 초 40일 금식기도를 했다.

이 금식기도로 여러 영적 경험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금식기도가 끝나 갈 즈음 마음에 이런 감동이 찾아왔다.

"갈릴리와 나사렛의 가난을 배워라. 그리고 농촌에 목회자 없이 버려진 잃어버린 양떼를 돌보라."

 

금식기도가 끝난 후 목회자 없이 비어있는 농촌 교회를 찾아서 6년간 전도사로 단독 목회를 했다.

경북 금릉군 부항면 월곡리 학동, 부항중앙교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절대 필요한 선교훈련을 시키셨다.

가난한 농촌 교회 교인들을 섬기고 교제하며 나

도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이들을 부끄럽지 않게 돕는 법을 배웠다.

 

농촌 교회 교인들과 말씀과 삶을 나누면서 우리는 농촌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됐다.

교인들과 함께 살다가 죽어서 양지바른 산 언덕에 묻히면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목사고시를 준비했다.

그때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선교 훈련을 다녀온 홍순범 목사를 만났다.

그는 끊임없이 인도의 비참한 모습과 복음이 필요함을 이야기해줬다.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함께 선교훈련을 갔던 신학생들 중 몇 명이 인도 선교에 헌신 했나요?"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무도 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홀로 누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도에 선교사가 필요한데, 아무도 가지 않는다면 나라도 가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곧 '왜 나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 나는 가난한 농촌에 가서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선교사 가려고 준비하는 사람들 많은데 그들이 가야지!' 그러나 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계속이어졌다.

그렇게 밤을 하얗게 새우고 피곤에 지쳤다. 새벽녘 '주님, 제가 선교사 되는 것을 바라십니까?

그럼 되어드리겠습니다'라고 마음으로 고백하고 잠이 들었다.

 

이 밤의 사건이 결국 인도에서, 아마존으로 바뀌고 아내 허 선교사의 허락을 얻어내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다.

이윽고 1990년 가을 신촌장로교회 창립 35주년 기념 선교사로 입양되어

세계선교부 파송을 받아 아마존에서 만 29년을 지내고 있다.

 

◑2. 가장 아름다운 정원에서

 

경비행기(마나우스~썽 가브리에우)에서 내려다보이는 몽글몽글한 나무의 봉우리들로 이어지는 정글은

마치 녹색의 양탄자가 한도 끝도 펼쳐진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로 여러 지류들이 흘러서 큰 강으로 합해지는

아마존 강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 전경은 나를 압도하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바라보며 전율하게 했다.

 

미국인들이 아마존에 붙인 이름, 녹색의 지옥(Green hell)이라고 붙여진 아마존은 아름다운 지옥이다.

 

일년 365일 계속하여 30도에서 40도를 오르내리는 적도의 강렬한 햇빛도 무섭지만

정글로 형성되어있는 아마존은 자주 비가 내린다. 그래서 낮에는 습도가 80%, 저녁 에는 90%까지 올라간다.

그러므로 집안 곳곳에 항상 곰팡이 꽃이 가득피고 습도로 인해 몸이 지친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온몸을 물어대는 벌레들은 자주 인내의 한계를 경험하게 한다.

아주 이른 아침 1시간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메룽(Maruim)이라는 벌레가 물어댄 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귓가에서 윙윙 소리를 내면 메룽이 주변에 있음을 안다. 물리면 많이 가렵다.

 

해가 뜨고 1시간 후부터는 삐융(Pium)이라는 벌레와 무뚜까(Mutuca)가 찾아온다.

삐융은 까맣고 아주 작은 벌레로 물리면 붉은 반점과 함께 부어 오른다.

무뚜까는 청바지같이 두꺼운 천이 아니면 옷 을 뚫고 들어온다.

무뚜까는 물리면 큰 상처가 난다.

 

풀밭에서 기생하는 무꿍이(Micuim)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독충은 녀석은 신발을 타고 올라와

가장 부드러운 피부라고 할 수 있는 사타구니에서 일주일간 기생한다.

무꿍이가 기생하면 붉은 반점이 생기고 가려움이 극심해서

피가 나도록 긁어도 가려움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다가 해질 무렵엔 메룽이가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여러 종류의 모기들이 나타나서 물어대기 시작한다.

여러 종류의 말라리아, 댕기열 등 갖 가지 질병을 옮기는 모기들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독개미들, 거미들, 벌들이 기생한다.

 

일년 중 유일하게 우기와 건기로 나뉘어지는 아마존의 이런 폭염과 폭우, 높은 습도, 많은 독충들은

하나님이 아마존을 보호하시는 방법이다.

완전 청정지역, 무공해의 정글에는 사람을 통째 삼키는 아나콘다, 각종 독사, 악어,

허기가 지면 사람을 공격하는 표범 등 야생동물들이 낙원을 이루며 서식한다.

 

지구의 허파 라고 불리는 아마존이 이와같은 환경이 아니었다면 벌써 오래전에 훼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존의 이런 환경들은 지금도 여전히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남아 있다.

 

아마존은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아마존은 이런 여러가지 악조건들로 매일 주님의 도움을 요청하고 주님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이다.

아마존은 항상 초심으로 적응하는 곳이다. 오래 살아도 환경에 익숙해지지 않으므로 마음이 모아진다.

 

◑3. 아마존의 별미에 길들여지다.

 

아마존에 들어갈 때 필자는 매우 교만했다. 젊은 시절 군대에서 3년간 카투사로 근무하며

영어를 배웠던 터라 상파울로에서 10개월간 포루투갈어를 쉽게 배웠다.

아마존에 들어갈 때, 능통하지는 않았으나 설교와 강의가 가능했다.

더욱이 비교적 마른 체질이어서 더위를 덜 타고 어떤 음식도 잘 먹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마존에 도착하고 곧바로 나를 부르신 선배 목사님이 주변 인디오 마을을 순회하는 여행을 하자고 하셨다.

용감하게 반바지를 입고 기쁜 마음으로 함께 했다.

그런데 모터 보트가 강가에 도착했을 때 양쪽 다리에 독충들의 공격을 받았다.

물린 다리는 물론 온몸이 불타는 것만 같았다. 고통이 너무 극심해 당장 죽을 것 같았다.

 

그 여행 후 더위를 먹어 몸져 눕게 됐다.

그 때 비로소 오만방자하게 아마존을 밟았음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했다.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도움으로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고백, 빌립보서 4장 13절을 인용하며

"주님 오늘도 당신의 도움으로 하루를 살아내게 하여 주소서" 

 

아마존에서 한국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대개는 브라질식으로 음식을 먹었고 한식은 가끔 밥을 지어 식으면 펄펄 날리는 쌀로 밥을 짓고

장국을 끓여 먹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자 김치나 다른 한국 음식도 그다지 생각나지는 않았다.

다만 몸이 아파서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렸을 때 한국 음식이 간절하게 생각난다.

어쩌다 김치를 먹을 때면 미각이 한국음식 맛을 기억하며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인디오 마을에 들어가서 사역을 하면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마을에서 그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는데 처음엔 몹시 두려웠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내색할 수 없어 식사시간이 고통스러웠다.

생선이나 고기들을 오래동안 보관할 방법이 없고,

우리가 사역하는 아마존 검은 강 상류지역은 물고기와 동물이 많지 않다.

 

그래서 생선이나 동물들을 잡아서 땅으로부터 약 1미터 높이에 발을 펴고

그위에 생선이나 동물고기들을 펴놓고 불을 피워서 훈제를 한다.

오래동안 훈제를 하면 생선이나 동물고기 껍질이 새까맣게 타며 마치 미라처럼 딱딱해진다.

그러면 몇 달간 보관이 가능하다.

 

그렇게 훈제한 생선이나 고기로 음식을 만들려면 불에 탄 부분을 벗기고 물에 담궈서 약간 불린 후에

물을 많이 넣고 고추, 개미 양념장을 소재로 탕을 끓인다.

훈제하여 끓여낸 원숭이 탕, 악어, 생선 탕 국물은 거무스럼하다.

 

원숭이는 사냥당할 때, 숨을 거두며 고통이 커서일까, 손을 꽉쥐고 있다.

손을 움켜쥔 원숭이 손, 아기 머리같은 원숭이 머리가 접시에 나온다.

이런 음식을 처음 접할 때 결코 먹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들의 음식을 기쁘게 먹는 것이 내가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이런 음식들을 대접하며 우리를 바라보는 인디오 형제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내가 이것을 삼키는 것이 한 영혼을 구원한다면 삼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라는 마음으로 음식을 삼켰다.

 

과거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서 음식을 대접받을 때, 밥 그릇이 불결하다고 여겨서

밥을 대접받으면 안에 든 밥만 파먹었다는 기록을 보고 신학교 시절 그들을 몹시 비판했다.

 

하지만 막상 선교사가 되고 보니 나는 그들보다 더 힘들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음식마다 독특한 맛이 있음을 느끼게 됐다.

 

각종 탕에 화링야 (farinha)를 집어 넣으면 국물 맛이 변하고 입맛이 돌게 된다.

훈제한 생선에 개미 양념장과 고추를 넣고 끓이는 탕은 얼마나 맛있는지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아마존의 별미 요리다.

 

아마존은 완전 무공해 청정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잡히는 생선들과 동물들 화링야는 모두

최상의 유기농 식품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최상의 식품을 제공하여 주신 것이다. 이제는 여러 형제들의 전통 음식들이 아주 맛있다.

 

신학교가 개교하고 1년이 지나자 독신자 뿐만이 아니라 기혼자도 여러 명 입학했다.

그중 한 명이 가족을 신학교에 데려오고 싶다고 했다.

남편이 없이 홀로 있는 아내가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기혼자를 위한 숙소는 따로 없었으므로 곤란해하자,

그가 집터만 허락해 준다면 자신이 집을 직접 지어서 살겠다고 했다.

 

그래서 목재를 내주며 동료 신학생들에게 그가 집 짓는 것을 도와주라고 권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단 한 명도 그를 돕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허 선교사가 답답한 마음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부탁을 하였다.

 

"친구가 혼자 집을 짓는데 도움을 주십시요.

당신들이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마음에 도울 생각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학생들이 '마음이 없다'는 말을 우리 몸에 '심장이 없다'는 말로 오해해서 거세게 항의를 했다.

포르투갈 어로 마음은 심장(coracao)을 일컬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그렇게까지 분노한 데는 뼈아픈 역사적 경험에 기인했다.

남미를 점령한 백인들이 "인디오는 들판에 뛰어다니는 영혼 없는 짐승이다"

"좋은 인디오는 죽은 인디오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백인들의 멸시와 학대는 오랜 세월 인디오 부족들의 잠재의식 속에 분노를 키웠고,

그날 허 선교사가 말한 '마음'을 '심장'으로 오 해한 이들은 오랜 역사적 감정을 터뜨린 것이다.

 

겨우 수습해 오해를 풀 수 있었지만 언어 장벽은 여러 곳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그들에게 사랑과 용서, 평화와 같은 개념을 이해시키기가 어려웠다.

누군가 진실한 사랑과 용서를 삶으로 보여줘야 비로소 이해될 개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오해를 불러일으켰듯이,

우리 역시 그들의 언어를 우리 식으로 해석해서 오해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로 인해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많이 미안하고 부끄럽다.

 

겸손히 기도하며 매일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살고 있다.

 

◑4. 교파가 나눠지지 않도록 힘쓰다.

 

아마존에 들어갔을 때 이미 아마존 검은 강 유역에 복음을 전했던 한 미국 여자 선교사와

새부족 선교회(NTM, Missao Novas tribos)에 의해 인디오 부족 교회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브라질인 교회들이 인디오 부족 교회들을 찾아가서 인디오 부족 교회들과 사역을 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나눠주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부족 교회들이 브라질인 교파들에 속한 교회로 바꾸는 중이었다.

 

동일한 부족으로써 그동안 같은 예식과 전통을 갖고 있었는데 교파가 갈라지면서

원주민 교회들이 교리와 교회 정책의 차이로 말미암아 심한 반목을 거듭하는 것을 보았다.

 

초기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고 난 후, 감리교회 선교사들이 교단을 나누지 말고 민족교회로 만들자고 제안하여

장로교회 선교사들도 동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이것을 발견하고 압력을 가해

결국 교파들이 나눠지도록 했다는 한국교회사를 기억한다.

 

선교지에서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무척 안타까웠다.

선교지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구원해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부끄럼이 없이 현지 교회들을 섬기고

연합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래서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과 현지 교회 지도자들에게 교파가 나눠지지 않고

계속 단일 부족 교회로 존재하도록 단일부족교회 연합을 설립하자고 설득을 계속했다.

 

단일 부족임에도 교파가 나눠져서 단지 교리 때문에 불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들의 분란을 보면서 실망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날 것이다.

그러니 단일 교회가 단일 부족 교회로 존재할 때에 가장 바람직하게 성장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논지를 폈다.

 

이렇게 설득하는 데 여러 해가 걸렸다.

드디어 2001년 7월 5일 브라질 정부 인디오 청(FUNAI) 대표, 현지선교회들 대표,

인디오 부족교회 대표들 100여 명이 모여 '아마존 검은 강 상류 신학교'에서

<단일 부족 교회> 정관을 통과시키고

<단일 부족 교회 총회> (Covencao Igreja Biblica Unida Indigena Alto Rio)를 결성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며 함께 참여하여 준 선교사들, 현지 교회 지도자들에게 감사드린다.

 

1997년에 개교한 아마존 검은 강 상류 신학교는 우리의 가장 주된 사역이다.

소명감이 있는 인디오 청년들을 초대하여 4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하는

아마존 검은 강 신학교는 초교파 신학교이다.

 

우리 신학교는 인디오 단일 부족 교회 총회와 파트너로 사역하며

신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은 인디오 단일 부족 교회 총회의 심의를 거쳐 목사안수를 받고

파송을 받아 사역한다.

 

1996년부터 시작한 의료사역도 초교파 사역으로 진행한다.

의료혜택이 미치기 어려운 인디오 마을들을 찾아가

우리가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장로교 간판을 걸고 싶다고 할 때 거절했다.

 

주님께서 우리를 넓고 넓은 아마존에 선교사로 보내실 때 장로교를 확장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말씀을 전하라고 보내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개척한 교회들은 모두 도시에 있어서 나도 우리 교회들도 브라질 장로교회에 속해 있다.

 

그동안 우리가 아마존 현지에서 절대 필요하다고 믿고 시행한 선교방법들을 신뢰하고

도움을 준 교파를 초월하여 함께 동역한 교회들과 성도님들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우리가 행한 사역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여러 교회들과 성도님들의 기도와 도움에 의한 것이다.

 

사역을 시작할 때,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한 현지 상황과 내가 가진 자원,

동역자들의 도움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오랜 시간 기도와 연구를 거듭하고 사역을 시작하고 진행했다.

 

철저한 검증과 기도 끝에 내린 결론으로 시작한 사역들은 가장 교과서적이고 필

요한 사역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 내 한계와 악함과 교만이 어우러져 있음을 몰랐다.

은밀한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내 자랑과 내 의가 얼마나 큰지 무지했다.

 

왜냐하면 나와 주님과의 관계보다 사역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매진했기 때문이다.

내가 행한 사역들로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주님을 대적한 죄인으로 남았다.

 

◑5. 아마존 부흥에 불씨로 써주소서

 

1999년부터 우리는 선교지에서 심한 영적 메마름을 느꼈다.

이 영적 갈증은 아마존 이 지역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주님, 이 땅에 부흥을 주시든지 아니면 저희를 데려가십시요.

저희를 부흥의 불씨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새벽마다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었다. 목이 상하고 또 상해도 계속 기도했다.

그러나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계속 채워 주셨다.

얼마 후에는 이 지역에 부흥이 아니라 "내 심령에 부흥을 주십시요"라고 기도하였고

주님은 우리 내외를 회개로 인도하셨다. 주님은 이미 그때 우리 심령 속에 부흥을 주셨다.

단지 이 부흥의 불길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만큼 크지 않았다.

 

언제나 부흥이 올 것인가? 한달이 지나고,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면서 초조해졌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의 믿음과 기다림을 준비시키셨다.

 

부흥은 회개운동을 통해 찾아왔다. 우리 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에스더라는 자매가

허운석 선교사와 함께 기도를 하다가 성령체험을 했다. 자매는 숨겨 왔던 죄를 고백했다.

어둠의 왕인 사탄의 포획권이 주님의 빛 아래서 분노하며 보복하고 위협했다.

 

그러나 성령께서 곧 그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셨다. 오히려 자매의 자백을 통하여

모든 자매들이 죄악을 낱낱이 고백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신학교의 남학생들의 죄들이 밝혀졌고, 그들은 꼼짝 없이 회개할 수밖에 없었다.

 

회개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신학생들은 신학교 공식일정이 끝나는 매일 저녁 열시반부터

채플실에서 기도회를 가졌다.

낮에는 시간이 나기만 하면 자발적으로 주님을 만날 자리를 찾기 위해 정글로 들어갔다.

남학생들은 오른쪽으로 여학생들은 반대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들은 정글 속에서 목소리를 다해 죄를 토했다. 부르짖는 기도 소리가 온 정글에 메아리 치며 울려 퍼졌다.

정글에서 학생들의 기도 소리에 모든 동물들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매일 저녁에 가지는 기도회에서 그들은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했다.

정글에서 얼마나 회개기도를 많이 했던지 눈은 충혈되고 목은 쉬었으나

그들의 얼굴은 어린 양처럼 순결했다.

 

이런 회개운동 후에 주님은 당시 신학교에 재학중이던 신학교 가족 60명 전원에게 성령체험을 주셨다.

회개운동이 계속되는 중에 우리는 성가브리에우 시내에 있는

우리 교회 교인들을 신학교 금요일 철야예배에 초대했다.

지금껏 신학생들이 경험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교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렵고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교인들은 신학생 60명이 쏟아 내는 기도와 찬양을 보며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뒤로 넘어지는 등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다.

그러고는 성령을 체험하고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죄악을 통회하며 공개적으로 자백하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친히 일으키시는 회개운동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불신자들이 금요일 철야예배를 구경하러 왔다.

나는 이들 불신자들을 신학교 교실 한쪽에 모아 놓고 에반지 큐브(Evange Cube)로 복음을 전한 뒤

주님을 영접하게 했다. 놀랍게도 그들 역시 그날 저녁 성령을 체험하고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했다.

 

성령님이 일으키신 회개운동은 2009년 9월부터 12월까지 불타 올랐다.

이렇게 강력한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난 후, 우리가 이 도시에 거주한 15년 동안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망고 나무들과 다른 열매들이 풍성하게 열렸다.

 

역대하 7장 13절 14절의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도 주님은 부흥을 꿈꾸며 회개하는 성도를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통하여 황폐한 우리 심령과 땅을 바꾸어 주신다고 믿는다.

 

◑6. 누가 내 은인인가?

 

사역을 시작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난 후는 비교적 평안하였다.

그러나 인디오 청년들을 목사와 선교사로 양성하는 신학교를 개교한 다음부터 시련과 박해가 줄을 이었다.

 

신학교 부지를 구입하면서 자동으로 넘겨받은 소가 20마리 있었는데

1년새에 뱀에 물려서 죽고 허리를 다쳐서 죽는 등 네 마리나 죽었다.

 

대형 버스가 우리 픽업트 럭을 들이받는 사고가 났고,

인디오 마을을 향하던 모터 보트가 정글에 처박히는 사고도 났다.

 

우리 아이들이 선교사 자녀 학교 진학에 실패했고, 동료 브라질인 선교사의 젊은 아들이 죽었다.

더구나 아들을 잃은 이 선교사가 다른 브라질인 선교사와 갈등하다 우리 신학교를 나갔다.

 

그 후로 그는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브라질의 인디오 마을들에 게

나와 우리 교회와 신학교를 비방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내가 예배당에 십자가를 걸고 성탄절에 촛불을 장식한 것을 두고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인디오 형제들에게 나를 반대하고 거절하라고 종용했다.

인디오 형제들이 그 선교사의 선동으로 나를 이단, 무당, 적그리스도, 천주교 신부라는 이름을 붙여서

반대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인디오 부족의 연합을 깨는 동료 선교사의 악의적인 행동에 분노했다.

공개적으로 그를 모함하고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증오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 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 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 라”(마 5:43-44)

고 하셨으나 말씀을 따라 절대 순종하기가 너무 힘들 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게 방법 하나를 가르쳐 주셨다.

 

박해가 시작되면서부터 내가 그를 미워하였고 복수하고 싶었던 악을

사건별로 보여 주시며 회개하라고 하셨다.

그가 거짓말과 갖은 방법들로 나를 괴롭힐 때부터 내가 품었던 미움을 모두 토하고 회개 했다.

“주님 내가 더 악합니다”. 라고 고백하였다. 용서하고 축복했다. 그리고 나는 회복되었다.

 

그 후로도 핍박 이 계속되었지만 담담히 받아 낼 수 있었고, 그 악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후에 주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시기를 그는 내 교만 을 다스리려고 보낸 주님의 도구였다고 말씀하셨다.

 

한번은 모터보트로 삼일 걸리는 약 900킬로나 떨어진 인디오 마을에 의료팀과 함께 사역을 하러 갔다.

하루 14시간을 달리는 모터 보트로 삼일을 간다는 것은 무척 힘든여행이다.

그 마을로 출발하기 전에 미리 언제 도착하여 의료사역을 하겠다고 통보하였다.

 

그런데 인디오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적 그리스도인 내가 온다고 하여,

나를 만나면 모두 살해 당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어서 다른 마을로 피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인디오 형제들이 나를 피하고 접촉을 거부하는 일들은 우리에게 큰 아픔이었다.

 

후에도 주님은 많은 고통을 허락하셨다. 중상모략과 투서들, 고소사건들, 배신과 이용당함,

계속되는 말라리아 감염과 독살시도가 있었다. 이렇듯 아마존에서 우리는 여러번 차가운 겨울을 맞았다.

 

이런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그동안 노력하고 헌신하여 쌓아 온 공든 탑이 무너져 내렸다.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와 인디오 형제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신학교와 교회, 가정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듣고 모욕을 받았다.

 

그때 우리는 발견하였다. 주님이 우리의 옷을 벗기시는구나,

나뭇잎을 모두 떨구어 가지만 앙상한 겨울나무로 만드시는구나.

고통스러웠지만 묵묵히 이 모든 고난을 받아들였다.

 

내가 주님을 사역으로 오해하고 우상으로 섬기는 것을 까발려서 보여 주셨으니

마땅히 모욕 받으며 회개하였다.

 

부족한 선교비로 인해 내가 얼마나 돈을 사랑하는지 밝혀 주셨다.

주님은 우리 인생에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 염려하는 것들이

세상을 사랑함으로 가지는 우상들임을 가르쳐 주셨다.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면 또 껍질이 나오듯이 계속해서

우리의 문제들을 계시하여 회개하게 하시고 그것들에 대하여 죽게 하셨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나를 주님께로 가장 가까이 데려다 주고

진실한 복을 받게 하여 준 일들과 사람들은 누구였나?

그것은 내가 기뻐하였던 좋은 일들과 나를 돕고 함께 하여준 동역자들이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나를 괴롭히고 모욕하고 배신한 그들이 은인이었다.

 

혹독한 고난이었다. 만일 주님의 허락하심중에 내게 고난과 십자가가 없었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도 썩어지지 않은 한알의 밀알로 남아 있으리라.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고난으로 우리를 단련하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린다.

 

“주님, 내가 가졌던, 내가 한 일이라는 모든 선함의 옷을 벗기 소서. 그리고 당신께로 가게 하소서.”

 

◑7. 아마존 하늘에 별이 된 사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소를 잃어버리고 고칠 일 없는 외양간을 응시하며 회한에 잠긴다.

 

23세에 회심한 아내 허운석 선교사는

하나님과 인디오 형제들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한 여인으로 불꽃같이 타올라

끝까지 신실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새벽기도에 게으른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무모한 여인만은 아니었다.

 

한국 농촌에 단독목회를 하러 간 것도 아마존에 선교사로 온 것도 내가 원해서였고 허 선교사는 동행했다.

그러나 어디서든 나보다 형제들을 더 사랑하고 섬기며 형제들의 가슴에 영적인 어머니로 남았다.

세상 어디에서든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환경을 바꾸며 복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창조적인 여인이었다.

 

농촌에 갔을 때는 묵은 때로 얼룩진 예배당 바닥을 사포로 밀어 새 바닥을 만들고 커텐을 갈고,

페인트를 칠해 새 예배당으로 만들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불우한 아이의 호적을 정정하고 집에 데려다가 키우며 학교에 다니게 했다.

 

아마존에서는 벌레 알러지가 아주 심하여 너무 많이 물려서 팔 다리가 소나무 껍질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46세에 기타와 키보드를 독학으로 배워서 신학교 학생들에게 기타와 키보드를 가르쳤다.

한번도 악보를 본 적이 없는 인디오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가대를 조직하여 4부로 연습을 시키고

매년 칸타타를 공연하고 지휘를 했다.

 

2006년 3개월 안식년을 마치고 11월 초에 돌아오려는 때에 후원교회에서 건강검진을 하라고 해

건강검진 받았는데, 허운석 선교사는 폐암(2기)이 발견됐다.

아내 허 선교사가 폐암진단을 받자 나는 크게 절망했다.

 

그러나 허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동안 주님을 사랑하려고 몸부림친 보상으로 주님이 내게 폐암을 주셨다."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는 "폐암 2기로 50%는 5년 내에 사망하고 50%는 5년 후에도 생존이 가능하다"며

"아마존에 돌아가지 말고 한국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허 선교사는 자기 목숨보다 인디오 형제들을 더 사랑했기에 6개월 후 아마존으로 돌아왔다.

 

2010년 암이 다시 재발되고 말기암으로 통증이 극심했다.

그런 와중에 교회로부터 설교초대를 받으면 흉관을 삽입한 채 수십 알의 모르핀 진통제를 복용하면서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했다. 이미 본인이 죽음을 예상했기에 설교는 유언처럼 쏟아놓은 절규에 가까웠다.

 

허 선교사는 본인이 주님을 영접하고 아마존에서 삶으로 살아낸 복음을 증거했다.

십자가의 복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선포했다. 한 시간 설교를 마치면 화장실에 가서 헛구토를 수없이 했고,

자동차 뒷편에 누워서 숙소로 돌아갔다.

 

이렇게 전해진 16개의 설교가 유튜브에 올라왔다. 허 선교사가 주님께 돌아간지 2년 후,

두란노서원에서 이 설교들을 책으로 출판하자고 제안해

'내가 왕 바리새인입니다'와 '그리스도만 남을 때까지'라는 유고 설교집이 세상에 나왔다.

 

33년을 가장 가까이에서 허 선교사를 지켜 보았다.

폐암 치료를 받으며 주님과 완전한 연합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세상 그 무엇도 초월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 안에 임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허 선교사는 사도 바울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곧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소원이었다. 그러나 남겨질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에게

본인의 사랑하는 모습을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치료를 받는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고 주님께로 떠났다.

 

주님께로 돌아가는 날, 허 선교사는 평생 사랑했던 형제들이 있는 아마존에 묻어줄 것을 부탁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마지막일 것이라고 느꼈는지, 내게 함박웃음을 웃어보이고 혼수상태로 들어갔다.

한 모금의 남은 숨 마저도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다간 것이다.

 

나는 허 선교사의 유언을 따라 아마존에서 한 줌의 재를 매장했다.

허 선교사의 유언은 우리 도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도전이 되었다.

 

도시의 시의회에서 허 선교사의 공적을 인정하여 교회 앞 큰 대로를 '허운석선교사로'라고

이름을 변경해줬다.

 

허 선교사가 주님께로 돌아간지 (2013) 6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노라면 허 선교사의 사진이 그들 가족 사진 옆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허 선교사는 아마존 사람들의 가슴과 하늘에 크고 아름다운 별이 되었다.

 

◑8. 거기엔 주님이 계시지 않았다.

 

'종교적 야망'이었다. 사람들에게 칭찬 받자는 욕심은 아니었다. 명예욕도 아니었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종교적 야망에 눈이 멀었다.

그래서 생명의 주님을 버리고, 내 거룩한 야망을 따랐다.

 

그것이 야망이었음을 알아차린 것은 아내 허 선교사가 곁을 떠난 뒤였다.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아마존 인디오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시대의 사기꾼이었다. 위선자 중의 위선자였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속아서 수 십년을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나는  58세에 아내 없는 홀아비가 되었다.

 

약 4시간에 걸친 암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옮겨지는 아내의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마치 숨이 멎은 것 같은 얼굴, 환자 복에 묻어 있는 붉은 피, 그때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렵다.

 

아내는 밤이 되어서야 회복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한밤 중, 통곡 소리와 함께 보호자 대기실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날 밤은 너무나 두렵고 소름끼치게 외로웠다.

 

아내가 일반 병실로 옮긴 뒤 담당 의사가 와서 결과를 알려줬다. 선암이라고 부르는 폐암이었다.

아내는 2기 A단계인데, 임파선 한곳에 전이가 되었다면서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열흘 후에 돌아가야 했다. 아마존신학교 학기가 끝나는 동시에 외부강사를 모시고

인디오 마을지도자 교육이 10일간 있는데다 졸업식도 있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아내를 이모님 댁으로 옮겨 놓고 길을 나섰다.

떠나는 날, 화사한 꽃바구니를 주문해서 허 선교사 방에 놓아 주었다.

 

아파트 앞에서 작별인사를 하는데 허 선교사가 함께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울었다.

따라 울 것만 같아 황급히 돌아서서 공항으로 갔다.

 

그때 내가 어떤 기도를 했던가? '선하신 주님, 당신의 여종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인가? 얼마나 신앙적인 기도인가?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기도는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허 선교사의 경우 50% 는 살고, 50%는 죽을 수 있는 확률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가 반드시 살 것이라고 믿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 여인인가? 본인의 목숨보다 인디오 형제들을 더 사랑한 여인이 아닌가!

폭포를 몇 개나 넘고 험난한 길을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아마존의 용감한 군사이지 않은가!

 

내가 해야 할 기도는 회개기도였다.내 마음을 찢고 그동안 내가 붙들고 살던 내 자랑과 자기 의,

종교적 야망을 버렸어야 했다. 가증스럽게도 주님께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고통을 내 의를 드러내는 데 이용하는, 거룩함을 흉내내는 악한 자였다.

주님은 내가 얼마나 가증스러웠을까!

 

사역에 목숨을 걸다 보니 나는 언제나 긴장했다.

일의 효율성을 위해 늘 머릿속으로 사역을 구상했다. 좀 더 완벽하게 잘 하고 싶어서

24시간 사역만 생각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사역만 생각했다. 쉼도 평안도 전혀 없었다.

허 선교사는 내게 일중독에 걸렸다고 말하곤 했다.

 

'언젠가 내가 아마존을 떠나게 될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일까? 처음에는 아마존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해서였지만 집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늘 완벽주의자로 살았다.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비록 내가 손해 보더라도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더 중요했고, 주님은 다음이었다. 사람 눈치를 많이 봤다.

(그렇게 하다보니 아내를 잘 돌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떠난 뒤에야 알았습니다)

허 선교사는 암 수술을 받고 "이제 좀 쉬고 싶으니 사역을 좀 줄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때 허 선교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가슴 속에 깊은 회한으로 남아 두고 두고 통곡하게 한다.

사역을 줄이기는 커녕 오히려 산타이사베우와 바르세우에 교회를 개척했다.

 

굳이 변명을 한다면 '선교사역은 교회가 자동적으로 성장하듯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개척을 해 나가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숨은 진실은 무엇인가? 내가 오랫동안 기도하고 연구한 뒤 시작한 사역인만큼,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었다. 나의 확신을 하나님의 확신으로 밀어부친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아파서 다 죽어갈 때도, 나는 열심히 사역에만 메달린 것입니다)

 

이제 지금 과거의 그때를 되돌아보니, 나는 주님께로 가지 않았다. 그분이 내게 원하신 일, 가장 중요한 일,

즉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역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게 절반은 야망이었습니다)

 

저는 아마존에서 전도하면서, 한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 변화되는 것을 보는 기쁨이

마약을 하고 얻는 기쁨과 같을까 하고 상상할 만큼 그 감격을 좇았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행복했고 기뻤다.

하지만 거기엔 주님이 계시지 않았다!

 

◑9. 이땅과 영원으로 이어진 복

 

'청춘과 아내를 아마존에 묻고 아마존에서 30년 선교한 결과가 암이냐?'

사람들이 제게 던지는 이 질문을, 나를 부러워하는 질문으로 해석하고 싶다.

'어떻게 너는 복을 그렇게 많이 받았느냐'라는 질문으로 이해한다.

 

한번도 선교사가 되려고 생각도 해보지 않았는데 나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만 34세에 선교사로 아마존에 왔다.   *1991~

 

힘든 아마존의 환경보다 더 힘겨운 핍박과 비난과 모욕을 받으며 수십년을 살았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상실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내를 잃었다.

 

나도 거듭 말라리아와 댕기열에 노출되며 고혈압, 당뇨, 방광염, 사시, 복시현상, 녹내장,

갑상선 암이 발병하여 두번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았다. 그야말로 나는 여러 질병을 많이 가진 병 부자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선교사 사도 바울은 25년 선교사역을 했다. 사역 말기에 늙고 병들었다.

함께 했던 친구들마저 그의 곁을 떠난 상태에서 감옥에 죄수로 갇혀 있다가 로마 감옥에서 순교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그가 가진 유익한 것들을 모두 해로 여겼다(빌 3:7).

 

그리고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다가 마침내는 목숨까지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존경한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가? 그분은 인류역사상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 분이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그 주님은 33세의 나이에 십자가에서 강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 주님의 모든 제자들도 제 명대로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보내심을 받은 땅에 가서 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성경에서 주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과 모욕과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에는 수치스런 죽음을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기쁨으로 주님께 자신을 드리고 세상이 주는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의 삶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삶의 증거로 로마인구 10분의 1을 회심시켰다.

 

나는 수십년 동안 종교적 야망에 눈이 어두워, 주님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선교 사역으로 오해하고

주님을 대적했다.

그렇게 왕 바리새인으로 살고, 주님께 일과 성과로 인정받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장 23~24절 말씀이

복음의 찬란한 빛으로 이해되어지고 그런 과정 또한 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4:22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구원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자아의 죽음은 매일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제자로서의 삶을 동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고 일하는 장소가 보냄을 받은 선교지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같은 거리에도 가겠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께만 드리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기쁘게 지겠습니다'라고 찬송을 부른다. 이 찬송이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라면 우리가 복음 전도자로서 세상 것들을 많이 잃어 버릴 수록 감사한 것이다. 어느 순교자가 고백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유한한 것을 잃어버림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질병을 갖고 아마존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고난의 열매로 주님께서는 내게 무었을 주셨는가?

세상의 어떤 가치로도 환산할 수 없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란 선물을 허락하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말씀과 아울러 또한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는 고백(딤전 1:15)이

내 삶에서 실재가 되는 주님과의 연합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잃어버린 여러가지 것들보다 차원이 다른

이 땅과 영원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복을 하나님께 받았다. SOLI DEO GLORIA!

 

 

10. 홀로 밤길을 걸으며

 

작열하던 적도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고 밤이 되면 서늘해진다.

예배가 있는 날은 교회 예배를 마치고 회의를 주재하고, 신학교에 돌아오면 거의 11시가 된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작은 랜턴 하나를 들고 선교관을 나서서 밤길을 홀로 걷는다.

 

온갖 풀벌레들의 노래가 자연 교향악 자체다. 정글 어느 곳에 피어 있을 꽃내음이 코끝에 스며든다.

어제 깍아놓은 잔디가 마르며 발산하는 잔디향이 향기롭다.

 

중간에 간간이 서 있는 가로등 불빛에 건물들이 보인다. 건물 하나 하나를 지나면서 건물의 역사를 떠올린다.

우리 부부는 건물이 필요할 때마다 주님께 두 손을 들고 금식하고 철야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얼마 후 모 교회가 교회 생일 잔치를 하지 않고 그 비용을 건축에 써달라며 보내주기도 했다.

 

이렇듯 여러 사연들로 여러 선교동역자들의 헌신으로 크고 작은 여러 동의 건물이 건축되었고

신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너는 이 땅에서 무었을 하고 왔느냐"라고 주님께서 천국에서 질문하시면

"저는 김철기, 허운석 선교사를 아마존에 파송했습니다"라고 대답하겠다는

신촌교회 오창학 원로 목사님을 비롯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아마존에 직접 오셔서 더위와 독충에 몸이 상하고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눠주신 동역자들도 있다.

비록 아마존에 오지는 못했으나 같은 마음으로 눈물의 중보기도와 선물과 헌금으로 필요를 채워주던

성도들의 헌신이 큰 힘이 됐다.

 

선교사 장녀로 태어나 이미 선교사로 봉사를 많이 한 딸(수산나)과

곧 선교사로 아마존에 와서 사역을 하게 될 내 아들(지훈)과 가족에게도 감사하다.

 

대체불가능한 존재, 고 허운석 선교사의 빈자리가 있음에도

한결같은 신뢰와 사랑으로 함께 해준 신학교 가족들과 우리 교회 성도들, 인디오 마을 형제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지금까지 우리를 돕고 협력한 선교동역자들에게 어떤 언어로 감사를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다만 주님께서 만 배나 복을 더하여 주시고,

혹시 우리가 상을 받는다면 모두 선교 동역자들에게 돌리고 싶을 뿐이다.

 

허운석 선교사가 20일 금식기도를 하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신학교 채플을 지나가 본다.

십 수년간 1년에 두 번, 일주일씩 인디오 부족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뒹굴며,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었던 추억을 떠올린다.

 

인디오 형제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 어머니가 여기 묻혔고 아버지가 평생을 여기 살고 있다.

그러니 너희들도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한다." 얼마나 황당한 논리인가?

 

랜 세월 가족으로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형제들의 논리를 들으며

아마존의 자연만큼이나 아름다운 형제들의 사랑에 감격한다.

 

저녁이라도 신학교 곳곳에 여러 색깔의 꽃들이 희미하게 자태를 드러낸다.

우리 내외가 꽃을 좋아해 신학교 내에 꽃을 많이 심었다.

꽃을 심으면 대개는 더위와 습도 때문에 잘 피지 못했다.

그러나 꽃을 심을 때 기뻐했던 것처럼 사역지에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 행복하고 기뻤다.

 

지난 29년간(1991~2019)의 사역 동안 어떤 형제들은

우리의 사랑을 받고 꽃을 많이 피우고 열매를 풍성하게 맺었다.

그러나 더러는 우리를 이용하고 배신하고 고통을 주고 떠났다.

 

머지 않아 정년이 되어 은퇴하고 젊은 선교사에게 사역을 물려줄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 돌아갈 것이다.

선교지를 떠날 때, 주님께 돌아갈 때, 나는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꽃을 심을 때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가 사랑할 때 기쁨을 준 그 기억, 그 행복한 추억만 갖고 가려고 한다.

오늘도 나는 기쁘게 꽃을 심는다.(즉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한참을 걸으면 꽃들로 둘러싸인 허 선교사가 쉬고 있는 정원에 도착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따라 선교사들이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보냄을 받은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허 선교사도 다른 선교사들처럼

이 땅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나도 이곳에 묻히기를 바란다.

 

홀로 밤길을 걷는 시간은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어떤 때는 낮에 있었던 일들로 인해 울부짖는다.

눈물로 회개하기도 한다. 누가 오던 간에 선교사 부부가 함께 이 길을 걸어가면 좋을 것이다.

 

낮에 있었던 일들을 대화를 통해 풀어 버리고 곧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풀어 낼 대상이 없음이 오히려 감사하다.

 

왜냐하면 나는 오직 주님께 마음을 토해내고 깊이 교제하며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나는 독신 선배인 사도 바울의 독신 예찬을 공감한다.

선교관에 다시 돌아 올 때면 오늘 하루도 주님의 선물이었음을 감사하며 또 내일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