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P6

LNCK 2020. 7. 4. 19:43

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 Part 6. 학교 폐교 - YouTube

◈인돈의 생애와 기독교 정신 P6              ☞시리즈 보기
  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


◑일제 강점기 한국기독교의 진통 

신사참배에 저항하며 신흥학교를 자진 폐교한 후, 
교육선교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며 인돈이 한 말; 

"나는 한국선교회가 기독교적 교육이 무엇인지 증명하도록 허락받은 
지난 40년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이 이 분야에서 미래의 사업을 이루어 갈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

인돈의 두 번째 안식년은 1928년 7월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첫 번째 안식년과 마찬가지로, 선교회의 특별한 허락을 얻어 2년의 안식년을 받았다. 
인돈의 두 번째 안식년은, 아내와 네 아이와 함께하는 인돈 가족의 첫 안식년이었다. 
미국으로 가는 이 여정에는, 아내 인사례의 남동생인 윌리엄 벨도 동행했다. 

전주를 출발하여 일본에서 증기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안식년의 여정은 
그들에게는 추억으로 가득한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특히 미국으로 가는 길에 잠시 하와이 호놀룰루에 들러 
당일치기로 관광을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애틀랜타에 도착하여 캘리 이모님과 지인들을 만났고, 그곳에서 며칠을 보낸 후 
병원 진료를 받았다. 인돈의 친구가 빌려준 최신형 포드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인돈의 가족과 친지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안식년 동안 인돈의 가족은, 인돈의 고향 토머스빌 GA 에서 머물기로 했다. 
캘리 이모님은 임차를 준 주택의 세입자를 내보내고, 
자신의 가구와 빌려온 가구들로 집을 완벽하게 꾸며놓고 
인돈가족이 들어와 살 수 있게 준비를 다 해놓았다. 

인돈의 첫 번째 안식년이, 교육선교사로서 교육학전공을 통해 
교육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한 연구년이었다면  *뉴욕 컬럼비아대 교육학 석사 

두 번째 안식년은 목회자로서 훈련받고 안수받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연구년이었다. 
인돈의 오랜 친구인 고성모 목사는, 인돈이 자신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학교 선생으로 남기보다는,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에 목사가 되어 
한국에 들어오겠다는 결심을 밝혔다'고 한다. 

그도 인돈에게 '신학을 하기에는 아직 늙지 않았고, 목사로서 선교하는 것이 좋겠다'고 
격려했다고 한다. 

인돈은 미국에서 2년을 머무르며 조지아 애틀랜타 인근의 디케이터에 위치한 
컬럼비아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1930년에 졸업했다. 

그가 2년 안에, 3~4년 과정의 신학수업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 안식년기간에 2년 동안 틈틈이 뉴욕의 성서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한 컬럼비아 신학교에서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서, 공부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인돈은 신학교에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했고 
젊은 신학생들을 따라잡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여름방학에도 추가 학점을 이수하기 위해 학교에 남아 공부했다. *썸머 스쿨
그는 공부에 집중하느라 6주에 한번 꼴로 가족을 만나러 왔고 
여름 계절학기에도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 한두 번 다녀간 것 외에는, 
신학교에만 머물러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책임은 오롯이 인사례 몫이었고, 
네 어린 자녀들을 돌보느라 고생한 아내의 헌신이 있었기에 
인돈은 짧은 시간 안에 계획했던 신학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인돈을 끔찍이 아꼈던 캘리 이모님도, 고향에서 인돈과 충분할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인돈이 가족과 떨어져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적잖게 실망했다. 

그러나 '목회의 부르심을 받아 신학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는 인돈의 계획 앞에서 
그 뜻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오랜만에 만난 이모님을 뒤로하고 공부에 매진해야 했던 인돈은, 
그들을 향한 미안한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인돈은 한국으로 복귀하면서, 1930년 5월에 고향 토머스빌 교회에서 
메이콘노회 소속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교육선교사였던 인돈은, 이미 선교회에서 전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 활동을 하면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신학공부와 목사안수는 꼭 필요했다. 

또한 '교육선교의 목적과 본질은 복음전도'라고 믿고 있었던 그에게 
교육선교를 잘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목사 안수는 필수였다. 

그는 목회의 소명에 대한 강한 확신과 의지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복음전도에 모든 시간을 바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2년간 안식년을 마치고, 1930년 7월에 한국에 복귀하자마자 
인돈과 인사례는 곧바로 선교부 연례회의가 열리고 있는 지리산 선교사 캠프로 향했다. 
인돈이 한국으로 복귀를 준비하고 있던 5월에 
전주 신흥학교 교장 여부솔 선교사의 후임으로 교장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가 선교지에 복귀했을 때, 여부솔 선교사는 자녀문제로 선교사를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인돈이 그의 후임으로 신흥학교 교장이 되었다.   *오늘날 전주신흥고등학교

그리고 인돈가정은, 여부솔 선교사가 떠난 신흥학교 교장 사택으로 이사하여 
1940년에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인돈은 220명 이상의 고등과정 학생과, 
240명 이상의 초등과정 학생이 있는 신흥학교 교장의 직무 외에도, 
7개의 시골 교회를 돌보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교장 업무와 시골교회 목회의 책임을 동시에 맡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에게 시골 순회 목회는, 목사로서의 첫 사역이었고, 
인돈은 오히려 그것을 매우 감격스럽게 생각했다. 

인사례는 "신흥학교 교장으로서 보낸 8년의 시간이 
두 부부가 함께한 가장 긴 사역의 여정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신흥학교 교장으로서 인돈은, 일제의 식민교육제도와 미션 스쿨이 직면한 불리한 여건 속에서 
일제의 공립학교에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유지하면서도 
미션스쿨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총독부로부터 지정학교 인가를 받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인돈은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선교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남장로교 선교회가 지향하는 교육의 목적과 원칙에 대한 신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인돈은 "교회의 지도자는 반드시 기독교 학교에서 길러져야 한다"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에 있는 미션스쿨의 목표는, 교회 지도자를 길러내는 것이며 
이 목적의 실현을 방해하는 그 무엇도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미션스쿨 교사 중에, 진실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되며, 
기독교인이 아닌 학생들이 입학할 수는 있더라도, 
학교의 설립목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미션스쿨에 다녀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인돈은 미션스쿨의 원리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교사는, 그 자신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사진에서 빠져야 합니다. 

학생들 가운데 20% 이상이 비기독교인 가정 출신이라면 다루기가 힘들고, 
지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비록 비기독교인 가정의 자녀들을 더 많이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우리 학교의 목적을 모든 학생에게 분명히 인지시키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은, 우리 학교에 다니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 선교부의 방법은 '비기독교인에게는 전도하고, 기독교인에게는 교육하는' 것입니다"

▲인돈은, 기독교 학교에서 직업교육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면서도 
기독교 학교에서 배출되어야 할 기독교지도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는 신흥학교에서 시행하는 직업교육의 목적을 3가지로 들었다. 

첫 번째는, 가난한 기독교 가정 출신의 유능한 학생들이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근로의 기회를 통해,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함으로써 
목사와 조사와 교사와 의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인돈은, 미션스쿨이 배출한 가장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대개 학비를 댈 수 없을만큼 가난한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능한 학생들이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대전대학을 설립한 후 마련한 근로장학생 제도로 이어졌다. 

두 번째는, 일부 학생들에게 직업훈련을 하여 
그것으로 졸업 후 생계를 이어가게 하는 것이었다. 

인돈은, 어떤 학생들은 신학교육이나 전문 교육, 또는 의학 공부 등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목공이나 정비, 놋쇠공이나 재단 일을 배워서,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세 번째는, 모든 학생에게 기술교육을 받게 해서 
학생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든지 
연장의 사용 방법과 재료의 가치와, 일상의 노고의 가치와, 
현대인의 삶에 유용한 것들을 배우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직업교육은 결국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곧 목사든, 의사든, 교사든, 농부든,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삶의 자리에 합당하도록 학생들을 길러내는 것이었다. 

직업교육이 더욱 필요한 이유는, 
한국이 이제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고, 
산업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빈곤과 고통을 겪기 쉬운 사람들이, 

현대사회에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실용적 기술을 연마하여 
가난의 허덕이는 가족을 돌보고, 빈궁한 교회를 책임지며, 
고통받는 이웃을 섬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열악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 기독교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을 
기독교 지도자로 길러내서 
교회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 인돈의 비전이었다. 

인돈은, 한국에서 미션스쿨만이, 가난한 학생에게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유능한 사람으로 키우는 유일한 교육기간이라고 확신했다. 

▲인돈이, 신흥학교를 지정학교로 인가받기 위해 노력하면서 부딪힌 가장 큰 어려움은 
선교부의의 예산 부족이었다. 

인사례는 1931년 2월 17일자 편지에서 '지정학교 인가'를 위해 애쓰는 인돈의 노력과 
학교의 상황에 대하여 기술했다. 

인사례에 따르면, 인돈은 지역의 교육당국 책임자와 만나 협의하며, 
지정학교인가 신청 작업을 진행했다. 

당국책임자는 기독교인이었고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돈과 인사례는 지정학교인가 취득의 전망이 밝다고 여겼다. 

학년을 증설하고 유능한 교사를 채용하면, 
인가에 필요한 외적인 조건들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어두운 그늘도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예산 문제였다. 

인사례는, 해외선교본부의 40% 예산삭감 소식을 전하면서 
"그렇게 된다면 고등학교를 운영할 수도 없으며, 
좋은 학교가 되기 위한 계획을 세울 수도 없다"고 염려했다. 

결국 "학생과, 명성과, 그동안 쌓아온 학교의 지위를 모두 잃어버리고 
지정인가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라" 우려했다. 

인사례는 "우리 교회가 오랫동안 지원해온 사업을 후퇴시킬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통해 그분의 일을 예비하실 것이라고 믿으며 
전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최근에 읽은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에 대하여 언급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했던 허드슨 테일러를 모델로 삼아 
우리도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인사례가 편지를 쓰고 있었던 당시는, 
1930년에 미국 대공황의 여파로,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 예산의 33%가 삭감되던 때였다. 
한국 선교부도 1931년에 전도, 교육, 의료, 선교예산의 20%를 각각 삭감하고, 
선교사들의 봉급에도 10%가 삭감되는 예산삭감의 시기였다. 

1930년과 1934년 사이, 남장로교 한국선교부의 예산을 비교해보면 
6만 달러에서 19,000달러로 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제 대공황과 예산 삭감의 어려운 시기에, 
지정학교인가를 추진하는 일은 재정적 악재를 뚫고 나가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인데, 
설상가상으로 예산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추진해야 했으므로 
인돈의 근심과 수고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인돈과 인사례는 불굴의 의지와 강한 믿음으로 현실의 어려움과 싸워나갔다.
이 시기에 인돈도 <Presbyterian Survey>의 1931년 10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신흥학교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일제의 교육제도 아래에서 미션스쿨의 어려움, 
-한국선교부가 지정학교 추진을 결정한 배경, 
-지정학교 인가추진 현황, 
-신흥학교 현황과 전망에 대하여 상세하게 정리했다. 

인돈의 설명에 따르면, 신흥학교는 1900년에 한문을 가르치던 학교가 
1904년에 하위렴 William Harrison 선교사에 의해 근대교육을 하는 학교로 새롭게 출발하여 
발전을 거듭해왔다고 설명했다. 

선교부는, 일제가 한국의 교육제도를 완전히 바꾸어서 
공립학교에 버금가는 수준을 요구하는 것에 
남장로교의 모든 미션스쿨이 맞추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남학교는 전주의 신흥학교를, 여학교는 광주의 수피아여학교를 
지정학교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다른 스테이션의 미션스쿨은, 초등 과정과 고등과정 2학년까지만 운영하고 
더 상급과정 진학을 위해, 그들의 학생들을 
전주 신흥학교, 광주 수피아 여학교로 보내기로 결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정학교 졸업장 받아서,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상황)

그는 선교부의 예산이 크게 삭감되어서, 1923년에 지정학교 인가를 추진하기로 결의했지만 
1931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당시 신흥학교는 8명의 교사와,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가 있었다. 
교사들은 훌륭한 기독교인들로서, 학교는 물론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 확장에 뜨거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믿는 보수적인 신앙인들이고, 세례교인이며, 
정부가 자격을 인정한 실력을 갖춘 교사들이었다. 

인돈은 학교에 그러한 교사들만 있으며, 
그러한 자격있는 교사를 확보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계속 확보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학생들은 250명 정도 있고, 많은 학생이 목회자와 장로의 자녀들이며
이 학생들이 학교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학교에 YMCA 활동이 활성화되어 있어, 
모든 학생이 회원이고,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으며, 
특히 주일 오후에 주일학교를 열거나, 여름 성경학교를 인도하는 등 
다양한 신앙활동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위에 글에서 인돈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을 또한 지적했다. 
먼저 젊은이들이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예전에 신봉하던 종교를 버리고, 
종교는 미신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과학과 근대 학문을 받아들임으로써, 종교를 미신적인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기독교의 위기인 동시에 기회라고 여겼다. 

기독교가 참된 종교로서, 기독교가 기반하고 있는 문헌들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오히려 젊은이들을 참된 종교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제 지배 아래에 있는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역시 독립운동이었다. 

인돈은 독립운동이 언제나 줄기차게 이어져오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한국인들은 옛 조선이 할 수 없었던 많은 일을, 일제가 해준다고 하더라도 
결코 착실한 일본 시민이 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인의 민족적 근성과 강력한 저항 의식을, 한국 청년들에게서 보았다. 

이와 더불어 인돈은, 한국의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한국인들과 특별히 젊은이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매우 수용적이며 
특히 인접한 러시아의 세력들이, 한국의 진로를 개척하며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러한 그의 분석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기독교 교육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 
-그리고 기독교가 젊은이들을 어떻게 품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고민의 흔적을 보여준다. 

악전 고투 속에서도, 인돈의 불굴의 의지와 선교회의 노력으로 
신흥학교는 조선총독부의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하여 
마침내 1933년 4월 지정학교인가를 취득했다. (그러나 얼마 후 1936년에 신사참배 반대로
학교는 자진 폐교하고, 선교사들은 결국 미국으로 추방당하는 일이 있었다.
애써 10년간 공을 들인 인가 취득이, 어쩌면 너무나 짧고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선교회는 1933년 4월 25일에 전주에서 개최된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인가 취득에 수고한 인돈과 교육위원회에 기립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이눌서, 강운림, 우월순, 인돈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전주 도청에 파송하여 
신흥학교의 지정학교인가를 도와준 당국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또한 서울로 파송하여 총독부 당국자에게 감사를 전하기로 결의했다. 

신흥학교와 함께 인가를 추진했던 광주의 수피아 여학교는 
학교 시설을 보완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총독부가 요구하는 기준대로 교사진을 구성하는데 문제가 생겨 
1936년까지 지정학교인가를 취득하지 못했다. 

신흥학교는 학교가 인가를 취득한 후, 1935년 3월에 첫 졸업생 28명을 배출했고, 
그 중 여러 명이 상급 학교에 진학했는데, 
인사례의 편지에 따르면, 두 명은 의대에 갔고, 목회자 후보생도 여러명 배출했다. 

노스캐롤라이나 그린스버러의 리처드슨 부인의 후원으로 
1935년 여름, 새로운 강당과 체육관 건물을 지었고, 
이로써 대규모 교실과 큰 모임장소가 확보됨으로써, 
신흥학교의 시설과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 

새로 지은 학교 강당은, 교회 연합 모임이나 선교회가 주관하는 
큰 규모의 사경회를 개최하는데 사용됨으로써, 지역의 교회 발전에도 큰 유익이 되었다. 
인사례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학교가 발전하여 
한국교회를 위한 지도자 양성의 사명을 지속해 나갈 수 있어서 감사했다. 

▲신흥학교가 지정학교인가를 취득한 것은, 선교회가 이룬 값진 성과였지만 
동시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신흥학교인가 취득의 협조한 일제당국에, 
선교부 차원의 감사를 전하는 위원회가 구성된 날, 
'일제가 미션스쿨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요구하는 문제'를 조사할 위원회도 구성되었다. 

기쁨과 염려,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인돈, 이눌서, 원가리, 유화례가 <신사참배 문제 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일제가 1931년 만주 사변을 벌인 이후, 
점차 기독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 강요의 압박 수위를 높이면서 
선교부는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다. 

인사례에 따르면, 1936년에는 상황이 악화되어서 
학생들에게 지역의 신사에 참배할 것을 더욱 강하게 요구했다. 

인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주 서울로 올라가 일제 당국자들과 협상을 했다. 
일제당국은 줄곧 '신사의식이 국민의례의 차원이며, 종교 행위가 아니라는 논리를 폈지만, 
선교부는 '명백하게 종교적 성격을 갖는 신사참배에 학생들을 참여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사실상 일제당국과 선교부는, 신사참배 문제에 입장이 확고했으므로, 서로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결국 외교적 해결을 추구하던 선교부의 노력이 실패하고, 협상이 최종적으로 결렬되었을 때, 

선교부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면서, 학교 폐쇄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33333333333 

남장로교가 1892년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이래,
전주를 시작으로 5개 스테이션에 
각각 남학교와 여학교의 미션스쿨을 설립했고, 
1933년 신흥학교 지정학교 인가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며 
한국교회 지도자를 길러왔던 교육선교를 
(하루 아침에) 중단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35년 11월 5~6일, 목포에서 열린 남장로교 선교부 임시위원회에 인돈이 출석하여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현황을 보고했다.

이어서 임시위원회는, 선교부의 여러 위원들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신사참배 강요에 대응할 미션스쿨의 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으로는 인돈, 김아각, 노라복, 유화례 선교사가 임명되었다. 

신사참배 문제 조사와, 이에 따른 학교 정책 수립을 위한 특별위원회에 
인돈과 유화례는 공통분모로 참여했다. 

이들은 선교회 중심 학교인 신흥(남)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의 교장으로서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핵심인사였기 때문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따른 선교회의 대책을 수립하는 책임도 맡아야 했다. 

또한 선교부는, 학교 폐쇄와 교육선교의 중단이라는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1936년 4월 22일에 열린 임시위원회에서 
미션스쿨 폐쇄 결정을 내리는 중요한 시점에서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 총무인 풀턴 박사를 한국에 초청하여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었음
선교부 연례회의에 참석시키기로 결의했다. 

▲당시 신사참배에 대한 재한 선교부의 입장은 조금씩 달랐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서울과 대구의 북장로교 교육선교사 일부와, 
캐나다 연합교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반대를 표명했다. 

감리교 선교회는 '한국교회가 결정할 문제'라는 다소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고, 
결과적으로 학교의 지속적인 운영을 위하여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선교부가 신사참배 문제에 가장 단호했고, 
특히 남장로교는 선교부 차원에서 결의문과 결정 사항을 채택하여 
일사불란하게 학교 폐쇄를 추진했다. 

마침내 남장로교는 1936년 11월 4~5일, 전주에서 열린 임시위원회에서 
신사참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교육선교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학교 폐쇄를 단행한다고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회의 참석자는 전주의 인돈과 부이열,
군산의 두애란과 부위렴, 
광주의 유화례와 남대리, 
목포의 김아열과 조하파, 
선교회 총무로서 당연직 위원인 유서백이었다. 

특이한 점은 전주경찰서가 보낸 5명의 일경 대표도 참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일제당국이 선교사들의 회의 내용을 감시하기 위한 차원이라기보다는, 
선교회가 일제를 자극하지 않고, 질서정연한 후퇴 
곧 준법투쟁의 모양세를 갖추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었다고 본다.

이 회의에서, 전주와 광주 스테이션이 제기한 
'신사참배와 관련한 미션스쿨의 문제' 안건을 심도있게 논의했고, 
마침내 임시위원회는 학교 폐쇄를 결정하고 결의문을 채택했다. 

"결의안
우리가 한국인들을 향상시키려고 힘써 온 노력에 
총독부 학무국이 보여준 호의와 인내어린 회담에 대하여 총독에게 감사를 표한다. 
우리는 이러한 우호적이며 유용한 관계가 지속되리라 믿는다. 

우리가 과거의 일반 교육의 장에서 진행한 사업을 지속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으로 인하여 
이 분야의 선교사업을 중단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여긴다. 

우리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결정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매우 유감스럽게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렇게 결의한다. 

-실행 권한을 가지고 모든 스테이션과 연락하여 이 정책을 실행할 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위원회는 다음의 사람들로 임명한다. 
  인돈(위원장), 노라복, 변요한, 김아각, 배요한, 유화례, 백미다 

-어떤 스테이션도 이 위원회의 재가 없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이와 함께 임시위원회는 풀턴박사에게 
늦어도 1937년 1월 말까지 한국에 들어와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해외 선교본부에 보냈다. 

교육선교중단을 한국선교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으니, 
본국의 해외선교본부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위의 결의안에서 보듯이, 인돈은 남장로교의 미션스쿨을 폐쇄하는 실행 권한을 지닌 
위원회의 위원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선교부 안에서 이 위원회의 재가 없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아 놓은, 
그야말로 전권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이어온 교육사업을 중단하고, 
정성껏 세우고 발전시킨 학교의 문을 닫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책무였다. 

남장로교의 중심학교인 신흥학교를 
지정학교로 인가받는 생산적인 과업의 책임을 완수한 인돈이 
이제는 그 학교를 포함하여, 
남장로교의 모든 미션 스쿨을 폐쇄하는 일에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었다. 

그가 받아야 할 비난과 미움은 얼마나 컸을 것이며, 
그가 감내해야 할 마음의 짐은 얼마나 무거웠을 것인가. 

▲지정학교 인가받음이 1933년 4월이었는데, 
선교부의 학교 폐쇄 결정이 1936년 11월이었다. 

1923년부터 선교회가 '지정학교 추진'을 결의하고 
10년 만에 각고의 노력 끝에 지정학교 인가를 받았는데 
(*수피아 여학교는 인가를 받자마자 자신 문을 닫게 됨)

이제 3년 만에 어렵게 발전시킨 학교를, 스스로 닫아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선교회의 결정은, 미션스쿨에 속한 교사들과 재학생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당연히 거센 반발과 혼란이 있었고, 학생들의 집단행동도 일어났다. 

유화례는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이 1936년 11월, 선교회의 폐교 결정 소식을 전해 듣고, 
일부 교사들의 선동으로 160여 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숙소로 몰려와 
유화례를 에워싸며 폐교 결정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고 말했다. 

유화례와 수피아의 교감이었던 김필례는 
선교회의 결정을 개인이나 개별학교가 번복할 수 없다고 학생들을 설득했지만, 
분노한 학생들은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밤12시까지 농성을 벌이면서 점거를 풀지 않았다. 

이와 같이 유화례 선교사는 분노한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교장 숙소에 감금 당하는 봉변을 당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장례가 걸린 중차대안 문제를, 결정한 선교사들이 
너무 무책임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학교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이 무너진 상황에서 
학교를 유지하는 것은, 그들의 신념과 가치를 훼손하는 심각한 타락이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한국선교부의 긴급한 요청에 따라,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의 풀턴 박사는 
1937년 2월에 내한하여, 총독부 당국자와 만나 최후 협상을 진행했고, 
학생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노력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1937년 2월 24일, 전주에서 풀턴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미션스쿨 폐쇄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기 위한 임시위원회가 열렸다. 

선교부에 참석자는 남대리(의장), 보이열, 부위렴, 두애란, 유화례, 김아열, 조하파, 
구례인, 원가리, 유서백, 위인사, 인돈이 있었다.

이 회의에, 신사참배 문제에 따른 학교 정책 수립을 위한 특별위원회도 초청되었다. 
또한 광주, 목포, 순천의 한국교회 미션스쿨 후원회 대표들도 초청하여 
그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오후에 속개된 임시위원회는, 해외선교본부의 훈령, 한국학교에 관한 정책을 전달받았고, 
임시위원회 회의록에 첨부하도록 지시받았다. 

이것은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가, 총무 풀턴의 출석으로 
선교부에 직접 전달한 행정명령이었다. 

신사참배가 강요되는 상황 속에서, 미션스쿨을 폐쇄하기로 한 한국 선교회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것을 본부 총무의 명의로 승인하는 내용이었다.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 총무 풀턴의 이름으로 작성된 총 13개 항의 
한국 학교에 관한 정책의 내용은 이러했다. 

「한국학교에 관한 정책 

한국에서 우리 학교들이 직면한 상황을 신중하게 검토한 후 
미국 남 장로교 해외선교본부는 교육사업에 영향을 끼칠 문제점들에 대하여 
다음의 정책성명서를 한국선교부에 제시한다. 

1 우리는 오랫동안 한국인들에게 교육의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해 감사한다. 

2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우리가 교육사업을 할 때, 자유와 보호를 제공한 점에 대하여 
정부에게 선교회를 통해 진실한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 

3 지금도 우리는 이제까지 누려왔던 똑같은 조건에서, 교육사업을 계속 이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학교를 설립하는 동기가 되었던 똑같은 목적으로, 
지금도 활동하는 것이 지지를 받는다면, 교육 활동을 중단하고 싶지 않다. 

4 그러나 기독교적 원칙을 양보하지 않고는, 우리의 교육사업을 지속하는 것을 불가능
하게 만드는 최근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한국선교회부에 
정당한 절차를 밟아 학교를 폐쇄하는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한다. _____________________

5 우리는 이러한 조치가 가져올 결과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이것이 많은 가정에 교육의 기회를 잃게 만들고, 
오랜 시간 동안 이 일의 삶과 정성을 바쳐온 우리의 교사와 선교사들에게 
고통을 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이러한 방침을 취하는 것을 통렬한 유감으로 여긴다. 

6 이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국자들이 우리 학교들의 했던 요구들에 대하여 
논란을 일으키거나, 이러저러하게 사안을 다투려는 목적이 아니며 
현 상황에서 일반 교육의 장에서 질서정연하게 철수하려는 우리의 의도를 표현하려는 것뿐이다. 

7 교육사업을 청산하는 첫 번째 조치로, 선교회는 4월에 새학기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기로 한다. 
신입생은 폐교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재학생 학급에만 받을 수 있다. 
이 조항을 적용할 때,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년의 학교는 별개의 단위로 인정한다. 

8 현재 재학 중인 학생들을 졸업시키는 것이 우리의 진심 어린 바람이며, 
그 사이에 우리가 지속적으로 유지해온 기독교적 자세와 입장을 양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학교는 이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학급을 유지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있을 경우, 학교에 지체없이 폐교하도록 명령하고 
허가증을 정부에 반환할 것이다. 

특정 학교에서 학교를 잠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지역적 내부 상황이 생긴다면, 선교부는 재학생들이 졸업하는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재량에 따라 그 학교를 즉시 폐쇄하는 권한을 갖는다. 

9 학교를 청산하는시기 동안, 학교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하여 선량한 시민의식을 고양하고, 국가에 대한 깊은 사랑을 배양하며 
법과 권위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며, 충성과 애국심의 높은 원칙을 심어줄 것이다. 

10 학교를 폐쇄하는 모든 절차는, 최소한의 공개로 당국을 곤란해 빠뜨리지 않도록 
가능한 한 조용히 이루어져야 한다. 

11 이러한 비상사태에, 학교 자산의 처분에 관하여 우리는 
증여, 임대, 대여, 혹은 판매 방법으로 
학교의 목적을 위해 우리 학교가 지켜왔던 기독교적 원칙을 유지할 수 없는 
다른 단체나 기관에 양도하는 것을 승인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양도로, 이 자산들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부여된 도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사용하든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용도대로 사용하든지, 
오직 우리가 대표해온 구성원들의 분명한 확신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야 한다. 
그 구성원들의 기부로 이 자산들이 제공되고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학교를 폐쇄하는 것은 양심상의 본질적인 이유이므로 
기독교적 교육을 받기 위해 받은 자산을 다른 기관에 양도한다면 
우리의 방식을 명확하게 보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선의를 가진 기관이라도, 결국엔 똑같은 한계 아래 학교를 운영하게 될 것이다. 

12 자산의 최종 처분은 지침서 138~146문단의 규정에 따라 
반드시 해외선교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13 일반교육을 중단하기로 한 우리의 결정은, 
우리의 학교들이 현재의 요구조건에 종속되는 한 확고하며 단호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당국이 우리의 목적의 진정성과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협조해 줄 것이라는 희망과, 
일본의 충실한 친구들이 기독교적 원칙을 양보하지 않고 
선교의 봉사를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해외선교본부 총무 C. 다비 풀턴」 

임시위원회는 해외선교본부 총무 풀턴박사에게 
한국선교회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해주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고통받는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도와준 것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표했다. 

또한 구례인과 인돈이 풀턴 박사와 협의하여 
해외선교본부의 훈령을 우리말과 일본어로 번역하는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각 스테이션에 선교부의 최종 결정문 번역본을 보내기로 했다. 

또한 임시위원회의 명의로, 풀턴박사에게 감사를 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로 결의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임시위원회는 이 시점에 한국선교부에 값진 봉사를 해주신 풀턴박사에게 
큰 감사를 표하며 공식적으로 기록한다. 
그의 명쾌한 사고, 분별 있고 용감한 판단은, 우리에게 믿음을 북돋아 주었고 
현 상황에서 사심 없이 가장 무거운 책임감을 자신이 짊어졌다. 
그의 존재가 우리에게, 해외선교본부와 모교회의 기도와 후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신흥학교는 1937년 9월 폐교를 단행했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미션스쿨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에 돌입하며, 사상통제를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남장로교 선교부는 이를 거부하면서, 즉각적인 학교 폐쇄를 결행했던 것이다. 

한국 학교에 관한 정책 제7항과 제8항에 따르면, 
1937년 4월 새학기부터, 학교에 입학하는 신입생은 더 이상 받지 않고, 
재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유지하도록 했지만 
그 과정에도 더 이상 기독교적 원칙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될 때, 
다시 말해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행할 때, 
재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체없이 폐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광주 수피아 여학교의 교장 유화례의 선교 편지에는 
폐교 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와 있다. 

「일제가 전쟁을 일으키며 신사참배에 대하여 더욱 강하게 압박하는 상황에서 
1937년 9월 6일에 명령했던 신사참배를, 학교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독으로부터 학교 폐쇄명령을 받았고, 
900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집에 돌아갔다. 

일제에 동조하는 교사들의 인솔에 따라, 광주숭일학교와 수피아 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하러 간 사이에, 두 학교의 교장이 학교 문을 닫아 
신사참배를 마친 학생들이 학교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일제 당국의 중재로 학생들이 소지품만을 가지고 나가도록 허락한 후 
즉시 폐교를 단행했다. 

폐교 후 학생들은 다른 학교로 전학했다. 
전주의 신흥학교와 기전 여학교 역시 같은 과정으로 폐교했고 
학생들은 전주에서 35리 떨어진 여러 학교로 전학을 갔다.」 

인사례는, 버스 여러대가 와서 신흥학교 학생들을 태우고 
다른 학교로 데려가던 날은 슬픈 날이었다고 기록했다. 

▲인돈은 학교 건물을 폐쇄하고, 사무실을 집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학교에 출근하는 대신, 시골지역을 다니며 개인전도를 했다. 

인돈은 1930년, 안식년 후 신흥학교 교장으로 복귀해 
1938년에 이르는 8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학교를 폐교했던 1937년이, 한국 선교 역사 중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해라고 평가했다.                

그는 선교회가 교육사업을 중단한 사건이 
한국에서 종교의 완전한 자유가 제한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예라고 보았다. 
엄혹한 일제의 식민체제 아래 있으면서도,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교회를 향한 핍박이 얼마나 거세게 밀어닥칠지 예측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그는 신사참배로 인하여 신앙을 지키다가 고초를 겪은 사람들과,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신흥학교 폐교가, 그에게 많은 고통을 안겼다고 고백했다. 

인돈은 한국에 선교사로 온 이래로 줄곧 교육선교를 해왔는데, 
인생을 바친 일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말했다. "나는 한국선교부가 기독교적 교육이 무엇인지 증명하도록 허락받은 
지난 40년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이 이 분야에서 미래의 사업을 이루어 갈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일제의 핍박으로 비록 교육선교는 중단되었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닫힌 문을 여시고, 끊어진 길을 다시 열어 주실 것이라고 인돈은 확신했다. 

그러면서 "선교사업의 중요한 분야를 잃은 것은 유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고난 당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선교부 학교(미션스쿨)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세워졌으므로 
오늘 그 건물이 비어 있는 것이며, 다른 신들을 섬기라고 가르치는 것에 
학교를 팔아넘길 수는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과 순전함을 시험하는 풀무였고 
남장로교 선교부는 학교 폐쇄를 통해, 천황제 국가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기독교의 정신과 힘을, 일제와 한국교회에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일제에 타협한 한국교회가, 
이후 일제 천황제 파시즘의 전쟁 동원의 도구로 전락하여 
정신이 황폐화되고, 신앙이 타락했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룬다.  

인돈은 학교 폐교 후, 전주 인근의 시골지역의 전도사업에 집중했다. 
교육사업에 전념하면서도 시간을 할애하여, 시골에 8개 교회를 돌보아 왔는데 
이제는 40개 시골교회를 돌보는데 집중하게 된 것은, 그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돈은 전도에 대한 열정이 넘쳤고 
이전에 학교 일에 붙들려 있을 때에도, 전도하는 일에 전념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시골전도 사역을 즐겁게 감당했다. 

인사례(인돈의 사모) 말에 따르면, 인돈은 순회 전도를 위해 
집에 며칠 동안 들어오지 않고 지방에서 보냈다. 

그는 경찰서를 찾아가, 마을에서 전도하면서 
전도지를 나눠주는데 필요한 허가를 받아야 했다. 
전도하는 일도 이제는 일제의 허가를 받아야 할만큼, 감시와 통제가 심해졌던 것이다. 
이처럼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인돈이 전도하러 갔을 때, 
한국인들은 일제 당국자들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말 거는 것조차 매우 조심해야 했다. 

▲인돈은 1938년 6월 4일부터 세 번째 안식년을 가졌다. 
그는 세 번째 안식년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두 번의 안식년은, 그가 선교사역을 위해 필요한 역량을 키우고 
자격을 갖추기 위해 공부에 전념하느라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번 세 번째 안식년 만큼은 가족과 소중한 추억을 남기는 시간을 갖고 싶어했다. 

특히 큰아들이 이번 안식년을 마치고 나면,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야 하고 
나머지 아들들도 곧이어 미국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온 가족이 함께 지내는 마지막 안식년이라고 여겼다. 

그는 인도양을 거쳐 팔레스타인에 한 달간 머물을 환상적인 여행 계획을 세웠는데, 
특히 예루살렘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가 평소 꿈꿔오던 일이며 
이후 성경을 가르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보내는 성지순례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마침내 인돈 가정은, 세계대전의 불운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안식년을 떠났다. 
1938년 6월 1일 전주를 출발하여, 평양 외국인학교에 다니고 있는 두 아들과 대전에서 합류하여 
부산으로 내려가 일본으로 출항하면서, 마침내 꿈에 그리던 안식년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미국으로 직행하는 노선이 아니라, 인도양을지나 여러 항구를 경유하여 
팔레스타인과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향하는 환상적인 여행을 했다. 

일본 고베에서 프랑스 해운으로, 상하이와 홍콩을 들러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의 3주간 머물렀고 
다시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로마, 스위스, 프랑스,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석 달간의 긴 여행을 했다. 

인돈가정은 뉴욕에 도착해 인사례의 남동생 윌리엄 벨을 만났고, 
그의 차를 타고 인사례가 자라난 유진벨의 고향 켄터키로 갔다. 

그곳에서 자동차를 렌트하여, 인돈의 고향 조지아주 토머스빌로 이동하여 
캘리 이모님이 안식년 기간 동안 살도록 준비한 집에서 
캘리 이모와 함께 가족 모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오랜 수고 후에 갖는 달콤하고 행복한 안식년이었다. 

인돈가정은 안식년을 마친 후, 캘리 이모님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오기로 결정했다. 
인돈이 이모님을 종용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캘리 이모님이 결단하여 함께 들어오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조지아에서 차를 이용하여 미국 서부로 대륙횡단을 하여, 
밴쿠버에서 캐나다 해운편으로 1939년에 한국으로 복귀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일본 제국주의 확장 전쟁에 광분한 일제에 의하여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시골에서 전도 활동을 하던 인돈은, 일본 경찰에 의해 미행과 감시를 당했고 
선교사들과 한국 교인들 사이에 접촉과 만남이, 노골적인 간섭과 제약을 받았다. 

1940년 1월 26일 인돈의 편지에는 이러한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편지 일부분을 살펴본다. 

「우리는 현충독이 그 직무를 계속 수행하는 한  *미나미 지로
한국에서 큰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일본의 신도 종교의 독실한 신봉자입니다. 
그는 일본의 동아시아와 전 세계를 향한 계획의 성공여부가 
일본인들과 일본 황실에게 세계를 지배하는 역할을 부여한 태양신에게 
일본 국민들이 바치는 합심기도에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을 분리하려는 경찰의 노력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우리와 어떤 모양으로건 접촉하지 못하도록, 금지를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많은 지역에서, 선교사들에게 그들의 교회를 방문하지 말라고 
편지를 쓰도록 일제에 강요를 당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은, 고위공직자들에게 우호적인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교회를 방문하지 말라고 선교사들에게 요청하는, 마음에 드는 편지만 발송되고 있는데

이 편지들을 비교해 보면, 종이만 다를뿐 내용은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찰서장은 '경찰이 모든 일을 강요했다'는 이와 같은 명백한 증거가 제시되었을 때,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저는 전에 여러 번 방문했던 교회를 찾았습니다. 
저는 많은 교인을 교회로 안내했습니다. 

경찰은 내가 온 사실을 알자,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제가 설교하지 못하게 하고, 저를 초청한 것을 취소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경찰이 모자를 쓰고 담배를 피우면서, 회중 가운데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모임을 마쳤을 때, 모든 회중이 저에게로 다가와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 경찰은 곧바로 거칠게 나오며, 회중들에게, 
(또한)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을 하면, 제가 떠난 후에 경찰이 
교인들에게 문제를 삼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경찰은 언덕 아래 차를 탈 때까지 저를 따라왔는데 
그제야 사복경찰을 포함하여 2명의 경찰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그곳에서 다음에는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가는지 알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경찰서로 가서 그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자'고 했고, 
결국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1시간 반 동안 실랑이를 벌였는데 
그들은 경찰서장에게 전화하여, 제가 사람들에게 말할 권리가 있는지, 
그 지역에서 설교할 권한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제가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교인들은 아마도 끝도 없는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미국의 자유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진실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곳 교인들은, 한국에 돌아온 우리를 보고 환영하려고 걸어와서도, 
우리에게 잠깐 인사할 적절한 기회를 찾으려고 애써야만 합니다. 
경찰에게 들킬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2년 내내 교인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해 왔는지 비로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교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고, 
경찰에 고초를 당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모두 알면서도 
여전히 모임을 했고, 새로운 교인들도 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제의 당국의 손아귀에서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편지에서 인돈이 지역에서 전도 활동을 하며 교인들을 돌보고 섬기는 일을 할 때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어떤 수준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경찰이 예배당에 들어와 동향을 파악하고, 
선교사의 행선지와 동태를 감시하고, 교인들을 통제하고, 
심지어 교회의 예배와 집회를 감독하고 있었던 것이, 당시 한국교회의 처참한 상황이었다. 

또한 예배당에서 회중 사이에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었던 일제경찰의 오만함과 
교회 지도자를 협박하여 선교사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압박하면서도 
고위공직자들은 겉으로는 선교사들을 잘 대우해주는 것처럼 행동했던 
위선적 이중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일제의 공포정치 아래 고통을 겪으면서도 
숨을 죽이며 이 시간을 인내해야 했던 한국교회의 수치와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을 인돈의 분노와 걱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인돈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무력한 선교사의 처지에서 
한국교회의 안정과 평화를 오직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다. 

같은 편지에서 인돈은, 일본에 대한 입장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당시 그는 '미국이 국제정세를 어느정도 통제하며 일본을 잘 견제하고 있다'는 
낙관적으로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다. 

아마 이런 인식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 
일본인들의 전략적 모호함과 기만적 외교술에 속아넘어가 
그들의 세계 정복의 야육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던 미국인들의 낙관적인 상황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일제의 지배 아래 놓인 한국에서 여전히 선교활동을 하면서 
전시체제의 험난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인돈의 희망사항이었을 것이다. 

인돈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 일본과 미국의 조약이 종료됩니다. 
우리는 미국이,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본의 대학살과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건립하려는 계획에 말려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미국이 일본의 전쟁 물자, 구체적으로 연료 공급을 끊어버린다면, 
이곳에서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일본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이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해온 사실은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할지를 보여줍니다. 

미국 해군이 태평양에서 보여주고 있는 압박은, 확실히 유익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미국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처럼 4년 전에 말했다면, 
모든 선교사는 짐을 써서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우상숭배하며 자만하는 일본의 무릎을 꿇게 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본제국이 완전히 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동양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열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본을 정신 차리게 하셔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가, 가능한 한 빨리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로 변화되고 
결국엔 세계의 새로운 질서, 곧 전 세계를 일본이 지배할 것이라는 망상을 버리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돈은 어렵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진행해 나갔다. 
남장로교 선교부의 연례회의록에는, 인돈을 전주에서 군산으로 다시 돌려보내 달라는 
군산 스테이션의 청원이 안건으로 다루어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인돈이 전주로 옮겨간 이유는, 그곳에서 교육사업을 하기 위함이었는데 
이제 (신사참배로) 교육사업이 중단된 상황에서 
다시 군산으로 와서 전도사역을 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선교부는 군산 스테이션의 청원을 거절하고, 인돈이 계속 전주에 있도록 했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첫째, 그는 전주 스테이션이 그에게 맡긴 정부관계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있으며, 
둘째, 그는 스테이션의 모든 정규회의와, 그가 소임을 맡은 특별회의에 투표권을 가지고 참석하고 있으며 
셋째, 그가 성경반과 사경회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넷째, 그가 언제든지 전주 스테이션의 요청에 응하도록 배정되어 있다는 이유였다. 

▲한국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선교회가 더 이상 선교사업을 진행하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라디오에서는 "모든 미국인은 아시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라"는 
미국 정부의 공식입장이 전해졌다. 

미국 영사관은 선교사들의 철수를 종용하면서, 
'11월 초에 떠나는 작은 배를 타고 다른 곳을 경유하여 귀국하는 편을 택하든지, 
아니면 그 후 미국으로 곧바로 들어오는 큰 배를 기다리든지 하라'고 전해왔다. 

그 당시 선교사들이 철수를 심각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있었다. 
첫째, 동아시아의 미국 공사관이 반복적으로 그리고 긴급하게 철수하라는 경고를 
보내면서 선교사들을 독촉했다. 

둘째, 전쟁에 휘말리거나 강제수용소에 억류될 가능성으로 인하여 
선교사와 선교사 가족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고 
한국에 남아있더라도 한국인들과의 소통과 관계가 끊어지게 될 우려가 있었다. 

셋째, 많은 지역에서 기독교 사업은 경찰에 의해 중단된 상황이었다. 
선교사들은 헌병과 형사들의 계속적인 조사에 시달렸다. 

넷째, 기독교 활동을 국가주의 정책에 순응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더 이상 기독교의 원칙을 지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다섯째, 일제의 국가주의적 반감으로 인하여 
선교사들은 미국인으로 현장에 있는 것이, 선교에 심각한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섯째, 많은 경우 선교사들의 존재가, 한국 교인들에게 위험과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선교사는 철수를 결정했다. 
인돈가정도 1940년 11월 14일 철수하기로 했다. 

인사례에 따르면, 한국인들에게 자신들이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짐을 꾸리는 동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한국인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번번이 짐 꾸리는 일이 중단되었다. 

갑작스럽게 짐을 꾸리고 정신없이 한국을 떠나왔지만 
인돈 가정은 이사야 52:12절의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너희 앞에 가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너희 뒤를 지켜주시니 
너희가 나올 때에 황급히 나오지 않아도 되며, 도망치듯 달아나지 않아도 된다." 새번역

그들의 불안한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이 잘 담겨 있는 성경구절이었다. 
그들이 떠날 때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여정이 하나님의 인도 속에 있다는 것을 굳게 믿으며 길을 나섰다. 

이로써 해방 이전 인돈의 한국선교는 일단락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수천명의 선교사들의 대규모 철수가 이루어질 때 
인돈 가정도 이 대열에 포함되어 있었다. 

대략 125명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중국, 일본, 한국에서 철수했고 
한국에서만 남장로교 선교사 50여명이 철수했다. 

타마자 부부와 유화례와 도마리아를 포함한 다섯 명만이 
선교부 재산을 정리하고 한국인들에게 이양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남겨진 이들도 1941년 6월 1일에 모두 한국에서 추방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