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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으는가 모이는가? 막3:7~12 2020.08.30.
예수님의 사역이 구체화되자 예수님을 모함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반대자들도 늘어났지만
예수님을 추종하고 따르는 자들도 늘어났습니다.
막3:7~8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큰 무리가 따르며, 많은 무리가 나아왔으며' .. 군중들입니다.
막3: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무리들이 예수님을 에워싸서 밀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막3: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이 구절들은, 소수가 아니었고, 무리, 군중들이었습니다.
이 몰려온 사람들의 지역을 이렇게 언급합니다.
3:7~8절에 보면 '갈릴리, 유대, 예루살렘, 이두메, 요단강 건너편, 두로, 시돈..'
이 지명들을 성경지도에서 찾아보면, 동서남북입니다.
갈릴리는 서쪽,
유다, 예루살렘, 이두메는 남쪽
요단 건너편은 동쪽
두로와 시돈은 북쪽입니다.
두로와 시돈.. 이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왔다는 말은
비유대인들도 왔다는 얘기입니다. 국경을 넘어온 것이죠.
꽤 먼 지역에서도 예수님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의 소문이 예루살렘, 갈릴리를 넘어서고
동서남북으로 다 흩어져서 국경을 넘어서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인터넷이 없던 시대였는데
막 입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여러분, 인터넷보다더 더 무서운 것이 입소문입니다.
의료시스템이 잘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인데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니까
그 소문이 널리 퍼진거죠.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많은 무리들이!
◑여러분, 여기서 이 설교의 초점은 뭐냐면
예수님은 사람을 모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저절로 몰려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모이는 것과 모으는 것의 차이>입니다.
<모이는 것인가, 아니면 모으는 것인가?> .. 이것은 다릅니다.
모으는 것은.. 인위적인 요소가 들어가고, 비자발적이며
어떤 모으는 주체가 분명하게 있는 거죠.
그러나 모이는 것은.. 자발적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사람들을 모으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우리가 주로 목격하는 것은
모이는 게 아니라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곳에는 뭔가 인위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마케팅이 있는 거고, 무슨 인위적인 노력이 들어간 것인데
지금 예수님은 전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막 모이는 것입니다.
세상에 두 종류의 리더십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저절로 따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입니다.
압살롬과 다윗의 리더십의 좋은 예입니다.
다윗에게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신기한 것은, 그가 도망을 다녔는데도 사람들이 그를 따라다닌 것입니다.
자기가 뭐 힘이 있거나 무슨 혜택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아둘람 굴에 숨어 있을 때도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그 기간이 상당히 길었습니다. 그 쫓겨다니던 기간이 다윗에게는 굉장히 긴 세월인데
그 긴 세월 동안에도 사람들이 계속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달랐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려고 했죠.
왜냐면 다윗에게 반역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민심을 움직이고, 자기에게로 민심이 돌아오게 하고,
그 일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이렇게 저절로 모이는 곳이 있고, 억지로 끌어모으는 곳이 있습니다.
모이는 곳은 강요가 없지만, 모으는 곳에는 인위성, 인위성, 선동이 들어갑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어떤 자기의 목적을 갖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면
그건 언젠가는 흩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으려고 민심에 촉각을 곤두세운 적이 없습니다.
군중을 동원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께는 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attractive한 매력적인 뭔가 끄는 것이 있었던 거죠.
이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데도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서기관들과 달랐다는 거죠.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는 그 권능,
그 권위와 권능을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밸런스를 지키면서 한없이 겸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 사람들이 몰린 것입니다. 사실은 이끌린 거죠. 이게 진짜 리더십입니다.
지금도 계속 그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 2천년의 역사 속에
주님은 스스로 인위적으로 당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수없는 사람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분 앞에 한 없이 그 매력에 빠져들고, 이끌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이 예수님께로 모여올 때, 주님은 어떤 태도를 보이셨습니까?
흥미로운 것은 막3: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9절에도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주님은 사람들이 몰려올 때, '물러나셨다'는 것입니다.
왜 물러나셨을까요?
몰려오는 군중들의 마음을 끌어모으면, 세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는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뭔가 저항을 하고, 뭔가 겁을 주려고 했다면
예수님께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위협이 될 수 있죠.
그런데 주님은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피하셨어요.
이 몰려온 군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주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막3: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자신들의 병이 낫기 위하여, 귀신들린 자들이 나음을 얻기 위하여
군중들이 주님께로 모여든 것입니다.
5병2어 사건에서도 이 군중들의 모습을 요한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요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 부른 까닭이로다'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가요? 중요한 질문이죠.
왜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왔는가?
'왜' 라는 이 질문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요즘 노하우 know-how 가 아니라 노와이 know-why를 알아야 됩니다.
why를 알면, how는 금방 답이 나오니까요.
왜 예수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왜 예수께로 나아왔느냐는 것입니다. 왜 교회를 다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목적이 뭐고, 이유가 뭐고, 동기가 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몰려든 군중들은 자신의 개인적 필요를 가지고 왔습니다.
구세주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고
그들이 원했던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사실 문제를 가지고 찾아온 사람들은 삶이 참 절박합니다.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나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10 '이는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다'
예수님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 같은 간절함이 있었던 거죠.
그것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절박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필요를 무시하지 아니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 무리를 피하신 이유가 뭡니까?
병 치유와 귀신 쫓는 일이 주님의 핵심 사역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영혼 구원입니다. 영혼 구원!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는 그 일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군중들이 모여드는 것을 즐기셨다면, 물러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군중들의 그 요구와 압력에 떠밀리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올 때, 여러분 그 모이는 것에만 도취되면 위험합니다.
여러분, 숫자가 많아지면 항상 위험수위도 동시에 높아집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수자를 늘리고 추종자를 모으고 그런 일에 사람들은 주력합니다.
세상을 보면 누가 나를 더 많이 따르느냐에 집중합니다. 숫자 싸움입니다.
'누가 사람들의 이목을 더 많이 집중시키느냐?' 숫자는 힘이고, 돈이고, 인기입니다.
세상의 리더들은 다 숫자의 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군중의 힘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을 모으려는 그 야망!
그때 중요한 것은 그 동기와 목적입니다.
그토록 멋진 얘기를 막 하지만, 속마음은 감쳐줘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마귀도 그렇습니다. 광명한 천사로 위장합니다.
이 말은, 분별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여러분, 누구나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하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 불순해 지는 것입니다.
오염되고 왜곡되어져 갑니다.
왜요? 우리 인간 안에 있는 욕망의 덩어리, 이 죄성이
겉으로 멋진 말을 막 쏟아내지만
그 안에 있는 그 죄성이 끊임없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냥 그 인간의 죄성 앞에 굴복하게 되면.. 처음에 순수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됩니다.
마귀가 예수님보고 성전 꼭대기에 가서 뛰어내리라는 말도
센세이션을 일으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환호할 것이다!'
영웅주의, 인기주의를 부추긴 것입니다.
네가 멋진 것을 사람에게 한 번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중을 움직이는 지도자들은
멋지게 자신을 포장하려고 하는 유혹에 자주 빠집니다.
인기주의 라는 거죠. 그건 달콤합니다.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속아넘어가다가 나중에 땅을 치는 거죠.
한 번 속으면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세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 능력이 전혀 없게 됩니다.
▲리더들이 대중의 지지와 환호에 취하면
리더 자신도 자신에 대해 착각하게 됩니다.
더 멋지고 강한 자로 인정받기를 원하게 되죠.
소위 이것을 '메시야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착각하고 자랑합니다.
자기 자신도 착각할 뿐만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도 그렇게 믿습니다.
당신만이 우리의 문제를 풀어줄 유일한 구세주가 되어야 된다고 주문하는 거죠.
여러분, 언제나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큰 교회, 대형교회 목사도 늘 위험한 경계선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유혹이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늘 빠지기 쉬운 유혹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려고 하는 뜻을 전달하기 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청중에게 설득하려고 할 때
잘못하면 그 설교는 선동으로 바뀝니다.
그것이 교회 성장주의와 맞아떨어지면 이 강단이 오염되게 되고 위험해 집니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의 의도보다, 하나님의 의의 도에 집중해야 됩니다.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거짓된 메시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
지지를 받으려고 합니다.
자기 과시를 하려고 하는 유혹과 싸우고 또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도 끊임 없이 설교하지만
그 유혹과 싸우는 자리입니다.
환호하고 박수를 쳐 주는 사람들이 많으면 대개는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수없는 사람들이 막 환호하고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고
막 손수건을 흔들고... 그러면 거의 정신을 잃기 십상입니다.
그 순간 착각하는 겁니다. 교만해지고, 헛소리를 막 하면서 허세를 부리게 됩니다.
지지자들의 환호는 마약과 같습니다. 쉽게 못 끊습니다.
그 지지와 박수와 환호는 인간의 은밀한 욕망을 건드리는 거거든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요. 더 많은 사람을 끌어모으고,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더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그래서 대중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고...
여러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입니다.
요즘 인스타그램, 인터넷, 페이스북, 유튜브를 통하여
조회수를 높이고.. 사람들이 얼마나 나의 것을 봐 줄 것인가?
요즘 개인방송도 하면서, 수없는 조회수를 올리면서
자기가 인기를 얻고, 그것이 수익도 창출하고... 마케팅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하고
팬을 만들고
그게 심해져서 팬덤(fandom, 팬의 무리)이 되고,
대중들은 막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대중이 자신을 따르도록 마케팅을 합니다. 미디어를 동원하고
각종 기법을 사용하고, 조작이 들어가기도 하고...
과장을 하고, 부풀리고... 거짓이 판을 치게 됩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 모으고 동원하고
추종을 받고.. 그게 곧 힘이요, 세력입니다.
그 정점에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환호를 받고, 지지를 받고 있으면 내가 신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죄성은 더욱 춤을 추는 겁니다.
더 멋지게 보이려고 하고, 더 자극적이고, 더 선동적인 언어와 제스쳐를 사용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증명해 보이려고 하는 유혹에 빠집니다.
자기를 주목하게 만드려는 우를 범합니다.
그러면 자꾸 헛소리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증명해 보이려고 애를 쓰신 흔적이 없으십니다.
더 많은 지지를 얻으려고 혹은 인기를 붙들어매려고 노력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팬을 염두에 두신 적이 없습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겉으로는 근사해 보이는 일을 하지만
내면에 육신의 정욕을 다루는 일에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중에 노출된 사람들은 늘 조심해야 되는 거죠.
무대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자신이 신이 되려고 하는 유혹과 치열하게 싸워야 됩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은 자기에게로 사람들이 모여들 때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기가 들러리 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신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다는 소문을 감옥안에서 듣게 될 때
일순간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철저히 자기 길을 부정합니다.
여러분, 끊임 없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 쇼맨십을 하기 쉽습니다.
여러분, 자기 부정 하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다른 사람에게로 향할 때, 그게 쉬운 일일까요?
자기가 부정되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숨는 법을 배웁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 숨으셨습니다.
주님은 숨는 법을 이미 터득하셨고, 힘을 쓰는 법보다 힘을 빼는 법에 익숙하셨습니다.
힘을 쓰는 것, 힘을 주는 것은.. 쉽습니다.
힘을 빼는 것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힘을 갖고 있는데, 그 힘을 빼는 것은 어렵습니다.
깊은 영성을 갖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힘을 빼는 모습니다.
돈을 많이 갖고 있는데, 자기가 돈의 힘을 주지 않는 것..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돈이 조금만 생겨도.. 돈의 힘을 빡 줍니다.
권력을 갖고 있는데, 휘두르지 않는 것..어려운 일입니다.
인기를 가지고 있는데 티 안 내는 것.. 어려운 일입니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 자랑하고 싶고요, 쓰고 싶고요, 얼마나 기고만장해지는지 몰라요.
안하무인이 되고, 강자의 논리를 따지고, 줄 수 있는 대로 힘을 다 줍니다.
주님은 당신에게로 사람이 모여들수록 힘을 빼셨어요. 물러나셨습니다.
넘볼 수 없는 깊은 영성이죠.
주님은 당신이 가진 힘으로 사람들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용하려고 하셨다면 얼마든지 이용하실 수 있었겠죠.
군중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 경제적인 메시야가 되어줄 것을 막 요구했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로마로부터 정치적으로 해방해주고, 배고픈 빵의 문제를 해결해줄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주님이 군중을 피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의 내면의 동기를 들여다보고 계셨기 때문이죠.
잘못된 목적으로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주님은 아셨어요.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따르는 사람은, 지금은 따르지만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그들의 이기적인 목적이 달라지면, 예수를 언제든 죽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지금은 필요에 의해서 예수를 따르지만,
그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예수를 버릴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죠.
자기의 목적을 가지고 따를 때 예수님을 우상으로 삼았지만
그 우상이 또 다른 우상으로 바뀔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다 알고 계셨어요.
군중들은 추종하는 대상을 절대화하고, 우상화시키는 경향이 있거든요.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거기에 투사하여, 스스로 믿으려고 합니다.
큰 무리가 주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이미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욕망을 성취해 줄 수 있는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죠.
▲오늘날에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요
다 동기와 목적이 제각각입니다.
진짜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
내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인가요?
남미에 가 보면, 남미의 예수님이 따로 있고요,
아프리가에 가면, 아프리카의 예수님이 따로 있습니다.
여성 해방운동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예수님이 따로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예수를 만들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내 편이라고 굳게 믿고 싶은 거죠.
그래서 성경을 가지고 제 멋대로,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는 겁니다.
여러분, 나의 필요를 위해 예수를 찾으면 언젠가는 그 예수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내 생각대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예수를 찾고 있다면,
언젠가는 그 예수와 결별해야 됩니다.
여러분, 대중은 언제든지 변심을 합니다.
대중의 요구는 늘 변합니다.
군중들은 얼굴이 없습니다. 군중은 얼굴이 없거나, 만약 있어도 항상 변합니다.
그 안에는 각 개인의 이기심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 군중을 따라가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어요.
주님은 그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던 군중들은, 나중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를 치는 군중으로 바뀝니다.
잘못된 동기로 누군가를 따르는 사람들은 위험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따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따르는 군중들에게 흥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동기를 간파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중심을 지키고, 당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셨습니다.
그 중심은, 오직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어요.
주님은 살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오셨어요.
당신이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마가복음에 핵심적인 구절을 10:45절에서 우리에게 뚜렷하게 가르쳐 줍니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여러분 세상의 모든 리더십은 군림의 리더십입니다...
주님은 군중을 이용하려고 하는 의도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주님은 계속 물러나신 거죠.
자기를 잘못된 방식으로 우상화하는 그룹으로부터 물러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최고의 모델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보다 더 탁월한 모델을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리더의 자리에 있다면, 누군가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면
사람들을 모으려 하지 말고
내가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살아가면 됩니다.
사람은 인간적 힘을 동원하여 모으려고 하면 위험해 집니다.
내가 모을 수도 없지만, 모였다 해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허망한 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 목회자들에게는, 한국교회에 들어와있는 성장주의 목회관이 굉장히 위험합니다.
목회자의 마음이 성장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면, 마음이 쫓기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요즘 코로나 사태로 교회 문이 닫히고 목회의 모든 영역에서 스톱되어지는 상황속에서
한국교회의 미래, 그리고 우리 교회의 미래, 작은 교회들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야 이렇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우리 교회가 어떻게 될지?'
어떨 때는 막막할 때도 있습니다. 조급해지기도 하고요.
자칫하면 우울해지기도 하고요.
여러분, 목회자의 마음이 숫자의 논리에 빠지면 기교가 들어가게 됩니다.
테크닉이, 경영이 가미되게 됩니다.
목회자가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자기 능력을 과시하려고 하는...
주변의 시선의 압력에 시달려 교회를 더 크게 키우려고 하는 욕망을 잠재우지 않으면
설교에서도 변질이 일어납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하는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려는 요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내 힘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선동하려고 하는...
그렇게 하면 본질적인 것보다, 일시적인 것들로 교인들을 만족시키는 일에 급급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이게 하시는 게 아니라,
내가 모으려고 하게 되는 거죠.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그러면 본질을 놓쳐버리는 것이죠.
목회자는 겸손하게 말씀으로만 전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돕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막3: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여러분, 예수님은 아주 심각하게, 아주 강한 톤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
1) 적대적 환경들 때문입니다.
아직 주님이 하실 일이 남아있는데, 너무 많은 노출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직 때가 아니라는 거죠.
주님의 급속한 부상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권력자들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어요.
주님은 때를 따라 움직이셨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해야 될 일이라도.. 때가 중요합니다.
'지금 이 때인가? 아니면 기다려야 하는가?'
우리 주님은 때에 민감하셨습니다.
성급한 열심은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2) 당신을 나타나지 말라고 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숨겨진 의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이 급속하게 퍼지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들 때
군중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님이 염두에 두신 것은 이 부분이었어요.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는 군중심리가 작동합니다.
군중심리에 따라 사람들이 이리 저리 몰려다니고 흩어집니다.
예수님께 몰려왔던 그 사람들도 역시 군중심리로,
예수를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로 추대하려는 분위기가 가득했습니다.
예수에 대한 오해와 착각과 거짓된 루머가 막 넘쳐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오해가 가장 큰 문젯거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잘못된 메시야 관을 갖고서 예수를 좇았던 이들!
그냥 군중들에게 떠도는 그 풍문에 의존한 사람들,
단편적인 정보에만 의존하여 오락가락하고 있는 이 군중들!
주님이 당신이 나타내지 말라고 하신 것에는
주님에 대해서 잘못 알려질 것에 대한 경계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바로 알지 못하면...
바리새인들도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고,
이 군중들도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따르다가 나중에 다 사라져 버렸거나,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무리에 가담했습니다.
주님이 당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은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군중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주님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좋다고 한다고 그냥 따라가면 안 됩니다.
주님은, 물러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군중에 의해서 아니라
조용히 주님을 진정으로 찾는 자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구도자적인 태도가 중요합니다.
구도자적 태도란, 진지한 것입니다.
흥분하면 안 돼요, 누가 부추긴다고 따라가면 안 돼요.
진리는 숫자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전도를 해도, 너무 성급하게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먼저 알려주는 일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니까
교회로 먼저 인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교회를 인도하기 이전에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교회라는 시스템과 조직 안에 들어와서 활동하다가.. 사람들로 인하여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 아예 그리스도를 만날 기회를 놓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요3장의 니고데모 같은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일은 일대일의 대면입니다.
요즘 비대면 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하나님과 비대면 교인들이 많아요.
주님과의 관계는 은밀한 사건을 통하여 일대일로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일어납니다.
무리들 안에 속해 있다고 내가 신자인가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종교란에 '기독교' 라고 쓰고, 기독교와 관련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신적인 만남 divine encounter 이 필요합니다.
구도자적인 태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영적 갈망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일대일로 찾아오는 사람을, 주님은 만나 주십니다.
그룹으로 만나주지 않으십니다. 그룹 안에 속해 있어도 일대일 대면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군중을 접수하지 않으십니다. 개인을 받으십니다.
누가 말하는 예수가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님을 말해야 합니다.
주님은 진실로 당신을 간절히 찾는 한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해야 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오늘날 더 그렇습니다. 좀 더 진지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전도가 어려워 졌습니다.
교회로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상황이 어렵지만, 예민해진 시대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복음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요즘 보니까 사람들이 다 공허해 있습니다. 자기 삶이 공허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 멈춰 섰으니까요... 삶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처절하게 인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때 사람들에게는 어떤 때보다도 영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여러분 빵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예언, 탄생, 생애, 십자가, 부활, 승천, 말씀)입니다.
복음으로 먼저 전도하고, 교회는 나중에 데려와도 됩니다.
정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게 되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가 그를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름다운 분이시거든요.
그리스도보다 더 매력적인 분은 없어요.
그리스도보다 더 탁월하신 분은 없어요.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유일하신 분이시거든요.
혹시 여러분들이 길을 잃으신 분이 계십니까?
삶이 혼란에 빠져 있습니까, 위기를 맞고 있습니까?
요즘 교회를 다니지만, 교회 안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조직 안에 참여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활동하고
문화적인 경험을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모르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사람을 따르기 쉽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 이전에,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 발견한 그리스도를 진실로 따르기만 하면 실패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를 다니십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나는 예수를 진정 따르는 제자입니까, 아니면 군중의 한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