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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LNCK 2020. 7. 24. 16:01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마20:11~12                             묵상글 스크랩

 

“품삯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마20:11-12

 

 

▶어머니는 피난 내려와 행상으로 여섯 식구의 생계를 도맡으셨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 끝에

“휴우, 너희 4명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쪼르르 학교 다닐 때엔 밤에

 

‘내일은 또 어떻게 애들을 먹일 수 있으려나!’ 싶어

가슴이 활랑활랑하여 잠 못 이룬 적이 많았지” 하셨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살이의 면모가 눈앞에 확연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아르바이트 한번 하지 않고 4년제 사립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사랑하는 님을 따라간다며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고생해서 대학공부까지 시켰으니 벌어서 갚고 들어가라 하시기는커녕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명(순종)해야지” 하시며 허락하셨다.

 

위 본문에서, 이른 아침에 선택되어 일터로 간 행운의 일꾼들은

오후 5시가 되도록 아무도 자신을 일꾼으로 뽑아가지 않아

(‘내 자식들을 어떻게 먹일꼬!’ 하며)

애간장을 태우던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  *주제

 

전자는 뙤약볕 아래서 일을 하되,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을 확실한 희망을 갖고 있었으나

후자는 가진 것도, 체력도, 재주도 없어 뽑히지 못해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에 싸여 희망 없이 지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 곧 하나님 아버지는 그 점을 너무도 잘 아셨기에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20:13) 정의를 세우셨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도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일꾼처럼 가족과 함께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하고

추위를 가릴 옷과 집이 필요하다.

 

먼저 온 일꾼들은 주인의 후한 처사를 시기함으로써

스스로 꼴찌의 자리에 선 것은 아니었을까?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영국의 뛰어난 미술 평론가이자 사회 사상가인 러스킨은

연민과 도덕이 결여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개인과 사회에 가져오는 큰 해악을 격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늘 들려주시는 비유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 비유의 정신이야말로 효율성을 앞세워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당시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열쇠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려 한 책을

본문의 한 구절을 따와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마20:12

 

이 책은 인도의 간디의 삶과 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또한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의 상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 하나를 대할 때 이를 직감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인류의 마음을 지배해 온 갖가지 망상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기묘한,

어쩌면 가장 명예롭지 못한 망상은,

사회적 행동의 규범은,

사회적 애정의 작용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결정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른바 경제학이라는 근대의 학문일 것이다.”

 

러스킨은 ‘세상의 셈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셈법’을 선택하지 않으면

사회는 점점 더 비인간화로 치달으면서 인간성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예언자적 직관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셈법은,

사람을 소모품이자 이윤을 내는 도구로만 생각하는 ‘경제학’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오늘 비유는 예수님 시대나 러스킨 시대보다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할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만큼 ‘세상의 셈법’에 젖어 있던 적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의 잘못된 통념에서

우리의 생각을 되돌리는 ‘회심’의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은 일자리를 잃거나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가운데

인격적 존엄을 침해받는 이웃의 처지를 대할 때,

 

경제 논리가 아니라 연민과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가 아닙니다.

 

한 소년이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끙끙대고 있는데,

교리 선생님이 탐스런 사과 하나를 손에 들고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이 빨간 사과 한 개에 다 담겨 있단다. 갖고 싶지 않니?”

 

소년은 벌떡 일어나 사과를 움켜잡으려고 손을 뻗쳤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소년의 손은 사과에 닿지 않았습니다.

 

펄쩍 뛰었습니다.

하지만 키 큰 선생님이 들고 있는 사과까지 닿기에는 너무 멀었습니다.

 

그래서 더 높이 뛰었습니다. 뛰고, 뛰고 또 뛰고...

그러나 이 소년은 사과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과까지는 닿기에는 자신의 키가 너무 작았던 것이지요.

 

미친 듯이 뛰던 소년은 이제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그래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움켜쥔 두 손을 자기도 모르게 벌려 앞으로 내 밀었습니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들고 있던 사과를 소년의 손바닥 위로 툭 떨어뜨렸답니다.

 

사과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두 손을 가지런히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사과를 취하고자 계속해서 뛰었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