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8XgMHN4pWkk
◈불타오르는 사랑으로 열심 내야 요2:17, 요엘 2:17 출처, 정리
ZEAL - LOVE ABLAZE!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요2:17
에녹은 "보라, 주님은 수천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라고 예언했습니다. 유1:14
위 말씀대로, 만약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 들어오실 때
마치 엘리야가 승천할 때 탔던 것처럼 불의 전차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 위에
어두운 밤에 내려오셨다면, 무리들은 왁자지껄하게 그분을 받아들이고 경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 반대로 조용히, 은밀하게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기들을 구해 줄 왕이요,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그분은 아무 힘도 없는 어린 아기로, 한 여인의 산고를 통해 그저 보통의 아기로
조용히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몰라본 것이죠.
▲성전 청소
그 지방 고향 사람들은 예수라는 청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실했지만 그저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목수인 자기가 지켜야 하는 주제와 선을 넘고 있습니다.
그는 광야의 설교자 세례요한이 자기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지명한 것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그는 군중들이 자기를 나귀 등에 태워서
"호산나"의 외침 속에서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 그는 환전상들과 가축 매매꾼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어
그 도시를 온통 자극하고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 청결은, 하루 아침에 욱하는 심정에서 된 일이 아닙니다.
그분은 거의 30년 동안 사람들이 그 성전을 더럽히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불경과 탐욕에 그동안 계속 분노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동물의 배설물로 성전 마당을 도배하고
소변 악취로 그 신성한 장소를 오염시켰다는 것을 역겨워 하셨습니다.
사복음서에는 모두 예수님의 채찍질(성전청결)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대조표 http://blog.daum.net/rfcdrfcd/15532588
그렇지만 누가복음에는 더 소중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요,
예수님이 휩핑 (whipping, 채찍질) 하시러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기 전에
올라가시는 길에서 그 성을 보시면서 윕핑 (weeping 우심)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휩핑 하시기 전에, 윕핑하셨다는 사실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언어유희
(왜냐면 우리 사람들은 휩핑만 하지, 윕핑은 하지 않거든요. 뉴스를 보면서도요!)
12세에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셔서 ‘아버지의 일 Father's business’을 하셨기 때문에, *눅2:49
예수님은 벌써 그 나이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마당을 밟고 다니시면서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목격하시면서 슬퍼하기도 하셨고, 분노하기도 하셨습니다.
그저 짐승들의 배설물로 더럽혀짐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환전상들과 가축을 파는 상인들의 탐욕으로 벌개진 눈을 보시면서 분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즉시 분노하지 않으시고, 삼십세가 되기까지 참으셨습니다.
은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성장해 오시면서
30세가 되기까지 기다리시다가, 이제 마침내 주님은 자기 사명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주님은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하셨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요2:17, 시69:9
그 열심!
오늘날의 약하고 시들어가는 교회에
이같은 열심에 대한 세례(푹 잠김)가 지금 얼마나 꼭 필요한지요!
▲열심 zeal 이란, 원래 사랑이 불타오르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게 건강하고도 건전한 원래 의미의 열심 zeal 이죠.
그렇지만 이유 없는 맹목적인 열심은.. 광신 또는 광신주의가 됩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열심은, 광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 불타올라서
그 사명의 길을 가는데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위험성에 대해
예수님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진정한 열심으로 예수님은 죽음의 위험을 불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셨지만, 그건 죄를 용납하지 않으신 것이지
광신주의는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분노는 갑자기 욱하고 터지지 않았습니다.
12세 때 성전에 올라가서 목격하신 이후로 그분은 평생 동안 그 성전훼손을 생각해 오셨습니다.
이제 30세가 되자, 그 때가 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채찍과 거룩한 분노 앞에서 도망쳤습니다.
▲영적인 생태계 SPIRITUAL ECOLOGY
‘오염되었습니다, 다 오염입니다!’
요즘 환경/생태학자들은 오염의 위험성을 사방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다 오염되었고, 마시는 물도 오염됐고,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가스로 인한 대기오염도 심각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오염"에 대해 외치는 설교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참 선지자들은 왕의 식탁에 앉아서 식사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들의 스승님처럼, 그들은 멸시를 당했고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했습니다.
그 선지자들은 말투가 매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 오늘날 이 도시의 오염을 바라보면서 울고있는 설교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시 성전의 매매상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그 제사를 통해 영업을 해서 이득을 취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일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보다
어떤 정치적 이슈를 붙들고 격렬하게 투쟁하는데 바쁩니다.
그것도 역시 제사(기독교)를 이용해서 어떤 자기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닐까요?
현재 이 세상에는 무서운 비극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제쳐놓고 이성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결정하고 주도한 결과
세계 곳곳에는 전쟁과 기근과 재난이 닥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끔찍한 일이지만, 나는 그것보다 무한히 더 나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세상에서 전혀 영향력을 못 미치고 있는 ‘병든 교회’입니다.
위대한 (기독교 국가) 미국이 오늘날보다 더 많이 파괴된 broken 적이 없습니다.
결혼 생활이 broken 망가져서, 수백만의 broken 깨진 가정이 남았습니다.
마약으로 정신과 생각이 broken 망가진 수 십 만의 젊은이.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신뢰도 broken 깨졌습니다.
튼튼하던 미국의 경제도 broken 무너졌습니다.
일부 신자들의 마음을 제외한
미국의 모든 것이 broken 깨졌습니다. (*30년 전, 1990년도 경의 글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거대한 혼란에 직면하기 위해 '상한 broken 마음'이 필요합니다.
회개와 참회는 어떤 예배의 순서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울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제사장들이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울고 ... 그들로 울부짖게 하라"(요엘2:17, 1:13).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울었습니다.
다윗도 울었고 바울도 울었습니다. 사도요한도 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는 울지 않고, 바짝 마른 건조한 눈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짜 열심 Counterfeit Zeal
교회의 현재 무기력은 거의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열심을 나타냅니다.
이단에서 복음주의 교회로 오는 사람 숫자보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이단으로 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들은 이교도들은 거리에서 열정적으로 전도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다 가짜 열심 Counterfeit Zeal 들입니다.
유대교를 믿던 시절의 다소의 사울은 광적인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남녀를 감옥에 보내고, 이 도시에서 도시로 다니면서 그들을 핍박했습니다.
기적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회개케 하시고
성령의 불로 세례를 베푸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진정한 열심’의 모델로 만드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광대하게 세상적이 되었는데,
그저 ‘우리는 교리적으로 건전하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고 말만 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분노로 화를 내야 합니다.
“화를 내면서도 죄를 짓지 말라”(엡 4:26).
(이 구절이 거룩한 분노는 용인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가지실 마음의 깊은 상처를
우리도 똑같이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분명한 말씀보다, 인간이 만든 신학에 더 충성을 나타냈습니다.
즉 성경말씀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신학에는 많은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 점에 대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우리는 ‘내가 오직 한 가지 일’에 집중하겠다고 말해야 됩니다. 빌3:13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교회 안에 있는 차가운 마음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겠습니다. 그 한 가지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열심있는 사람은 ‘오직 한 가지’를 위해 삽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는 ‘열심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지 않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 냅니다.
건강할 때나 / 병들 때나
부유할 때나 / 가난할 때나
사랑받을 때나 / 멸시받을 때나
칭찬 받을 때나 / 그렇지 못할 때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가 쇼맨십과, 오락과, 바자회, 사교춤 등으로
성경의 규정에서 떠나 위반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딤후3:5
오늘날 이혼이 아무렇지도 않는 일인 것처럼 허용하는 목회자들이 있는데,
그건 아마 하나님이 그런 목회자와 이혼하시고, 그를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자신의 교회가 ‘물을 타 희석시킨 복음’으로 불순종으로 부정한 것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 또는 “너희 가운데 가장 큰 자는 섬기는 자이다”
등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금반지를 낀 사람이 집회에 오면, 우리는 그를 존중해 줍니다. 약2:2
그가 믿음은 없어도 큰 부자이면, 그는 교회의 이사회(운영진) 회원으로 환영받습니다.
우리는, 젊은 설교자들이 위로부터 능력을 수여받기까지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하게 해야 하는데,
그저 신학교 졸업장만 받으면 다 되는 것처럼 그들을 사역자로 인정해 줍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바리새인은 성전에 서서 기도할 때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기꾼도 아니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간음하는 사람도 아니며 또 이 토색하는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눅18:11)라고 기도했는데,
오늘날 이런 기도도 당당히 할 수 없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 (요7:24)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즉 비방하는 자들에게 꼬투리 잡힐 것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바리새인’같은 설교자는 없습니까?
그들이 받는 판결은 더욱 엄중하다고 하셨습니다. 눅20:47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기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5:41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4
오늘날의 교회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갈3:3
오늘날의 교회 위에는 불기둥의 인도가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지옥을 정확히 설교하는 사람이 찾아보기 드뭅니다.
로마 도시가 불에 탈 때, 당시 네로 황제가 정말 흥에 겨워 악기를 연주했는지는
저는 확실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이 온통 죄악으로 불에 타고 있는데, 교회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흥겹게 악기를 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부흥이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부흥 없이도’ 즐겁게 만족하며 잘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천년 전에 주님이 성전에서 외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봐야 합니다.
‘성전을 향한 열정이 나를 삼켰도다!’
이 말씀은 원래 다윗이 했던 말입니다. 시69:9
다윗도, 예수님도 하나님의 집을 너무 사모했기에
하나님의 성전이 훼파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진정한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휩핑(채찍질)도 하지만 먼저 윕핑(눈물의 기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오직 한 가지 일을 하는, 우리들이 되기 바랍니다. 빌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