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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4:1~22 솔로몬 왕의 성전 기구들 제작

LNCK 2020. 9. 29. 10:18

◈솔로몬왕의 성전 기구들 제작                 대하4:1~22                       출처 

 

※솔로몬 성전은, 모세의 성막보다 규모 면에서 커졌지만

기본 구조, 기본 틀은 모세의 성막과 동일합니다.

즉 마당에는.. 번제단과 물두멍 (성전에는 '바다' 추가),

성소에는.. 등대, 떡상, 향단입니다. 

그외 부속기구들이 있습니다. 이 구조를 머리에 넣고 본문을 읽으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

 

역대하3장은 성전의 외형에 대한 기술인 반면

본문 역대하4장은 성전에 필요한 기구들에 대한 기술입니다.

 

본 장의 구조는

1) 성전 마당에 놓인 기구들, (1-6절)

2) 성전의 모든 기구들로 되어 있습니다. (7~22절)

 

크게는, 성전 뜰에 비치될 <놋제단>, <바다> 와 <물두멍>,

성소 안에 비치될 <등대>, <떡상>, <분향단>에 대한 기술입니다.

그리고 그 외 여러 부속 기구들 및 두 기둥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 부속기구들이란,

솥, 부삽, 대접, 고기 갈고리 :11, 16

등잔, 화젓가락, 불집게, 주발, 숟가락, 불 옮기는 그릇 등입니다. :22

 

솔로몬 성전에 있는 기물들은 모세시대의 성막에서 사용된 기물들에 비해

크기와 수량과 기능이 훨씬 큽니다.

 

그것은 솔로몬왕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왕에게 주신 식양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대상28:11-19).

 

 

◑1. 성전 마당에 놓인 기구들 (1-6절)

 

▲번제단 (1, 16절)

1절에 "솔로몬이 또 놋으로 제단을 만들었으니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십 규빗이며,"고 했습니다.

 

성전 마당에 있는 번제단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모세 때에 성막 뜰에 있던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 놋을 입혔는데

솔로몬 성전 마당에 있는 번제단은 놋으로만 만들었습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20×20×10규빗. 1규빗을 50센티로 볼 때 10x10x5미터입니다.

모세 때의 번제단은 번제단은 5×5×3규빗이었으니 그에 비하면 훨씬 큽니다.

 

그리고 번제단에 사용되는 부속기구들도 있었습니다.

그 부속물들인 솥과 부삽과 갈고리도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16절)

 

-솥(항아리)은 번제단의 재를 담아 버리는 도구이고, :11

-부삽은 번제단의 재를 긁어내는 도구이고, :11

-갈고리는 번제단 위에 놓은 고기들을 펼쳐 놓는 도구입니다. :16

 

그리고 대접도 있었는데 이는 번제물의 피를 담는 대접으로 1백개를 만들었습니다. :8

 

번제단이 나타내는 의미들이 있습니다. 주1)

 

▲바다

'바다'(sea)는 물을 담아 두는 기구입니다.

성전 마당에 번제단이 있고 그 곁에 바다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10

바다는 성전의 약간 우편에 있었습니다 (10절).

 

바다는 놋으로 주조하여 만들었는데

그 직경과 높이와 둘레가 각각 10×5×30규빗,

그 두께는 손바닥 넓이(10센티)였습니다. 용량은 3,000밧이었습니다.

1밧은 23ℓ에 해당하므로 3,000밧은 69,000ℓ 약350드럼입니다.

 

열왕기상7:26에는 2,000밧이라고 했는데 본서에서는 3,000밧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물을 담을 수 있는 양은 2,000밧이나

바다의 전체 크기가 3,000밧이라는 의미로 기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다는 주조할 때 윗 부분은 돌아가면서 백합화 형상을 넣었습니다.

아래 부분에는 돌아가면서 두 줄로 소 형상을 넣었는데

매 규빗 마다 10개의 소 형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주2)

 

놋 바다는 놋으로 만든 황소 12마리가 받치고 있었습니다.

그 12마리의 황소는 동서남북으로 3마리씩 배치되어 있었고

그 황소들은 모두 밖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진(陣)을 칠 때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12지파가

3지파씩 동서남북으로 진을 진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민2장).

 

▲물두멍

물두멍(laver)은 놋으로 10개를 만들어 바다 좌우편에 5개씩 두었습니다.

물두멍은 작은 대야에 해당하는 기구인데 바퀴가 달린 받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물두멍 하나의 직경은 4규빗이었고 그 물두멍 하나에 40밧의 물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1밧은 36ℓ로서 약 2말 정도 되므로 40밧은 약 1440리터, 7드럼 정도 됩니다.

 

바다에 담긴 물의 양을 2,000밧으로 본다면

바다에 비해 50분의1 정도의 양을 담을 수 있는 크기입니다 (왕상7:30-40).

 

바다와 물두멍의 용도에 대해서는 6절에 보면

바다는 제사장들이 씻기 위한 것이고,

물두멍은 번제에 속한 물건을 씻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씻는 것은 제사장의 몸과 수족 그리고 번제에 사용되는 기구와 제물 등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바다는 그 씻기 위해 저장한 거대한 수조였을 것이고

물두멍은 그 바다의 물을 떠서 무엇을 씻기 위해 둔 작은 대야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바다를 황소 12마리가 바다를 받치고 있었습니다.

 

바다와 물두멍의 영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3)

 

 

◑2. 성전의 모든 기구들 (7~22절)

 

▲등대 (등잔대) :7, 20~22절

등잔대는 내전 곧 성소 안 좌 우편에 5개씩 전체 10개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매 등잔대마다 7가지가 있고 가지마다 (성막의 등장엔) 살구꽃 형상이 있었고

그 가지 끝에는 등잔이 있었습니다.

이 등잔대는 성전 성소를 안을 비추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메노라 라고 부릅니다. 계시록의 ‘촛대’도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등잔대와 모든 부속물들은 다 순금으로 제작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의 등잔대는 모세 때의 성막의 등잔대와 용도는 같으나 수나 위치가 다릅니다.

모세 때에 등잔대는 1개였고 성소 좌측에 놓였지만

솔로몬 성전의 등잔대는 10개로서 성소 좌우편에 5개씩 놓였습니다.

 

등잔대의 등잔에는 순결한 감람유 기름을 두게 했고

저녁에서 아침까지 항상 불을 밝혀 놓게 했습니다 (레24:2-3, 27:21, 슥4:1-6).

 

등잔불은 성소에서 제사장들의 사역을 돕기 위한 불입니다.

제사장들의 진설병 사역과 분향단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불을 환하게 비추는 것입니다.

 

등잔대와 등잔불의 영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4)

 

▲진설병상, 떡상 (8, 19절)

'상'(床)은 진설병상을 말합니다.

진설병상은 10개를 만들어 성소 좌 우편에 10개씩 놓았습니다.

 

진설병상(陳設餠床)은 제원에 대해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 용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떡을 올려 놓는 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떡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으로서 매 안식일마다 한 상에 12개씩 차리는 떡입니다.

 

떡상의 영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5)

 

▲금단, 분향단 (19, 21-22절)

19절에 나온 '금단'은 금으로 만든 금 제단, 즉 분향단을 말합니다 (왕상7:48).

(*이 금제단은, 마당의 놋제단과 구별해야 합니다. 둘 다 ‘제단 altar’이라서 헷갈립니다)

분향단은 성소(외소) 안에 있었는데 지성소(내소) 안쪽 가운데 있었습니다.

 

본문에 분향단의 제원은 나오지 않았고 다만 금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만 나옵니다.

그 용도와 의미는 성막의 성소에 있었던 분향단과 같았습니다 (출30:1-10).

 

부속물로는 부젓가락과 숟가락과 불 옮기는 그릇이 있었습니다 (21-22절).

'부젓가락'과 '불 옮기는 그릇'은 숯을 옮길 때 사용하는 도구이고

'숟가락'은 향을 담을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금단, 분향단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6)

 

▲마치는 말

성전의 핵심 건물은 현관(낭실)과 성소(외소)와 지성소(내소)로 되어 있습니다.

성소에는 등잔대와 진설병상과 분향단이 있고

지성소에는 언약궤(법궤)와 속죄소와 그룹이 있습니다.

 

현관을 통해 그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문은 현관(낭실)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성소의 문은 잣나무로 만들었고

지성소의 문은 감람나무로 만들었는데 (왕상6:31-34),

성소의 문과 지성소의 문 모두에 금을 입혔습니다 (22절).

 

예수님은 자신을 '문'에 비유했습니다.

요10:9에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요14:6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행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는 구원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주관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3:7-8에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을 통해 영적인 성전에 들어가 각양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요10:9).

 

...................

 

 

주1) 번제단이 나타내는 의미

 

첫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표징입니다.

번제단은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생축(짐승)을 데리고 와서

머리에 안수를 통해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전가시킨 다음

제사장들이 생축을 잡아 번제(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 때에 사용되는 제단입니다.

 

이 때 번제로 드려지는 생축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이 죄값을 치르기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에

생축을 사람 대신 죽게 한 것입니다.

 

로마서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고,

히브리서9:22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리라"고 했습니다 (레17:14).

 

하나님께서 이런 율법을 내신 것은 그가 얼마나 죄에 대해 미워하시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그 공의의 법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였습니다.

베드로전서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롬6:10).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표징입니다.

번제단에 드려지는 생축은 사람의 죄를 대신 전가받아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사람이 죽어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사람 대신에 짐승으로 죽게 하고 사람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10:4에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고 했고,

11절에는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고 했고,

 

9:11-12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셔 대속해 주실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번제단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늘 감사해야 합니다 (히9:11-14).

............................

 

주2)

아마 '소'는 '박'에 대한 오기인 듯 합니다.

'소'에 해당하는 '바카림'은 '박'에 해당하는 '페카임'을 잘못 읽은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매 규빗에 해당하는 1규빗(45.6cm)마다 소 형상 10개를 넣은 것은 부자연스럽고

또 바다를 받치고 있는 12마리 소와 중복되는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

 

주3)

바다와 물두멍의 영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도의 죄사에 대한 표징입니다.

바다와 물두멍은 제사장의 몸을 씻는 곳입니다.

 

제사장들은 제사 사역을 할 때 의식적 정결을 위해 몸을 씻어야만 했습니다 (출29:4, 레8:6).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에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히9:11-14, 계7:13-17).

 

예수를 구주로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고 거듭나야 합니다 (요3:5).

이는 죄사(罪赦)와 칭의(稱義)와 중생(重生)입니다.

 

요한복음3:5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물과 성령'은 물을 말씀으로 보는 이도 있고 (엡5:26)

성령에 대한 중의적 표현으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이미 죄사함을 받아 중생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입니다.

 

둘째, 성도의 정결에 대한 표징입니다. 바다와 물두멍을 제사장의 수족을 씻는 곳입니다.

이미 몸을 씻은 자는 계속해서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요13:10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미 중생한 자에게는 성화(聖化)를 위해 매일 삶에서 회개를 통해 정결케 해 나가야 합니다.

 

사단의 역사가 맹렬하고 세속 문화와 문명이 유혹하고

육체의 부패한 성품이 끊임없이 죄를 짓게 하기 때문에

육체의 연약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항상 불결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날마다 씻는 일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말씀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엡5:26).

자범죄뿐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한 요구죄까지 정결케 해야 합니다.

 

로마서14:23에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했고,

야고보서4:17에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했고,

사무엘상12:23에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고 했고,

요한일서1:8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고 했습니다. 그럴 때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됩니다 (롬5:20, 6:1).

 

그리고 바다와 물두멍은 제단의 도구와 제물을 씻는 곳입니다.

신약시대에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하지만

우리의 사역에 이용하는 헌물도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물이 취한 방법과 드리는 목적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깨끗한지 생각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물은 드리려는 목적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밭을 팔아 일부는 감추고 일부만 드렸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을 책망하자 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행5:1-11).

그들은 거짓말 한 것보다도 드린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자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자기 밭과 집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사도들 발 앞에 두었습니다.

바나바도 밭을 팔아 사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는 권위자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행4:33-37).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영광과 칭찬을 받고 싶어서 드렸거나 그 그룹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드렸습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시작되는 시점에

성령의 역사를 인간의 노력으로 바꾸는 누룩과 같은 요소였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황소 12마리가 바다를 받치고 있었습니다.

'소'는 희생과 헌신을 상징합니다. 온유한 동물로서 희생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언약궤를 끌고 벧세메스에 도착한 암소도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삼상6:14).

자신을 정결케 하고 헌물을 정결케 하는 일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정결한 생활로 드려지기 위해서는 물질적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많은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

 

 

주4)

등잔대와 등잔불의 영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등잔대의 등잔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신 성령을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계4:5).

오늘날 성령은 교회에 임재하여 성도의 구원 사역을 돕습니다.

 

첫째,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 주실 것을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등잔대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신약시대의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이 보내셨습니다 (요14:16).

그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거합니다.

 

요15:26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고 했습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대언자, 변호자, 증거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합니다.

 

요3:5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성령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실 것을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제사장들이 진설병을 진설하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진설병을 응식으로 먹는 일을 도와 줍니다.

 

분향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예표하는 동시에(롬8:34)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시141:2).

요한계시록5:8에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기도하고자 하는 열의를 갖도록 감동시키시며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리고 기도응답에 대한 감동과 확신을 얻도록 도와 주십니다.

 

로마서8:26-27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벧전2:9, 계5:10).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말씀을 이해하게 하고 기도를 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행4:24, 행1:8).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아무 사역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전 생활에서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 분이 역사할 수 있도록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제사장이 금 집게로 불똥을 떼어 내듯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거역하고 소멸하던 불순종의 죄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뜻과 의지와 행동과 육체의 모든 의지가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주5)

떡상의 영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진설병상은 예수님의 희생을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진설병상은 진설병(떡)을 올려 차려 놓는 상입니다.

진설병상 위에는 항상 진설병을 항상 두었습니다.

진설병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하나님께 드려질 것을 예표하는 표징입니다.

 

요한복음6:35,48,58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그 떡을 먹는 자는 생명을 부여받게 되고 생명을 유지하므로 영원히 주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늘로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도 주리고 죽었지만

그것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먹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고 죽지 않습니다 (요6:48-51, 고전10:1-5).

 

신약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이것을 알게 해주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요6:1-35).

 

진설병은 제사 후에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베드로전서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고 했고,

요한계시록1:6에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진설병은 곱게 간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발라 익힌 것입니다.

익히는 방법은 화덕에 굽기도 하고 번철에 부치기도 하고 솥에 삼기도 합니다 (레2:1-10).

이 고운 가루는 곡식 열매가 찧음을 받으면서 빻아지고 부서져서 만들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큰 고난으로 제물로 올려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에 노출되어 잘 구워진 떡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거절과 핍박을 통해

제물이 되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부서지는 듯한 경험과 갈보리 산상에서의 타는 듯한 경험을 통과하는

과정으로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과 영생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진설병은 2줄로 6개씩 12개가 올려졌습니다 (레24:6).

그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거둔 곡식을 모두 바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바치므로 생명의 떡이 되어줄 것처럼

이스라엘도 오실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질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롬12:1).

 

둘째, 진설병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먹고 살아야 할 영적 양식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신명기8:3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로서 내린 양식 곧 만나를 먹게 한 것은

사람이 육신의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떡은 사람이 먹고 사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이미 떡을 먹었습니다.

영적 생명을 얻었습니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제 매일 삶에서 영이 힘을 얻어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을 계속해서 먹어야 합니다.

오늘날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항상 제공받아야 합니다.

 

그 떡에는 누룩과 꿀이 들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레2:11, 고전5:6, 눅12:1, 막8:15, 마16:12).

누룩과 꿀은 죄성과 외식 곧 인본주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갈5:9, 고전5:6, 눅12:1, 막8:15, 마16:12).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인본주의가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말씀을 받기를 원합니다 (고전5:7-8).

 

진설병은 매 안식일마다 새로 갈고 물리게 했는데

그 물린 떡은 제사장과 그 후손들이 거룩한 회막 뜰에서 먹었습니다 (레24:8-9).

 

우리는 매 주일마다 하나님 말씀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특히 죄성과 인본주의가 섞이지 않은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갓난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을 얻어 먹어야 합니다 (벧전2:2).

 

진설병은 제사장들이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습니다 (레24:9, 6:16).

그 시간은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교제하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설병이야말로 교제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교제의 기초는 진설병이어야 합니다.

모든 교제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 말씀을 통해 누린 은혜여만 합니다.

그런 교제만이 참된 교회를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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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금단, 분향단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분향단은 예수님의 중보사역를 예표합니다. 분향단은 향을 피우는 곳입니다.

제사장들이 매일 등불을 끌 때와 켤 때에 향을 사르는 곳입니다 (출30:7-8).

그 향연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언약궤와 속죄소 앞에서 올라갑니다.

 

이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밤낮 쉬지 않고 기도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을 치르므로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했습니다 (행9:14).

 

그리고 우리를 위해 매일 관심을 가지시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행7:55).

또한 우리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8:34에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롬8:26).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못했을지라도 우리를 변호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요한일서2:1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대언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곁에서 돕기 위해 보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요한복음에서는 '보혜사'로 번역되었으나

'돕는자' '상담자' '위로자' '증거자' '변호자' '대언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본문의 파라클레토스를 '변호자'(advocate-KJV,NASB)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죄행을 심판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변호하며 중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삶 속에서 범죄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공의대로 징계하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대시 죽어서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변호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으로서(히4:15) 우리를 이해하시고 하나님을 설득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 구원한 예수님이 간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어린 아이가 잘못할 때 아버지가 매를 때리는 장면과 같습니다.

아이는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심하게 매질하려 합니다.

그 때 어머니가 그 매를 붙잡고 자기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하면서 아이의 편에 서서

아버지를 설득시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애원으로 인해 매를 내려 놓게 됩니다.

 

둘째, 분향단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분향단 향연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5:8에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시편141:2에도 "나의 기도가 주의 분향함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보좌에 향처럼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듣는 것처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잡혀 간 이방에서도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한 것처럼 (겔11:16),

어느 곳에서 어떤 형편에서 기도하든지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분향단이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언약궤와 속죄소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것처럼 (25:22, 30:6),

성도의 기도 생활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생활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을 위해서야 합니다. 향은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드릴 향을 자기가 냄새를 맡을 목적으로 만들면 백성 중에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30:37-38에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냄새를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 목적이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많은 사람에게 높임을 받기 위해 하는 외식하는 기도도 옳지 못합니다 (마6:5-7).

또한 구하는 내용이 자기를 위한 것이어도 안됩니다.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와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마6:25-33, 약4:3).

 

기도의 방법은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해야 합니다.

향을 사를 때는 하나님이 지시한 재료와 방법대로 만든 향만 사용해야 합니다.

다른 향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출애굽기30:9에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고 했습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워야 합니다.

모든 기도의 기초와 근거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구약에 나답과 아비후가 번제단(구속의 기초)에서 취한 불이 아닌,

여호와께서 취하지 아니한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임 당한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레9:24~, 10:1-2).

 

그리고 출애굽기30:34-36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소합향'은 눈꽃 모양의 꽃이 피는 키가 작은 나무 껍질에서 채취한 향품이고,

'나감향'은 바닷 속의 연체 동물 덮개 딱지에서 만든 향품이고,

'풍자향'은 지중해 연안의 다년생 초본 식물의 줄기에서 채취한 향품이고,

'유향'은 감람나무과에 속한 나무에서 채취한 진액으로 만든 향기로운 향품입니다.

 

이러한 향기로운 향품으로 향을 만들게 한 것은

아마 성막에서의 희생 제물로부터 나오는 여러 냄새와 주위에 뿌린 피 냄새를 제거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금'을 넣은 것은 향품을 굳게 하는 역할을 하거나 위생적 목적을 위해

넣게 한 것 같습니다.

 

기도는 성경말씀을 근거하여 해야 합니다.

구하는 근거를 말씀의 약속에 두어야 하며 말씀에 맞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말씀에 맞지 않는 것은 구해도 주시지 않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하지 않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주술적 의미를 가진 습관적인 기도도 옳지 못합니다 (마6:5-7).

 

기도의 시간은 아침 저녁으로 매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30:7-8에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고 했습니다.

 

향은 등불을 정리할 때와 켤 때 사릅니다. 이는 아침과 저녁을 가리킵니다 (출27:20-21).

기도할 때 만물을 접하기 전 아침에 기도로 시작하여 일을 마친 후 저녁에 기도로

하루를 정리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꼭 아침 저녁 하루에 두 번 하라는 의미보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3번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단6:10).

그리고 향은 아침 저녁으로 매일 피워서 향불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만 동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문제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신자된 의무입니다 (삼상12:23).

 

기도는 특별한 때에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출애굽기30:10에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고 했습니다.

 

분향단은 1년에 1차씩 아론이 속죄 피를 뿔에 바르므로 정결케 했습니다.

성도는 가끔씩 특별기도 기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상적인 기도가 아닌, 그리스도의 속죄를 생각하며 자신의 본질적인 죄를 깊이 회개하는

특별기도 기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나 국가적으로도 특별기도가 필요합니다.

 

미스바 부흥 운동과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 운동이 좋은 예입니다.

또한 개인의 중대한 문제를 두고도 특별기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는 핍박 문제를 두고 히스기야는 국가적 위기와 질병 문제를 두고 특별기도를 했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21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고,

느헤미야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모르드개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금식하며 특별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도 성역을 앞두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특별기도를 했고,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특별기도를 했습니다.

특별기도도 도중에 포기하지 말고 정한 때까지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한 바를 다 아시기 때문에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에스겔36:37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고 했습니다.

 

구하면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벗 됨을 인하여는 안 줄지라도 강청함을 인하여서는 주신다고 했습니다 (눅11:5-8).

낙망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눅18:1-8, 단10:12-14).

 

주님은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십니다. 우리도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적 호흡입니다. 잠시라도 중단하면 우리 영혼은 생명력을 잃고

마귀에게 지게 됩니다.

한시도 깨어 기도하지도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26:40).

 

그리고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베드로를 통해 주신 권면을 깊이 새기고 실천해야 합니다 (벧전5:8).

기도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생명력이자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능력입니다 (막9:29).