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칼빈의 생애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JrQV8baZI6o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에 프랑스에 있는 작은 지방도시인 누아용 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제라르 칼뱅과 잔느 르프랑의 다섯 아들 중 4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 칼뱅은 신앙심이 깊으면서도 성취욕구가 강한 편이었으나
어머니 잔느 르프랑은 경건한 신앙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겸손한 성품의 여인이었습니다.
모친이 신앙의 위인들과 성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따라서 칼빈은 모친의 경건한 신앙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제라르 칼뱅의 아들들은 엄한 가정교육 아래에서 자랐으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재산도 넉넉해서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칼빈은 겁이 많고 소심하여 수줍음을 잘 탔지만
명석한 두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어린 시절부터 밖에서 놀기보다 공부아 기도에 몰두한 사색파 였습니다.
존 칼빈이 겨우 여섯 살이 되던 1515년에 어머니 잔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할 시기에 어머니를 잃은 존은
큰 슬픔과 충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칼빈의 아버지는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이들을 모두 돌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새 어머니는 그 후 딸 둘을 낳아서 식구가 더 늘어났습니다.
이때 존의 아버지 제라르 칼뱅은 누아용 성당의 주교 아래서 비서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방유지 로서 탄탄한 지위를 굳혀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성공에 대한 욕심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들 존이 신부가 되어서 성공의 길을 가기를 소원했습니다.
아버지는 귀족들의 손에서 신부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귀족들과 잘 사귀어 두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존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매우 불편해 졌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당연히 이루어지는 세상의 모순 속에
칼빈의 개혁 정신은 싹이 텄습니다.
제라르 칼뱅은 출세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열심히 노력해서 주교의 비서라는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나이가 많아서 때가 늦었다는 것을 알고
아들을 통해 출세와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모시고 있던 주교를 찾아가
성직록을 받는 빈자리에 아들 존을 넣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주교의 허락을 받아 12살인 칼빈은 어린 나이에 누아용 성당에서
성직록(아마 봉급) 받는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제라르 칼뱅은 아들 칼빈의 당시 그 지역에 유력한 자제들만 다니는
몽모르의 한 학교에 다니게 했습니다.
아버지의 출세욕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민의 자녀의 지나지 않았던 칼빈이
귀족의 자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후에 칼빈은 그곳에서 훌륭한 교사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의 생애의 기틀을 만들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칼빈은 파리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겨우 중산층 자리에 오른 서민에게, 파리 유학은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와 열성이, 아들을 파리까지 보낸 것이었습니다.
존은 파리에서 유명한 마르슈 대학에서 대학입학 예비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학교에서 공부하려면 라틴어부터 익혀야 했는데
갈빈은 어려운 라틴어를 빠르고 쉽게 익혀 나갔습니다.
워낙 영리하고 침착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빨랐습니다.
칼빈은 마르슈 대학에서 1년 남짓 공부한 후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습니다.
몽테규 대학은 성직자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곳으로
규율이 엄격해서 마치 수도원 생활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 학교의 목적은 성직자를 배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과 과정을 마치고 당시 기독교 신학의 중심을 이루었던
스콜라 철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학교 생활은 처음부터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새벽 4시부터 밤 9시 까지 빽빽하게 짜인 하루 일과는
학생들로 잠시도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죄와 허물을 여러 사람앞에서 자백케 하였고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케 함으로써 엄격한 윤리 생활을 요구하였습니다.
기숙사 식사는 주로 빵이었고, 13분의 1파운드 정도의 버터와
익힌 열매와 채소 그리고 달걀 하나 정도였습니다.
칼빈은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 생활에 대한 회의와 반발심으로
점점 적응하기가 어려웠으며, 신앙에 관해서도 큰 의문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 뜻을 정한 길을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칼빈이 입학할 때 쯤에는 외부적인 문제가 정리 되었기 때문에
다행히 학업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뜻을 정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난 뒤
칼빈은 학교수업에 더욱 열중하는 한편
남은 시간에는 독서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는 교과서와 그에 관련한 책만 아니라
중세의 세계관을 대표할 만한 책들을 두루 읽었습니다.
몽테규 대학에서 공부한 4년 동안 칼빈은
무엇보다도 체계적인 논리 분석력 훈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분석력은 그의 평생에 걸쳐 큰 능력이 되었습니다.
▲1528년 칼빈은 몽테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신학 과정에 들어가지 말고, 대학을 옮겨 법률을 공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제라르가 보기에 법학이야말로 돈과 명예를 획득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 운동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대항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성직이 별로 인기가 없을 것이라는 세상적인 계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칼빈은 아버지의 권고에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해 왔던터라 마음에 갈증이 더욱 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오를레앙 대학은 오직 법률학 한 가지만 가르치는 전문대학 이었습니다.
칼빈이 이 학교로 옮겨 오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1527년에 오를레앙으로 가기 전 고향의 주교로부터
다시 한번 사제 직책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가톨릭교회에서 신부로 일하지 아니면서도
성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가 관습화되고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좋은 칼빈은 당시 내로라 하는 인재들이 모여드는 오를레앙 대학에서
인문주의의 배웠습니다.
15~16 세기의 인문주의는 고전학의 용성, 그리고 원전 및
근원적 이념으로의 복귀를 추구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칼빈은 훌륭한 암기력과 명석한 추리 능력, 완벽에 가까운 라틴어 실력에 힘입어
동료들보다 멀찌감치 앞서 나갔습니다.
칼빈의 강의 준비와 이해가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에
교수들은 가끔 자신들이 결강을 하게 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칼빈에게 수업 진행을 떠맡겼습니다.
그는 저녁을 먹고도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 지난 밤 읽었던 내용을 명상하고 암송하였습니다.
이런 방식의 밤샘 공부를 통해
자신이 터득한 내용들을 자세히 기억할 수 있었으나
그를 평생 괴롭힌 위장장애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529년에 프랑스 부르주에 있는 법과대학으로 옮겨갔습니다.
이 대학은 개신교를 옹호하는 마르그리트 공주의 후원을 받는 곳이어서
개신교의 색채가 짙은 곳이었습니다.
칼빈은 이곳에서 멜키오르 볼마르 교수를 만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볼마르는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 푹 젖어 있었던 사람이었고
개혁운동에 강한 확산력을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칼빈에게, 신약 성경이 기록된 언어인 헬라어를 공부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존 칼빈은 부르주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면서
볼마르와 함께 헬라어를 익히기 시작했읍니다.
이것이 훗날 개혁운동을 일으킬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존 칼빈이 대학을 막 졸업했을 때 고향에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가게 되었습니다.
제라르 칼뱅과 누아용 성당에 참사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누아용 성당 참사회에서 제라르 칼뱅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만들었고
심지어 교회에서 출교까지 시켰습니다.
이렇게 면직장과 제명장을 받아든 제라르 칼뱅은
화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칼빈이 고향으로 온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 제라르 칼뱅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존 칼빈은 슬픔과 함께 이제는 자기의 길을 가기 위해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칼빈은 부지런히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이 시기에 존 칼빈은 중대한 영향을 받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의 물결이
프랑스에 본격적으로 밀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프랑스 안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지도한 사람은 기욤 브리소네 였습니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설교와 강론을 통하여 사람들이 성경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교회 법을 적용하여 마르틴 루터를 정죄하면서 반격했고
프랑스에서도 가톨릭교회가 온 힘을 다해
종교개혁 사상에 맞서 반격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읍니다.
존 칼빈이 오를레앙 대학 생활 이후로
다시 볼마르와 자주 만나게 된 것도 이 무렵 부터였습니다.
볼 마르는 칼빈에게 성경의 바른 도리에 비하여
가톨릭교회가 무엇을 잘못 가르쳤으며
종교개혁 사상이 무엇을 바로잡아 가르치고 있는가를 상세히 알려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존 칼빈은 본격적으로 헬라어 신약성경과 함께
종교개혁자들의 책들을 구하여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교회에 대하여 냉철한 시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어느새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는 개혁운동의 지지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마음은 개혁신앙에 푹 빠졌으며
마르틴루터의 신학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에 심취해 갔습니다.
하지만 섣부른 행동은 삼갔으며 자기 신앙 노선을 일부러 드러내서 물의를 일으킨다거나
가톨릭교회를 반대 한다면서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서는 일도 없었습니다.
좀 칼빈은 개혁운동 입장에서
기독교 정신과 사상을 깊이 연구해 나갔습니다.
아무래도 성경적인 신앙과 신학을 올바르게 세우는 일이
우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시간에도
유럽 각처에서는 개혁운동의 지지자들과
가톨릭 교회 사이에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급기야 양쪽 세력이 극도로 맞서다가 전쟁을 일으키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프랑수아 1세는 누이 마르그리트 공주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운동에 비교적 관대했습니다.
프랑수아 1세와 마르그리트 공주가 개혁자들이 돕고 나서자
가톨릭교회 당국자들은 마르그리트 공주를 모함하려는 음해공작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왕실의 태도에 대하여 신학적인 공격을 감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의 공격목표가 된 것은 마르그리트 공주가 쓴 "죄 많은 영혼의 자화상"이라는
책이었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파리 대학에서 니콜라스 콥이라는 학자를 주도로에서
사문위원회를 설치하여 맞서게 되었습니다.
니콜라스 콥이 파리대학 사문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존 칼빈은 그와 여러 차례 만나 신앙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개혁운동 사상이 성경적인 진리라는 쪽으로 결론이 나곤 했습니다.
니콜라스 콥이 파리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되어 취임식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니콜라스 콥은 칼빈을 찾아와 총장 취임식 때 연설문을 낭독해야 하는데
그 연설문을 작성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니콜라스 콥은 이번 기회에 공식적으로
자신의 개혁신앙의 입장을 알리고 싶어했습니다.
존 칼빈은 니콜라스 콥의 취임 연설문 썼습니다.
그런데 취임 연설문의 내용은 개혁운동의 입장을 찬성하고
가톨릭 교회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니콜라스 콥이 파리대학 학장으로 취임하던 날
콥은 순서에 따라 연설문을 읽었습니다.
가톨릭 교회 당국자들은 콥을 법원에 고소했습니다.
고소를 접수한 법원에서는 즉시 니콜라스 콥을 소환했습니다.
법원 안에는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니콜라스 콥은 법원으로부터 파면되어 버렸습니다.
그 당시 교회로부터 파면당한 자는 그 누구라도 생명조차 보장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니콜라스 콥은 파리를 떠나 고향인 스위스 바젤로 피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자 콥의 연설문을 써 준 칼빈도 피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쫓겨 다니던 칼빈은 파리에서 학창시절에 친구인 듀오딜레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서 무서운 강풍을 피하여 은신하게 되었습니다.
▲듀오딜레의 집에서 칼빈은 그의 시편주석 서문에서 언급한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자기반성을 하고 있었는데
진리의 빛이 갑자기 임해서 내가 이전에 갖고 있던 온갖 거짓과 죄악을 보게 되었다.
나는 자신의 불쌍한 상태와 내 앞에 놓인 죄악을 자각했을 때 전율을 느꼈다.
오 주여! 눈물과 부르짖음으로써 주께서 미워하시는 옛 생활을 버리고
주의 길로 가는 것 밖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구원의 항구는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이다.
나는 나의 공덕이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교제하는 것이다."
존 칼빈은 누아용 성당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성당 안에는 오랫동안 내려온 훌륭한 도서실까지 갖추고 있어서
연구생활을 계속하기에 딱 알맞은 장소였습니다.
그가 처음에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여 개신교 신자가 되었을 때만 해도
개혁자로서 선두에 서서 활동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구도자적인 자세로 꾸준히 진리를 탐구하면서 살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누아용으로 도피해 오면서부터 지난날의 안온한 생각을 버리기 시작했읍니다. 마음속 생각만으로는 개혁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바른 진리를 전해야할 사명감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존 칼빈은 누아용 성당에 도서실에 박혀 신학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강요>를 쓰기 시작했읍니다.
존 칼빈이 누아용에서 1년 쯤 지냈을 무렵
1534년 10월 18일에 개신교 신자들이 큰 탄압을 받게 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 전국의 건물과 도로, 교회 등에 대자보가 붙은 것이었습니다.
이 대자보 사건은 프랑스의 왕인 프랑수아 1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개신교 운동이 프랑스의 기초부터 송두리째 뒤흔들려는 혁명사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듬해 1월에, 가톨릭 교회의 방식으로 거리를 행진한 후에
노트르담에서 미사를 드리고 개신교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을 참수하겠다며
강력하게 선언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몇 명의 개신교도들을 처형시켰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존 칼빈도 더 이상 프랑스 누아용에서 지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누아용을 떠나 스위스 바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칼빈이 바젤에 도착하자마자 니콜라스 콥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젤은 이미 종교개혁 운동이 성공을 거두던 도시였으므로
이 도시는 유럽 각처에서 교회의 박해를 피해 온 개혁자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칼빈은 이곳에서 니콜라스 콥의 동료들과 함께 지내며 일하기로 했습니다.
칼빈은 바젤에 머무는 동안 성경번역을 돕기도 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 집필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캄캄하기만 보이는 시대적 상황에서 가톨릭 교회의 박해에 대항할 무기는
성경에 근거한 복음적인 신앙 논리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존 칼빈은 마침내 <기독교 강요>의 집필을 끝내고
1536년 3월에 바젤에서 출판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운동이 유럽 각처에서 맹렬히 번져가고 있었으나.
그 박해에 대한 성경에 근거한 신학적 무기가 별로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당시 개혁운동이 역경에 부딪칠 때면, 사람들은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개혁운동에 대한 여러 비난들 가운데서도 가장 치명적인 것은
특별한 교리가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칼빈의 저서인 <기독교 강요>는
개혁운동의 실상을 밝히는 등불 과도 같았습니다.
존 칼빈이 2년 동안 바젤에 머물며 <기독교 강요>의 집필을 끝내고
출판을 한 후 이탈리아에서 잠깐 머물다가
프랑스 누아용에 가서 가족 소유의 땅과 재산을 정리했습니다.
▲이 일은 프랑스에서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정리와 같았습니다.
존 칼빈은 동생들과 함께 고국을 떠나 스트라스부르로 향했습니다.
스트라스부르로 향하던 도중, 그들은 제네바에서 하루를 묶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개혁주의자 기욤 파렐을 소개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를 있고 감명을 받았다며
칼빈에게 제네바의 상황을 얘기해 주면서
제네바 만큼 개혁운동이 시급한 곳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자신은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조용히 연구생활에 몰두하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은 개혁운동에 뛰어 들만한 처지가 못된다고 했습니다.
파렐은 칼빈의 소극적인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며 함께 일하자고 다그쳤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욕심만 채워 공부하라고 당신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업을 맡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칼빈은 당황했지만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파렐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존 칼빈을 얻고 난 기욤 파렐은
개혁에 대한 강한 열정과 용기가 한층 더해졌습니다.
그는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반면에, 조직적인 면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직 능력과 학구적이고 논리적인 실력을 갖춘 칼빈을 얻었으니
거의 완벽한 팀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제네바는 오랫동안 사부아 공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6세기가 되어서는 그들의 지배를 반대하는 세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독립하려는 무리들의 힘이 점점 커졌는데
그들은 종교개혁 활동에 지지자 역할도 했습니다.
제네바는 개신교 도시인 베른과 동맹을 맺어서
사브와 공작으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 일어설 것을 결의했습니다.
1536년 5월 26일에 시민총회는 '복음의 따라 살 것'을
안건으로 하여 표결에 들어갔습니다.
이를 통해 비로소 공화정 체제의 자치도시가 된 제네바는
개신교의 정체성을 가진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기욤 파렐과 존 칼빈은 개혁운동의 여러 방안을
구체적이고 조직적으로 계획하여 개혁안을 의회에 적극적으로 제출했습니다.
그런 서류나 문서들은 대부분 존 칼빈이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칼빈의 존재는 제네바에서 점점 더 부각되었습니다.
1537년 10월에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존 칼빈은 개혁의 도시 제네바에서 복음전도자요, 설교자요, 교사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기욤 파렐과 함께 제네바 도시를 그리스도의 정신이 지배하는
복음의 도시로 만드는 일을 꿈꾸었습니다.
존 칼빈은 제네바에서도 중심가에 있는 가장 큰 교회를 담당하여
주일마다 설교했고, 때로는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기도 하고
결혼식 주례를 서 주기도 했으며, 교회 행정을 치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가장 우선 되는 일은, 개혁신학신앙 사상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가톨릭의 세력이 약화되었고 많은 이들이 도시 행정과 종교의 개혁을 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개혁운동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시의 소위원회는 관습적이고 보수적인 기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개혁을 원하는 많은 제네바 시민들과
그들을 대표하는 칼빈과 파렐 등과 자주 부딪치고 했습니다.
존 칼빈 이 개혁신앙을 펴나가면서 제네바 시의회와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시의원들과 충돌하는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성찬 예식의 횟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칼빈은 성찬 예식을 자주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의원들은 모두가 반대했습니다.
왜냐면 당시 교회들은 관습에 따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성찬예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 것으로 합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다음에 열린 소의회에서는
예배 시간 중에 부르는 찬송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되었습니다.
이때도 먼저 존 칼빈이, 일반 성도들도 다 함께 찬송을 부를 수 있도록 하자고
문제를 상정 했습니다.
그 당시는 일반 성도들이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 하는 일이었습니다.
깊은 논의가 이루어진 후 우선 두어군데 교회에서 시범적으로
전교인이 찬송을 불러보고 효과가 좋으면
전 교회로 확산 시키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때부터 제네바의 분위기는 변화되었습니다.
주일마다 많은 교회에서는 힘찬 찬송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거리에서도 찬송을 흥얼거렸습니다.
제네바 시는 점점 거룩한 도시로 변화되어가는 듯했습니다.
▲이처럼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무렵
존 칼빈은 기욤 파렐에게 개혁운동의 제2단계 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복음 정신에 맞는 시민법을 제정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그 법을 지키면서 살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존 칼빈은 기욤 파렐과 함께 시민법에 대한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담아 파렐과 칼빈은 교회 개혁안을 만들어 소위원회에 제출했습니다.
시 의회의 개혁자들은 큰 관심을 가지고 그 날 한 가지만 빼고 모두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행할 단계가 되자 그 열심이 점점 식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고안한 교회 개혁안과 시민법은
기독교 교인들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실행해야 할 생활규범 이었습니다.
이 시민법이 통과되자 처음에는 대부분이 순순히 따라주었습니다.
시민들 역시 제네바를 거룩한 도시로 만들어보겠다는
칼빈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시민 밥이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민법은 교인들의 생활규범으로서 매우 이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되자 모두들 불편하고 부담스러워 하게 되었고
마침내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높아만 같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제네바 시민들은 두려워 떨기까지 했습니다.
왜냐면 그 시민법 조항 가운데는 위법자들을 이 도시에서
추방한다는 엄격한 법 조항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시민법 때문에 칼빈과 파렐이 시민들의 미움을 받던 시기에
제네바 시 안에서 파렐과 칼빈이 프랑스의 스파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1538년에 프랑스의 관리 한 사람이 몰래 제네바를 방문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자고 제안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네바 시 당국자들은 그런 제안은 침략의 야욕에 나온 것이라며 거절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스파이 희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태가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가던 어느 날
마침내 제네바 시민들은 칼빈과 파렐을 거처를 포위하고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칼빈과 파렐이 집 안에서 대화를 나누며 고민하는 사이에
폭도로 변한 시민들은 제풀에 꺾여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제네바 시민들의 태도는 잠잠했습니다.
스파이에 대한 오해는 풀렸지만
시민법이 존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함성은 여전히 높았습니다.
▲1538년 12월 존 칼빈은 제네바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소의회에서는 행정관 4명을 새로 뽑았는데
그들은 제네바가 베른의 영향력 아래 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칼빈과 파펠은 베른을 비롯해 외의에 세력에 의존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반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의회는 칼빈과 파렐이 베른 시의 정책을 따르도록 압박을 가해습니다.
새 행정관들은 칼빈의 개혁운동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시의회에서는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에게 모두 다 성찬 예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가결했다고 통보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주일에 성찬예식을 베풀되
회개가 없는 사람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이 일이 문제가 되어, 칼빈과 파렐은 제네바 시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기막힌 통고에도 불구하고 존 칼빈의 마음은 오히려 감사로 가득했고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려는 그의 의지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1539년 칼빈의 나이 30세 때, 칼빈과 파렐은 아쉬움 속에서 제네바를 떠났습니다.
갈빈은 제네바를 떠나서 스트라스부르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부처와 카피토를 만난 후에
더욱 활력을 가지고 개혁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스트라스부르에는 프랑스의 피난민들이 있었습니다.
피난민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말과 문화와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목회자를
만나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칼빈은 쉴사이 없이 성도들을 가르치고, 강단에서 설교하고,
학교에서 강의하고, 모임에 참석하며 개혁의 기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네바에서 처럼 성도들에게 엄격한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교인 중 단 한 명이라도 교육에서 소외시키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 시를 찾은 한 프랑스 피난민은
칼빈이 목회했던 교인들의 살아있는 예배생활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손에 찬양집을 잡고 함께 찬양하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들이 모국어로 주님의 기사와 영광을 노래할 때
얼마나 기쁨이 넘쳤는지, 그 누구도 짐작 만으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1541년 칼빈은 좋은 동료이자 친구였던 장 스트리르 의 미망인인
이들레트 드 뷔르 와 결혼했습니다.
그동안 학문과 개혁운동에 몰두하느라 결혼이 많이 늦어진 것입니다.
이들레트 드 뷔르는 성품이 매우 온화했습니다.
또한 개혁신앙의 소유자로서 칼빈의 내조자이자 동반자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첫 아들 자크는 태어난 지 2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칼빈 부부는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칼빈은 자신의 비애를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확실히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주셨소.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시요, 그분은 자기 자녀에게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고 계셨소."
자크의 죽음 이후 그들은 계속해서 자녀를 갖지 못했습니다.
3년 후 낳은 딸 역시 출생과 함께 세상을 떠났고
1547년에 또 다른 조산아를 낳았으나 끝내 살아남지 못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칼빈을 원수처럼 대하는 자들은
그들 부부를 모욕하고 괴롭히는 언사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칼빈의 자녀들이 겪는 비극을 하나님께서 내린 재앙이라고 떠들어 됐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랑곳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하나된 열정으로 나이갔습니다.
부인 이들레트는 평생 칼빈의 개혁운동을 열심히 돕다가
결핵으로 추정되는 질병때문에 수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칼빈은 이들레트의 자녀를 자신의 자녀처럼 끝까지 양육했습니다.
칼빈과 이들레트의 결혼생활은 오늘날과 같은 로맨스와 열정이 기준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과 목적을 함께 바라보며 행진했던
참으로 견고하고 숭고한 삶이었습니다.
▲존 칼빈이 제네바를 떠난 지 2년이 흐른 사이에 제네바에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시 의회 선거에서 칼빈파 두 사람이 행정관으로 선출되고
전에 칼빈을 추방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반역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칼빈의 반대파들이 그렇게 처리 된 것은
칼빈이 추방당하고 1년도 지나지 않아
제네바 교회들이 혼란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시민들의 도덕 의식도 형편없이 낮아졌습니다.
칼빈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제네바 시의회에서는 칼빈에게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처음에 칼빈은, 개혁운동이 한창인 스트라스부르를 쉽게 포기할 수 없어 거절했지만 시의회의 계속된 요청과 제네바의 안타까운 현실에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존 칼빈은 2년 만에 제네바에서 다시 개혁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돌아온 칼빈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제네바 교회 조직을 재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질서를 위한 칙령을 제정하여
개혁운동의 새로운 근간으로 삼고자 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번 시민법처럼 법적인 성격을 띄지 않고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존 칼빈은 제네바에서 무엇보다도 설교와 가르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제네바의 개신교 신도들은 보통 1시간이 넘고 단어도 6천개 이상이 사용되는
칼빈의 설교를 잘 받아 적기 위해, 자신들만의 속기 방식을 개발해 내어
그의 모든 설교를 받아적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칼빈 또한 사람들 앞에 나서기 꺼리는 성품이지만
설교 사역 만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감당했습니다.
그의 설교 모습은 활기와 열정이 넘쳤고
성경은 분명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고루한 학문적 강연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활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였습니다.
때로는 신랄함과 노여움으로, 또 때로는 온유함과 동정심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는 교인들의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을 써서 아주 분명하게 뜻을 밝혔고,
다소 어려운 어휘나 암시된 의미들을 설명할 때는 신중하고 진지했으며
말씀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사람들끼리는 자유로이 토론하도록 배려 하기도 했습니다.
칼빈은 교인들의 찬송도 지도했습니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라고 믿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단순성은 칼빈에게 매우 중요했기에
그는 시편을 있는 그대로 찬송하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반주는 단선율로 간소하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제네바교회의 개혁과 그 영향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핍박을 피해 제네바로 도망쳐나온 신자들은 나중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그들이 직접 그 곳에서 개혁운동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용맹한 존 녹스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녹스의 눈에 비친 제네바는, 칼빈이 바랬던 그대로
'사도 시대 이래로 지구상에 존재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운동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유롭게 참여하도록 했더니 시민들이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는듯 했습니다.
칼빈은 이 문제를 시의회를 열어서 토의했습니다.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교회 헌법을 따로 만들어 공포했습니다.
예전에 시민법의 최고 형은 추방이었는데
이번에 제정한 교회 헌법은 사형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시민법보다 훨씬 더 강화된 것입니다.
반대파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칼빈에게 가장 강력하게 맞선 자들은 주로 쾌락을 좋아하고 방종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칙령과 교회헌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점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그 후에도 칼빈에 대한 반대가 더욱 심해져 갔습니다.
자크 그류 라는 사람이 성 베드로 교회 담벼락에
칼빈을 향한 협박장을 붙이다가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집을 수색하자 칼빈의 대한 비난하는 글 뿐만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모독하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회개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크 그류는 끝내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존 칼빈은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칙령 정신을 잘 살려서 개혁운동을 훌륭하게 성취하려는 목적에서
사형 조항을 넣었는데, 실제로 한 사람을 사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자크 그류가 처형을 당한 후, 또 한 사람 류 모네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후에 또 이단자 세르베투스가 사형선고를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칼빈은 사형만은 막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칼빈의 노력에도 세르베투스는 회개하지 않고 결국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칼빈에게 불명예스럽게 여겨졌고
후대에 냉혹한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1544년 2월에 실시된 소의회 선거에서는
칼빈파가 행정관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의회에서도 칼빈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의석을 거의 장악하게 되어
칼빈이 다시 돌아온지 13년만에 개혁운동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3가지의 목적을 정하고 교회개혁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첫째는 전체 시민들이 성경 말씀에 합당하게 살도록 만드는 일이었고,
둘째는 훌륭한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인재를 기르는 일이었으며,
셋째는 여러 나라의 교육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세계적인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룩하려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세 번째 목적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개혁자들은 결국 하나가 되지 못했고
이 결과 개신교는 여러 교파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1558년 존 칼빈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제네바 거리를 걷는 칼빈을 보고 '살아있는 송장' 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주석을 쓰는 일, 설교, 상담하는 일, 편지 쓰는 일 등을 해야했습니다.
침상에 누워 있을 때도 그는 할 일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제발 좀 쉬라고 간청했지만 그때마다 칼빈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게으른 내 모습을 보여드릴 수는 없지 않는가!'
▲1564년 5월 27일 칼빈은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개혁의지를 가지고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그의 나이 겨우 54세에 하나님의 곁으로 떠나갔습니다.
칼빈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해온 그 모든 일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나 자신 역시 참으로 누추한 피조물에 지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확신하건데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오직 선한 것만 추구에 왔다는 것,
내 부족함 때문에 늘 마음이 괴로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내 마음 속 깊숙이 뿌리내려 있었다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