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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하시던 대로

LNCK 2020. 8. 13. 18:33

◑늘 하시던 대로                                  눅4:16                               2020.08.09. 출처

 

설교 "자유의 복음을 선포하시다" 중 전반부 녹취

 

 

우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황' 이고, 두 번째는 '소명' 입니다.

 

의미 없는 인생을 산 사람은 언제나 상황에 이끌리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주는 영향력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명에 집중하는 인생은 어떠한 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상황에 이끌리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소명에 이끌리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날마다 이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야 합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성질의 기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온도계 이고, 또 하나는 온도 조절기 입니다.

 

온도계는 말 그대로 현재 그 공간의 온도가 몇 도인지

그 온도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계입니다.

 

반면에 온도 조절기는 그 온도를 바꿈으로써

그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기기입니다.

 

상황에 이끌리는 인생은 온도계와 같은 인생이죠. 상황에 휩쓸립니다. 그저 상황을 반영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온도조절기와 같은 인생은 상황을 변화시키는 인생이죠.

 

상황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명과 사명에 집중하는 인생은

상황을 이기는 인생을 살게 되는 거죠.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집중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곳, 그 밟으신 땅의 바운더리를 계산해 보면 50KM 반경을 넘지 않았습니다.

아주 좁은 지역에서 사셨죠.

물론 걸어서 여행하는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그다지 많은 지역을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또 짧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33세의 생애!

그중에 공생애는 3년 반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 성취했다.. 여한이 없다, 내 인생에는 후회가 없다! 의미 없는 삶이 없었다!

그것이 '다 이루었다'는 고백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명에 집중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황을 이기셨습니다.

 

"사명"으로 환경을 이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의 사명을 선언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직업이 목수였고,

예수님 또한 목수의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나사렛은 신흥도시, 요즘으로 말하면 신도시였습니다.

많은 건축들이 이루어졌고, 또 예수님의 직업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족은 나사렛이나 가버나훔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 회당에 출석 하셨습니다.

 

회당은, 예수님의 어린시절부터 청소년시절, 또 청년시절을 지나신 곳입니다.

바로 그 회당에서 성경을 읽는 일에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참여 하신 것입니다.

 

눅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여기서 "늘 하시던 대로"  as was His custom

이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청년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늘 회당에 출석하시며 성경을 읽고 듣고 또 가르치기도 하셨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큰 두 개의 신앙의 중심지는 성전과 회당 인데요.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 침입 때 완전히 훼파 됐죠.

 

그 이후로는 이스라엘의 신앙의 중심은 회당이었고 (회당은 바벨론 포로기에 바벨론에서 시작됨)

그 회당의 중심은 말씀을 읽고 낭독하고 또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녀셨던 회당에, 중심이 되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위선과 외식과 또한 영적으로 하나님으로서 멀어져 있는지를

예수님께서 보시고 '화 있을진저!' 이렇게 지적하시고 또 책망하신 것을 통해서 보면

성령 충만함,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기 어려웠던 시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회당의 질서에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참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대화하셨습니다.

그 율법학자들이 놀랄 정도로 예수님의 지식이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20대 시절은 얼마나 더 성숙해지고, 얼마나 더 깊이가 있었고,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성령의 능력을 받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그 능력이 제일 먼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늘 하시던 대로"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예루살렘에 다녀오셔서 나사렛에서 쭉 잘 자라셔서

12살에서 30세에 이르는 그 18년 기간 동안도

늘 하시던 대로 회당의 질서에 참석하시며, 말씀을 듣고, 또 말씀을 배우셨다는 겁니다.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까요?

 

▲전 20대 때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고, 말씀을 배웠고,

'아~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것이구나!'

 

유아세례를 받고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이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제가 20대 때 체험했어요.

 

그때부터 제게 또 한편으로 제 안에 교만의 역사가 시작됐어요.

제가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으니까 제일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이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가 제 귀에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목사님은 어떻게 저렇게 설교를 못 하시나?'

'어떻게 나를 잠 재울 수가 있나!'

'이렇게 감동적인 말씀을 저렇게 밖에 못 전하실까!'

그래서 목사님들에 대한 불만이 꽉 차 있었어요.

 

어느 목사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이군, 이군의 눈에는 교만이 서려 있어!'

그 말조차도 저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이렇게 무식한 목사님이 있나?' 속으로 판단했어요.

입으로 말 하지는 않았어요.

그게 제 20대의 모습이었어요.

 

기존의 교회의 모든 그 모습들이 제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막 뛰쳐나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던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군대 가서 복무를 했습니다.

전방을 지키는, 임진강을 지키는 소대장 이었는데

 

외딴 곳에 독립된 부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없어서

제가 이제 그 20대의 성령충만한 제가

부대원 중에서 예배 드리고 싶은 사람들을 다 불러모았어요.

 

한 10여명을 모아서 제가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처음으로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장병들은 모두 잤습니다.

한 사람도 깨어서 듣는 사람이 없이

다들 눈감고 꾸벅꾸벅 하거나, 좌우로 쳐져서 자는 모습을 제가 보면서

'이렇게 성령 충만한 설교를 듣고서 자다니!'

 

아무리 속으로 고함 쳐도 장병들은 계속 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장병들이 피곤해서 그랬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제가 비판했던 목사님들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설교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구나!'

교만했던 제 모습이 주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비판의 눈이 이제 제대로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어릴적부터 이 때까지 계속 출석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 개혁되어야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전해지고 가르쳐 지는 교회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파괴적인 태도로 교회를 무너뜨려선 안 돼요.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도 여러 목사님들이 와서 설교를 하는데,

사실 저도 당시 온누리교회 전도사 였으니까

설교를 들으면 하용조 목사님이나 설교 잘 하시는 목사님들의 설교에 귀가 높아져서

다른 목사님들이 설교하면 제 귀에 들리지가 않는 거예요.

 

저는 신학교 채플실에서 제일 뒤에 앉아서 그냥 눈 감고 '어떻게 하시나 보자!'

채플시간에 그런 태도를 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 시골에서 목회를 하면서 은혜 받으려고

열심히 등교하는 신학생들은 제일 앞에 앉아서 열심히 말씀을 사모하더라고요.

 

▲예수님께서 회당의 질서를 지키시며 "늘 하시던 대로"(눅4:16)  회당에 가셔서

말씀을 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을 배척하고, 회당과 등져도.. 예수님은 옳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회당의 질서 속에 들어가셔서

그속에서 말씀을 들으시고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 속에 들어가셨습니다.

 

또 일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읽으셨는데

당시 회당에서는 7명의 남자가 구약성경을 읽었는데

첫 번째는 제사장, 두 번째 레위인이 읽고, 다섯 명의 유대인들이 순서를 따라 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 모임에 열심히 참석했다는 증거가 뭐냐면, 17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눅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당시의 성경은 오늘처럼 이렇게 66권이 제본된 성경이 아니고요, 두루마리였습니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는 것처럼 둘둘 말려 있었죠.

 

그리고 이렇게 작게 인쇄된 게 아니라, 큰 글씨로 다 필사된 것이기 때문에 분량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이런 두루마리는 회당에만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회당에 가야만 그 말씀을 읽을 수가 있었고 들을 수가 있었던 거예요.

회당에서도 각자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낭독하면 그것을 듣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예수님이 펼치셨을 때

자기가 어디를 읽어야 될지 모르면, 펼쳤다 다시 접었다를 반복하면서,

그 두루마리 속에서 오늘 본문 내용(이사야 61:1~2)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을 금방 찾아 읽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얼마나 말씀을 읽는 일에

익숙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거예요.

 

읽고자 하는 바로 그 부분, 이사야 61장이었는데, 그 말씀을 정확하게 찾아 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읽으신 부분은 눅4:17~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찾아 읽으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가장 많은 설명을 하고 있는 이사야서를 통해서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메시아관의 기대를 교정시켜주시는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유대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강국으로 만들어 줄 현세적인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다. 로마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메시야가 아니라

죄로부터 벗어나게 할 메시야이니라!

세상적인 힘으로 강하게 해 줄 메시야가 아니라

악과 싸워이기는 하나님 나라를 만드실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다!'

 

'바로 그 일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바로 그 일을 행하러 온 자가 바로 나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다. 이 일을 위해 나를 보내셨다'고 예수님은 설명하셨습니다.

바로 그 사명은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없는 가난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놓을 의가 없기 때문에 가난한 자입니다.

 

자신의 죄와 악함 때문에 마음이 깨어지고 무너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영, 혼, 육의 가난입니다. 완전히 파산된 상태입니다.

 

오늘날 코로나-19와 같은 재난, 수해로 인한 재난..

이런 재난들이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지 않습니까!

 

과학 기술이 그렇게 발전했다고 했지만 백신을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잘 산다고 하지만

이 쏟아지는 비로, 며칠 만에 폭우로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우리가 무력한 지를 알게 되지 않습니까!

 

이 깨달음이 가난한 마음이 되게 합니다.

이런 천재지변과 이런 큰 재난 속에서도 우리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이 모든 재난 앞에서 발견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성입니다. 지구 온난화를 만든 우리의 죄성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며 살아갔던 인간의 죄악의 그 무서움을 보며

우리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이사야의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가난입니다. 하나님은 재난을 통해 우리에게 가난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될 가난한 마음을 우리가 잃어버렸습니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들려지는 것입니다. 눅4:18

 

세상 사람들이 복음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은 마음이 부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조금 가진 것, 조금 누리는 것 가지고

자신을 부유한 자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