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사도 바울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의 형제들은 그들이 행한 모든 일에 있어서 조금도 사심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그의 형제들이 다양한 행동을 했지만 언제나 동일한 목적을 위해서 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축복하는 일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이 바울은 지나치게 흥분했으며 자기 자신을 너무 강하게 표현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좋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사도 바울이 합리적인 사고(思考)를 강하게 하는 자임을 주목하여 그를 너무나 차갑고 논리적인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생각에 대해서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몇 가지 점에서 살펴본다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돈키호테와 같이 터무니 없는 일에 몰두해 있는, 열렬한 광신자들처럼 보였음이 틀림없으며, 완전히 미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거의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회심한 이야기를 말했을 때 그것을 들은 총독 베스도가 소리쳤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 행 26:24) 또한 바울의 행동에서 놀라운 변화를 보았고, 그가 어떠한 지위를 포기했으며, 새로운 그의 믿음을 위해 어떠한 고난을 당해야 했는가를 알았던 많은 사람들도 의심할 바 없이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판단을 받지 않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주님이시오 선생님이신 예수님께서도 미쳤다고 비난 받았으며, 심지어 주님의 친속 들까지도 "그가 미쳤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총독 베스도에게 그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행 26:25). 그리고 본문에서는 고린도의 대적자들에게 더욱 강력하게 답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하는 열정으로 말미암아 미쳤다는 비난을 받는 자는 복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할 수없이 충분한 답변이 될 것 입니다. 미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미친 세상이 어리석고 발광적인 사람들 중에 도덕적으로 올바른 한 사람을 보고 비난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 눅 7:35)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또 다른 비난으로 사도 바울을 공격했으며, 그가 미친 듯 하지만 조기가 있고 모든 사람들에 대한 그의 모든 행동들은 대단한 신중함을 보이며, 그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라고 비꼬았습니다. 그들이 암시하는 어떤 목적이란 아마도 권세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에 대하여 대단히 단호하게 답변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바울은 조금도 사심 없이 행동했으므로 고린도교회에 호소할 수 있었으며,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요 그들을 얻으려 했다(고전 9:19~24)는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가 그들의 무질서함을 대단히 온전한 정신으로 판단하였다면 그것도 그들을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느꼈거나, 고통을 받았거나, 설교를 했거나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 속에 그는 오직 한 가지 계획만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자들을 온전하게 하고 죄인들을 구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사역자들은 조금이라도 유보됨이 없이 본문의 바울의 말씀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성도 역시 그와 꼭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내가 미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함이요, 만일 내가 정신이 온 전하다 하여도 그것은 성결한 삶을 유지하기 위함이며, 또 내가 돈을 함부로 쓰는 것 같이 보인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깊은 곳에 있는 내 영혼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마음이 온화하며 사려가 깊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방법으로 내 구세주의 나라의 유익을 위함일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한 가지 계획을 추구하고, 우리 자신을 그 거룩한 일에 헌신한다면 울거나 노래하거나, 염려하거나 소망을 가지거나,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확장되거나 축소되거나, 의기양양하거나 의기소침 하거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를 보며 살게 하시고, 또 우리와 같은 그러 한 교회들이 그러한 성도들을 지도하기에 합당한 교역자를 얻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이 동일한 거룩한 목적에 따라 같은 주인을 섬기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적에 간멜산 위에 내리신 그 불을 우리의 제단 위에도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의 제단 위에는 세상이란 소금 바다에 두 번 세 번 적셔놓은 제물이 놓여 있나이다. 그 번제물이 완전히 소멸토록 하늘의 불을 내려주시고, 그 불길이 나무와 돌들과 흙까지 태우게 하시며, 도랑에 있는 물을 핥게 하소서. 그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며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 이시다" 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왕상 18:38~39). 사도 바울은 이제 14절에서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의 모든 행동이 왜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한 것이었는가 그 이유를 말해 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저는 여기서 본문의 원어의 의미를, 제가 할 수 있는 한, 정확하게 여러분에게 주해해 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강권함을 받음 두 번째, 그리스도의 의로운 지식의 강권함을 받음 입니다.
◑첫째 제가 말씀드릴 주제는 강권함을 받음이란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었으며,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영적인 자유를 누렸던 자였는데, 여기서 그는 그가 강권함(억압)을 받고 있음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는 강권함을 받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굉장한 힘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저도 "우리를 강권하신다"라고 번역한 것이 원문을 가장 잘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금한다, 억제한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진실한 신자들이 자아를 추구하는 것을 금하고, 그들로 가장 지고한 목표를 추구하도록 명합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미쳤든지 정신이 온전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명하시는 것에 순복하였습니다. 마치 순한 양이 목자의 휘파람 소리에 응답하거나 말이 고삐가 끄는 대로 복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금하는 힘이 없다면 불순한 동기에 끌려가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통제했고 그 능력 아래 그들을 붙들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금한다, 억제한다"라는 말은 원어의 의미를 일부만 표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어는 "강요당한다, 억압당한다" 즉 압력에 의해서 옮겨지듯이 강제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강물 속에서 수영하는 사람을 물결이 뒤에서 압박을 가하므로 강물 줄기를 따라 아래로 떠내려 가듯이, 바울은 사방에서 둘러싼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에게 압력을 가했던 것입니다. 성경 원문에 대한 대단한 권위자인 벵겔(Bengel)씨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우리를 계속 사용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계속 부지런히 일하게 되고, 열심을 내도록 강요 받고, 계속 인내하며, 앞으로 계속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도 들은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수고는 예수 그리스도 의 사랑에 자극 받음으로 감당했던 수고였습니다. 마치 야곱이 단순히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위해서 수고했음과 같이, 진실한 성도들은 무한한 사랑의 강권에 못 이겨 주 예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저명한 주석가는 그 단어를 "우리를 한 그릇에 담으신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의미는 주님의 종들은 하나로 결속되어 있고, 또 하나의 깃발이나 상징 아래 모인 무리와 같이 본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깃발이란 "나를 정복한 그리스도의 군기(軍旗)는 사랑이었네"라는 교회 찬송가 가사의 그 군기를 언급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병사들이 군기 아래 모여 결속 되듯이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주님의 사역과 봉사를 계속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강권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참아내도록 하며, 그들의 정력의 중심으로서, 근원으로서 함대의 깃발과 같이 높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충성하는 최선의 동기를, 힘이 넘치는 최선의 이유를, 인내하는 최선의 논거를 우리 주님의 사랑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또한 "압축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그들의 모든 힘이 한 통로 안으로 압축 결집되어 무엇을 움직이게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제가 저의 힘을 금지하고 억제하여 모든 힘을 하나의 형태로 결집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수가 범람하여 초장 위를 넓게 덮쳐 흐르다가 푹 패인 웅덩이에 고일 때, 사람들은 둑을 쌓아 한 통로로만 그 물이 흐르도록 물의 흐름을 억압합니다. 그래서 그 물은 압축되어서 이제는 물 줄기가 되고 한 방향으로 힘차게 흘러갑니다. 그 물결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살펴 보십시오. 그 물줄기들이 모였을 때 어떠한 힘을 가지게 되는지 보십시오. 그것은 저 너머 물레방앗간의 물레를 돌리며, 양을 씻길 만한 도랑물이 되며, 작은 폭포가 되어 떨어지며, 여름철 뜨거운 햇볕 아래 소떼들이 발을 담그고 서 있는 시냇물이 되어 마을 앞을 요란스럽게 웃으며 흘러 갑니다. 그러면서 계속 불어나서 보트와 작은 배들을 띄우는 강물이 됩니다. 그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불어나서 멈출 줄을 모르고 도도한 물결이 되어 거대한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산만한 바울의 힘을 압축하여 한 군데로 모았고, 한 통로를 통하여 흘러가게 했고, 그 힘들이 모아져 굉장한 위력을 가진 추진력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동역자들이 일을 위하여 강력한 능력을 얻게 되었고 항상 적극적이며 활기에 차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라고 합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그들을 주관하는 어떤 원리의 강권함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리 불면 이리 틀리고 저리 불면 저리 틀리는 풍향기 같이 모든 것에 의해서 영향 받아 변하고, 오래가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은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변덕과 공상, 오락과 쾌락에 삶을 소비하는 사람은 결코 한 가지도 성취할 수 없는 자입니다. 삶의 표면을 배회하는 자는 새가 공중에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못함 같이 그의 삶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할 자입니다. 그러나 실수를 할지라도 집중하는 자는 위대한 자가 됩니다. 마게도냐의 젊은 왕자 알렉산더를 대제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정복을 위한 야망에 그의 전 마음을 쏟았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편안하고 평안히 있을 때에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전장이나 행군하면서 보낸 날들이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그가 전장에서 어떻게 했는가 살펴보십시오. 그는 전장에서 선봉으로 적진에 돌진하였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병사라도 그러한 왕의 필사적인 용맹을 지켜보는 동안 용맹스러운 병사로 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은 그 왕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만약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정복의 야욕이 그를 강권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세계를 정복하는 정복자가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이저와 같은 사람들,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들, 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들의 야망에 완전히 사로잡힌 자들이었으며, 지배욕에 모든 것을 바친 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생각을 더 아름답고 더 거룩한 영역으로 옮겨 볼 때에 거기서도 그와 같은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호와드(Howard)가 죄수들에 대한 사랑의 힘에 이상할 정도로 사로잡히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위대한 박애주의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궁전이나 영빈실의 소파에 앉아 있을 때보다 병원이나 감옥소에 있었던 때가 더 행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옥소를 심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재소자들에 대한 동정심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전 생애를 그들을 위하여 보냈던 것입니다. 휫필드(Whitfield)나 그의 동료 웨슬리(Wesley)와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 생각은 그리스 도를 위하여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전 존재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의 강물 속으로 녹아 흘러 들어갔고, 그 강물은 도도하게 흐르는 론(Rhone) 강과 같이 충일(充溢)하며 힘찼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그들의 휴식이었습니다. 전도하는 동안 비난 받으며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중상모략을 당하는 것이 그들의 영광이었습니다. 귀족들의 집에서 주교의 직을 감당하거나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면 왕의 보좌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고문 대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약해지기를 바라지도 않았던 어떤 열정에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 사람들의 방황하는 영혼을 찾도록 하신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그들을 건져내어 구원하려는, 수 없는 부르짖음과 간구와 눈물로." 그들의 전 생애, 존재, 재능, 영, 혼, 육이 그 의도하는 목적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나뉘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결하게 된 그들의 전인격이 그 목적을 향하여 불가항력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마치 영원자의 손으로부터 터져 나와서 그 목적하는 곳에 미치기까지 직진하는 번개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태양이 그 빛을 비추는 것을 멈출 수 없고, 하늘에서 그 진로(進路)를 역행할 수 없듯이 그들도 결코 전도하는 것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강권은 강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속박을 내포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고상한 자유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정확하게 자기의 원하는 것을 하게 되어서, 그가 그 일을 하면서 얻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기 원한다면, 그는 대체로 오늘 본문의 말과 유사한 말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학문에 마음이 모두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습니다. 저는 그것이 주는 매력에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단어 하나 하나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조금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입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과학이나 또는 추구할 만한 다른 과목에 완전히 몰두해 있다면,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것을 버려둘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있지만, 그는 당연히 그것을 버려둘 수 없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을 갖고 있어서 그가 거기에 몰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강권함을 받는 상태에 있게 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대로 행하지 못하거나, 우리의 자율적인 의지대로 봉사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묶여 있을 때만큼 자유롭게 되는 경우는 결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물리적인 힘으로 우리를 억압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묶는 끈은 사랑의 끈이며, 그분께서 우리를 동이시는 띠는 사랑의 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권하심은 우리가 즐겁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끈과 띠로 우리를 묶고 동이시는 그런 상태 속에 놓이는 것을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를" 허락하며, 그러한 강권 하심이 날마다 더욱 증가하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굉장한 힘이 바울을 붙잡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강권하는 힘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음을 살 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대한 자기의 사랑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도, 비록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못 미치겠지만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만을 언급하는데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그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즉,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랑의 주력(主力)입니다. 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속에 온갖 즐거움이 들어 있는 능력입니다. 그 사랑은 가장 위대한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일 만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누가 그 사랑의 전능한 힘을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본문 내용에 따르면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보여준 그 사랑이 가장 강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본문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도다." 바울의 마음을 극도로 요동하게 하였던 그리스도의 사랑의 특이한 현시는 그분의 대속의 죽음에 나타난 사랑이었습니다.
잠시 그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한 고통도, 어떠한 아픔도, 어떠한 수치도 결코 당하실 수 없었던 영원히 복 되신 그리스도께서 죄악 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 놀랍고도 특이한 그 사랑이여! 그분께서 죄악 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 실로 자기의 원수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비참하게 타락한 인간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본성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놀라운 낮아지심! 하나님의 아들이 또한 마리아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스스로 비천하게 되시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양이 하나도 없는 자가 되셨습니다. 인간 재판관들 앞에 붙들려 가서 부당하게 정죄 받는 그분을 보십시오. 로마의 릭토르 <집정관을 따라다니며 죄인을 잡던 관리〉에게 붙잡혀서 채찍으로 혹독하게 내려침을 당하시는 그분을 보십시오! 조금만 더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분께서 십자가 사형 틀에 못박혀서 흉악범의 하나로 취급되어 높이 매어 달리시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분은 조롱하고 조소하며, 잔인하게 쳐다보거나 악의에 가득 찬 말을 하는 자들 사이에 홀로 버림받았다가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침내 실제로 죽으시고 무덤에 뉘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의 이면에는 그분께서 단순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며, 전능자의 진노를 담당하시고, 인간의 죄에 내려진 무시 무시한 사형 선고를 감당하신 비밀이 있습니다. 여기에 참으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무한히 순결하신 분이 죄인들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셔야 했고,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아픔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냉혹한 율법의 무서운 형벌을 감당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피 묻은 나무에 못박은 그 사랑이야말로 가장 숭고하고 고귀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이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 사랑의 강권하는 영향력을 느끼실 때까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이 지음 받기 오래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영원한 말씀( 요 1:1, 2참조)이 자기 백성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의 이름을 자기의 가슴에 새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심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대속의 희생을 치루시면서 아무 유익도 얻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하늘에서는 비파와 거문고가 울릴 만했으며, 천상의 도성에서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질 만 하였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의지에서 나온 사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도 그러한 사랑은 구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사랑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지극히 인내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를 짓고, 그리스도를 거절한 때에 그가 자기 백성에게 왔고, 자기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셨으며,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에 대해서 제가 어떻게 말씀 드려야겠습니까? 제가 더 많은 말을 하게 된다면 그 사랑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분발시키기보다는 침몰시키고 말 것입니다. 그 사랑은 무한하며, 측량할 수 없으며 상상할 수조차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어머니들의 사랑이 죽음만큼이나 강하며, 여자의 질투심은 무덤 만큼이나 잔인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러한 여인들의 사랑을 능가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사랑은 타오르는 사나운 불길을 극복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러한 순교자들의 사랑을 능가합니다. 이 작열하는 사랑의 태양 앞에서는 다른 모든 사랑의 빛들이 희미해지며 그 무력한 빛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 사랑의 따스함은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찬란한 빛은 아무도 바라보며 응시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가슴 속에 타올랐던 그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지옥에 내려가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창에 찔리기까지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크리스천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이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바울도 이 사랑의 힘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작용하여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말씀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 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모든 백성들이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그를)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 이라" ( 요일 4:19). 그러나 제가 그 사랑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지요? 제게는 이 두 가지 화제─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보다 말씀 드리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화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어떻게든지 입 속에 있는 언어보다는 다른 곳에 있는 언어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사용하는 이 언어는 머리 속에 있는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머리 속의 여러 가지 생각들을 밖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여러 가지 감정을 밖으로 말할 수 있는 가슴 속에 있는 언어를 필요로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두뇌의 불완전한 화술을 빌어와야 합니다. 차가운 두뇌와 타오르는 가슴 사이에는 큰 공간이 있고, 가슴 속의 뜨거운 것들이 표현되어지기 위해 두뇌로 옮겨지는 동안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그러므로 타오르는 가슴은 싸늘한 말들이 싫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그 두 사랑을 말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진실로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분의 성호는 꿀과 같이 달콤하고, 그분의 말씀은 오빌의 금과 같이 귀중합니다. 그분의 성품은 우리에게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그분은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온전히 사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마침내 그분 가까이 가서 그분을 뵈옵게 될 때에는 그분의 모습을 보고 너무 기뻐하여 졸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천국,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천국은 원치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천국에서 모든 신묘한 것들을 즐기며, 모든 영광을 누리며, 모든 교우들과 함께 기뻐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모두 없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보좌에 앉으신 우리 주님을 되오며 주님께서 하신 기도,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 기도가 성취된 것을 볼 수 있기만 하다면 우리에게 별다른 차이가 없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복이 되십니다. 예. 실로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들어보셨던 설교 중에서 가장 감미로웠던 설교는 그분으로 가득한 설교였다는 것을 못 느껴보셨습니까?
저는 때때로 어떤 설교를 듣는데 그 설교를 들을 때는 복음을 떠나서 철학을 하고 싶거나, 우아한 단어로 쓴 시와 같이 멋지게 묘사한 아름다운 수필을 쓰고 싶은 유혹들을 받게 됩니다. 그 설교는 저를 병들게 하는 설교입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고 떠듬거리며 연방 실수를 범하는 형제가 타오르는 뜨거운 가슴으로, 내 영혼이 가장 사랑하는 나의 주님에 대해서 진심으로 말한 다면 저는 황홀한 기쁨으로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안에 계시는 집회장소에 있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두 세 명과 함께 다볼산 위에 있든지, 신실한자들이 모인 집회에 있든지, 예수님께서 임재해 계실 때에는 거기에 있는 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서 들을 때 즐거운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여러분이 그분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분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을 움직여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분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소망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분의 영토를 확장시키기 위해 여러분의 생명을 바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광스러운 왕이시며 온 세상이 그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온 세상이 그분의 보좌에서 비취는 빛 속에서 웃음을 지을 때까지 결코 쉴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진리에 관한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 순수 복음을 고수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일부 크리스천들에 대해서 잘 참지를 못하겠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 목사님은 참으로 똑똑하고 세련된 설교 자지, 천재야, 타고난 웅변가지"라고 말하는 그런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려고 애쓰는 자들입니다. 거짓 교리를 듣기 좋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똑똑함 말입니까? 그런 설교를 즐기는 선생들이여, 엉터리를 멋지게 전하는 그런 능력이 있는 설교자는 제게 칭찬(감탄)의 대상보다는 슬픔의 대상이 됩니다. 저는 거짓 교리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말쑥하게 제 앞에 놓여진다 할지라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저더러 지극히 귀한 접시에 놓였다는 이유로 독이 든 음식을 먹으라고 하시겠습니까? 저는 매혹적인 말로써 성도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을 때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영혼들을 팔아 먹고야 말 자들입니다. 또 저는 그런 사기꾼들을 부드러운 말로 감싸는 자들에 대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의 이 말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목사님의 편협한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한다면 그렇게 말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저의 편협한 신앙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랑하신 사도 요한의 말씀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라" ( 요이 1:10, 11). 저는 우리 모두가 사도 요한과 같은 그런 단호한 결단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결단이 없을 때 우리의 신앙 생활이 삐뚤어지게 되며, 정직하고 담대함이 적당히 부드럽게 서로 아첨하는 것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미워하지 않는 자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나 사람의 말이나 똑같은 들리는 자는 아직 그 심령이 새롭게 되지 않은 자입니다. 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선조들과 같이 되고 싶다면, 여러분은 이 시대에 쓰레기를 잔뜩 실은 마차들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지 말아야 할 것 입니다. 여러분이 택하는 쓰레기를 잔뜩 실은 마차 같은 목사들로 말미암아 지금 복음이 그런 쓰레기 밑에 묻혀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교회가 고수하는 근본적인 교리에 원수 된 자들에게 강단을 서둘러 내어 주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들은 능수능란하여 교묘한 수법으로 여러분의 목회자가 되었고, 아직은 어려서 피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이들의 연약한 믿음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한 때에 정통이었던 교회의 강단을 강탈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들이 설 곳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교회를 세울 만큼 그들의 무기력한 신학 이론으로서는 그들의 추종자들을 충분히 감화시켜 비용을 내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러분의 선조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어놓은 교회들을 더럽히며, 정통 교회의 여러 기관들은 변절시켜 그들의 불경(不敬)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그들의 사상을 쉬운 말로 불경(不敬)이라고 칭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자기들의 사상을"현대 사상"이 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두 명칭은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그 두 가지 악한 명칭 중에서도 불경(不敬)이 덜 악하다 하겠는데, 그것은 명칭에 속임수가 덜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허락하셔서 교회들이 그러한 사악한 자들을 분별할 수 있게 하시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을 추방할 수 있게 하시 기를 간구합니다.
저는 때때로 요한과 같은 심정이 들곤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가장 사랑이 많았던 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진리를 위하여 가장 단호하였던 자였습니다. 한 번은 그가 목욕탕에 들어갔는데 그가 목욕탕 안에서 이단자 세린듀스(Cerinthus)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서둘러 그 건물을 뛰쳐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단자와 함께 동일한 장소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제를 나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함께 식사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이 엄하고 냉혹한 것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영감을 받아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 8). 요즈음 유행 하는 여성적인 표현을 빌어 우유부단하게 말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은밀하고 친절히 말하게 놔두며, 조용 조용히 기도하게 놔두십시오. 그 훌륭한 형제는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가진 것이 분명하며, 우리가 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도 우리가 믿는 것과 똑같은 것을 믿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만 용어에 있어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반역이며, 진리를 불신하는 행위이며' 영혼들을 잔해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지켜야 할 것이며, 믿음에 견고히 서며, 거짓 교사들 가운 데서 빠져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비와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잘못을 범하는 자들에게 대한 진정한 사랑은 그들의 잘못 속에서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아니요,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예수님께 충실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복음에 대한 깊은 애착심을 창조합니다. 특별히 우리 주님의 성품에 관한 여러 가지 교리에 관해서 그러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모퉁이의 머릿돌이라는 교리, 즉 그리스도 깨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그 대속의 교리에 대해서 특별히 더욱 그러하다고 여겨집니다. 대속의 교리를 접하는 자는 눈동자를 만지 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자는 우리 영혼의 유일한 소망을 강탈 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우리의 모든 위로와 장차의 기대를 그것으로부터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힘이 사도 바울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 힘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고, 그것이 또한 역으로 그의 내면에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힘은 모든 성도들에게 비례적으로 작용합니다. 이 힘은 모든 성도들의 내면에 다소간 작용하지만, 그 정도가 모두 다릅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원기는 폐병에 걸린 사람과 운동 선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도 중생한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지만, 그 정도가 같지는 않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완전히 움직여 질 때에는 그가 완전한 크리스천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러한 영향력 아래서 성장하고 있다면 그는 성장하는 크리스천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신실하게 영향을 받는다면 그는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는 전혀 크리스천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저는 믿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라고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영혼을 구원할 믿음이 못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뿌리를 내린 곳에서 반드시 사랑이 꽃을 피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은 아래의 몇 가지 사항에 비례하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을 느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아는 정도에 비례하여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연구하십시오. 깊이 탐구하고 그 비밀들을 깨달으십시오. 천사들도 그것을 살펴보기를 소원합니다. 그 사랑의 영원성을 살펴 보십시오─시작이 없습니다. 그 사랑의 불변성을 살펴 보십시오 변동이 없습니다. 그사랑의 무한성을살 펴보십시오 측량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의 영원성을 다시 살펴보십시오. 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사랑을 많이 생각하십시오.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가 어떠한지를 이해할 때까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그 사랑을 알게 되면, 그 사랑의 능력을 느끼기 시작할 것 입니다. 그 능력 또한 여러분이 그 사랑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비례할 것 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가슴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십니까? 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과로 향유(享有)하는 것은 더욱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셨으며, 여러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것을 때때로 생각하면 여러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까?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여러분 위에 머물러 있어 왔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호와의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던 다윗과 같이 여러분도 춤을 출 수 있으리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까? 아, 생각하고 거듭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위하여 흘린 핏방울 같았던 땀, 여러분을 위하여 쓴 가시 면류관, 여러분을 위한 못 자국들, 창 자국, 상처들, 파열된 심장 그 모든 것, 그 모든 것들이 원수였던 여러분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이 사랑에 여러분의 가슴이 얼마나 민감하고 부드럽게 반응하는가에 비례하여, 그 사랑이 여러분의 전 생애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영향력은 또한 여러분 속에 머물러 있는 은혜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을 지배하는 그 힘의 정도에 따라서 여러분 속에 머물고 있는 은혜를 측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 자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그분의 사랑의 힘을 잘 인식하므로 그들을 바라보는 그분의 눈길 만으로도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그 은혜를 준 그 사랑에 크게 감동할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에 놀랍도록 민감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적게 간직한 자는, 그런 자들이 결코 적지가 않습니다. 십자가의 이야기를 아무런 감정 없이 읽을 수 있으며, 아무런 감정 없이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할 수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리석 같이 차갑고 단단한 상태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품 또한 예수님의 사랑의 강권함을 느끼는데 있어서 상당한 관계가 있습니다. 더욱 많이 그리스도를 닮을수록 더욱 많이 그리스도의 강권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도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실 때 그분의 사랑이 지금 이 순간보다 더욱 충만하게 여러분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그 강권하시는 힘 아래 더욱 분명하게 놓일 것입니다.
첫 번째 대지에서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그 힘을 어디에서 느낄지라도 그 힘은 그 힘의 본래의 성질을 따라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힘들은 그것들의 본래적 특성을 따라서 작용합니다. 사랑의 힘은 사랑을 창조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와 같은 류의 사랑을 낳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것과 같이 행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실로 자기를 회생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낀다면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회생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6).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며 그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길 것입니다. 오, 나의 영혼이여, 그대가 주님을 이미 알았고 선택하였다면, 이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지 못할 것이요, 그대 앞에 놓인 길이 부요로 인도하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즉시 작별인사를 고할 것 입니다. "잘 가라 부(富)여." 또 그대 앞에 명예를 얻도록 인도하는 길이 있어 그대가 그 길을 택한다면 유명하게 되겠지만, 그것이 그리스도께 영광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대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낀다면 그대는 기꺼이 "잘 가라 명예여, 나는 차라리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겠다. 나의 유일한 생각은 나를 위하여 희생해 주신 그분을 위하여 나 자신을 회생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을 강권한다면 그 사랑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사랑하도록 하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랑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사랑이요, 그분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었던 자들, 그분의 손에서 그 어떤 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사랑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을 강권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요구할 아무런 권리가 없는 자들, 여러분에게서 무엇을 얻으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자들, 오히려 그 반대로 여러분의 비난 올 받기에 마땅한 자들을 특별히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보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저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 빈민가의 꾀죄죄한 아이들, 거리를 오염시키는 창녀들, 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가 또 다시 범죄를 반복하는 비열한 사람들, 이러한 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할 때 우리가 사랑해 주어야 할 타락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어떤 사람도 멸시하지 말고, 그 어떤 사람도 단념하지 말도록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불쌍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방법을 달리 어떻게 알겠습니까? 도무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 사악한 사람들, 때때로 여러분이 거리에서 만나면 피해버리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신성모독하며 불경스러운 사람들, 여러분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죄인의 괴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대한 그분의 사랑이 가장 비천하고 저속한 자들을 여러분이 사랑함으로써 반사 되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태양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빛이 되어 캄캄한 밤과 같은 세상을 비추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실제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은 관념적으로만 그리고 말만으로 사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행동으로 진리로 그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바쳐서 사랑의 사역과 봉사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물질은 구제물로 나누어 주며, 우리의 받는 고통을 인내하며, 우리의 신앙이 말 뿐 만이 아니라 거짓 없는 사실임을 명백히 하여야겠습니다. 우리는 전체로 불살라지기 위해 제단 위에 놓여진 번제의 황소와 같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오직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온전히 사로잡힐 수 있을 것인가 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남김이 없이 우리 주님을 섬기는 일에 우리의 모든 재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을까 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여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대지로, 지금까지 말씀 드린 강권하심은 사도 바울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 옳은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생각건대." 사랑은 눈멀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기는 사랑의 일들을 하면서도 차분하게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서는 올바르게 행할 수도 있으며, 원한다면 눈이 멀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건전한 판단력에 따라서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따사롭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그러나 그는 또한 냉정한 판단력을 덧붙입니다. "생각건대." 이성적 판단이 사랑의 기초가 될 때에 그 사람의 마음이 견고해지고 그의 행동이 고도의 귀감이 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그러합니다. 거기에는 판단의 확고한 기초가 있습니다.~사도 바울은 마음에 의심하지 않는 만큼 그 문제를 알아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또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만큼 감정을 배제하고 열정을 자제하여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의 판단은 차갑고 단단한 놋 제단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위에 타오르는 열정의 숯불을 피워놓았습니다. 그 숯불의 불길은 모든 것을 소멸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신앙은 지성과 열정 모두를 갖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이성적 판단이 항상 그 영혼의 지극히 강렬한 열정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그의 형제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러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행했던 모든 일에 대하여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정당한 이유를 든다면 첫째로, 그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인식하였습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즉." 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노력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깨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보증이며, 희생제물이며, 대속물이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독교에서 대속의 교리를 제거한다면, 계시라고 불릴 만한 것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고 저는 단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속의 교리는 우리의 거룩한 믿음의 본질이며, 심장이며, 머리며, 내장이며, 영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실제적인 사실로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믿음으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강렬한 사랑이 자라나왔었고,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강렬한 힘이 생겨났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가 설 자리에 대신 섰습니다. 오, 제가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지요. 그분이 저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이 저를 사로잡아 왔고, 저는 지금 이후로도 기꺼이 그분의 사랑의 포로가 되기 원합니다. 오, 거룩한 대속자시여, 저는 당신의 것이오며, 저의 가진 모든 것도 당신의 것이옵니다.
두 번째로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연합된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렇게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모든 자들아 그분의 죽음으로 죽었다는 의미인 것 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자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모든 자들이 죽은 것 입니다. 그분이 모든 자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모든 자들은 그분 안에서 죽고,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모든 자들이 그분 안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그 분이 살아 계시므로 모든 자들이 그분 안에서 살게 됩니다. 자, 보십시오.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리스도를 믿어온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것이며, 몸 된 그분의 지체들이 된 것입니다. 그 진리가 차갑게 설명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 속에 불을 품고 있는 부싯돌과도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면,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며, 자기 자아에 대하여,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오, 성령이시여, 우리 속에 이 죽음을 온전하게 이루어 주시옵소서. 사도 바울은 죽으시는 주님과 연합한 당연한 결과를 인식하며, 그대로 실행할 것을 결단합니다. 형제 여러분, 아담이 범죄했을 때 우리도 범죄하였고, 우리는 그런 사실의 결과를 체험하여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첫 번째 조상 아담의 행위로 말미암아 본질적인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그것이 사실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무덤으로 운구되는 모든 어린 아이들이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중인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린 아이들이 몸소 아담이 범한 그런 범죄를 범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아담 안에서 범죄한 것입니다. 자, 또한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 안에서 우리의 죄가 우리로 악을 행하도록 강력히 작용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그것도 우리로 선을 행하도록 강력히 역사함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제가 어떻게 제 자신을 위하여 살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미 2000년 이전에 죽었습니다. 저는 죽어서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세상에 대하여 살 수가 있겠습니까? 2000년 이전에 세상은 저를 죄인으로 체포하여 십자가에 매어 달았습니다. 아니 저 또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세상을 죄인으로 체포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세상을 죽은 죄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십자가에 못박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으며,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좋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실로부터, 이제 후로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고, 또한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행한 그것을 우리도 그분 안에서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습의 이기적 본성을 좇아 살 것이 아니요, 오직 주님께만 대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성적인 지식이 근저에 있고, 다음에 죽기까지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거룩한 힘에 모든 열정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음 사항들을 간단히 말씀드림으로 오늘의 설교를 끝맺고자 합니다. 첫 번째 사항은~사도 바울의 결론과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의 결론이 얼마나 다릅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단번에 죽으셨고 나를 구원할 사역을 완성하셨다면, 나는 구원받은 것이고 이제는 편안히 앉아서 즐기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애쓰고 수고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을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긍휼입니까! 그런데도 교회 의자의 구석에 앉아서 졸아야 합니까? 회심한 사람이 회심했다는 이유 때문에 침대 위에서 태만하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해야 하는 것입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광경이지만 한편은 너무나 보편적인 광경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 회심하지 못한 채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런 감정도 못 느끼는 사람들 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걸"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시든지 아니 하시든지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조금도 없는데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엄청나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일조차도 하지 않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제넘은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은혜에 이방인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요지가 우리 자신이 마음의 완악함과 이기심으로부터 구원받는데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많은 것을 하셨기 때문에, 지금 내가 그분을 위하여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은 악마의 결론입니다. 아니, 제가 그렇게 말한다면 악마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지경입니다. 왜냐하면 악마란 놈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낼 만큼 비열하지는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악마란 놈도 그렇게 혐오스러운 범죄를 시도하는 자리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그렇게도 많은 은혜의 빚을 진 자가, 그 은혜의 빚진 결과로 오직 이기적인 게으름만 피운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경멸할 만한 마지막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자녀는 결코 "내 영혼아. 평안히 쉬어라. 만사 잘 되어간다. 그 밖에 할 일이 무엇이 있는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라고 말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 드리면, 크리스천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의 행위보다 사도 바울의 행위가 얼마나 더 고상합니까? 제가 어느 누구를 판단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판단해 보기를 바라는 것 입니다. 어떤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들이 크리스천이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백성인지 아닌지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며, 열심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 삶의 주요한 생각은 그리스도도 아니요 그분을 예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부를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요, 그들의 모든 재능들이 그것을 향하여 굽어 있습니다. 또 다른 교회의 구성원들이 있는데 ~우리가 그들을 판단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금하십니다. 그들의 생각의 비중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그들이 성직자로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그러한 생각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그와 같은 자들의 주요한 야망은 그것이 아니라 더 고상한 것임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가장 주요한 목적은 자신의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마크를 달고 살며, 우리 하나님의 영광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썩어질 육신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셔야 한다는 목표가 추구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업에서, 우리의 학문에서, 모든 것에서 우리의 표어는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물질이나, 명예,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다는 것은 얼마나 더 고상한 일이겠습니까? 저는 지금 지혜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 드린 것을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는 또한 그것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영혼에 더욱 평안을 준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은 우리의 행위를 판단할 것이며, 그들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 혹독하게 판단할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가 열정적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자임을 안다면, 그들은 우리를 두고서 "왜 저러지. 저 사람 돌아버린 것 아니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말에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 말은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들이 "오, 당신은 고리타분하게 너무 근엄합니다. 당신의 표정이 얼마나 침통한지요"라고 말할지라도 우리가 "아, 그러나 그것이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요 나는 지금 정신이 건전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말에 상처받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동기가 전적으로 사심이 없는 것임을 여러분 자신이 알고 있다면 아무리 혹독한 비평을 받을지라도 조금도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면,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산다면 사람들이나 악마들의 모든 독설도 여러분을 결코 쓰러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오직 예수님만을 위하여 인생을 쓰는 것이 다른 어떤 삶보다 마지막에 회고해 볼 만한 가치가 더 있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칭한다면 돈 버는데 써버린 여러분의 삶은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침상에 누워 벗들을 모으고 여러분의 영혼은 하나님께 의탁할 날이 결코 멀지 않습니다. 자, 여러분의 방에 홀로 앉아서 여러분의 청지기 직의 마지막 대차대조표를 결산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한다면 어떻게 보실 것입니까? "나는 입으로 신자라고 신앙을 고백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나의 행위는 겉으로는 점잖고 존경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주된 목적은 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수천 파운드의 돈을 긁어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냈습니다." 여러분도 그것을 여러분의 삶의 목적으로 하여 살다가 잠들어 죽고 싶습니까? 아니면 이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겠습니까? "나는 사회 속에서 잘 처신하며 살았고, 빚진 것도 없으며, 내 가족을 위하여 얼마의 재산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마지막 회고로서 만족할 만한 것입니까? 형제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말씀 드리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과거의 삶을 회고해 봄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위로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힘을 느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의 은혜에 돌립니다. 저는 저의 전 존재를 주님의 온전한 영광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저의 허물과, 셀 수도 없는 저의 방황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강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을 그분 안에서 죽은 것으로 간주했고, 그 이후로 그분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저는 선한 싸움은 싸웠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가치가 있는 삶이라 여겨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권함을 받게 된다면 그 삶이 영웅적이며, 고상하고, 훌륭하게 될 것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그런 고상한 말들을 사용하지 않아야겠습니다~그러한 삶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입니다. 만일 진실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권함을 받는 자라면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며 모든 신자들이 살아야 할 삶이 그러한 삶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 처음 참석하신 분들과 형제 여러분이여, 만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을 강권하지 않는다면 여러분 스스로를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마지막 심판 때에 부족한 자로 발견되어 심판 받지 않도록 우리가 성령으로 우리의 가슴에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For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because we thus judge, that if one died for all, then were all dead.”— 2 Corinthians v. 14.
THE apostle and his brethren were unselfish in all that they did. He could say of himself and of his brethren that when they varied their modes of action they had ever the same object in view; they lived only to promote the cause of Christ, and to bless the souls of men. He says, “Whether we be beside ourselves, it is to God: or whether we be sober, it is for your cause.” Some may have said that Paul was too excitable, and expressed himself too strongly. “Well,” said he, “if it be so, it is to God.” Others may have noticed the reasoning faculty to be exceedingly strong in Paul, and may perhaps have thought him to be too coolly argumentative. “But,” said Paul, “if we be sober, it is for your cause.”
Viewed from some points the apostle and his co-labourers must have appeared to be raving fanatics, engaged upon a Quixotic enterprise, and almost if not quite out of their minds. One who had heard the apostle tell the story of his conversion exclaimed, “Paul, thou art beside thyself; much learning doth make thee mad;” and no doubt many who saw the singular change in his conduct, and knew what he had given up and what he endured for his new faith, had come to the same conclusion. Paul would not be at all offended by this judgment, for he would remember that his Lord and Master had been charged with madness, and that even our Lord’s relatives had said, “He is beside himself.” To Festus he had replied, “I am not mad, most noble Festus; but speak forth the words of truth and soberness”; and to Corinthian objectors he gave a still fuller reply. Blessed are they who are charged with being out of their mind through zeal for the cause of Jesus, they have a more than sufficient answer when they can say, “If we be beside ourselves, it is to God.” It is no unusual thing for madmen to think others mad, and no strange thing for a mad world to accuse the only morally sane among men of being fools and lunatics: but wisdom is justified of her children. If others assailed the apostle with another charge, and insinuated that there was a method in his madness, that his being all things to all men showed an excess of prudence, and was no doubt a means to an end, which end it is possible they hinted at was a desire for power, he could reply most conclusively, “If we be sober, it is for your cause.” Paul had acted so unselfishly that he could appeal to the Corinthian church and ask them to bear him witness that he sought not theirs but them, and that if he had judged their disorders with great sobriety it was for their cause. Whatever he did, or felt, or suffered, or spake, he had but one design in it, and that was the glory of God in the perfecting of believers and the salvation of sinners.
Every Christian minister ought to be able to use the apostle’s words without the slightest reserve; yea, and every Christian man should also be able to say the same: “If I be excited, it is in defence of the truth; if I be sober, it is for the maintenance of holiness: if I seem extravagant, it is because the name of Jesus stirs my inmost soul; and if I am moderate in spirit and thoughtful in mood, it is that I may in the wisest manner subserve the interests of my Redeemer’s kingdom.” God grant that weeping or singing, anxious or hopeful, victorious or defeated, increasing or decreasing, elevated or depressed, we may still follow our one design, and devote ourselves to the holy cause. May we live to see churches made up of people who are all set on one thing, and may those churches have ministers who are fit to lead such a people, because they also are mastered by the same sacred purpose. May the fire which fed of old on Carmel fall on our altar, whereon lieth the sacrifice, wetted a second and a third time from the salt sea of the world, until it shall consume the burnt sacrifice, and the wood, and the stones, and the dust, and lick up the water that is in the trench. Then will all the people see it, and fall upon their faces, and cry, “The Lord, he is the God; the Lord, he is the God.”
The apostle now goes on to tell us why it was that the whole conduct of himself and his co-labourers tended to one end and object. He says,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because we thus judge, that if one died for all, then the all died.” I give you here as exact a translation as I can.
Two things I shall note in the text: first, under constraint; secondly, under constraint which his understanding justified.
I. Our main point will come under the head “UNDER CONSTRAINT. Here is the apostle, a man who was born free, a man who beyond all others enjoyed the greatest spiritual liberty, glorying that he is under constraint. He was under constraint because a great force held him under its power.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I suppose “constraineth us” is about the best rendering of the passage that could be given; but it might be translated “restraineth.” The love of Christ restrains true believers from self-seeking, and forbids them to pursue any object but the highest. Whether they were beside themselves or sober, the early saints yielded to divine restraint, even as a good ship answers to her helm or as a horse obeys the rein. They were not without a restraining force to prevent the slightest subjection to impure motives. The love of Christ controlled them, and held them under its power. But the word “restrained” only expresses a part of the sense, for it means that he was “coerced or pressed,” and so impelled forward as one carried along by pressure. All around him the love of Christ pressed upon him as the water in a river presses upon a swimmer and bears him onward with its stream. Bengel, who is a great authority, reads it, “Keeps us employed”: for we are led to diligence, urged to zeal, maintained in perseverance, and carried forward and onward by the love of Jesus Christ. The apostles laboured much, but all their labour sprang from the impulse of the love of Jesus Christ. Just as Jacob toiled for Rachel solely out of love to her, so do true saints serve the Lord Jesus under the omnipotent constraint of love. One-eminent expositor reads the word, “containeth us,” as though it signified that the Lord’s servants were kept together and held as a band under a banner or standard ; and he very appropriately refers to the words of the church in the Song, “His banner over me was love.” As soldiers are held together by rallying to the standard, so are the saints kept to the work and service of their Lord by the love of Christ, which constrains them to endure all things for the elect’s sake, and for the glory of God, and like an ensign is uplifted high as the centre and loadstone of all their energies. In our Lord’s love we have the best motive for loyalty, the best reason for energy, and the best argument for perseverance.
The word may also signify “compressed,” and then it would mean that all their energies were pressed into one channel, and made to move by the love of Christ. Can I put restraint and constraint, and all the rest, into one by grouping them in a figure? I think I can. When a flood is spread over an expanse of meadow land, and stands in shallow pools, men restrain it by damming it up, and they constrain it to keep to one channel by banking it in. Thus compressed it becomes a stream, and moves with force in one direction. See how it quickens its pace, see what strength it gathers; it turns yonder wheel of the mill, makes a sheep wash, leaps as a waterfall, runs laughing through a village as a brook wherein the cattle stand in the summer’s sun. Growing all the while it developes into a river, bearing boats and little ships; and this done, it still increases, and stays not till it flows with mighty flood into the great sea. The love of Christ had pressed Paul’s energies into one force, turned them into one channel, and then driven them forward with a wonderful force, till he and his fellows had become a mighty power for good, ever active and energetic. “The love of Christ,” saith he, “constraineth us.”
All great lives have been under the constraint of some mastering principle. A man who is everything by turns and nothing long is a nobody: a man who wastes life on whims and fancies, leisures and pleasures, never achieves anything: he flits over the surface of life and leaves no more trace upon his age than a bird upon the sky; but a man, even for mischief, becomes great when he becomes concentrated. What made the young prince of Macedon Alexander the Great but the absorption of his whole mind in the desire for conquest. The man was never happy when he was at ease and in peace. His best days were spent on the battle field or on the march. Let him rush to the forefront of the battle and make the commonest soldier grow into a hero by observing the desperate valour of his king, and then you see the greatness of the man. He could never have been the conqueror of the world if the insatiable greed of conquest had not constrained him. Hence come your Cæsars and your Napoleons — they are whole men in their ambition, subject to the lust of dominion. When you carry this thought into a better and holier sphere the same fact is clear. Howard could never have been the great philanthropist if he had not been strangely under the witchery of love to prisoners. He was more happy in an hospital or in a prison than he would have been at Court or on the sofa of the drawing room. The man could not help visiting the gaols, he was a captive to his sympathy for men in bondage, and so he spent his life in seeking their good. Look at such a man as Whitfield or his compeer Wesley. Those men had but one thought, and that was to win souls for Christ; their whole being ran into the one riverbed of zeal for God, and made them full and strong as the rushing Rhone. It was their rest to labour for Christ: it was their honour to be pelted while preaching and to be calumniated for the name of Jesus; a bishopric and a seat in the House of Lords would have been the death of them; even a throne would have been a rack if they must have ceased hunting for souls. The men were under the dominion of a passion which they could not withstand, and did not wish to weaken. They could sing—
“The love of Christ doth me constrain To seek the wandering souls of men; With cries, entreaties, tears, to save, To snatch them from the fiery wave.”
Their whole life, being, thought, faculty, spirit, soul, and body became one and indivisible in purpose, and their sanctified manhood was driven forward irresistibly, so that they might be likened to thunderbolts flung from the eternal hand, which must go forward till their end is reached. They could no more cease to preach than the sun could cease shining or reverse his course in the heavens. Now, this kind of constraint implies no compulsion, and involves no bondage. It is the highest order of freedom; for when a man does exactly what he likes to do, if he wants to express the enthusiastic joy and delight with which he follows his pursuit, he generally uses language similar to that of my text. “Why,” saith he, “I am engrossed by my favourite study; it quite enthrals me; I cannot resist its charms, it holds me beneath its spell.” Is the man any the less free? If a man gives himself up to a science, or to some other object of pursuit, though he is perfectly free to leave it -whenever he likes, he will commonly declare that he cannot leave it; it has such a hold upon him that he must addict himself to it. You must not think, therefore, that when we speak of being under constraint from the love of Christ we mean by it that we have ceased to exercise our wills, or to be voluntary agents in our service. Far from it, we own that we are never so free as when we are under bonds to Christ. No, our God does not constrain us by physical force; his cords are those of love, and his bands are those of a man. The constraint is that which we are glad to feel; we give a full assent to its pressure, and therein lies its power. We rejoice to admit that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we only wish the constraint would increase every day.
We have seen that Paul had a great force holding him: we advance a step further and note that the constraining force was the love of Christ. He does not speak of his love to Christ: that was a great power too, though secondary to the first; but he is content to mention the greater, for it includes the less: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that is, Christ’s love to us is the master force. And O, brethren, this is a power to which it is joy to submit: this is a force worthy to command the greatest minds. “The love of Christ.” Who shall measure this omnipotent force? That love, according to our text, is strongest when seen in his dying for men. Mark the context “because we thus judge, that if one died for all.” The peculiar display of the love of Christ which had supreme sway over Paul was the love revealed in his substitutionary death. Think of it a moment. Christ the ever blessed, to whom no pain, nor suffering, nor shame could come, loved men. O singularity of love! He loves guilty men, yea, loves his enemies! Loving poor fallen men, he took their nature and became a man. Marvellous condescension! The Son of God is also Son of Mary, and being found in fashion as a man he humbles himself, and is made of no reputation. See him taken before human judges and unjustly condemned; seized by Roman lictors and lashed with the scourge! Gazing a little longer, you see him nailed to a gibbet, hung up for a felon, left amid jeer and jibe and cruel glance and malicious speech to bleed away his life, till he is actually dead, and laid in the grave. At the back of all this there is the mystery that he was not only dying, but dying in the stead of others, bearing almighty wrath, enduring that dread sentence of death which is attached to human sin. Herein is love indeed, that the infinitely pure should suffer for the sinful, the just for the unjust, to bring us to God. Love did never climb to so sublime a height as when it brought Jesus to the bloody tree to bear the dread sentence of inexorable law. Think of this love, beloved, till you feel its constraining influence. It was love eternal, for long before the earth was fashioned the eternal Word had set his eye upon his people, and their names were graven on his heart. It was love unselfish, for he had nothing to gain from his redeemed; there were harps enough in heaven and songs enough in the celestial city without their music. It was love most free and spontaneous, for no man sought it, or so much as dreamed thereof. It was love most persevering, for when man was born into the world and sinned, and rejected Christ, and he came to his own and his own received him not, he loved them still, loved them even to the end. It was love,— what shall I say of it? If I were to multiply words I might rather sink your thoughts than raise them: it was love infinite, immeasurable, inconceivable! It passeth the love of women, though the love of mothers is strong as death, and jealousy is cruel as the grave. It passes the love of martyrs, though that love has triumphed over the fury of the flame. All other lights of love pale their ineffectual brightness before this blazing sun of love, whose warmth a man may feel but upon whose utmost light no eye can gaze. He loved us like a God. It was nothing less than God’s own love which burned within that breast, which was bared to the spear that it might redeem us from going down into the pit. It is this force, then, which has taken possession of the Christian’s mind, and as Paul says, “constraineth us.”
Now we may advance another step and say that the love of Christ operates upon us by begetting in us love to him. Brethren beloved, I know you love our Lord Jesus Christ, for all his people love him. “We love him because he first loved us.” But what shall I say? There are scarcely any themes upon which I feel less able to speak than these two– the love of Christ to us and our love to him, because somehow love wanteth a tongue elsewhere than this which dwells in the mouth. This tongue is in the head, and it can therefore tell out our thoughts; but we need a tongue in the heart to tell out our emotions, which have now to borrow utterance from the brain’s defective orator. There is a long space between the cool brain and the blazing heart, and matters cool on the road to the tongue, so that the burning heart grows weary of chill words. But oh, we love Jesus; brothers and sisters, we truly love him. His name is sweet as the honeycomb, and his word is precious as the gold of Ophir. His person is very dear to us: from his head to his foot he is altogether lovely. When we get near him and see him at the last, methinks we shall swoon away with excess of joy at the sight of him, and I for one ask no heaven beyond a sight of him and a sense of his love. I do not doubt that we shall enjoy all the harmonies, and all the honours, and all the fellowships of heaven, but if they were all blotted out I do not know that they would make any considerable difference to us, if we may but see our Lord upon his throne, and have his own prayer fulfilled, “Father, I will that they also whom thou hast given me be with me where I am, that they may behold my glory.” He is happiness to us, yea, he is all in all. Do you not feel that the sweetest sermons you ever hear are those which are fullest of him? When I can sometimes hear a sermon it sickens me to listen to fine attempts to philosophise away the gospel, or to pretty essays which are best described as a jingle of elegant words: but I can hear with rapture the most illiterate and blundering brother if his heart burns within him, and he heartily speaks of my Lord, the Well-beloved of my soul. We are glad to be in the place of assembly when Jesus is within; for whether on Tabor with two or three, or in the congregation of the faithful, when Jesus is present it is good to be there. This joyful feeling when you hear about Jesus shows that you love his person; and your endeavours to spread the gospel show that you love his cause. The love of Christ to you has moved you to desire the coming of his kingdom, and you feel that you could give your life to extend the borders of his dominions, for he is a glorious King, and all the world should know it. Oh that we could see all the nations bowing before his sceptre of peace. We love him so much that till the whole earth smiles in the light of his throne we can never rest.
As to his truth, a very great part of our love to Christ will show itself by attachment to the pure gospel. I have not much patience with a certain class of Christians nowadays who will hear anybody preach so long as they can say, “He is very clever, a fine preacher, a man of genius, a born orator.” Is cleverness to make false doctrine palatable? Why, sirs, to me the ability of a man who preaches error is my sorrow rather than my admiration. I cannot endure false doctrine, however neatly it may be put before me. Would you have me eat poisoned meat because the dish is of the choicest ware? It makes me indignant when I hear another gospel put before the people with enticing words, by men who would fain make merchandise of souls; and I marvel at those who have soft words for such deceivers. “That is your bigotry,” says one. Call it so if you like, but it is the bigotry of the loving John who wrote — “If there come any unto you, and bring not this doctrine, receive him not into your house, neither bid him God speed: for he that biddeth him God speed is partaker of his evil deeds.” I would to God we had all more of such decision, for the lack of it is depriving our religious life of its backbone and substituting for honest manliness a mass of the tremulous jelly of mutual flattery. He who does not hate the false does not love the true; and he to whom it is all the same whether it be God’s word or man’s, is himself unrenewed at heart. Oh, if some of you were like your fathers you would not have tolerated in this age the wagon loads of trash under which the gospel has been of late buried by ministers of your own choosing. You would have hurled out of your pulpits the men who are enemies to the fundamental doctrines of your churches, and yet are crafty enough to become your pastors and undermine the faith of a fickle and superficial generation. These men steal the pulpits of once orthodox churches, because otherwise they would have none at all. Their powerless theology cannot of itself arouse sufficient enthusiasm to enable them to build a mousetrap at the expense of their admirers, and therefore they profane the houses which your sires have built for the preaching of the gospel, and turn aside the organisations of once orthodox communities to help their infidelity: I call it by that name in plain English, for “modern thought” is not one whit better, and of the two evils I give infidelity the palm, for it is less deceptive. I beg the Lord to give back to the churches such a love to his truth that they may discern the spirits, and cast out those which are not of God. I feel sometimes like John, of whom it is said that, though the most loving of all spirits, yet he was the most decided of all men for the truth; and when he went to the bath and found that the heretic, Cerinthus, was there, he hurried out of the building, and would not tarry in the same place with him. There are some with whom we should have no fellowship, nay, not so much as to eat bread; for though this conduct looks stern and hard, it is after the mind of Christ, for the apostle spake by inspiration when he said, “If we or an angel from heaven preach to you any other gospel than that ye have received, let him be accursed.” According to modern effeminacy he ought to have said, “Let him be kindly spoken with in private, but pray make no stir. No doubt the good brother has his own original modes of thought, and we must not question his liberty. Doubtless, he believes the same as we do, only there is some little difference as to terms.” This is treason to Christ, treachery to truth, and cruelty to souls. If we love our Lord we shall keep his words, and stand fast in the faith, coming out from among the false teachers; nor is this inconsistent with charity, for the truest love to those who err is not to fraternise with them in their error, but to be faithful to Jesus in all things.
The love of Jesus Christ creates in men a deep attachment to the gospel, especially to the doctrines which cluster around the person of our Lord; and I think more especially to that doctrine which is the corner stone of all, namely, that Christ died in the stead of men. He who toucheth the doctrine of substitution toucheth the apple of our eye: he who denies it robs our soul of her only hope, for thence we gather all our consolation for the present and our expectation for days to come. A great force, then, held the apostle: that force was the love of Christ, and it wrought in him love to Christ in return.
Now, this force acts proportionately in believers. It acts in every Christian more or less, but it differs in degree. We are all of us alive, but the vigour of life differs greatly in the consumptive and the athletic, and so the love of Jesus acts upon all regenerate men, but not to the same extent. When a man is perfectly swayed by the love of Christ he will be a perfect Christian: when a man is growingly under its influence he is a growing Christian; when a man is sincerely affected by the love of Christ he is a sincere Christian; but he in whom the love of Christ has no power whatever is not a Christian at all. “I thought,” says one, “that believing was the main point.” True, but faith worketh by love, and if your faith does not work by love it is not the faith which will save the soul. Love never fails to bloom where faith has taken root.
Beloved, you will feel the power of the love of Christ in your soul in proportion to the following points. In proportion as you know it. Study, then, the love of Christ: search deep and learn its secrets. Angels desire to look into it. Observe its eternity— without beginning, its immutability— without change, its infinity— without measure, its eternity— without end. Think much of the love of Christ, till you comprehend with all saints what are its breadths and lengths, and as you know it you will begin to feel its power. Its power will also be in proportion to your sense of it. Do you feel the love of God shed abroad in your heart by the Holy Ghost? Knowing is well, but enjoyment as the result of believing is better. Does it not sometimes force the tears from your eyes to think that Jesus loved you and gave himself for you? On the other hand does it not at times make you feel as if, like David, you could dance before the ark of the Lord, to think that the love of God should ever have been set on you, that Christ should die for you? Ah, think and think again: for you the bloody sweat, for you the crown of thorns, for you the nails, the spear, the wounds, the broken heart,— all, all for love of you who were his enemy! In proportion as your heart is tender and is sensitive to this love it will become a constraining influence to your whole life. The force of this influence will also depend very much upon the grace which dwells within you. You may measure your grace by the power which the love of Christ has over you. Those who dwell near their Lord are so conscious of his power over them that the very glances of his eyes fill them with holy ardour. If you have much grace you will be greatly moved by the love which gave you that grace, and wondrously sensitive to it, but he who hath little grace, as is the case with not a few, can read the story of the cross without emotion, and can contemplate Jesus’ death without feeling. God deliver us from a marble heart, cold and hard. Character also has much to do with the measure in which we feel the constraint of Jesus’ love: the more Christlike the more Christ-constrained. You must get, dear brother and sister, by prayer, through the Holy Spirit, to be like Jesus Christ, and when you do, his love will take fuller possession of you than it does at this moment, and you will be more manifestly under its constraining power.
Our last point upon this head is that wherever its energy is felt it will operate after its kind. Forces work according to their nature: the force of love creates love, and the love of Christ begets a kindred love. He who feels Christ’s love acts as Christ acted. If thou dost really feel the love of Christ in making a sacrifice of himself thou wilt make a sacrifice of thyself. “Hereby perceive we the love of God, because he laid down his life for us: and we ought to lay down our lives for the brethren.” We shall for our Lord’s sake count all things but dross for the excellency of his knowledge. O soul, thou wilt have no choice left after thou hast once known and chosen thy Lord. That road leads to wealth, but if it does not glorify Christ thou wilt at once say, “Farewell wealth.” That road leads to honour; thou wilt be famous if thou wilt take that path; but if it will bring no glory to Christ, if thou feelest the power of his love in thy soul, thou wilt say, “Farewell honour: I will embrace shame for Christ, for my one thought is to sacrifice myself for him who sacrificed himself for me.”
If the love of Christ constrain you it will make you love others, for his was love to others, love to those who could do him no service, who deserved nothing at his hands. If the love of Christ constrain you, you will specially love those who have no apparent claim upon you, and cannot justly expect anything from you, but on the contrary deserve your censure. You will say, “I love them because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me.” Dirty little creatures in the gutter, filthy women polluting the streets, base men who come out of jail merely to repeat their crimes,— these are the fallen humanities whom we learn to love when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I do not know how else we could care for some poor creatures, if it were not that Jesus teaches us to despise none and despair of none. Those ungrateful creatures, those malicious creatures, those abominably blasphemous and profane creatures whom you sometimes meet with and shrink from, you are to love them because Christ loved the very chief of sinners. His love to you must be reflected in your love to the lowest and vilest. He is your sun, be you as the moon to the world’s night.
The love of Jesus Christ was a practical love. He did not love in thought only and in word, but in deed and in truth, and if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we shall throw our souls into the work and service of love; we shall be really at work for men, giving alms of our substance, enduring our measure of suffering, and making it clear that our Christianity is not mere talk, but downright work; we shall be like the bullock of the burnt offering, laid upon the altar wholly to be consumed; we shall consider nothing but how we can most completely be eaten up with the zeal of God’s house, how without the reserve of one single faculty we may be entirely consumed in the service of our Lord and Master. May the Lord bring us to this.
II. THE CONSTRAINT OF WHICH WE HAVE SPOKEN WAS JUSTIFIED BY THE APOSTLE’S UNDERSTANDING.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because we thus judge” Love is blind. A man may say that in the affairs of love he exercises a calm discretion, but I take leave to doubt it. In love to Christ however you may be carried right away and be as blind as you like, and yet you shall act according to the soundest judgment. The apostle saith warmly,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and yet he adds with all coolness, “because we thus judge.” When understanding is the basis of affection, then a man’s heart is fixed and his conduct becomes in a high degree exemplary. So it is here. There is a firm basis of judgment,— the man has weighed and judged the matter as much as if the heart were out of the question; but the logical conclusion is one of all-absorbing emotion and mastering affection as much as if the understanding had been left out of the question. His judgment was as the brazen altar, cold and hard, but on it he laid the coals of burning affection, vehement enough in their flame to consume everything. So it ought to be with us. Religion should be with a man a matter of intellect as well as of affection, and his understanding should always be able to justify the strongest possible passion of his soul, as the apostle says it did in the case of himself and brethren. They had reasons for all that they did. For, first, he recognized substitution: “We thus judge, that if one died for all.” 0 brethren, this is the very sinew of Christian effort— Christ died in the sinner’s stead. Christ is the surety, the sacrifice, the substitute, for men. If you take the doctrine of vicarious sacrifice out of the Christian religion I protest that nothing is left worth calling a revelation. It is the heart, the head, the bowels, the soul, the essence of our holy faith,— that the Lord hath laid on him the iniquity of us all, and with his stripes we are healed. The apostle firmly believed this to be a matter of fact, and then out of his belief there grew an intense love to Jesus, as well there might. Did Jesus stand in my stead? Oh, how I love him. Did he die for me? Then his love hath mastered me, and henceforth it holds me as its willing captive. O sacred Substitute, I am thine, and all that I have.
In the next place he recognised union to Christ, for, said he, “If one died for all, then the all died,” for so it runs, that is to say the all for whom Christ died in his death. His dying in their stead was their dying; he dies for them, they die in him; he rises, they rise in him; he lives, they live in him. Now if it be really so, that you and I who have believed in Christ are one with Christ, and members of his body, that truth may be stated coolly, but like the flint it conceals a fire within it; for if we died in Jesus, we are henceforth dead to the world, to self, to everything but our Lord. O Holy Spirit, work in us this death even to the full. The apostle recognises the natural consequence of union with the dying Lord, and resolves to carry it out. Brethren, when Adam sinned we sinned, and we have felt the result of that fact; we were constituted sinners by the act of our first representative, and every day we see it to be so: every little child that is carried to the grave bears witness that death passeth upon all men, for that all have sinned in Adam, even though they have not personally sinned after the similitude of his transgression. Now, just as our sin in Adam effectively operates upon us for evil, so must our death with Christ effectively operate upon our lives for good. It ought to do so. How can I live for myself? I died more than eighteen centuries ago. I died and was buried, how can I live to the world? Eighteen hundred years ago and more the world hung me up as a malefactor; ay, and in my heart of hearts I have also crucified the world, and henceforth regard it as a dead malefactor. How shall I fall in love with a crucified world, or follow after its delights? We thus died with Christ. “Now,” saith the apostle,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because we thus judge, that if one died for all, then the all died.” All who were in Christ, for whom he died, died when he died, and what follows from it, but that henceforth they should not live unto themselves, but unto him that died for them, and rose again? We are one with Christ, and what he did for us we did in him, and therefore we are dead because he died; hence we ought no longer to live in the old selfish way, but should live to the Lord alone. There is the basis upon which the intellect rests, and then the affections yield themselves to the sacred force of Jesus’s dying love.
I close with the following reflections, putting them very briefly. The first reflection is,— how different is the inference of the apostle from that of many professors. They say, “If Christ died once for all, and so finished the work of my salvation, then I am saved, and may sit down in comfort and enjoy myself, for there is no need for effort or thought.” Ah, what a mercy to feel that you are saved, and then to go to sleep in the corner of your pew. A converted man, and therefore curled up upon the bed of sloth! A pretty sight surely, but a very common one. Such people have but little or no feeling for others who remain unconverted. “The Lord will save his own,” say they, and they little care whether he does so or not. They appear to be dreadfully afraid of doing God’s work, though there is not the slightest need for such a fear, since they will not even do their own work. These are presumptuous persons, strangers to the grace of God, who know not that a main part of salvation lies in our being saved from selfishness and hardness of heart. It is the devil’s inference, that because Christ did so much for me I am now to do nothing for him; I must even beg the devil’s pardon, for I scarcely think that even he is base enough to draw such an inference from the grace of God. Assuredly he has never been in a position to attempt so detestable a crime. It is to the last degree unutterably contemptible that a man who is indebted to the Lord Jesus Christ for so much should then make the only consequence of his indebtedness to be a selfish indolence. Never will a true child of God say, “Soul, take thine ease: thou art all right: what matters anything else?” Oh no,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How much more ennobling, again, is such conduct as that of the apostle than that of many professed Christians? I am not about to judge any one, but I would beg you to judge yourselves. There are some, and I would try to hope that they may be Christians— the Lord knoweth them that are his — who do give to the cause of God, who do serve God after a fashion; but still the main thought of their life is not Christ nor his service, but the gaining of wealth. That is their chief object, and towards it all their faculties are bent. There are other church members success in — their God profession forbid we should I am judge not condemning them— whose their great having thought such is a thought, but the chief ambition of the apostle and of those like him was not this, but something higher. The chief aim of all of us should be nothing of self, but serving Christ. We are to be dead to everything but our Lord’s glory, living with this mark before us, this prize to be strained after, that Christ shall be glorified in our mortal bodies. In our business, in our studies, in everything, our motto must be, Christ, Christ, Christ. Now, is it not a far more noble thing for a man to have lived wholly unto Christ than for mammon, or honour, or for himself in any shape? I speak as unto wise men, judge ye what I say. Do you not think also that such a pursuit as this is much more peace giving to the spirit? People will judge our conduct, and they are sure to judge as severely as they can: if they see us zealous and self-denying they will say of us, “Why, the man is beside himself.” This will not matter much to us if we can reply, “It is for God”; or if they say, “Oh, you old sobersides; how grave you are,” we shall not be offended, if we can reply, “Ah, but it is for the good of others I am sober.” You will be very little distressed by sharp criticisms if you know that your motive is wholly unselfish. If you live for Christ, and for Christ alone, all the carpings of men or devils will never cast you down.
Do you not think that a life spent for Jesus only is far more worth looking back upon at the last than any other? If you call yourselves Christians how will you judge a life spent in money-making? It cannot be very much longer before you must gather up your feet in the bed and resign your soul to God. Now, suppose yourself sitting in your chamber all alone, making out the final balance-sheet of your stewardship, how will it look if you have to confess, “I have been a Christian professor; my conduct has been outwardly decent and respectable, but my chief purpose was not my Master’s glory. I have lived with the view of scraping together so many thousands, and I have done it.” Would you like to fall asleep and die with that as the consummation of your life? Or shall it be, “I have lived to hold up my head in society and pay my way and leave a little for my family”? Will that satisfy you as your last reflection? Brethren, we are not saved by our works, but I am speaking now upon the consolation which a man can derive from looking back upon his life. Suppose he shall have felt the power of my text, and shall be able to say, “I have been enabled by the grace of God, to which I give all the glory, to consecrate my entire being to the entire glorification of my Lord and Master; and whatever my mistakes, and they are many, and my wanderings and failures, and they are countless, yet the love of Christ has constrained me, for I judged myself to have died in him, and henceforth I have lived to him. I have fought a good fight. I have kept the faith.” Why, methinks it were worth while so to die. To be constrained by the love of Christ creates a life heroic, exalted, illustrious: no, I must come down from such lofty words— it is such a life as every Christian ought to live; it is such a life as every Christian must live if he is really constrained by the love of Christ, for the text does not say the love of Christ ought to constrain us, it declares that it does constrain us. Men and brethren, if it does not constrain you, judge yourselves, that ye be not judged and found wanting at the last. God grant we may feel the love of God shed abroad in our hearts by the Holy Ghost.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