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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P2

LNCK 2020. 9. 17. 16:48

www.youtube.com/watch?v=wjX-dhkbH6M

◈회심  P2                     눅23:40~43,  눅19:9, 벧후2:21~22                            출처

 

십자가 상에서 회심한 한 강도

초기에 한 편 강도도 동일하게 회심하기 전에는 동일하게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27:43~44

 

'강도들'이라 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도 복수형 s 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형틀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회심을 합니다.

 

그가 회심했는데요, 그러자 훈련과 교육으로는 불가능한 고백을 합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눅23:40~42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을 비방하고 모욕하는데 동참했던 한 편 강도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영어로 컨벌전 (회심) 되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 편 강도처럼 예수님을 모욕하고 비방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투정하자

오히려 그 사람을 향해 꾸짖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끔찍한 징계가 공의롭고 정당하다' 라고

예수님을 변호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향해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우리에게 나타나야 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 있었죠.

진리를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나서 달라지는 것은

더 이상 주님의 이름이 모욕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게 회심했던 한 편 강도에게서 나타났던 것이고

그리고 또 하나, 진리를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변호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 편 강도는 그리스도를 변호하고 있습니다.

지금 변호할 처지입니까?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혀서 지금 매달려서 죽어가고 고통이 끔찍한데

그 끔찍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변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뭐죠?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우리는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주님을 따르는 생명을 보게 됩니다.

극심한 고난가운데서도 새로운 행동이 나옵니다.

 

이 생명, 이것을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목사님, 왜 저는 말씀대로 안 살아지지요?'

'그건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행동 밖에 못합니다.

그러나 주의 생명이 들어왔을 때, 생명이 들어왔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숨을 쉬고 행동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움직여지지 않는 것은,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영생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주의 계명대로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예수님이 이렇게 표현하셨죠.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영생이란, 삭개오처럼,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게 되어진 것을 말합니다.

 

주의 계명을 회개와 신앙으로 지키게 된 상태,

이것을 영생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런 구원의 표징을 보인 한 편 강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이 선언은 삭개오가 회개와 신앙 faith 으로 반응했을 때,

즉 율법을 지키겠다고 고백했을 때, 그 생명의 현상이 나타났을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19:9

라고 선언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용어의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회심은, 거듭난 죄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키는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반면에 회개와 신앙 repentance and faith 는 지속적으로 신자의 삶 전체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회심은 단회적이고요,

회개와 신앙은 반복적입니다.

 

회심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회심은, 인생의 방향을 바꾼 사건이라고 한다면

회개와 신앙은, 그 방향을 향해 지속적으로 진행해 가는 것을 얘기합니다.

 

회심은, 결혼식 이라면

회개와 신앙은, 결혼생활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분명히 중생을 통해 완전히 구원을 받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또 양자로 입양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회개와 신앙을 통해서

진위가 입증되어집니다.

 

성화 라는 방식으로 입증된다는 얘기입니다.

 

표징은 언약의 진위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싸인과 같습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싸인, 이 표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회심은 서명이 없는 계약서를 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생명의 표징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데

'그래도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계약서에 여러분의 이름이,

또한 하나님의 싸인이 없는데도

그 계약서를 들고서 확신을 갖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두렵고 떨림으로 날마다 내 삶속에서

그 표징이 나타나는지..

내 삶속에서 생명의 증거가 나타나는지를 날마다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있는데,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위선이죠.

 

믿음은 있다고 하는데,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야고보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죽은 믿음'이라고 얘기합니다.

 

결혼식을 했다고 하는데, 결혼생활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위장 결혼'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 중에서 '위장결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과 결혼했다고 하는데, 결혼생활이 없어요.

그런데 그걸 신앙 faith 이라고 얘기합니다. 아뇨,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일시적 신앙 temporal faith

 

이제 회심과 관련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일시적 신앙 temporal faith 입니다.

 

일시적 신앙은, 구원의 표징이 일시적으로는 나타나는데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마치 뭐와 똑같은가 하면,

그리스도와 결혼한 흔적이 있는 것 같은데

결혼생활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결혼생활이 잠깐 나타났다가, 이것이 어느 시점부터 결혼생활 이 나타나지 않기 시작합니다.

 

일시적으로 믿음에 의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났고

진정으로 참회하는 회개가 있었어요.

 

그런데 점차 옛적 삶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의 방향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가 지적한 것처럼,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옛속담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루 누웠다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벧후2:21~22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게 이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결혼한 흔적이 있다고 해서

이젠 간음을 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고전7장에서 '배우자의 간음일 경우에는 이혼이 허락된다' 라고 하는 이 개념은

'구원 받은 신자들이 구원에서 이탈 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의도는) '일시적 신앙'에 대한 조명입니다.

 

하나님과 결혼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외적인 표징이 잠깐 나타났었는데

나의 영적인 배우자가 제물이고, 명예이고, 성공이고, 쾌락이라고 하는

그 우상과 계속적으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그 간음이 계속 진행되어진다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표현하는

소위 개념을 우리들에게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일시적 신앙의 대명사로 데마를 얘기합니다.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그는 마가, 아리스다고, 누가와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했던 사람이죠.

 

그런데 바울이 로마에 수감되자, 바울을 떠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딤후4:10

 

인생의 방향이 다시 세상으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인생의 방향이 그리스도를 향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인생의 방향이 다시 세상으로 향했다는 것이죠.

 

히브리서 기자는 '일시적 신앙'에 대해서 아주 잘 설명해 줍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히6:3~4

 

무슨 얘기죠?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을 경험하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행동의 변화를 경험한.. 그래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

 

내세의 능력이란 영생의 삶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지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시적 신앙의 문제는, 이 비춤(한 번 비췸을 받고~)이 일시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변화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었다는 것도 아니에요.

 

분명히 은혜를 받은 증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가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 옛적 모습으로 점차 회귀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적 행위는 지속합니다.

데마가 종교를 버렸다는 말은 없어요.

종교적 행위는 지속합니다.

 

그리고 직분도 계속 갖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초창기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목사, 장로, 안수집사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다시 옛적 모습으로 회귀하면서 교회를 풍비박산 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종교적 행위를 지속하지만, 종교 행위 안에 믿음과 생명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시험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어려움과 난관이 닥칠 때마다 세속적인 판단력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지적처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는 것이 아니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상태가 되는 거죠. 히6:7~8

 

여러분, 살아있는 식물일 경우에는 비를 맞으면 맞을수록 썩습니까, 더 잘 자랍니까?

더 잘 자라지요.

 

생명이 들어간, 영생이 들어간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힘을 얻고

더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되어져 갑니다.

 

근데 이 일시적 신앙의 특정이 뭐냐면, 초창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시간이 가면서 말씀 때문에 썩어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비처럼) 떨어지는데 오히려 마음이 더 강퍅해지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상태가 되는 거죠.

 

말씀을 듣지만,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말씀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더 대적하고,

오히려 마음이 더 강퍅해지며,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서 썩어져 갑니다.

 

세상과 구별됨이 없습니다.

신학적 지식은 많을지 모르나, 성령의 조명이 없습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판단하는 것마다 진리를 대적하는 판단을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 미련하게 보일 뿐이니라.. 는 것과 동일한 것이죠.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만이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 신앙은 마치 머리카락이 잘린 후에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고 착각했던 삼손과 같은 태도를 견지합니다.

 

'과거에 내가 믿음이 있었으니까, 지금도 믿음이 있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일시적 신앙 temporal faith' 의 원인과 특징이 뭔가요?

대부분 자신의 영혼의 전적 타락과 무능에 대한 심각한 자각이 없이

뭔가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루이스 벌코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회심이란, 경건한 슬픔에서 나오며

또한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활을 결과 한다'

 

진정한 회심이 어디서 나온다고요?

경건한 슬픔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심은 어디서 나옵니까?

해산의 수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심은 어디서 나옵니까?

자신의 옛적 삶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방식으로 나옵니다.

 

근데 이 과정이 생략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기분 좋게 회심했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경배 찬양에서 찬양하다가 회심했어요'

'자기는 설교 들으면서 위로 받으면서 회심 했대요'

 

그런 거 없어요. 회심은 기분이 슬픈 가운데서 회심합니다.

기분 좋게 회심하는 분 있으면,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돌에 맞아 죽지 않았겠죠.

 

회심은 기분이 우울하다가 회심합니다.

여러분, 출산할 때 기분 상큼하게 출산하는 산모 봤습니까?

'볼 일' 하고는 다릅니다.

 

해산의 수고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이잖아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해산이라고 하는 고통을 여자에게 주셨을까요?

 

이게 생명을 잉태하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회심할 때 거의 죽을 정도로

아니,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그리고 새 사람으로 다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입니다.

 

사실 해산의 수고는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말씀하셨잖아요.

 

해산의 때가 다 되었을 때 여자가 근심하는 것과 같이

그러다가 해산하게 되면, 기쁨이 오게 된다고...

 

우리에게 회심은 그런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볍지가 않습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한 사람의 회심이

자신의 죄인 됨과 무능에 대한 경건한 슬픔에서 시작해서

십자가 아래서 죄 짐을 벗는 그 감격으로 온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줍니다.

 

번연도 자신이 전적타락과 무능에 대한 극심한 고뇌,

그 가운데서 회심을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선배들 중에서 회심을 기분 좋게 한 사람이 없어요.

저도 굉장히 기분 힘들게 했습니다.

 

근데 제가 매번 회심할 때, 회심하는 그 현상을 볼 때 마다

그리고 제 자신의 삶에서 나타난 것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렇게 기분 힘든데.. 이렇게 절망적인데..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은 게 신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안 떠난 게 기적입니다.

그게 회심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게 견인이거든요.

성도의 견인이 거기서부터 이미 시작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회심의 순서에서

율법을 통한 죄인 됨의 충분한 각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성경은, 죄인의 회심 전에 율법을 통해 죄인이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상태로 몰아갑니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뭐라 얘기하냐면, '예비적 은혜의 교리'라고 얘기합니다.

 

이 과정에서 죄인은 견딜 수 없는 해산의 수고를 경험합니다.

그 기간이 짧을 수도 있지만, 길게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아주 피가 바짝바짝 마르고, 뭐 몸무게도 쭉쭉 빠지고

그리고 막 정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습니다.

죽을 것 같을 정도로요.

 

성령님은 이 과정 가운데, 죄인들이 오로지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될 때까지

인내케 하십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씀드렸죠.

 

마치 개처럼 무시당하던 여인이 당했던 가나안 여인이

모욕을 참고서도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붙잡았던 것과 같은..

 

그런데 우리는 요즘 이 정도가 아니라

'덜 된 인간' 이렇게만 얘기해도

그리스도를 뿌리치고 도망갈 수준입니다.

 

이렇게 인내하며 그리스도를 붙잡은 사람은 어떤 어려움과 괴로움이 있더라도

그리스도를 떠나거나 배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를 쉽게 배반하는지 아십니까?

쉽게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가볍게 믿을만한 분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그렇게 경솔하지, 가볍지 않습니다.

 

요즘 기독교, 얼마나 가볍습니까. 깃털만큼 가볍죠.

감기 바이러스만 설쳐도...

 

누누이 말씀드립니다만

믿음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접기도 그 한 방으로 예수님 영접하고 쉽게 예수 믿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촐싹 대고 가벼운 기독교.. 아닙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율법과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 예수를 믿게 되는데

이것을 존 플라벨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율법은 상처를 입히고, 복음은 치료한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비단계로 가면서

주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치료의 길을 열기 위해

영혼에 상처를 입히신다.'

 

'하나님은 오직 수확을 얻을 수 있는 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갈아엎으신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메스로 살을 가르는 것이 앞서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수술하기 전에 배를 가르지 않고 어떻게 환부를 도려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배를 가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곪은 부분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방식도 동일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회심은, 율법이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단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배를 가르는 역할만 합니다.

회심은 오로지 복음을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배를 갈랐다고 해서 치료가 되는 게 아니죠.

맨날 회개를 외치는데, 거기에 복음이 없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배를 개복시켜 놓고, 그냥 끝내버리는 것과 같죠.

 

여러분, 그래서 죽은 영혼들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개복시킨 다음에는 복음으로 적절히 치료해야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치료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도록 한다면

복음은, 겸손해진 심령을 치료하고 다시 봉합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이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입니다.

 

율법으로 철저히 겸비해진 사람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비로소 듣고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복음을 마음에 새깁니다.

 

이전에는 평범하고 또는 거칠게 들리던 복음이

이제는 생명처럼 비로소 들리기 시작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굶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라'

 

반대로, '화 있을진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안 들어오십니까? 화 있을진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지 않으십니까? 화 있을진저!

하나님의 말씀이 가볍게 들리십니까, 쉽게 무시할 소리로 들리십니까?

그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두려워해야 될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은

진정으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복있는 심령에게만 나타나지는 현상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 안에서 이런 과정 없이 회심을 경험했다는 사람들이 많죠.

이들은 여전히 육체를 신뢰합니다.

기도보다 이성이 앞섭니다.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경험이 앞섭니다.

자기부인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열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진리를 따르는 열심은 없습니다.

형제를 내 몸처럼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번연은, 십자가 체험 없이 담 넘어서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들은 날마다 자기 삶속에 나타나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좁은 길을 선택하고, 곧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길, 편한 길, 그리고 초원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정과 육을 못 박으려는 쓰라린 고통을 모르고

지름길을 따라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인 됨과 비참을 자각했다 해서

회심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플라벨은, 죄를 자각하는 예비적 조명 단계와 달리

구원하는 조명이 다르다.. 고 가르칩니다.

 

그는 죄를 자각하는 예비적 조명과, 구원하는 조명을 이렇게 구분합니다.

첫째, 죄의 자각은 지성과 양심에 영향을 미치지만

구원은 오로지 의지를 변화시킨다.

 

둘째, 죄의 자각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두려운 공의와 능력에 대한 강력한 깨달음을 제공하지만

오직 구원하는 조명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랑에 대한 영적 의식을 제공한다.'

 

여러분, 회심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에 붙잡힌바 됩니다.

회심에 까지 가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찌르는 것으로만 느껴질 뿐, 그분의 사랑을 느끼는 것까지는 가지 못합니다.

 

그 메시지가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라고 들리지 않고

자꾸 내 배에 칼을 대서 내 배를 가르려고 하는 메시지로밖에 여기지지 않습니다.

 

율법과 복음선포를 통한 회심은, 말씀이 효과적이고 강하게 역사해서 그들의 헛된 소망을 죽인다고 합니다.

말씀만이 오로지 회심의 도구가 됩니다.

 

찬양이나, 또는 프로그램, 심리상담, 위로, 또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무슨 종교 영화,

신비한 체험, 안수기도.. 이런 식으로 회심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또는 쓰러짐, 이런 것으로 회심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멉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회심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라고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왜냐면 회심이란 우리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말씀이 각인 된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이 내 마음에 각인되지 않은 상태의 변화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의 변화는, 우리의 회개는, 항상 신앙의 의해서 나오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본성에 각인되어져서, 그 말씀이 나를 강권하여 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면

그건 가짜입니다. 가짜 회심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심은, 율법의 두 강령,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과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요? 우리의 마음 속에 그 두 강령이 각인되어져서 우리가 변화된 것이니까요.

 

이것이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된다고 하는

그 묵직한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거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짧게 언급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죄인은 스스로 회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좌우에 날선 검처럼 찌르는 말씀을 듣고서

겸비해진 죄인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주님께 긍휼을 간절히 구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찌르는 말씀을 겸비하여 듣고,

그 말씀을 듣고서 주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께 수차례 여러 번 거절을 당하거나

혹은 환경의 극심한 저항 속에서도 주님께 긍휼을 구한 사람은

예외 없이 그들은 회심했습니다.

 

그들은 인내하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었던 사람들입니다.

왜냐면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여기엔 주의 이름을 부르는 누구든지.. 모든 사람이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의 이름을 불러도)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운운하며 주의 이름을 간절히 찾지도 않았는데도 영접기도만으로,

또는 프로그램으로, 또는 영화 한 편으로 또는 찬양으로

내가 구원을, 회심을 경험했다? 저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회심을 경험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지 봐야만 합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극적인 상황을 통해서 한 순간에 회심했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데 지속적으로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안 나타납니다.

회개와 믿음이 지속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점차 다시 옛적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참 회심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만 구원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렇게 주의 이름을 간절히 찾지 않으면서 구원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자기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에 올리기를 괴로워하는' 이 게으른 사람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회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회심에 대한 정의를 보시겠습니다.

'회심이란, 율법으로 겸비해진 죄인이, 말씀을 받아 거듭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이켜진 것을 뜻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가 오늘 회심이라는 용어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고, 또 구원받은 성도에게 어떻게 삶의 열매가 나타나는지

다시 한 번 알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주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게으르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우리가 느슨하거나 방심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우리의 구원을 점검할 줄 아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고,

그래서 날마다 '회개와 믿음의 삶'의 열매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도록 복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